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629
x 629
제55장 어머니 내 어머니11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걸랑요. 시랑쟁투(豺狼爭鬪)라고나 할까? 크크크!”
무쌍이 낄낄 웃었다. 장 씨가 패륜을 범했다고 자신도 똑같이 날뛸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그럴듯한 수단을 구상해 두었다.
“못된 년! 내가 직접 혼을 내주고 싶구나.”
김말순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동댁의 말에 따르면 윗동서가 아들을 소처럼 부려 먹으면서 식은 밥 한 덩이 주지 않았다고 했다. 악독한 년의 얼굴에 손톱 고랑을 만들고 머리털을 몽땅 뽑고 싶었다. 김말순이 생각할 수 있는 끝판 복수다.
“어무이 뜻대로 될 겁니다.”
무쌍이 자신 있게 말했다. 용은 대충 그려두었고, 눈알을 찍는 사람은 어머니로 내정해 두었다. 기억을 되찾고 괴로워할 어머니에게 통쾌함을 선사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순아, 잠깐만!”
무쌍이 제수를 진설하려는 진순을 말렸다. 무쌍이 4m 높이의 선돌을 가리켰다.
“어무이, 아부지께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소. 저 돌을 세울 때 어무이를 찾아와서 비석을 만들어 드린다고 아부지께 약속했심더.”
“아!”
김말순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마지막 순간에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아내를 부탁한 남편, 어머니를 찾아와서 비석을 세우겠다고 맹세한 아들, 이런 부자가 또 있을까! 굳건한 정신과 깊은 정에 가슴이 저렸다.
“고맙습니다. 당신을 찾아갈제 미영(목화)씨 한 줌과 누른국수 한 뭉치 들고 가리다.”
종일 흘려도 흐를 눈물이 남았던가! 눈물이 삐적삐적 새나왔다.
“성님, 흑흑!”
하동댁이 흐느꼈다. 그녀는 안다. 누른국수 재료는 청국밀(호밀)이다. 해마다 찾아드는 가뭄과 진절머리 나는 가난, 미영과 누른국수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아내의 숙명이다. 미영을 심어서 남편과 자식의 입성(옷)을 짓고, 누른국수 뽑아서 남편과 자식의 배를 채워줘야 했다. 이승에서 못다 한 정성을 저승에서 다하겠다는 소리다.
“어머니!”
진순은 가슴이 콱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다. 고모 성정으로 볼 때 몇 번을 실신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음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모자가 똑같이 무참한 일을 당하고 기억을 잃었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기억을 회복해도 문제다. 오빠가 못할 일은 없다. 신통력을 부리는 큰스님과 뇌과학자 기즈 박사도 계신다.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 강인한 오빠도 기억을 되찾았을 때 살인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차라리 기억을 잃은 채로 새 삶을 즐기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진순의 시름이 깊어졌다.
쉬익- 무쌍이 둥실 떠올라서 우뚝 솟은 선돌에 도마뱀처럼 달라붙었다. 스스스- 억수갑이 솟아올랐다. 억수갑이 바위를 쓸었다. 바바바박- 울퉁불퉁한 화강석 표면이 대패로 밀 듯이 매끈하게 깎였다.
바위 옻에 덮인 시커먼 바위가 회백색 비석으로 변신했다. 놀라자빠질 광경이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모두 그러려니 했다. 오랜만에 발사라가 세상을 구경했다. 발사라가 화선지를 달리는 붓처럼 바위를 바위 표면을 종횡으로 달렸다. 소리도 없이 돌가루가 뿌옇게 날렸다.
[고맙습니다. 당신을 찾아갈제 미영씨 한 줌과 누른국수 한 뭉치 들고 가리다.]두자 두께의 입석에 손가락 깊이로 글자가 일필휘지로 새겨졌다. 그 옆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새겼다.
[오십 년쯤 지난 뒤에 어머니를 보내드리지요. 먼저 가셨으니 외로워도 할 수 없습니다.]무지근하던 가슴이 후련했다.
“오오!”
“세상에나!”
그제야 탄성이 터졌다. 무쌍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진순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우주를 구할 아들이 나오려나!’
앙큼한 여심은 벌써 자식 욕심으로 부풀었다.
진순이 제물을 차리고 삿자리를 주르륵 펼쳤다. 무쌍이 먼저 두 번 절하고 김말순이 절했다.
“영아야, 너도 두 번 절해라.”
영아가 영문도 모르고 엄마를 따라 절했다.
“아가야, 니도 절 해야제.”
김말순은 진순을 며느릿감이 아니라 며느리로 기정사실화 했다. 진순이 주춤하자 하동댁이 어깨를 슬쩍 밀었다. 진순이 혀를 날름하고 엎드렸다. 무쌍의 안색이 잘 삭힌 홍어를 한 점 먹은 듯 찌그러졌다. 홍수에 떠밀려가는 기분이었다. 계면쩍어진 그는 하릴없이 마른 잡초를 뽑았다.
퐁- 퐁- 연못에 떨어진 돌이 동심원을 그렸다. 미나는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하릴없이 돌을 던졌다. 갑자기 할머니가 나타났다.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했지만, 미나는 나름 심각했다.
번뇌의 씨앗은 아빠를 오빠라 부르고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는 꼬마 계집애였다. 미나의 입장에서 네 살이나 어린 영아를 고모라 부르고 존댓말을 써야 하는 현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예수만큼이나 심각했다.
“걔도 아빠 딸이면 얼마나 좋아.”
미나가 투덜거렸다. 아빠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지만,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인제에 살 때는 언니만 사랑하는 아줌마와 욕심꾸러기 언니들 때문에 속상하고 슬펐다. 동생이면 주먹질과 발차기도 가르쳐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공기놀이도 가르쳐주고, 머리도 땋아줄 텐데 고모란다.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아빠가 슬퍼하고 엄마도 슬퍼할 거야. 그런데 할머니도 아빠처럼 나를 좋아하실까?”
“당근이지. 헐헐헐!”
“으악!”
느닷없는 대꾸에 미나가 펄쩍 뛰었다. 오 척 단구의 비쩍 마른 노승이 명아주 지팡이로 땅바닥을 쿡쿡 찍으며 껄껄 웃었다.
“스님 할아부지!”
미나가 빽 소리 질렀다.
“아이쿠 이놈아, 늙은 할아버지 고막 터지겠다.”
“깜짝 놀랐잖아요.”
“나쁜 짓 했어?”
“아뇨!”
“그럼 놀랄 일도 없구먼.”
“다 들으셨죠?”
“당연히 다 들었지.”
대우선사는 뻔뻔할 만큼 당당했다.
“스님 할아부지, 미나는 어떡해요?”
미나가 울상이 되었다.
“영아가 싫어?”
“싫지는 않은데 미워요.”
“왜 밉지?”
“영아를 고모라 부르고 존댓말을 쓰야해요.”
“영아가 미나에게 고모라 부르고 존댓말을 쓰라고 하디?”
“아뇨!”
“그것 봐라. 너는 네 멋대로 걱정을 만들고, 걱정에 빠져서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것 같은데.”
“쓸데없는 고민 아니라예.”
“내 생각에는 영아가 너를 언니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닐 것 같은데.”
“정말요?”
시무룩하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대우선사가 지팡이로 뚫어놓은 구멍을 발로 쓱쓱 지웠다.
“쉽지?”
“넹?”
“구멍이 왜 생겼는지 머리 터지도록 고민할 필요 있을까?”
“할아부지가 지팡이로 뚫은 구멍인데 고민을 왜 해요?”
“그럼 너는 그까짓 고민을 왜 하누? 이렇게 발로 지워버리면 그만인데.”
“아!”
“헐헐헐, 영아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네 마음을 몰라주면 섭섭하겠지?”
“네!”
“받으려면 먼저 줘야 해. 미나가 먼저 마음을 보여주면 영아도 기뻐할걸.”
“아! 그런데 아빠가 영아를 더 사랑하면요?”
“미나가 연못에 돌을 던져도 연못은 그대로지?”
“네!”
“마음은 저 연못보다 훨씬 크단다. 영아가 백 명 천 명이 생겨도 네 아빠는 그대로란다.”
“아!”
“이크, 오는군. 주책 소리 들을라. 미나야, 할아부지 만난 건 비밀!”
대우선사가 눈을 찡긋했다.
“네, 할아부지! 감사합니다. 어! 가셨네.”
미나가 배꼽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만 눈에 들어왔다. 비정상이 정상이고, 놀랄 일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 곳, 응심제다.
“영아야!”
영아가 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미나가 도도도 달려왔다.
“추웠지?”
미나가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어서 씌워주고 벙어리장갑도 손에 끼워주었다.
“어어!”
영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들과 놀고 싶어도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리기만 했다. 돌을 던지는 아이도 있었다. 친구가 없어서 고양이와 놀고 새를 불러서 놀았다. 갑작스러운 호의에 어리둥절했다.
“언니가 집 구경시켜줄게. 우리 집은 딥따 넓거든.”
미나가 영아 손을 잡아끌었다. 영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이 언니의 마음도 하얗다. 아빠 집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전부 하얗다.
“알았어. 언니!”
계집아이 둘이 손잡고 쫄랑쫄랑 사라졌다.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난 동질감일까. 둘은 너무나 쉽게 서로를 받아들였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무쌍이 머리를 끄덕이고 비시시 웃었다. 김말순과 하동댁, 진순도 얼굴 한가득 미소 지었다. 아무도 고모니 조카니 말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정을 나누는데 그까짓 항렬 구분이 무슨 대수일까.
먼 길을 돌아서 제자리를 찾은 김말순은 당연히 안방을 차지했다. 진순은 미나와 영아, 영숙이 한방을 쓰도록 했다. 방이 없어서가 아니다. 서로 부대끼며 커야 정이 든다는 진순의 주장에 김말순과 무쌍은 두말없이 찬성했다.
이튿날, 김말순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들 밥은 당연히 엄마가 해 먹여야 한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과 흥분으로 인해 전전반측 밤을 새웠지만, 몸은 활력이 넘치고 정신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대청마루 끝에 서서 사랑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내 아들!”
회한 어린 탄식이 새나왔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보내버린 긴 세월이 가슴 아팠다. 50년간 밥을 지어달라는 아들의 말이 생각났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인간이 아닌 능력을 지녀도 아들은 아들일 뿐이다.
김말순의 손은 더디기만 했다. 부엌살림도 낯설고, 값비싼 도자기 그릇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오븐, 쿠커, 블렌더, 전기 압력솥 같은 외국산 전기 제품은 다룰 줄도 몰랐다. 주방 미닫이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달그락 소리에 깬 진순이다.
“어머니!”
진순이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아가야, 더 자지 그러노.”
“마이 잤어예. 지가 도와드리께예.”
진순은 부엌살림 위치며 전기 제품 조작법, 냉동고와 냉장고에 보관된 요리 재료 목록, 무쌍의 입맛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식사 준비는 김말순이 맡고 그녀는 보조 역할에 충실했다. 진순은 당신의 손으로 아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오빠, 어머니가 식사 준비 끝내셨어.”
“응, 어무이가 직접?”
“안방마님이 돌아오셨으니 밥권을 넘겨드려야제.”
“밥권? 풋!”
말갛게 내려다보는 눈이 예쁘다. 진순의 목을 잡아끌어서 입술 박치기 모드로 들어갔다.
“아!”
진순은 진한 남자의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머니가 기다리시는데.”
“니는 넉살도 좋구마. 다짜고짜 어머니가 머꼬?”
진순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허이구, 내가 앓느니 죽지. 고모를 어머니라 부르는 놈, 조카를 언니라 부르는 놈, 족보가 콩가루구마.”
“어머머, 누굴 탓해? 전부 오지랖 넓은 오빠 탓이지. 미나와 영아가 꼭 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눈물이 울컥 나더라.”
“고맙다. 니 덕분이다.”
“흘러가는 마음을 억지로 막지 말거라. 캬! 큰스님은 쫀쫀한 누구와 달리 정말 사람 마음을 잘 이해하셔.”
진순이 대우선사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혼자 감탄했다.
“에구, 잠이 고픈데.”
무쌍이 딴소리했다.
“흥,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받아랏.”
진순이 뜨거운 물수건을 다짜고짜 얼굴에 척 덮었다. 찜솥 증기로 쪄낸 수건은 피부가 탈 듯이 뜨거웠다.
“에쿠, 이기 머꼬!”
“헹, 어머니가 처음 해주는 밥인데 눈곱은 떼고 먹어야제. 지금부터 퇴폐 이발소 모드로 들어갑니다요.”
진순이 얼굴을 꼼꼼히 닦아내고 면도기를 꺼냈다. 이틀이나 수염을 깎지 않아 텁수룩했다.
“야야, 그만둬. 샤워하고 깎을게.”
무쌍이 상체를 일으켰다.
“해줄 때 즐기라고.”
진순이 이마를 눌러서 제압했다.
“허이고, 내가 너 때문에 미친다.”
“오빠는 여러 번 미쳤었거든. 또 미치마 클 나제.”
나긋한 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청춘은 면도할 때 가슴부터 더듬는다.
‘어휴, 내가 돈다 돌아!’
무쌍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예전처럼 자신이 가까이 다가서기만을 기다리던 진순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비단뱀이 희생양을 감아 조르듯, 안개비가 옷을 적시듯 차근차근 압박했다. 어머니까지 가세했으니 무쌍이 진순의 마수를 피하기는 틀렸다.
“어무이, 더 주무시지 않고…….”
무쌍이 두리번거렸다. 이탈리아 산 까라라(Carrara) 대리석 식탁이 텅 비었다. 형광등 불빛을 받아 푸르스름하니 홀로 빛났다.
“아!”
탄성이 터졌다. 프레스로 쾅 찍어서 촌스런 장미 문양을 넣은 싸구려 양은 밥상이 주방 가운데 떡 자리 잡고 있었다. 진순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밥상이다.
유기그릇 위로 삐딱하니 넘어갈 정도로 담긴 고봉밥, 맑은 토란국, 노란 달걀부침, 들깻가루로 무친 머위대, 고추장으로 버무린 가죽나물, 녹두를 갈아서 부친 녹두전,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호박잎을 넣은 된장찌개, 구운 갈치 한 토막, 소박해도 너무 소박한 음식이 비좁은 양은 밥상을 빼곡히 채웠다.
“어무이!”
무쌍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가 실종된 그해 아들 생일에 차려주었던 밥상이다. 어머니는 위대했다. 물리적인 뇌는 기억을 잃었지만, 영혼은 기억을 잃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었다.
“내사마 아가처럼 저러코롬 큰 식탁을 채울 자신이 없능 기라. 그래도 밥은 마이 했다. 어여 묵어라.”
김말순이 재촉했다.
“밥 마이 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