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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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장 내 그럴 줄 알았다4
“아가야, 이리 온.”
김말순이 한쪽으로 밀려난 영숙을 손짓했다. 세상의 슬픔 중에 제일은 어미 잃은 새끼다. 영숙이 주춤거리며 다가섰다.
“몇 살?”
“다섯 살!”
영숙이 배시시 웃으며 단풍잎 같은 손바닥을 활짝 펴서 흔들었다.
“아이구, 요런 이쁜 녀석! 영아 동생이구나.”
김말순이 난짝 안아서 무릎에 앉혔다. 그 순간 깜둥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친구, 어린 여자는 뭐지?] [인신매매단에 납치된 아이를 데려왔다. 아직 보호자를 찾지 못했다. 왜 그러나?] [관찰이 필요하다.]깜둥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과학자입네 하는 일부 무지한 인간들이 정신작용을 뇌에 국한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마음은 뇌와 심장의 상호 작용이다. 뇌가 분비한 감정 호르몬이 심장에 축적된 경험치와 반응해서 감정을 증폭한다.
여자아이의 뇌는 감정 호르몬을 정상적으로 분비했지만, 심장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통 인간과 다름없는 감정 반응을 보임은 인위적인 부분이 개입했다는 의미다.
[관찰은 개뿔! 귀엽고 예쁘기만 하구먼.]무쌍은 무심히 넘겼다. 영숙이는 알에이치 널(Rh null) 혈액을 보유한 이민주와 함께 심장 도너로 일본에 팔려갈 아이였다. 짠한 감정이 앞섰다.
“아이고, 저런!”
하동댁이 가슴을 치는 소리에 영숙이는 의식 밖으로 밀려났다.
“성님, 비 오는 날 독수리 바위는 와 올라갔능교?”
“와송을 따러 갔제. 쌍이가 큰집에서 철 지난 곶감을 먹고 배탈이 났거든.”
“하이고, 독수리 바위에서 떨어진 기식이가 벵신된 거 모릅니까? 죽지 않은 기 다행이구마.”
“아이고 어쩌나! 그래서 기억을 잃었어예?”
“그 여편네가 일부러 썩은 곶감을 오빠께 줬을 거라예. 하이고, 독한 년!”
김말순이 월송산 독수리 바위에서 미끄러져 추락했다는 소리에 모두 안타까워했다. 진실을 아는 하동댁과 진순은 열렬히 맞장구쳤다.
“고모, 오빠는 우예 만났어예?”
연순의 물음에 진순이 흠칫했다. 나쁜 기억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진순의 걱정은 기우였다.
김말순은 기억을 잃고 헤매다가 신동재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섬에 팔려간 이야기, 염전에서 돈 한 푼 못 받고 십 년 동안 염부들 밥을 하고 잡일에 시달린 이야기, 식당을 전전하며 고생한 이야기, 영아 덕분에 아들을 만난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듣던 여자들이 마지막에 환성을 질렀다. 무쌍은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차분히 가려서 담담히 풀어놓는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장필녀의 포달에 눈물짓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시련이 어머니를 강하게 만들었다.
‘역시 사부님! 아구스타 얼릉 사드릴게요.’
사부는 기억 재건 과정에서 박인보와 관련된 기억만 건드리고 나머지는 손대지 않았다. 어머니는 약하지 않다. 고난은 안타깝고 괴롭지만, 세월이 흐르면 기쁨도 슬픔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든다. 기억 조작은 한 인간의 여정을 농단하는 지나친 간섭이다. 사부다운 처사였다.
“성님, 기억을 잃으면 늙지 않나 보지요. 나도 기억을 잃으면 젊어질랑가요?”
하동댁이 얼굴을 바투 들이밀었다. 김말순은 세월을 비켜갔다. 새색시 같은 언니가 부럽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시선들이 일제히 김말순의 입에 모였다.
“떽, 자식을 17년이나 팽개쳤는데 이까짓 번드레한 껍질이 뭔 소용이여.”
김말순이 정색했다.
“하이고, 이래서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심정을 모른다니까.”
하동댁이 구시렁거렸다. 그렇게 응심제는 진정한 안방마님을 맞았다.
서재에 어머니와 아들이 찻잔을 놓고 마주앉았다. 모자간에만 할 수 있는 대화가 오갔다.
“쌍아, 우얄라꼬 집을 이리 크게 지었노. 내사마 길 이자뿌겠구마.”
“장필녀가 툭하면 집도 절도 없는 게 얼굴 반반한 값을 한다꼬 어무이를 욕했지요. 기억납니까?”
“그랴, 동서가 언가이(어지간히) 친정집 유세를 떨었지라. 내가 고아로 컸으니께 틀린 말도 아이지만, 속이 상해서 마이도 울었능 기라. 어렸을 때 일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구나.”
“어린 마음에도 억수로 분했심더. 내가 어른이 되면 장 씨 종갓집보다 열 배 큰 집을 짓겠다고 결심했걸랑요. 우야다 보이끼네 스무 배는 큰 집이 되었네요. 하하하!”
무쌍이 속없이 웃었다. 우습고 슬픈 이야기다.
“그랴, 어미가 얼매나 그리웠으면 연못에 섬을 만들고 말순도라고 이름 지었겠노. 내가 죄 많은 년인 기라. 흑흑흑!”
“어무이, 진보연과 말순도를 만들고 묘연거를 지은 뜻은 아부지와 어무이가 내세에도 즐겁게 사시기를 바라는 자식의 마음입니다. 그만 우시소.”
“그랴, 바보 같은 너그 아부지! 불쌍한 그이가 저승에서 편히 계시는지…….”
“사부님께서 아부지 영혼이 좋은 길로 들어섰답니다. 아무 걱정마이소.”
“그랴, 그래야제. 시상에 너그 아부지처럼 가슴 넓고 자상한 남자는 없능 기라. 네가 그이를 빼닮았어. 흑흑흑!”
김말순의 눈물은 끝이 없었다.
“어무이, 그만 우시소. 눈이 퉁퉁 부어서 장필녀를 만날라 캅니까.”
“장필녀를 만난다꼬?”
김말순이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솟았다.
“겁낼 것 없심다. 장 씨는 벼슬 떨어진 장닭이고 소금에 절인 배추라요.”
“거기 무신 소리고?”
“장 씨 가문 전체가 적몰되었으니 장 씨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지요.”
“세상에! 우째 그런 일이!”
김말순이 해연히 놀랐다. 장 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무너진단 말인가!
“어무이 아들이 입김만 불어도 그까짓 가문은 훅 날아갑니다.”
무쌍이 빙그레 웃었다.
“그랴, 내 아들이 잘나긴 잘났제. 네가 손썼더냐?”
“장 씨 가문이 소유한 농토가 대부분 제 손에 들어왔으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지요.”
“세상에! 장 씨들 땅을 밟지 않고는 인동을 지나갈 수 없다고들 했는데……. 장 씨 문중에서 땅을 내놓을 리도 없는데 그 많은 땅을 샀단 말이가?”
김말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무쌍은 백부가 큰 회사를 만들었고, 장 씨들이 회사를 뺏으려다 오히려 당한 일련의 사건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래서 땅을 백부와 나눠 가졌심더. 그래 봐야 크게 돈 될 것도 없는 논 2,000마지기, 밭 250마지기, 과수원 30,000평, 산 몇 개, 그 정돕니다. 벨 거 아이지요.”
무쌍의 입장에서야 별것 아니지만, 김말순으로서는 놀라 자빠질 숫자다.
“세상에!”
김말순이 입을 쩍 벌렸다. 남편과 십 년을 밤낮으로 손톱이 닳도록 일해서 논 여섯 마지기를 늘렸다. 2,000마지기는 상상 밖의 숫자다.
“상전벽해로다. 아지벰(아주버니)이 큰 회사를 일구고 대단한 장 씨 가문이 그 꼴이 되었다 카이 믿어지지 않는구마.”
“화무십일홍이지요. 이번에 백부 회사도 사들였심더. 내일 장필녀를 회사에서 쫓아내고 어무이가 그 자리를 차지할낌니더.”
“오메야! 그건 무신 소리고? 나는 암것도 모른다.”
“알 필요도 없어요. 그냥 주주들에게 인사만 하면 됩니다. 내일은 장 씨가 망하는 날입니다. 어무이는 아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쌓인 한을 마음껏 풀면 됩니다.”
“오이야,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년만은 좋게 대할 수 없구나.”
순해 빠진 김말순도 장필녀는 뱀보다 싫었다.
라라라- 초인종이 울렸다. 진순이 인터폰을 들었다.
“안뇽하셔요. 대사관에서 물품 배달왔습네다.”
키가 멀대같은 서양인이 화면에 어른거렸다. 진순이 개방 스위치를 눌렀다. 대사관 직원이 급한 물품이나 중요 서류를 직접 승용차로 배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감사합네다.”
대사관 직원이 승용차에서 대형 트렁크 두 개를 내려놓고 인수증에 사인을 받아서 곧바로 돌아갔다. 물품은 프랑스에서 외교 행낭으로 긴급 공수된 김말순의 패션 아이템이다. 진순이 무쌍을 닦달하고 무쌍이 DGSE를 닦달한 결과물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진순이 트렁크를 개방했다. 각종 의류와 액세서리, 화장품이 쏟아졌다.
“어머니, 프랑스에서 어머니 옷이 도착했어예.”
진순이 대청마루에서 소리쳤다.
“와!”
말만 한 처녀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나왔다. 마라 강에 몰려드는 누떼가 따로 없었다.
“쌍아, 이기 무신 소리고?”
“어무이가 입을 옷을 프랑스에 주문했심더. 패션 하면 프랑스 잖아요.”
닭 다리는 두 개고 의자 다리는 네 개라는 식이다.
“아이구, 이기 무신 소린지!”
김말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게 무슨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란 말인가?
“어무이 아들이 프랑스에서 방귀깨나 뀌거든요. 자자 가입시다. 어무이는 몸매가 좋아서 맵시가 팍팍 살아날꺼라요.”
무쌍이 어리둥절한 어머니 손을 잡아끌고 안채로 올라갔다. 오 자매와 영희 자매까지 처녀 일곱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수십 벌의 옷을 코디하고 액세서리를 부착하느라 난리법석을 부렸다. 안방에서 한바탕 패션쇼가 벌어졌다.
샤넬 스커트, 에르메스 재킷, 까르띠에 손목시계, 지방시 블라우스, 바바리코트, 루이뷔똥 숄더백 등등 웬만한 사람은 구경도 못 해본 명품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특별군사고문 스바르드 굴베이그의 말 한마디가 엄청난 과소비를 불렀다.
김말순의 패션은 한복, 몸뻬, 행주치마가 전부였다. 듣도보도 못한 옷차림에 어찌할 줄 몰랐지만, 처녀들은 사정이 없었다. 응심제 안방은 밤늦은 시간까지 환성과 웃음으로 요란했다. 고난은 복락으로 돌아오리라고 말한 대우선사의 말 그대로였다.
이튿날 아침, 환성이 터졌다. 앞마당에 등장한 여자는 짚은다리 김말순이 아니라 패션모델 김말순이었다.
“와! 어머니 반칙이라예.”
“우오오!”
“꺄아, 언니야!”
별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럴만했다. 김말순을 누가 48세 중년 여자라 할 수 있겠는가. 하의는 타이트한 세로줄 무늬 레깅스에 진회색 펜슬 스커트를 받쳐입고 스웨이드 롱부츠를 신었다. 상의는 진주색 울 블라우스에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캐시미어 스카프를 둘렀다.
회초리처럼 낭창대는 몸매를 감싼 명품 옷과 얼굴 절반을 가린 까플린 모자, 어깨에 멘 진홍색 호보백, 브라운 톤 선글라스가 어우러져 일류 패션모델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외모에 둔감한 무쌍마저 감탄했다.
“아이고, 이를 어째!”
김말순이 몸을 비비 꼬았다. 그녀는 상상도 못 해본 숭스런 옷차림에 어찌할 줄 몰랐다.
“어무이, 잘 어울립니다.”
무쌍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냐?”
“그럼요. 어머니 최고라예.”
진순이 엄지를 척 들었다.
“사모님, 최곱니다.”
김극도와 김기택이 입을 모아 외쳤다. 김말순이 어깨를 폈다. 아들과 며느리가 좋다면 좋은 것이다.
향심섬유 사옥 로비, 안구가 정화될 선남선녀 한 쌍이 현관을 들어섰다.
“충성!”
무쌍에게 혼이 났던 경비가 우렁차게 경례를 붙였다.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우하는 남자들의 감탄과 꺄아하는 여자들의 비명이 울렸다. 직원과 일가붙이에 둘러싸여서 당당하게 걸어가던 장씨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머꼬?”
장 씨가 고개를 돌렸다. 무쌍과 장 씨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겨울 호수처럼 서늘한 시선과 살모사 눈 같은 냉랭한 시선이 엇갈렸다. 장 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가 어찌 무쌍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엌, 저놈은 첩 년 새끼 아이가?”
장필녀가 장상수를 돌아보았다.
“그 글쎄요. 저는 잘…….”
장상수가 우물쭈물했다. 어린 무쌍을 몇 번 보고, 고등학교 재학 중일 때 동선을 감시한 적도 있지만, 얼굴을 기억하기는 무리였다.
‘저놈이 무쌍이 맞긴 맞나?’
장 씨도 긴가민가했다. 농사짓고 똥치던 천덕꾸러기 무쌍과 기품과 위엄이 어우러진 당당한 청년을 연결하기엔 그녀의 선입견이 지나치게 강했다. 단춧구멍 같은 눈이 무쌍의 아래위를 분주히 오갔다.
‘저년은 또 머꼬?’
시선이 김말순을 향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몸매와 신발에서 액세서리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년이 눈을 꽉 채웠다. 한때는 딸 둘과 어울려 쇼핑을 낙으로 삼았던 장필녀다. 명품에 대해서는 빠끔했다. 어설프게 흉내 낸 짝퉁이 아니라 진짜 명품이다. 단춧구멍에 단추가 끼워지듯 검은 동자가 드러났다. 장필녀로서는 한껏 커진 눈이다.
무쌍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팍팍한 얼굴이 마른 삭정이처럼 바짝 말랐다. 머리숱은 모내기 끝난 논처럼 듬성듬성하고 눈두덩이 푹 꺼졌다. 어머니가 새색시라면 장 씨는 증손자 본 할머니다. 하긴 예전에도 장 씨는 얼굴에 살이 없고 광대뼈가 불쑥 솟아올라서 팍팍한 인상이었다. 워낙 박색에다 얼굴은 덮은 마마 자국 때문에 혼기를 놓치고 박인보에게 시집왔다.
‘저 저것!’
마마 자국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른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저 표정은 우탁이 던진 농약병에 마빡이 깨졌을 때 지었던 바로 그 얼굴이다. 시퍼런 농약과 붉은 피로 범벅된 얼굴, 조소하는 듯 비웃는듯한 저 표정에 한때는 가위눌리기도 했었다. 짚은다리 친척들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외국에 나가서 돈을 산처럼 벌어왔다는 놈, 무쌍이다.
이럴 줄 알고 그토록 밟고 또 밟았지만, 여뀌바늘(습지에서 잘 자라는 생명력 강한 잡초) 같은 놈이 기어코 꽃을 피웠다. 좋았던 기분이 급전직하했다. 놀람은 분노로 끓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