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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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장 Veritas Caritas Justitia 1
진실은 본태고 사실은 현상이다. 승전국 미국의 대일본 점령정책의 근간은 ‘기존의 정치 기구를 이용한다.’였다. 전범을 처단하고 민주적 인사로 신정부를 구성해야 할 미국이 왜 그랬을까?
미국이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과 무자비한 팽창주의, 중국 공산화에 놀랐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투라우마가 생긴 미국은 일본을 사상적 군사적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그 결과, 민관군을 막론하고 기득권층 극우파 전쟁광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았고, 전범 처리는 흐지부지되었다.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가 피폐할수록 권력자와 재력가는 손쉽게 세를 불리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일본 재무장의 씨앗은 패전 순간부터 심어졌다.
한국에서 시행된 미 군정도 일본 GHQ(연합군 최고사령부 총사령부) 정책의 연장이었다. 친일파와 매국 부역자 처단은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미 군정 목적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소련 저지와 공산주의 말살이었다.
미 군정은 한국에서 몰수한 엄청난 일본 재산(기업, 토지, 주택, 원료, 광산, 등등)을 일반에 매각했다. 이러한 재산을 사들일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일본 식민통치에 협력한 친일 매국노와 기타 동족의 피로 배를 채운 악덕 업자들이었다. 부를 손쉽게 손에 넣은 이들은 강력한 사회 기득권층으로 등장했고,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다. 독립운동가와 일제 저항세력은?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극우주의 전범세력이 고스란히 보전된 일본이 반성할 리 없고, 친일 매국노 세력이 고스란히 남은 한국에서 갈등이 사라질 리 없다. 미국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없다. 미국은 미국일 뿐 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없는 정의는 투정일 뿐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일 뿐이다. 우리는 정당한 것을 강하게 만들지 못한 나머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우를 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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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빠세오 누에보(Paseo Nuevo) 거리 3구역 에이미 오피스텔 701호, 탕-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쫓기듯이 들어선 미모의 동양 여성이 팽개치듯 단화를 벗어 던졌다. 룸으로 돌진하려던 여자가 주춤했다. [Veritas Caritas Justitia]
여자가 풀무질하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맞은편 벽에 걸린 액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붓글씨로 쓴 알파벳이 살짝 어색했지만, 산수화의 부벽준을 차용한 획은 힘이 철철 넘쳤다. 여자는 정물이 된 양 오래도록 액자를 쳐다보았다.
“베리타스 카리타스 저스티티아!”
여자가 중얼거렸다. 액자 아래쪽에 걸려있는 거울에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자그마한 얼굴을 학처럼 긴 목이 받치고, 반듯한 이마 아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정확한 비례로 자리 잡은 미인이다. 세상에 미인은 많지만, 긴 속눈썹에 덮혀 젖은 듯 푸른빛 도는 검은 눈동자는 무쌍의 연인인 인혜영밖에 없다.
“누나, 나 돈 없다. 이걸로 퉁 치자.”
쑥스러운 웃음을 채운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무쌍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액자, 손재주 좋은 무쌍이 글씨도 직접 쓰고 액자도 직접 만들었다. 분노로 번득이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아랫도리에 힘이 쭉 빠진 혜영이 휘청했다.
“미안해, 난 진리도 사랑도 정의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정말 미안해!”
혜영은 비척비척 침대로 향했다. 붙박이장을 열고 되는대로 옷가지를 챙겼다. 28인치짜리 대형 캐리어를 침대에 던져놓고 되는대로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혼란했다. 탁-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화장품 케이스가 캐리어 월에 부딪혔다.
“아!”
동작이 뚝 멈추었다. 잠금장치가 풀어진 케이스에서 내용물이 우르르 쏟아졌다. 스킨, 아이 스틱, 에센스 크림, 루주,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파우다 케이스 뚜껑이 열렸다. 하얀 분가루가 뒤죽박죽으로 쑤셔 박은 옷에 쏟아졌다. 여행 가방은 엉망이 되었다.
“이게 뭐야!”
다리에 힘이 풀린 혜영이 얼굴을 감싸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흘러내렸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진리도 사랑도 얻지 못한 개떡같은 나날이.
베리타스와 카리타스 중에 베리타스를 선택한 대가는 가혹했다. 미국 생활은 고통과 절망의 변주곡이었다. 결벽하고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를 가진 그녀는 미국 사회에 쉽게 녹아들지 못했다. 익숙지 않은 문화, 음식, 언어에 지치고, 스터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난제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벼랑에서 밀면 새는 날아오른다는 각오로 달려든 아메리칸 그레쥬레이트 스쿨은 험난했다. 의기양양한 출발은 연구 과정 첫날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생각지도 못했던 언어 문제가 철벽처럼 앞을 막았다. 빠르고 억센 남부 억양 영어가 그녀를 그로기로 몰았다. 그녀를 위해서 한국의 영어 학원 강사처럼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강의하는 교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제대로 듣지 못하니 질문은 언감생김이었다.
게다가 산타바바라 대학의 연구 과정은 한국 대학 교과목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국과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지리정보체계(GIS), 공간인지(Spatial Cognition) 등의 생소한 과목에 넋이 빠졌다. 견디다 못해 가을 학기를 기약했다.
그레쥬레이트를 휴학하고 6개월 코스의 대학 부설 ESL로 들어갔다. 칼리지도 아닌 대학원생이 ESL이라니……. 기가 막혔다. 참담하게 무너진 자존심만큼이나 독기를 품고 입과 귀를 훈련했다.
1980년대 미국 캠퍼스에서 동양인을 마주치기란 쉽지 않았다. 동양인 여자는 희귀한 존재다. 예쁜 동양인 여자는 천연기념물 수준이다. 언어 문제를 해결했지만, 인종 차별과 호기심이란 또 다른 암초는 해결할 수단이 없었다. 어디를 가나 주목받았고, 시도때도없이 껄떡대는 남자에 시달려야 했다.
UCSB(University of California-Santa Barbara)의 지구과학 대학원 과정은 미국 20위권으로 그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 주당 수업시간은 27시간에 달했다. 장학금을 유지하려면 강의와 세미나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구두시험에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잠은 쪽잠으로 때우고 식사는 햄버거로 때워야 했다. 한국에 남은 사랑을 기억할 작은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대학원 연구 과정은 그룹 스터디와 조교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과제 대부분은 그룹으로 주어졌고, 조교가 그룹 스터디에 킹핀 역할을 했다. 시기와 질투는 그룹 스터디에도 따라다녔다. 두각을 드러내면 시기와 질투가 따랐고, 뒤처지면 인종적 편견을 동반한 경멸이 쏟아졌다.
똑똑하고 예쁜 인혜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멍청하고 지친 여자만 남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온 자신을 저주했다. 그리움과 미안함, 이 세상에 혼자라는 외로움이 우울증을 불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서발 바지랑대를 흔들어도 걸리는 게 없었다.
도미 2년째, 연구실에서 충동적으로 손목을 그었다. 연구실에는 지질 표본을 다듬는 메스가 흔해 빠졌다. 조교 로버트가 과다 출혈로 요단강에 한 발 디딘 자신을 발견했다.
로버트는 헌신적이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안정적인 장학금을 주선해준 사람도 로버트였다. 장학금 지급처가 국가 기관이라고 들었지만, 그 기관이 어떤 기관인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돈이 중요하지 돈을 주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가 주는 돈도 받아야 할 만큼 궁핍했으니 말이다.
로버트라는 지푸라기를 잡았다. 왜 로버트와 가까워졌을까? 무쌍은 네 살이나 연하다. 어린 연인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감과 자신이 어른이라는 선입견에 매몰되었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였다. 열 살 연상인 로버트는 베풀어 주는 사람이었다. 로버트는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오빠가 되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로버트에게 의지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조교의 역할은 연구 과정에서 절대적이다. 조교의 호감과 악감에 따라 학위 취득 연도가 달라지고 장학금이 왔다 갔다 한다. 로버트 덕분에 스터디 그룹에서 위치가 안정되고, 까다로운 사무엘 교수의 입맛을 맞출 수 있었다.
로버트와 함께 떠난 에팔레치아 산맥 트레킹에서 몸을 열었다. 석사 학위증을 받은 기념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남자라곤 무쌍밖에 몰랐다. 무쌍은 굳건하고 진실했다. 입에 꿀을 바른 남자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지 못했다. 여자에겐 나쁜 남자가 인기 있다는 통속적인 경구도 몰랐다. 아니다. 변명일 뿐이다. 될 대로 되라는 심리적 허탈 상태가 어리석음을 불렀다.
로버트와 동거한 지 일 년이 지나서야 그가 유부남임을 알았다. 분노가 영혼을 태웠다. 유부남이라는 사실보다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로버트는 적극적으로 변명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사과했다. 동양적인 사고를 하는 당신이 유부남이라고 했으면 자신을 사랑했겠느냐고 되물었다. 이미 이혼 절차가 진행중이라고 강변했다.
사건은 어물어물 넘어갔다. 동거도 아니고 이별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현실에 굴복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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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연구 자료를 챙기러 재차 연구실에 들렀다.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바지를 내린 로버트가 열심히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작업 테이블에 누워서 기성을 지르는 여자는 석사과정의 중국계 수잔이었다. 더러웠다. 머릿니가 전신을 기어 다니는 듯 피부에 소름이 돋고, 자동차 부동액을 마신 듯 구역질이 올라왔다.
일을 끝낸 수잔이 태연히 옷을 걸치고 비웃듯이 째려보고 나갔다. 로버트는 애정 없는 섹스라고 강변했다. 린만을 사랑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놈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미친 듯이 물건을 집어 던졌다. 메스, 가위, 분도기, 저울 등등. 로버트는 책임감 없는 놈답게 도망쳤다. 그리고 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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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푸른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산타바바라는 청정지역이다. 풍부한 오존이 달을 푸르게 물들이고, 고기압대가 비릿한 바다 내음에 와인향을 섞었다.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순간에도 달이 푸르게 보이는 원인을 더듬는 자신이 어이없어서였다. 지식을 얻고 지혜를 잃었다. 사유를 얻고 낭만을 잃었다. 표변을 얻고 본질을 잃었다.
“내 사랑, 아직도 뻐꾸기 울음을 싫어하니?”
달을 좋아하고 뻐꾸기 울음을 싫어하던 무쌍이 사무쳤다. 장한가를 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외로운 뒷모습이 가슴을 저몄다.
“사월 팔 일에 노인송에서 만났네. 인적없는 지하에서 깊은 정을 주었네! 바라오니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연리지가 되게 하소서. 영원한 천지가 다함이 있을지라도 한스러움은 끝없이 이어져 다하지 않으리. 흑흑흑!”
마지막 구절에서 흐느낌이 새나왔다. 얼마나 유장하고 끝없는 사랑의 노래던가! 앞 구절은 생각나지 않았다. ‘비익조가 되고 연리지가 되소서’라는 구절만 쟁쟁 울렸다.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영리했던 자신의 연인, 한없이 슬퍼 보이던 연인의 마지막 얼굴만이 눈앞을 채웠다.
“꺼억 꺽!”
혜영은 창자를 뱉어내기라도 할 듯이 꺽꺽 울었다. 연인이 즐겨 부르던 장한가 뒤 구절이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고, 연인의 얼굴이 슬퍼서 울었다.
4년 세월을 꿈속에서 살았다. 낡은 적산 가옥은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조로한 남자와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파는 공상가 땅강아지 처녀가 꿈을 키웠던 묘연거였다. 무쌍이 주방에서 떨걱이면 침이 저절로 고였다. 남의 고기가 맛있고, 남이 구워준 고기가 더 맛있고, 무쌍이 구워준 고기는 더더 맛있었다. 된장찌개를 끓여도 무쌍이 끓이면 백배는 맛있었다.
무쌍이 끓인 해물탕은 어떤가! 양은 냄비에 수북이 쌓인 낙지, 미더덕, 백합, 오징어, 꽃게, 대합, 그리고 미나리, 콩나물!
같은 양념을 써도 입안이 얼얼하고 목구멍이 뻥 뚫리는 매운맛이 행복을 불렀다. 야채를 와작와작 씹으면 입이 아니라 관자놀이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이에게 안기고 싶다. 그 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학위 따위가 무엇이던가! 그이만 좋다면 가슴골 드러나는 블라우스 입고 붉은 꽃 머리에 꽂고 중중모리 자진모리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육자배기 뽑는 작부가 되어도 좋다.
석사, 박사 학위증이 행복에 무슨 소용이 있다고 미친 듯이 살았을까? 결심이 무너질세라 이별 통보를 보내고 한국에는 발걸음조차 않았다. 더러워진 몸으로 감히 그이의 앞에 설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이의 흔적 한 자락이라도 알고 싶다. 당장 공항으로 달려가고 싶다.
“내 사랑!”
무쌍이 쓰다듬기만 해도 자지러지던 몸은 감각을 잃어버렸다. 로버트와 관계 중에 단 한 번도 오르가슴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이의 손길이 그리웠다. 강철처럼 단단한 가슴이 그립고 무섭도록 강했던 중심이 그리웠다.
혜영은 벌떡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살이 익을듯한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피부가 벗겨지라 타월로 박박 밀었다. 이내 피부가 빨갛게 변했지만, 손을 멈추지 못했다. 죄책감이 가슴을 후벼 팠다. 더러워진 껍질을 홀딱 벗겨 내고 싶었다. 세탁기에 넣고 달달 돌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