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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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장 Veritas Caritas Justitia 2
젖가슴을 쓰다듬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무쌍이 ‘엎어놓은 백자 주발에 올려진 잘 익은 팥 한 알’이라고 표현했던 예쁜 가슴이다. 철판처럼 단단한 가슴, 솜처럼 부드러운 손길,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게 만드는 정력, 생각만으로 중심이 푹 젖었다. 그 손길을 느끼고 싶다. 귓바퀴 솜털이 오소소 돋는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를 듣고 싶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기고 싶다.
“흑흑흑! 왜 떠났던 거야. 왜에~”
혜영이 벽을 짚고 흐느꼈다. 그토록 사랑했던 님인데, 학위 따위가 뭐라고, 나이 몇 살이 뭔 대수라고 남의 시선을 의식했던가. 남보다 못한 냉골 아버지, 딸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반대가 뭘 그리 대단하다고 마음이 흔들렸던가. 정염이 꾹꾹 눌러 두었던 그리움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뇌가 하얗게 불탔다.
“다 필요 없어. 그이를 만나야 해!”
혜영은 발작적으로 욕실에서 튀어나왔다. 알몸을 닦을 새도 없이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붙박이장에 달려들었다. 청바지, 블라우스, 레깅스가 어지러이 허공을 날았다. 손에 들려 나온 물건은 노란 표지의 두터운 책자였다.
작은 손으로 쥐기에 부담스러울 만큼 크고 무거운 책자는 한국을 떠날 때 들고온 전화번호부였다. 거리의 차력사가 힘자랑할 때 찢었던 전화번호부, 집집이 두 권(인명부, 상호부)씩 상비 되어 있던 바로 그 전화번호부였다.
혜영은 후루룩 책장을 넘겨서 ㄱ을 찾았다. 무쌍의 자취방 주인 이름이 김철수다. 김철수를 찾은 혜영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 김철수가 무려 세 페이지였다. 국배판(가로세로 210mm*297mm)에 깨알같은 글씨로 3페이지면 5,000명이 넘는다. 왜관읍 왜관리의 김철수도 20개가 넘었다.
“하아~”
혜영이 긴 한숨을 쉬고 전화부를 내던졌다. 한국에서 제일 흔한 성이 김 씨고 제일 흔한 이름이 철수다. 미국에서 잭 에드워드 찾기다. 이름보다 긴 세월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7년이란 세월은 노인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청춘은 인생을 바꿀 만큼 긴 세월이다.
혜영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손에 타월을, 다른 손에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몸을 닦고 말렸다. 제사상에 올릴 북어처럼 바짝 말렸다. 오욕의 흔적을 지우는 의식을 치르듯이.
여행 가방을 정리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뉴욕 항공에 김포공항행 항공권을 예약하고 옷을 챙겨입었다. 가출 준비를 끝내고 룸을 돌아보았다. 지난 5년 동안 거주한 오피스텔이 타인의 방으로 변했다. 탕- 뒷발질로 현관을 걷어차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쪽에서 찰칵하고 자동 락이 걸리는 소리가 울렸다.
“굿바이!”
혜영이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다. 또각또각- 단화 소리와 달달달-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낭하를 울렸다.
******
한번 꼬인 운명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혜영의 발걸음이 오피스텔 입구에서 딱 멈추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진드기 광신도보다 더 보기 싫은 천박한 얼굴이 앞을 막았다. 혜영이 슬쩍 비켜서 걸음을 옮겼다. 말을 섞었다간 암이 걸릴 것 같았다.
“린,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어. 수잔이 먼저~”
로버트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주절거렸다.
“닥쳐!”
혜영은 팔짱을 끼려는 로버트를 밀쳐냈다. 어쩌자고 이런 쓰레기를……. 몸서리가 쳐졌다. 인분차는 세차해도 인분차고, 포니에 터보 엔진을 얹는다고 람보르기니가 되지 않는다. 기껏 닦아낸 몸에 이가 스멀거렸다.
“린, 어쩌려고 그래? 어디로 가는 거야?”
“비켜! 내 고향으로 돌아간다.”
“코리아?”
로버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혜영은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린, 몇 달만 참으면 닥터 코스가 끝나잖아.”
로버트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사정했다.
“그까짓 학위는 네놈이나 처먹어!”
혜영이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미세스, 잠시 시간을 내 주셨으면 합니다.”
정중하지만 강압적인 어투였다. 혜영이 움찔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로버트와 함께 나타났던 남자다. 10m 뒤에 정물처럼 서 있더니 신기루처럼 앞에 나타났다.
“미쓰로 불러 주세요. 누구시죠?”
혜영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미세스라는 호칭이 흙탕물 튀긴 기분을 아예 똥물에 처박았다.
“그러죠. 스펙터라 부르십시오.”
“그런데요?”
“미쓰 린이 지금까지 받은 스테이트 스콜라쉽과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적대적인 반응에 불구하고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눈도 깜짝이지 않았다. 고 앰풀 보톡스 주사를 얼굴에 맞았거나 가면을 쓴 듯했다.
“국가 장학금!”
혜영의 어깨가 축 처졌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소금을 먹었으면 물을 켜야 한다.
“잠시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러죠.”
혜영이 해변의 노천카페로 향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불구하고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이 많았다. 와인을 즐기는 아베크족이다. 산타바바라 해변에 늘어선 노천카페는 시음용 야외 매대를 내놓고 다양한 와인을 선전한다.
와인이라면 프랑스, 이탈리아, 칠레를 먼저 떠올리지만, 캘리포니아에서도 질 좋은 와인이 대량 생산된다. 그 중심지가 산타바바라다. 혜영은 시음용 잔을 들고 카페로 들어섰다. 스펙터가 맞은편에 앉고 로버트는 소다수 한 잔을 들고 옆 테이블에 앉았다.
“미쓰 린, 박사과정은 포기입니까?”
푸른 눈동자가 빤히 응시했다. 혜영은 섬뜩했다. 눈동자에서 한 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버마 비단뱀 눈알을 보는 느낌이었다. 새삼 무쌍이 그리웠다. 그이 옆에 있으면 비단뱀 눈알 아니라 공룡 눈알도 무섭지 않을 텐데…….
“포기는 아니지만……. 지금은 쉬고 싶어요.”
혜영이 얼버무렸다.
“좋습니다. 쉬고 싶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냥 쉬고 싶어요.”
혜영이 한숨 쉬듯 대답했다.
“그 말씀을 포기라는 말과 동의어로 보아도 될까요?”
목소리가 시종일관 책을 읽듯이 건조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남자다.
“현재로서는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군요.”
혜영이 시니컬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쉬고 싶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유감입니다.”
혜영은 섬뜩했다. 남자의 말에서 유감이 아니라 진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쌍아, 나 무서워!’
서러움이 왈칵 솟았다.
“미쓰 린, 실례지만 계약서를 재확인 바랍니다.”
스펙터가 낡은 닥스 서류가방에서 파일을 꺼내서 내밀었다.
“네!”
기가 꺾인 혜영은 얌전히 파일을 펼쳤다. 스테이트 스콜라쉽 계약서 사본이다. 계약 당시엔 학점 유지 부분, 보조 금액, 학위에 관한 사항만 대충 읽고 처박아 두었다. 계약서를 어느 구석에 처박아 놓았는지 기억도 없었다. 사실 나머지는 사족이다. 로버트가 시음용 와인을 가져다 슬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혜영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약서에 코를 박았다.
……
f-3 서명된 수혜자가 중도에 석사 학위를 포기하거나 학위 취득 가능성이 현저히 낮을 경우 본 학회가 지정한 조직에서 3년간 의무적으로 근무한다.
…….
h-4 서명된 수혜자가 석사 학위 취득 후 f-3의 경우에 처할 경우 본 학회에서 5년간 근무한다.
……
s-2 서명된 수혜자는 본 학회에서 지정하는 업무를 거부할 수 없다. 이는 해외 파견 근무를 포함한다.
s-3 서명된 수혜자는 h-4의 경우 미국 시민권을 자동 취득한다.
……
t-1 서명된 수혜자는 비밀유지 서약에 동의한다. 본 학회의 관련 업무는 영구 비밀로 한다. 수혜자의 비밀유지 서약은 종신 유효하다.
…….
혜영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항목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이상했다. 국가 장학금은 아껴쓰면 학비는 물론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자신은 특별할 것 없는 한국 유학생이다. 예쁘고 머리 좋은 여자는 캠퍼스에 널렸다. 만만치 않은 액수의 장기 장학금이 순순히 주어지기엔 개연성이 부족했다.
“미스터 스펙터, 계약서에 언급된 학회가 무슨 학회죠?”
“그냥 학회입니다.”
“정부와 관련된 기관인가요?”
“당연합니다. 미쓰 린은 지난 5년간 아메리카합중국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하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비밀 기관인가요?”
“노코멘트입니다.”
“미국 시민권은 자동 취득인가요?”
“그렇습니다. 한국 국적은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요?”
“포기하게 됩니다.”
“t-1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비밀을 누설할 경우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위험이라는 의미는 죽는다는 뜻인가요?”
“노코멘트입니다.”
“으윽!”
혜영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화 상대가 인간인지 로봇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달달하고 스파이시한 와인이 떫고 신 레몬 주스로 변했다. 시음용 와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혜영은 뇌 한쪽에 눌어붙은 불길한 전조를 떼어내려고 와인 이름을 결사적으로 떠올렸다.
“미쓰 린, 행선지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노코멘트입니다.”
혜영은 스펙터 흉내를 냈다. 순전히 반발심이다.
“미쓰 린이 예약한 한국행 항공권은 취소되었습니다.”
역시 흉내는 흉내일 뿐이었다. 카운터 펀치가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뭐라고요? 여기가 미합중국이 맞나요?”
혜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와인과 칵테일을 즐기던 아베크족의 시선이 일제히 혜영을 향했다. 스펙터가 손을 흔들었다. 시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맞습니다. 미합중국은 계약을 중시합니다.”
스펙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와인 이름이 생각났다.
“트리커리(야바위)!”
혜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와인의 이름은 야바위였다. 자신은 야바위꾼이 쳐놓은 질긴 거미줄에 걸렸다.
“미쓰 린, 학회는 당신 의사를 존중합니다. 몇 가지 규칙만 준수하면 미쓰 린은 자유롭습니다.”
‘내가 예약한 항공권을 지들 멋대로 취소해놓고 자유롭다고?’
혜영은 화를 내기 전에 불안이 앞섰다. 학회라는 조직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소리다. 은밀히 캠퍼스에 나도는 루머가 생각났다. 정보기관이 경제적 지원을 미끼로 유학생을 실험용이나 정보원으로 써먹는다는 소문이었다. 타켓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남미와 동양계 유학생이라고 했다. 오래전부터 회자된 소문이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오피스텔로 돌아가야 하나요?”
혜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닙니다. 거처가 바뀌었습니다.”
혜영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로버트를 돌아보았다. 로버트의 시선은 딴 세상에 있는 듯 보이지도 않는 밤바다를 헤매고 있었다. 방관적인 태도에 한 움큼의 분노가 울컥 솟았다.
“로버트, 계획적이었나요?”
“내 사랑은 거짓이 아니야. 난 지금도 린을 내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어.”
로버트가 혜영의 시선을 슬쩍 비켰다.
‘하느님, 맙소사!’
혜영이 휘청했다. 책임감 없고 즉물적인 인간임은 알고 있지만, 이토록 후안무치할 줄은 몰랐다. 이놈은 계획적으로 자신을 함정에 밀어 넣었다. 느끼하고 뻔뻔한 백인 놈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나쁜 놈!”
촤악- 혜영은 머그잔에 남은 와인을 얼굴에 끼얹는 것으로 더러운 기분을 대신했다. 와인을 덮어쓴 로버트가 말없이 냅킨을 뽑아서 얼굴을 닦았다.
“미쓰 린, 새로운 거처로 안내하겠습니다.”
스펙터는 혜영의 일탈 행위에 오불관언 했다. 자기 할 말만 했다.
‘진짜 로봇인가?’
혜영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스펙터는 감정 자체가 결여된 인간으로 보였다. 인간도 입력된 데이터와 상황을 맞추어 행동하지만, 스펙터처럼 상대방의 감정에 무반응일 수는 없다.
******
“그럼, 편히 쉬십시오.”
스펙터는 18호 어시스턴트 안내를 끝내고 냉정히 돌아섰다. 닭장을 벗어나려는 암탉을 되돌리는 임무는 끝났다. 에이전트가 멍청한 짓을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닭장 관리에 구멍이 날뻔했다.
새 오피스텔 현관을 열고 들어서던 혜영이 움찔했다. 정면 벽에 [Veritas Caritas Justitia]가 걸려있고, 액자 하단에 거울이 걸려있었다. 놀란 혜영의 눈이 실내를 훑었다.
“세상에!”
혜영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오피스텔에 있던 물건이 고스란히 옮겨졌다.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정확히 있었던 자리에 배치되었다. 심지어 걷어차서 침대 발치에 뒹굴던 쓰레기통도 그대로였다.
낯선 물건은 딱 한 가지, 거실 탁자 위에 놓인 흰 봉투였다. 혜영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개봉했다. 백 달러 지폐 두 장이 나왔다. 혜영은 소름이 쭉 끼쳤다. 당일 출발하는 한국행 항공권 해약 수수료가 200불이었다.
소름이 쭉 끼쳤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학회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개미귀신 굴에 빠졌음은 확실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개미굴!
이튿날부터 세상이 갑자기 달라졌다. 아니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달라졌다. 익숙했던 세상이 불편해졌다. 오피스텔을 나서면 시선이 따라붙고 룸에 들어서면 시선이 떨어졌다.
학회라는 조직이 억압심리 테스트 중이라는 의심까지 들었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은 항공권 해약 수수료까지 정산해서 보내준 치밀한 조직이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당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한 자신이 서러웠다.
“쌍아, 난 어쩌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