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cenary Black Mamba RAW novel - Chapter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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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장 Veritas Caritas Justitia 3
혜영은 목이 메었다. 직접적인 위협은 없지만, 억압받는다는 기분 자체가 스트레스다. 가위눌린 가슴을 해결해 줄 사람은 태평양 너머 10,000km밖에 있다. 목메어 부른들 처소가 초간한데 듣기나 할까! 괜찮다고 안심하라고 어깨를 감싸줄 수 있을까! 기력이 쭉 빠졌다.
미국 행정 기관의 정책 수립과 집행은 한국과 달리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인다. 경찰의 과도한 물리력 행사가 도마에 오를 때가 많지만, 총기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평범한 동양인 유학생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인권을 제한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꼬르륵- 위장에서 보낸 신호가 사고 작용을 끊었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 저녁부터 지금까지 먹은 것이라곤 와인 한 잔이 전부다. 꼬르륵- 쪼르륵- 배고픔을 인식하는 순간 위장이 아우성쳤다. 창자가 꼬이는 듯한 허기가 밀려들었다. 거실 탁자에 놓여있는 흰 봉투가 국숫발로 보였다.
“크크크!”
혜영은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 아기가 엄마 젖에 매달리듯 무쌍이 고팠다. 죽을 것 같은 그리움에 몸부림쳤는데…….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릴까? 과도로 가슴을 찌를까 고민하는 판에 배고픔에 눈이 뒤집히는 몸뚱이라니! 억장이 무너졌다.
개체 보존의 본능은 이토록 장엄했다. ‘죽기 전에는 미리 죽지 않는다.’는 어떤 배우의 대사가 생각났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도 정신이 나가면 나갔지 굶어 죽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급사한 남편의 시체를 병풍 뒤에 눕혀놓고 눈이 퉁퉁부은 과부가 숟가락질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 살아있는 인간은 먹어야 하고 살려면 먹어야 한다.
벌떡 일어나서 파카를 걸치고 지갑을 챙겼다. 위장을 위로할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필요했다. 현관문을 나서다 말고 외투를 휙 벗어 던졌다. 감시당하는 더러운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역시나 피자와 햄버거가 들어있었다. 대단한 인간들이었다. 어쨌든 학회라는 조직이 곧 액션을 취할 것이다. 도래하지 않은 사건을 앞당겨서 근심·걱정에 빠져봐야 소용없다. 광야를 헤매던 유대인이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고난이 없겠는가.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혜영은 차갑게 식은 피자를 데우지도 않고 꾸역꾸역 뜯어먹었다. 어이없지만, 육체적 허기가 정신적 허기를 이겼다. [Veritas Caritas Justitia]가 혜영을 처연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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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빠세오 누에보 골목, 붉은벽돌이 깔린 도로는 간간이 오가는 행인을 빼면 차량 한 대 없이 텅 비었고, 악기점의 색소폰 소리는 수시로 박자를 놓쳤다. 한가로운 골목을 따라 늘어선 흰색 스페인풍의 건물 창가에는 예외없이 꽃 화분이 올려져 있고, 벽면을 덮은 붉은 담쟁이가 해풍에 이파리를 떨었다.
거리 양쪽에 드문드문 배치된 벤치는 시가 연기를 뿜어 올리는 노인과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할머니가 차지했다. 한가로운 풍경에 가슴이 아릿했다. 50시간 전까지는 자신도 평화로운 풍경 일부분이었지만, 이제는 아웃사이드가 되었다.
먼바다를 달려온 바람이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담쟁이 이파리가 우수수 흔들리고, 창가에 놓인 이름 모를 꽃이 우쭐거렸다. 낙동강 강바람에 우쭐거리는 고향 집 담쟁이덩굴이 생각났다.
담쟁이 이파리로 배를 엮어서 손바닥만 한 히라니와 정원 연못에 띄우던 솜씨 좋은 남자, 그 옆에서 손바닥을 두드리며 깔깔대던 여자, 집으로 향하는 골목은 자신만의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국에서 고등학교 중퇴 학력에 전과자 딱지를 붙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이가 특별한 인간이지만, 한국 사회는 학력 없고 전과 있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을 만큼 개방된 사회가 아니다. 아무려면 어떤가. 그이는 능력있고, 자신이 비빌 언덕이 되어 줄 텐데. 혜영은 달콤한 상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꺄하하!”
호들갑스런 웃음이 오후의 한가로움을 깨뜨렸다. 골목 입구에 젊은 남녀가 나타났다. 남자는 멸치처럼 바싹 말랐고 여자는 하마처럼 뚱뚱했다. 멸치와 하마가 감싸 안고 어찌나 심하게 비벼대는지 골반이 멍들 것 같았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백인 여자가 긴 머리채를 흔들며 연신 웃었다. 푸짐한 살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자신의 몸 관리도 못 하는 여자를 왜 좋아하지?”
혜영이 중얼거렸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남자 허리를 뱀처럼 감고 왼손에 견과류 봉지를 들었다. 뚱뚱해서 식탐이 강한지 식탐이 강해서 뚱뚱해졌는지 모르지만, 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허리에 미쉐린 타이어를 둘렀다면 자기 관리를 못 했다는 소리다.
‘자기 관리? 헉!’
혜영은 망치로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자기 관리를 못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형편없는 쓰레기에게 몸을 던져놓고 염치없이 그이를 찾아가려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설마 섹스를 악수만큼이나 쉽게 여기는 미국 사회에 물들어 버린 걸까? 불현듯 까만 얼굴에 이름마저 촌스러운 계집애가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찬 기운이 등을 쓸고 지나갔다.
조진순, 열패감을 안겨서 등 떠민 계집애를 잊고 있었다. 교복 입은 주제에 자신보다 키도 크고 가슴도 큰 계집애, 무쌍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자취방에 들러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했다는 계집애.
실종된 무쌍을 찾아서 겨울 방태산을 헤매고, 무쌍의 학비를 벌려고 16살에 백화점 점원으로 들어간 계집애, 무쌍이 대구 구치소에 수감된 7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밥해놓고 기다린 독한 계집애가 진순이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니?] [오빠가 얼마나 원통하고 힘들겠어예. 죄가 없으니까 곧 돌아올 끼라요. 따뜻한 밥이라도 얼릉 묵어야지예.]맹랑한 반문이 어제인 듯 생생했다.
[……이제 손을 뻗으면 오빠 얼굴이 닿을 텐데. 행여나 오빠가 멀어질까 두려워 손을 감추었어. 한 번만 말해 주세요. 감춘 손을 내밀어도 좋다고. 아니예요. 아무 말씀 마세요. 이대로 그림자가 될래요…….]몰래 훔쳐본 일기장은 눈물에 젖어 군데군데 잉크가 번지고, 젖은 종이가 말라 쭈글쭈글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질려서 지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진순이 지금의 자신이라면? 외로움에 지쳐서 몸을 던졌을까? 턱도 없는 일이다. 외로움 따위는 사치로 여기는 계집애다. 오빠 학비를 번다고 육계장에서 닭을 해체하고 포도원에서 퇴비를 져 나를 계집애다.
무쌍이 있는 곳에 조진순이 있다. 그곳이 지옥이든 천당이든 틀림없는 사실이다. 벼랑에서 떨어진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인혜영은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려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렸고, 조진순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버렸다. 그것이 두 사람의 차이다. 자신이 설 자리는 없다. 열패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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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엇이 문제냐고? 꽉 막힌 한국년!”
로버트가 들고 있던 술잔을 집어 던졌다. 창그랑- 대형 분광기와 충돌한 술잔이 장렬히 전사했다. 섹스? 서로 즐겼으면 그만이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갑자기 요조숙녀인 양 까칠하게 구는 린이 이해되지 않았다.
섹스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 미모에 지성적인 린이 아쉽긴 복장 뒤집힐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조금 전에 받은 한 통의 전화였다. 캘리포니아 장색(프리메이슨 정회원)이 30포인트 감점을 통보했다. 감점을 회복하려면 3년이 걸린다. 수련생을 벗어날 날만 기다리던 그로서는 청천벽력이었다.
그까짓 어시스턴터 한 명 때문에 이 난리라니!
로버트는 잔뜩 심사가 비틀렸다. 물론 자신의 실수다. 스펙터가 즉각 조치하지 않았으면 린은 한국으로 날아버렸다. 조직에 필요한 재원을 발굴하고 관리하는 에이전트로서 명백한 실수지만, 징계가 지나치게 과했다.
미국은 프리메이슨 세력이 공고히 자리 잡은 나라다. 프리메이슨은 권력기관과 경제계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국가 이익이 곧 프리메이슨 이익이 되었다.
학회의 정식명칭은 ‘합중국 에너지 관리 및 개발 학회’다. DIA 산하 소크라테스 프로젝트 위원회의 손발 중 하나로 사실상 프리메이슨 하부 조직이었다. 학회는 경제적으로 곤란한 수재를 지원해서 인재 풀을 유지했다.
인재 풀에 속해있는 재원을 어시스턴터라 부른다. 학회는 필요시에 어시스턴터를 입맛대로 활용한다. 연구원, 정보원, 도너 등으로 활용되며 때로는 음습한 연구에 동원되었다가 감마 2호 규정에 따라 소리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수련생 신분인 로버트는 조직에서 혜영을 눈여겨보고 있음을 몰랐다. 프리메이슨은 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는 한국을 예의주시했다. 혜영은 한국에 파견할 조직원으로 간택된 인물이었다.
혜영이 받은 국가 장학금의 정체는 프리메이슨에서 지급한 생활비였다. 조직은 어시스턴터를 비교적 합리적으로 대우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어시스턴터는 정해진 기간만큼 근무하면 된다. 물론 규칙을 어기면 제재받지만, 그것은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규칙도 규칙 나름이다. DIA 감마 규칙은 극비 소거(消去)지침으로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부여한다. 감마가 발동하면 책임자는 프로젝트에 반하는 내부적 외부적 적대 세력을 소거할 수 있다.
감마 1호는 프로젝트에 동원된 인력의 법률적 기본권을 제한한다. 2호는 프로젝트에 종사하는 인원을 재판 없이 즉결 처분할 수 있다. 3호는 한 파트 또는 프로젝트 인원 전부를 소거한다. 4호는 외부 적대 세력을 말살한다. 로버트는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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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이 지났다. 혜영은 육체적인 허기를 배달 음식으로 달래고, 영혼의 허기를 TV로 달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피자, 햄버거, 쿵파오 치킨은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났다. 혀를 얼얼하게 만들고, 목구멍을 태우는 매운맛이 간절했다.
참다못한 그녀는 월드마트에서 김치와 쌀을 사고 고춧가루를 비롯한 양념도 대충 구입했다. 교포가 만든 제품인지 한국 수입품인지 알 수 없지만, 마트 매대에 김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지덕지했다.
그녀는 김치찌개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다. 미국에서는 아예 요리하지 않았고, 한국에 있을 때는 덕산댁과 무쌍이 요리를 도맡았다. 그녀는 무쌍이 요리할 때 어깨너머로 본 기억을 되살렸다. 마른 새우와 양파로 육수를 내고, 김치와 돼지고기를 프라이팬에 들들 볶았다. 끓는 물에 이것저것 재료를 투입하고 불을 잔뜩 올렸다.
시큼한 김치 냄새가 좁은 오피스텔을 가득 채웠다. 맛을 본 혜영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높은 퀄리티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밋밋하고 맵기만 했다. 무쌍이 만든 김치찌개는 이렇지 않았다. 혀를 확 지지고 목구멍을 뜨겁게 만들고 가슴에 불을 댕겼다.
억지로 올린 기분이 다시 우울해졌다. 찌개 냄비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혜영은 스스로 위로하며 맛없는 밥과 찌개를 서방 잃은 과부가 장례식장 국밥 퍼먹듯이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삐리리- 초인종이 울렸다. 초인종 소리마저 김치찌개만큼이나 삐리리 했다. 젓가락을 밥공기에 푹 꽂고 현관문에 난 작은 구멍에 눈을 들이밀었다. 볼록렌즈에 이지러진 허여 멀끔한 얼굴이 비쳤다. 혜영은 쇠사슬을 걸어 놓은 채로 문을 열었다.
“아직 볼일이 남았어?”
“허니,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로버트가 골레타 비치 공원 입구에서 구걸하는 걸인만큼이나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로버트, 내가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식탁에 초청한다면 너는 60억 번째야.”
“헐, 매정하군. 이럴 사이가 아니잖아.”
“이럴 사이 맞아!”
혜영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로버트가 다급히 손을 끼웠다.
“성질하고는, 학회 일로 왔다.”
“웃기지 마!”
혜영이 손잡이를 힘껏 당겼다.
“아야! 진짜라니깐. 확인하라고~”
로버트가 비명을 질렀다. 문틈에 낀 손에 플라스틱 신분증이 들려있었다. 혜영이 플라스틱 조각을 홱 채 갔다. 미국지질조사국(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 임시 연구원 신분증이었다.
“그래서?”
혜영이 눈을 치떴다. 오물 덩어리를 집안에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젠장, 레이건 집무실도 여기보단 출입이 쉽겠군.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거야? 진심으로 사과할게. 내 정신이 잠시 외출했나 봐.”
‘맙소사, 내가 저런 인간과…….’
혜영은 라드에 마요네즈가 범벅된 듯한 느끼함에 몸서리쳤다. 저놈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한때는 호감이 갔던 푸른 눈동자가 온갖 오물로 혼탁한 물웅덩이로 보였다.
“사적인 이야기 할 거면 꺼져!”
‘젠장,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군.’
냉정한 축객령에 로버트가 혀를 찼다. 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날마다 스테이크를 먹을 수는 없다. 더러 파스타도 먹고, 햄버거도 먹고 중식도 먹는다. 중식을 잠깐 시식했다고 아예 끝장을 내려는 린이 답답했다.
“사흘 후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지질 조사다.”
“지질 조사?”
혜영이 문을 열었다. 지질조사 출장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