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tron RAW novel - Chapter 10
00010 1-2.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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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뒤.
나는 엎드려 있었다.
숙인 고개 아래의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
이게 내 눈물이라면 믿겠는가?
지난 4시간 동안, 41개, 즉 41억 원어치의 상자를 까면서 나는 삶의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희노애락애오욕.
이 사행성 도박에는 그 모든 게 녹아있었다.
몇 번이나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41개의 상자를 까지 전의 나와, 41개의 상자를 까고 난 뒤의 내가 결코 같을 수 없음을.
나는 인생을 느끼고 인생을 보았다.
그리고 실패했다. 부질없었다.
처절할 정도의 대실패였다.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여기가 막장인가…….
더는 손발도 떨리지 않는다.
이것은 끝,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끝의 끝 이야기다.
“기념할 만한 날이네. 네 죽음이 확정된 날이니까. 축하해.”
경멸이 가득 담긴 깨끗한 목소리가 귀를 후벼 판다. 맞다. 이 방 안에는 나 외에 다른 이도 있었지.
41개의 상자를 까며 절규하느라 모든 걸 잊고 말았다.
추하게 희망이란 진창에서 뒹구는, 그 모든 돼지 같은 꼴을 보였겠구나.
고개를 들어보니 스이엘이 있었다.
저 눈빛은 사람이 아니라, 핵폐기물을 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망했다.
51억을 날리고 모두 꽝을 뽑았다. 그 잘난 직감이 제대로 배신했다.
옆에서 스이엘이 몇 시간 전의 내 대사를 따라하며 빈정거린다.
“이 정도는 내가 했던 미친 짓에 비하면 미친 짓도 아닙니다.”
“으아아아아악!”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자 스이엘은 날 비웃는다.
“아직 부끄러울 감정이 남았나 보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안 돼.
나는 스이엘을 붙잡고 매달렸다.
“대출을 해주십시오! 갚겠습니다!”
“곧 뒤질 네가 무슨 수로? 이 쓰레기가!”
“실패마다 희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이 오른다고 했습니다. 이대로 포기하긴 아깝습니다!”
“그래. 설명에 보면 미세하게 오른다고 하긴 했지. 그리고 51개가지고는 0.1%도 안 올랐을 걸?”
반박할 말이 없었다. 기껏 일어났던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얌전히 스이엘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아니야. 어차피 답없긴 그것도 마찬가지잖아.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뭔가 방법을 생각해라.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없는 돈을 만들 순 없었다.
곧 스이엘이 소환의 방을 나가자고 하자 무기력하게 동의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때, 내 의복 안 품에서 무언가 땅으로 떨어졌다.
잠깐.
“이건?”
아공간 주머니였다. 이게 웬 건가 생각하다가, 불현듯 죽은 윈드 워커가 떠올랐다.
윈드 워커에게서 구한 메모리칩이 인상적이라 이 아공간 주머니는 잊고 있었다.
오늘 가지고 온 건, 나온 김에 안전한 물건만 골라 장물아비에게 매각하려던 계획이었다. 물론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랐지만, 안전하게 확인해볼 장소가 있었다.
내용물도 모르고 함부로 집에서 깔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죽은 몬스터의 사체가 와르르 쏟아지면 어쩌겠나.
잘못하면 집 안이 개판된다.
죽은 몬스터 사체의 냄새는 한 번 스며들면 지독스리 빠지지 않는다.
“이게 있었지!”
윈드 워커나 되는 헌터의 아공간 주머니다.
돈이 되는 것쯤은 있으리라.
한꺼번에 쏟아내자 우르르 안의 내용물이 나타난다.
“잠깐! 이거 뭐야?”
갑작스러운 일에 스이엘은 놀란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곧 세상에, 라 중얼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은 나 역시 마찬가지.
안에서 엄청난 양의 마정석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어디서 난거야? 이거?”
스이엘의 물음에 솔직히 대답했다. 천사를 속이기는 극히 어렵다. 그리고 내게 동정심을 베푼 스이엘에게 거짓말하긴 싫었다.
“그러니까, 죽은 윈드 워커의 유품이라 그거지?”
“네.”
“헌터나 하이에나가 죽은 자의 물건을 갖는 건 나도 이해해. 하지만 유족에게 먼저 가져다 줘야지?”
“알아보긴 했어요.”
천애 고아였다, 그 윈드 워커 녀석.
그렇다면 남은 건 녀석의 패밀리에 가져다주는 건데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그 정도까지 하면 바보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런 점을 설명하자 스이엘도 어쩔 수 없단 표정이었다.
“그쪽 패밀리 공용의 물품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다 마정석이고……. 아무래도 이런 건 주운 쪽에서 입 닦는 걸 뭐라 하기도 어렵고….”
스이엘은 꽉 막힌 천사랑은 거리가 멀었다.
태도를 보니 못 본 척하기로 한 모양이다.
나는 그 사이 마정석 측정기를 이용해 총 얼마인지 확인해 봤다.
“대단하군….”
원으로 환산하면 무려 201억 원어치다.
“꺄아!”
놀란 스이엘도 감탄을 터뜨린다. 그녀는 눈물을 약간 글썽였다.
“잘됐어, 네가 한 모든 삽질을 만회할 수 있겠어.”
스이엘은 내가 얌전히 마법 물품을 구매하길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
어차피 저 돈으로 C급 마법 물품으로 전신을 도배해 봐야 내 운명을 극복할 수 없다.
무조건 답은 행운의 상자뿐이었다.
기적에 기대는 게 아니다.
최선의 선택이지.
오히려 C급 마법 물품으로 도배하고는 99%의 확률을 견디길 바라는 게, 더 기적에 기대는 거다.
나는 즉각 이 점을 스이엘에게 설명했다.
“궤변이잖아!”
스이엘은 격노했다. 그래도 나는 쇠심줄 같은 고집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도박 중독 같은 게 아니다.
오로지 이 방법뿐이니 이러는 거 아닌가.
결코 물러나지 않자 스이엘은 급기야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바보! 바보! 바보! 나도 이젠 몰라! 어디 가서 죽어버리라고!”
“죄송합니다.”
사과한 뒤에 나는 시스템 창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뭔데?”
스이엘은 내가 가리키는 걸 본다.
-50개를 뽑은 당신에게 특별한 기회를 드립니다. 가진 돈을 모두 배팅해 압축 상자를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가령 100억이면 100개의 상자가 압축된, 확률적으로 상위 마법 물품의 드랍 확률이 올라간 상자가 출현합니다.
압축 상자라니…….
사행성 끝판왕이구나.
이래서야 부자도 자살로 끝나겠다.
“미쳤어. 유제아, 넌 미쳤어.”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10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죠.”
나는 바닥에 쌓인 마정석을 모두 스이엘에게 밀었다.
스이엘은 이제 화낼 기력도 없는 듯했다.
그저 모든 게 빨리 끝나길 바라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마정석을 흡수해 동력으로 치환한다.
게임 인터페이스 같은 창 오른쪽에 201억이 새로 입력된다.
행운의 상자 201개 가격이다.
나는 단 한 번에 이 모든 걸 배팅했다.
과감하게 임했지만 몸에 안 떨리는 곳이 없었다.
구매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일단 핸드폰 어플로 한강 온도를 체크했다.
4도.
좋은 온도다.
어쩐지 시리게 아름다운 날이구나.
창이 없어 밖이 안 보이긴 하지만.
“갑니다, 스이엘.”
201개의 상자를 압축해 구매했다.
-압축 상자를 구매하셨습니다. 총 201개 분량입니다. 희귀한 마법 물품이 출현할 확률이 약간 올라갔습니다.
201개인데 약간이라니.
생각할 수록 극악한 게임이다.
-담당 천사가 전송 절차를 시작합니다.
우우우우웅.
다시 기계음과 같은 게 들리며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절차가 끝났을 때 처음 보는 시커먼 상자가 눈앞에 출현했다. 스이엘은 그걸 보고 이죽거린다.
“어라? 새까맣구나. 마치 누구 인생처럼.”
그래도 난 내가 믿는 길을 가야한다.
“좋아…….”
죽음을 앞둔 검객처럼, 비장의 각오로 상자를 열었다.
201개의 압축분을.
띠리링!
유난히 효과음이 컸다. 빛이 작렬하며 물건이 나타났다.
갑자기 팡파레가 터진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방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놀라운 확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무심한 자조차 이 업적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당신은 S등급 마법 물품을 획득했습니다.
뭐야? 정말 해낸 건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기적적인 행운으로 새로운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이제부터 럭키가이 타이틀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타이틀의 효과는 행운 +10입니다.
시야가 돌아왔다. 앞을 보니 스이엘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우리 둘은 어벙한 표정을 짓다가 발치에 놓은 커다란 검을 발견했다.
정말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랄까?
들어보려고 하자 갑자기 창이 떠오른다.
-감정하시겠습니까?
예를 누르자 로딩창이 떴다.
그리고 곧 아이템의 상세 스펙이 나타났다.
*용사 헤르의 양손검(S등급)
위대한 용사 헤르가 쓰던 양손검입니다. 검신에는 아직도 마왕의 피가 만든 얼룩이 남아있습니다. 최고의 검인만큼 정점의 전사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공격력+198
회피+41
생명력+40
힘+35
민첩성+15
매력+55
특수능력-낙뢰/사악함 제거/발키리 소환
등급제한-1등급 이상의 헌터만 사용 가능.
과연 S등급이라 그런지 스펙이 장난이 아니다.
옆에서 스이엘이 몸을 부들부들 떤다.
“세상에 S등급을 뽑다니! 게다가 이 검은!”
“아는 물건입니까?”
“한국에는 단 한 자루뿐인 물건이야. 그때 행운의 상자로 1조 2,000억짜리가 나왔다고 했잖아. 그게 이 검이야, 용사 헤르의 양손검.”
설마 그 칼이었냐.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걸! 유제아, 너는 얼마나 강운을 가진 것이야.”
스이엘은 정신을 못 차렸지만 정작 나는 차분했다.
S등급, 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전설적인 당첨자와 같은 물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사용할 수 없으면 다 무슨 소용이라.
여기에는 1등급 헌터 이상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게다가 이건 내 직감인데 S등급 마법 물품으로도 99%라는 죽음의 확률을 피해가긴 어려울 듯했다. 뭔가가 더 필요했다.
그래서 일단은 이 물건의 처리에 관해 스이엘에게 물었다.
“팔면 돼. 대천사 님들 중 이 용사 헤르의 양손검을 원하는 분이 몇이나 계셨어. 물건이 없어서 못 구한 거지.”
대천사들은 자신의 권속을 매우 아낀다.
모바일 게임에서 키우는 몬스터를 사람들이 아끼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물론 그 감정의 수준은 비교가 안 된다.
천사에게 권속인 헌터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족이다. 오랜 시간 정성껏 지도하고 좋은 장비를 지원한다.
게다가 이런 활동은 다른 천사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자금이 풍부한 대천사들은 최정예 권속을 고강한 무기로 무장시키려 했다. 억만 금을 줘서라도 말이다. 게다가 이런 검을 하나 사놓으면 필요에 따라 패밀리에서 돌려 쓰기도 좋았다.
“금방 팔 수 있나요?”
“물론. 천사는 천사만의 네트워크가 있어. 거기에 올리면 금방 대천사 님들께서 입찰하실 거야.”
“하지만 1조가 넘는 물건이잖아요? 그렇게 쉽게 팔릴까요?”
“걱정 마. 이 양손검, 확실히 판매할 작정이지?”
스이엘은 자기 일처럼 신을 내고 있었다.
얼마에 팔릴 줄은 모르겠다만 1조 언저리겠지. 그녀는 그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내가 완벽한 장비를 세팅할 거라 기대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스이엘.
그래봐야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는 S등급의 마법 물품을 보고도 이거다 란 느낌을 못 받았다.
“오옷! 대천사 님들께서 경쟁적으로 입찰하고 있어.”
나는 안 보여서 사정 파악이 안 되지만 스이엘은 흥분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 용사 헤르의 양손검은 1조 5,000억에 낙찰되는 기염을 토했다.
맙소사.
이 몸께서 행운의 상자계에 새로운 전설을 쓰고 말았다.
금액은 곧장 입금되어 내 창위에 떴다.
볼수록 믿기지 않는다.
아이템 구매 창의 오른쪽 위에는 1,500,000,000,000원이란 숫자가 보였다.
0이 너무 많아서 얼만지도 모를 정도다.
저걸로 행운의 상자를 다시 사면 대체 몇 개야? 하하하.
속으로 웃던 나의 머리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1만 5천 개의 행운의 상자를 구할 수 있는 돈.
그리고 행운의 상자 중첩에는 제한이 없었다.
“스이엘 님.”
“웅?”
“지금까지 행운의 상자를 가장 많이 중첩시켰던 게 얼마예요?”
“아, 그거? 300억이야. 300개의 상자를 겹쳤지. 진짜 미친놈이었다니까. 결국 그 만용의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고 말았어. 아무리 헌터가 돈을 잘 벌어도 그렇지. 뽑기 상자에 300억으르 쓰는 바보가 어딨어?”
바보는 없지만 미치광이는 있는 법이지.
스이엘은 내 머릿속에 떠오른 무서운 생각도 모른 채 희희낙락했다.
“천사로 근무하면서 이런 돈은 처음이야. 호호호. 이제 정말 완벽히 무장할 수 있겠다.”
꿈에 부푼 스이엘.
나는 그런 그녀에게 가혹하기까지 한 선언을 했다.
“스이엘 님.”
“응? 뭐든 말해. 호호호.”
“행운의 상자를 구매하게습니다. 1만 5천 개. 모두 중첩하겠습니다.”
“에?”
눈앞에서 순진한 천사가 새하얗게 굳어 버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 천사는 자신의 두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의 한계 이상을 경험하고는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마치 조각상처럼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눈을 깜빡이지 조차 않고 숨도 쉬지 않았다.
“일단 구매 버튼부터 누르겠습니다. 전송 절차 준비해 주세요.”
나는 창의 숫자를 계속 위로 눌러 15,000개로 맞췄다.
올라가는 숫자에 제한이 있으면 어쩔까 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없었다.
“유유유유유제아!”
스이엘이 그제서야 혼란에서 벗어나 격렬하게 몸을 떤다. 그리고는 곧장 폭발했다.
“이 쓰레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꺄아아아아아!”
참을 수 없다는 듯 지른 하이톤의 비명이 소환을 방을 찢어발길 듯했다.
순간 물리적인 풍압이 거칠게 몰아친다.
그래도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스이엘을 바라보았다.
“뭐야! 뭐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아? 1조 5천억이라고! 1조 5천 억! 그 돈을 도박에, 그것도 한 방에 쳐 넣겠다고?”
“그게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실패한 모든 도박꾼은 자신이 던진 주사위가 최선임을 의심하지 않았어! 네게 강하게 경고하겠어. 이 미친 짓을 멈춰!”
이번에 스이엘을 설득하긴 불가능하단 걸 나는 잘 알았다.
놀라운 이해심을 보여준 관대한 천사지만 이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스템에 의지해 행동하면 그만이다.
그녀는 내가 원하면 소환 절차에 응할 수밖에 없다.
“미안합니다.”
그 말 한 마디만 하고는 구매창의 확인 버튼을 눌러버렸다.
-1만 5천 개의 행운의 상자를 구매하셨습니다. 모든 상자가 중첩됩니다. 담당 천사가 전송 절차를 시작합니다.
“안 돼!”
스이엘은 1조 5천억의 공중분해에 절규했지만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진 못했다.
시스템이 전송 절차의 시작을 얘기한 이상, 결국 시스템의 부속물인 천사는 따라야한다.
“미친놈! 미친놈! 세상에서 제일 미친놈! 으아아앙! 미카엘라 님!”
스이엘은 엉엉 울면서 소환 절차를 진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앞에 검은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새까맣구나. 마치 우리 인생처럼.”
자포자기한 스이엘은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혼은 우주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 듯하다.
그래도 난 내가 믿는 길을 가야한다.
1만 5천 개의 상자를 중첩했어도 꽝일 확률이 훨씬 높다.
만약 그렇다면 담담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말 다른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운명을 바꿀 수 없을 테니까.
“좋아…….”
나는 죽음을 앞둔 검객처럼, 비장의 각오로 상자를 열었다.
띠리…….
그런데 뭔가 효과음이 이상했다.
원래라면 띠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나타난다. 한데 소리가 늘어지더니 곧 링! 링! 링! 링! 하는 뒷소리가 끝없이 나온다.
마치 컴퓨터가 다운된 것 비슷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상자의 안을 살펴보니 내용물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
꽝이라면 썩은 생선이라도 떨어져야 정상 아닌가.
뭉크의 절규를 온몸으로 표현하던 스이엘도 뭐지? 하는 얼굴이 됐다.
“스이엘 님.”
“부르지 마. 나도 뭔지 모르겠으니까.”
우리 둘은 열린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럴 수도 있나요?”
“아니, 절대로 없어. 빈 상자는 시스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나 못해 닭 뼈라도 나와야 해.”
설마 다운 같은 건가?
버그?
그때 갑자기 시스템 음성이 들린다.
-시스템이 다운되었습니다. 복구 절차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이템이 나타나지 않은 현상을 감지했습니다. 최근 시스템에 도착했으나 분류되지 않은 물품을 무작위로 발송합니다.
스이엘은 깜짝 놀라했다.
“세상에, 정말 다운이라니. 대천사 님들께서 만든 시스템이 다운되다니.”
역시 세상에 완벽한 건 없나보다.
아무리 대천사라도 1만 5천 개가 중첩될 줄은 예상치 못했나 보다. 그렇기에 결국 진행이 멈춰버렸고 아이템은 증발하고 말았다.
시스템은 이걸 감지하고 규격 외의 새로운 아이템을 보내주겠다는 거다. 기존의 드랍 테이블에선 또 다시 다운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우우우웅.
마법진에 빛이 들어온다. 뭔가 확실히 오고 있었다.
“스이엘 님.”
“알았어! 이렇게 된 이상 궁금해서라도 착실히 일해주지.”
스이엘은 마법진을 통제해 나갔다.
-담당 천사가 전송 절차를 시작합니다.
파앗!
빛이 작렬하며 새로운 물건이 도착했다.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달라질 정도다.
일순간 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마법진에 쇼트가 났다.
파직!
마법진 일부에서 불꽃이 튀더니 더는 가동되지 않았다.
그래도 시스템 메시지는 들려온다.
-전무후무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당신은 SS등급 마법 물품을 획득합니다.
뭐? 그게 무슨?
-전무후무한 기적으로 새로운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이제부터 ‘기연왕’ 타이틀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타이틀의 효과는 행운 +30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작렬하던 빛이 사라지자 시야가 돌아왔다. 앞을 보니 스이엘도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우리 둘은 어벙한 표정을 짓다가 발치에 놓은 커다란 원형 방패를 발견했다.
뭐지 이게?
단순한 방패일 터인데 보고 있자니 초월적인 느낌까지 든다. 어쩐지 방패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져 있는 것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랄까?
-감정하시겠습니까?
예를 누르자 로딩창이 뜬다.
그리고 감정이 끝나자 아이템의 상세 스펙이 나타났다.
*태양 신격 오즈의 방패(SS등급)
갈라스의 위대한 신격 오즈가 사용하던 방패입니다. 그의 연인이자 바다의 신격인 바쉬냐리페에 의해 선물됐습니다. 어째서 이 방패가 태양 신격 오즈의 곁을 떠나게 된 건지는 불분명합니다.
공격력+99
방어력+341
생명력+120
힘+75
민첩성+75
지능+75
지혜+75
건강+75
매력+75
특수능력-반사/되돌리기/태양광 폭사/진실의 시야/마법 무효화/소환 무효화
특질-화염 저항+30%/냉기 저항+30%/산성 저항+30%/탁월한 내구도/석화 마법에 면역/수면 마법에 면역/발견되지 않은 옵션
“뭐지, 이 말도 안 되는 방패는….”
마법 물품의 문외한인 나도 이 방패가 규격 외의 물건임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SS등급이라고?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앞을 보니 스이엘은 기절하기 직전으로 혼자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몰라 무서워. 중얼중얼.”
쉽게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스이엘을 수습하는 걸 포기하고 앞의 방패를 살폈다. 보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SS등급이라서가 아니다.
이 방패가 그 어떤 아이템과도 다르게, 운명조차 바꿀 힘을 가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것이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