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tron RAW novel - Chapter 9
00009 1-2.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
“생의 마지막 쇼핑이 될지 모르니 분발해줘. 쇼핑은 소중한 거니까, 암암!”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스이엘은 보며 마음 속 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니 제대로 골라야 한다.
일단 보자.
이해하기 쉬운 구조다.
온라인 게임을 따라한 인터페이스라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겠다.
장비는 우선 직업별로 나뉘어 있었다.
전사, 마법사, 도둑, 성직자 등등.
그 항목 안에 들어가면 각 직업에 어울리는 장비가 펼쳐진다.
공통장비 항목이나 물약, 강화룬 등도 따로 있었다.
그나저나 맙소사 강화라니.
천사 녀석들 게임을 너무 열심히 베껴 왔네. 15강 가려다 막 무기 터지고 그러는 건가?
처음에 나는 전사 항목을 살폈는데 안에는 온통 묵직한 게 가득했다.
도망가고 피해가는 나랑은 안 어울리지.
아무래도 갑옷 계열은 소리가 나잖아. 상위 항목에 보니까 무소음 처리된 갑옷도 있었지만 너무 비쌌다.
*지룡의 갑옷(A등급).
사나운 지룡의 부산물로 만든 갑주입니다. 정교한 솜씨로 연결되어 어떤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습니다.
방어력+128
힘+40
민첩성-12
건강+32
특수능력-하루에 1번 지진/하루에 3번 완전한 치유/하루에 5번 어쓰 엘리멘탈 소환.
특질-무소음 처리/경량화/비싼 수리비.
등급 제한-2등급 헌터 이상 착용 가능.
대단해….
엄청난 갑옷이다.
갑옷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조차 감탄할 물건이었다.
외형조차 너무나 근사했다.
문제는 가격이 3,800억.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금액이었다.
“입 떨어지겠다.”
스이엘의 야유에도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상위 헌터들이 입고 다니던 게 이렇게 비싼 거였습니까?”
“응? 아, 지룡의 갑옷? 땅에 사는 용의 비늘을 가공한 거라 비싸긴 하지. 한국에는 5벌인가 있다고 들었어.”
“사는 사람이 있긴 있었군요.”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데 어떻게 이리 다른 걸까.
울적한 마음에 전사 항목을 그만 보기로 했다.
도둑 항목으로 넘어가자. 그쪽이 내게 맞겠지.
도둑이란 대분류 아래 무수히 많은 직업이 존재한다.
그날 몬스터의 위에서 발견한 윈드 워커 역시 도둑이란 항목에 속했다.
암살자, 정찰병, 소매치기 등등 여러 직업이 도둑이란 대분류 아래 가지처럼 뻗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명확한 분류에도 불구하고 아이템은 끝도 없이 많았다. 상위 직업 전용 아이템에 일부 히든 직업용까지.
“여러 가지 옵션을 조절해봐.”
스이엘의 조언에 100억 이하로 옵션을 체크 했다. 그러자 훨씬 보기 좋은 상태가 됐다.
내가 고를 아이템은 명확해졌다.
방어력이 좋고 마법적인 옵션이 안 붙은 것 위주로 찾아야 한다.
설령 옵션이 있다면 헌터가 아닌 이상 사용이 불가하니, 아이템 자체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어야 된다.
“보자…. 이거 괜찮네.”
투명화 망토라. 좋은 것 같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2035년인 지금은 투명화 망토가 상용화됐다. 하지만 천사들이 제공하는 이 마법적 투명 망토와는 퀄리티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마법이 훨씬 낫다.
“가격이?”
28억이네.
생각보다 살만하구나.
그래서 구매해 볼까 싶었는데 7등급 헌터 이상이란 옵션이 날 막는다.
“하…… 헌터 아니면 완전 거지 같네.”
결국 나는 등급 제한 없음이란 옵션을 또 눌렀다.
아이템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 속에서 괜찮은 물건을 발견했다.
*암살자 함의 야행복(C등급).
함은 솜씨가 부족한 암살자였음에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은퇴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함이 입었던 야행복이 특별한 물건일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방어력+31
민첩성+9
독에 대한 저항력+10%/마비에 대한 저항력+10%
하루에 3번 그림자로 변신.
특질-매우 가벼움/저렴한 수리비/강화된 내구도.
내게 잘 어울리는 상당히 좋은 물건이었다.
일단 등급 제한이 없고, 가장 좋은 건 하루 3번 그림자 변신이란 능력을 내장된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헌터가 아니라도 가능하다는 소리다.
“가격이…. 헙!”
그런데 78억이라니.
좋다 싶으니 가차없구나.
“용케 가성비 최강의 물건을 찾아냈구나? 역시 안목 하나는 좋네. 네가 못 찾으면 추천하려고 그랬던 제품 중 하나거든.”
“그래요?”
스이엘은 고개를 끄덕인다.
“함은 별 볼 일 없는 암살자였지만 저 옷 한 벌로 버텼어. 다른 유능한 동료가 모두 죽는 와중에도. 물론 함의 비겁함도 한몫했겠지만.”
“비겁함이야말로 훌륭한 덕목이에요. 아프리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겁쟁이는 엄마가 있는 고향에 간다고요. 위험을 피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죠.”
내 반론에 스이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걸작이라는 듯 손뼉까지 친다.
“흐히힛. 정말 하이에나다운 의견이구나. 너는 진짜 최고의 하이에나야.”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함의 의복을 샀다.
더 고민할 것 없었다. 이건 내게 맞춤이나 마찬가지다.
-결제하시겠습니까?
시스템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소리 예쁘네요?”
“응. 그렇지? 가브리엘 님 목소리거든.”
“여자 목소리잖아요?”
“어? 몰랐어? 가브리엘 님 여잔데?”
뭐어?
최고의 인기인, 미소년 가브리엘이 여자였다고? 방금 엄청난 비밀을 듣고 말았다. 게다가 더 웃긴 건, 시스템 음성 말이야… 천사들이 직접 녹음한 거구나.
얘들 진짜 게임 개발하는 기분으로 달려들었던 거 같다.
나는 일단 예를 눌렀다.
-결제되었습니다. 담당 천사가 전송 절차를 시작합니다.
“맡겨두라고.”
스이엘은 콧김을 내뿜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사방에 빛을 뿌리며 소환 마법을 시작했다.
방 안의 마법진이 빛으로 온통 물든다.
위이이이이잉!
소음과 함께 시스템 음성이 다시 들린다.
-남은 소환 시간 한 시간.
창도 같이 나타났는데 즉시 소환을 위해서는 얼마의 마력이 ‘추가로’ 소모되는지 적혀 있었다.
야, 아주 기가 막히구먼, 우리 천사님들.
게임 업체에서 캐쉬템 팔아먹는 부분까지 충실히 구현해 놨네.
기립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는 당연히 그 유혹을 이겨내고 한 시간을 기다렸다.
우우우웅.
시간이 되자 기계가 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방의 빛이 사그라진다. 그리고 마법진의 빛까지 모두 없어진 그때 눈앞에 검은 가죽으로 보강된 흑의가 나타났다.
“이건가….”
입어보니 상당히 편했다. 외형은 무척 멋있기까지 하다.
이 구매로 51억밖에 안 남았지만 탁월한 선택이었지 싶다.
스이엘도 세미 롱헤어를 찰랑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음, 음. 좋아. 이제 나머지도 골라보렴. 가속 옵션이 붙은 신발 같은 건 도망가는 데 유리하겠지. 방어막 기능이 있는 반지도 있고. 물론 남은 돈으로 몇 개 더 못 살테니 신중한 구매가 요구돼.”
목숨이 달린 문제다.
스이엘이 본 운명에 따르면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
남은 돈으로 최고의 효율을 짜내서 생존 확률을 단 1%라도 올려야 한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는데 어떤 상자 아이템이 보였다.
*행운의 상자.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보세요. F등급 아이템에서 SS등급 아이템까지 무작위로 나타납니다. 실패가 쌓일수록 고등급 아이템이 나타날 확률이 ‘미세하게’ 오릅니다. 다만 창을 한 번 닿으면 쌓인 확률은 초기화 됩니다.
가격은 1억원이었다.
맙소사. 이 사행성이라니.
뽑기 한 번에 1억이다, 1억.
“너 설마… 그거 사려는 건 아니지?”
“이거요?”
“그래, 우리 천사가 만든 최악의 아이템, 일명 패가망신 선물 세트야. 유능한 헌터가 여럿 그 상자에 작살났지. 한번 시작하면 전재산이 갈리는 건 시간문제야.”
“그래도 성공한 사람은 있을 거 아니에요?”
“물론 있지. 실제로 S등급을 뽑은 사람이 한 명 있었어.”
대단한 마법검을 뽑았다고 한다. 경매장에 내놨는데 판매가는 1조 2,800억이었다고.
1억 원으로 1조 이상을 번 그는 헌터계의 영원한 전설로 남았다.
“고약한 녀석이지.”
“왜 고약해요?”
“수많은 헌터가 그 성공 사례에 낚여서 패가망신하니까. 너도 알겠지만 될 놈만 되고,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되잖냐.”
스이엘은 한심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내 시선은 어째서인지 행운의 상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 몇 개 정도라면 운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51억이나 있잖아?
게다가 이렇게 평범하게 무장해 봐야 어차피 높은 확률로 죽는다. 뭔가 극적으로 바뀌려면 모험을 할 수밖에 없어.
지난 10년간 내 인생은 늘 도박이고 모험이었다.
“이걸 뽑겠습니다.”
“에엣? 돌았어?”
스이엘은 대번에 반대하고 나섰다.
“마음은 알겠는데 그러지 마. 여기서 실패하면 되돌릴 수 없어. 게임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이건 진짜 게임이 아냐!”
“하지만 이대로는 절망적인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죽을 확률 99%라고 하셨죠? 1~2%정도 나아진다고 티나 나겠습니까? 어차피 남은 돈으로 C등급 한두 개 사면 끝입니다. 잔돈으로는 포션 좀 마련하고 말겠죠. 그렇게 하면 제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당신은 제게 이 돈을 맡겼습니다. 그러니 제가 좋은 것으로 선택하게 해주세요.”
딱히 내가 도박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얌전한 죽음은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면 이 수 밖에 없어 보였다.
“…알았어. 네 뜻대로 해.”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일단 행운의 상자 10개를 구매했다.
자그마치 10억 원이 소모된다.
소환된 10개의 상자를 열려고 하는데 손이 다 떨려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과감히 열었다.
그러자 효과음과 함께 내용물이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엘릭서를 얻었습니다.
“아…….”
긴장했던 탓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엘릭서는 최고급 회복 포션이다. 가격은 1억 2,000만 원.
2,000만 원 이득이었다.
잘 뽑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상자는 바로 말썽을 일으켰다.
-아쉽네요. 낡은 구두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 보이네요. 지나가는 거지에게 적선하세요.
“으윽!”
1억 원을 주고 낡은 구두를 뽑다니.
엘릭서 때 눈을 반짝이던 스이엘이 나를 째려보기 시작한다.
그러지마라 내 맘도 찢어지니까.
다시 상자를 열었다.
-꽝! 식은 음식이 나왔습니다. 데워 먹기에는 이미 풍미가 사라진 뒤입니다. 변변찮군!
“뭐야! 이게!”
급기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스이엘이 혀를 찬다.
“말했잖아. 패가망신 세트라고.”
나는 두려움에 빠져 남은 7개의 상자를 보다가 쉬지 않고 개봉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수상한 액체가 묻어있는 딜도.
-쥐고기 크리스피 버거(시궁창 스파이스 향).
-상한 거북이.
-음식물 쓰레기 봉투.
-행운의 편지(이 글은 읽는 당신은 저주에 걸렸습니다….)
-개노답 삼형제 피규어.
-위조 지폐 한 다발.
띠잉-.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아아…….”
10억을 날렸다. 갑자기 숨이 다 막혀왔다.
순식간에 그 거금이 증발했는데 결과가 저거라니.
나온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나 자신을 폐기하고 싶은 기분이다.
“이건 꿈이야…….”
스이엘이 그런 날 딱하게 보더니 “그 정도에서 멈춰. 10억이면 양호한 수준이니까. 우리 다른 거 골라보자. 나도 같이 골라 줄게.” 라고 달래온다. 저렇게 착한 모습에 나는 속이 더 찢어졌다.
하지만 절대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
여기서 포기하면 조만간 찾아올 죽음에 굴복할 것 같았다.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원래 미쳤기 때문이다.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준엄하게 요구했다.
“행운의 상자 41개.”
스이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고만, 고만해! 미친 새끼야!”
하지만 나는 기어코 결제창에서 예를 눌렀다.
“이 정도는 제가 지금까지 했던 미친 짓에 비하면 미친 짓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