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le physical therapist RAW novel - Chapter (14)
기적의 물리치료사-14화(14/205)
# 14
아버지의 이름으로 (5)
“부팀장, 병원 생활은 할 만해?”
“네. 열심히 적응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로 주호식, 1팀장 박준만 등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박영규가 어느 순간 기적을 도마에 올렸다.
“그래? 주 실장이랑 팀장들이 보기에는 어때?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예. 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치료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박부진 환자 아시죠? 부팀장이 손대고 나니까 없던 로딩 리스펀스(충격 흡수하는 게이트의 과정)가 바로 생기더라니까요?”
첫 번째 대답이 주호식, 두 번째 대답이 강동호의 것이었다. 박영규는 이 중 강동호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뭐, 정말이야? 로딩 리스펀스가 생겼어?”
“그렇다니까요? 제가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뭐야? 저 인간, 왜 저래?’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둬도 좋아지는 환자라며 비아냥거리던 강동호였다. 그랬던 그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나오는 것일까,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는데 대화가 이어졌다.
“로딩 리스펀스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고…….”
머리를 긁적이던 박영규가 적당히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는 쩝쩝거리며 말했다.
“다가오는 3월, 쩝쩝. 케이스 컨퍼런스를 부팀장이 담당하는 거야, 쩝쩝, 어때?”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컸다. 막 술잔을 넘기려던 주호식이 놀라 헛기침을 할 정도였다.
“어헉! 케이스 컨퍼런스를요? 아무리 그래도 어제 입사한 부팀장이 하기에는 좀…… 그리고 3월 컨퍼런스는 원래 강동호 부팀장이 하기로 정해진 거 아닙니까?”
쩝쩝거리던 고기를 꿀꺽 삼킨 박영규가 정색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주 실장! 사람이 왜 이렇게 유도리가 없어? 원래는 강 부팀장이 하기로 했었지.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지금 이 부팀장이 박부진 환자한테서 엄청난 임프루브를 끌어냈다잖아. 그걸 원장님하고 나, 그리고 각 과 과장들한테 보여 주면 얼마나 좋아? 우리 재활치료실도 그렇고, 부팀장 개인에게도 엄청난 플러스잖아! 나는 부팀장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야. 부팀장,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어쩐지 날 칭찬하더라니…… 일이 이렇게 되나?’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피할 수 없는 화살이 기적에게로 날아들고 있었다.
슬쩍 강동호를 돌아보니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지만 저 얼굴에는 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적은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박영규를 보니 어쩐지 NO라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3월 컨퍼런스…… 제가 해 보겠습니다.”
그제야 박영규가 굳었던 표정을 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이야! 부팀장 야망가네, 야망가! 어? 완전 남자다잉?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하자고.”
기적이 마지못해 술잔을 들어 올리자 강동호가 기다렸다는 듯 술잔을 들어 올렸다.
“3부팀장을 위하여!”
일련의 상황이 마치 짜 놓은 각본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부팀장, 괜찮겠어?”
주호식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앞에 나와서 문제를 풀어 보라는 수학 선생님의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케이스 컨퍼런스였으니까.
자료 수집부터 시작해 이론적 배경 확립을 위한 논문 번역, 그리고 치료 계획까지…… 준비를 위해 개인 여가 시간을 꼬박 날려도 모자랄 판국인 데다, 병원 고위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압박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부긴 하지만 케이스 컨퍼런스가 부담스러워 병원을 그만두는 치료사까지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물론 박영규의 말대로 케이스 컨퍼런스를 잘한다면 돋보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깐깐하고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의사들에게 일개 물리치료사의 케이스 컨퍼런스가 성에 찰 리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득 될 것은 하나 없는 것이 바로 이 케이스 컨퍼런스였다.
기적은 한숨 비슷한 것을 내뱉으며 말했다.
“할 수 없죠, 뭐.”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주호식은 ‘과장님도 참…….’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기적이 그를 따라 한 잔 들이켜는데, 문득 옆쪽에서 박영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보니 박영규가 송한나 2팀장을 앞에 앉혀 두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송 팀장.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며? 쩝쩝, 이제 나이도 있는데 성질 죽이고 결혼할 생각해야지, 무턱대고 헤어지면 어떻게 해? 그러다가 막차 놓치고 후회한다?”
“내가 동생 같아서 그래. 쩝쩝, 거울 한 번 보고, 저쪽에…… 정수정 치료사 봐, 봐. 얼굴은 베이비한데 몸매는 어? 어? 남자라면 누구랑 만나고 싶겠어?”
명백한 성희롱이었지만 박영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들어 여자의 몸매를 그리고 있었다. 다들 불편해하는데 본인만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기적은 그런 박영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완벽한 개저씨의 표본이네. 노답이야, 노답.’
총체적 난국.
박영규에 대한 기적의 솔직한 평가였다.
***
“부팀장, 3월 케이스 컨퍼런스 떠안았다며? 어쩌자고 그랬어?”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장원호가 그렇게 물어왔다. 원래부터 검은 얼굴이 붉게 물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그마한 과일 하나가 떠올라서 기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옆에서 고기를 먹고 있던 최진아가 어? 하고 끼어들었다.
“방금 그 생각했죠?”
“네? 뭐, 뭐가요?”
“와! 모른 척하시겠다고요? 제가 부팀장님 웃는 거 분명히 봤는데요? 아까도 말했지만 부팀장님은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보이는 스타일이거든요? 무슨 생각했는지 맞춰 볼까요?”
“마, 맞추긴 뭘 맞춘다고 그래요?”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지만 최진아는 굴하지 않고 기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추?”
“헐……!”
기적이 소름 돋는다는 듯 팔뚝을 문지르자 최진아는 그것 보라는 듯 꺄르르 웃었고, 듣고 있던 장원호는 인상을 구겼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죽을라고. 다 대가리 박앗!”
“어? 팀장님 화내니까 진짜 대추 같은데요?”
적절하게 오른 술기운 때문일까, 셋은 평소라면 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을 주고받았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상한 사람들 덕분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적어도 두 사람만큼은 정상인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네.’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시간은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6시가 안 된 시점, 버스에서 내렸으니 어느덧 2시간이 넘게 흐른 셈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배를 거나하게 채운 사람들이 후식을 먹거나 남은 술을 비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유독 신경 쓰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수정 샘, 멍하니 서서 뭐 해요? 여기 아이스크림 3개 모자라잖아.”
재활 1팀 2년 차 치료사 엄주만의 목소리였다. 공식적인 직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치료실 내에서 군기 반장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가져갈게요.”
화들짝 놀란 수정이 반쯤 벗었던 신발을 도로 신고 종종걸음으로 아이스크림이 있는 냉장고로 갔다. 종업원이 있었지만 셀프라는 이유로 인턴인 그녀가 아이스크림 서빙을 도맡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이 아닌 아이스크림 기계 앞으로 이동했다.
“뭐 해요?”
고개를 잔뜩 숙인 채 아이스크림을 받고 있던 수정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유난히 짙은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앗! 부팀장님…… 아이스크림 드시러 온 거예요? 저한테 말씀하시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기적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손이 아이스크림 기계에 붙은 안내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 셀프라고 쓰여 있네요.”
그렇게 말하는 기적의 말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막내고 인턴이라고 해도 수정은 어엿한 물리치료사다. 지금이 90년대도 아니고, 치료사에게 이런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적은 수정이 받아 올려 둔 아이스크림 종이컵을 양손에 들고 양 손가락을 모아 수정이 막 받아 낸 아이스크림까지 집어 들었다.
“3개가 모자라다고 했죠? 이건 내가 배달할게요.”
“아…….”
수정이 말릴 틈도 없이 몸을 돌리는 순간, 마침 엄주만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추가 주문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귀찮다는 표정으로 나타난 그는 이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기적을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 부팀장님…… 이런 건 인턴들한테 시키시면 되는데……. 직접 가지러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적 앞에서는 그도 저자세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수정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던 역학 관계가 기적을 상대로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니까. 갑과 을이, 을과 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뇨, 이건 선생님들 겁니다. 수정 샘 손이 모자라서 제가 조금 도와주고 있었어요. 혹시 추가 주문이라도 들어왔습니까? 어쩌죠, 보다시피 더 이상은 무린데.”
“아이고, 아닙니다. 이리 주세요. 아이스크림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기적은 거절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수정을 가리켰다.
“수정 샘은 나랑 같이 가도 되죠? 같은 팀인데 이야기를 전혀 못 해 봐서요.”
“네, 그러, 그러세요. 수정 샘, 얼른 가 봐요.”
엄주만은 자리까지 비켜 주는 친절함을 보이며 다급히 말했다.
아이스크림을 모두 건네준 기적이 쭈뼛거리는 수정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들어가죠.”
“네, 네, 부팀장님.”
수정은 불안함에 계속 눈치를 보면서도 결국 기적의 뒤를 따랐다. 신발을 벗고 올라서는 둘을 보며 엄주만이 짜증난다는 듯 작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때였다.
“엄주만 치료사.”
“엇? 실장님!”
엄주만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박영규와 함께 먼저 귀가한 줄로만 알았던 주호식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다, 다시 오신 겁니까? 늦지 않게 잘 오셨습니다. 마침 자리 옮기려던 참이었는데요.”
“내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네?”
영문을 몰라 되묻는 엄주만을 향해 주호식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턴 선생님들에게 업무 외에 사적인 심부름 시키지 말라고. 기억력이 안 좋은 건가? 아니면 내 말 정도는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에 엄주만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주호식은 그런 그를 배려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 대답이 없지? 정말 내 말 정도는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들어가 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엄주만이 몸을 돌렸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호식이 화장실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머릿속으로 아이스크림을 나눠 들던 기적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