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ulous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제4의 종족
“왜지?”
스테빈 회장의 물음에 플록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독대하는 거 오랜만이네요.”
“대답 먼저.”
대화의 맥락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말투는 여전했다.
뭔가 심기가 불편한 얼굴.
플록스는 그런 회장의 표정이 조금 재밌었다.
“그 곡, 제 거 아니에요.”
“뭐?”
“그냥 틀 수 있는 곡도 아니고.”
“그날 쓴 샘플링이 있지 않나?”
스테빈의 미간이 좁아졌다.
전야제 오프닝의 무대에서 틀었던 곡을, 어째서 본인의 무대에서는 선보이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 곡이 얼마나 화제가 되었는지는 분명 알고 있을 텐데도.
“이봐, 플록스. 최근 자네의 부진을 모두 씻어 낼 정도의 곡이었어. 전야제에서 틀었지 않은가. 당연히 본무대에서 선보일 줄 알았는데?”
“오늘 무대가 맘에 안 들었나 보네요?”
“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
“그 곡 때문에요?”
“부정하지 않겠네.”
플록스가 선글라스를 올려 쓰며 턱을 들었다.
“뒷방에 밀어 넣더니…….”
스테빈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런 대접 오랜만이네요.”
플록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찻잔을 들었다.
“다시 묻겠네. 오늘 무대에서 왜 그 곡이 빠졌지?”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틀 수 있는 곡이 아니라고.”
“흠…….”
스테빈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샘플링이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를…….”
“라이브였거든요.”
“뭐? 무대에는 자네 혼자…….”
“무대 아래에 있었어요.”
구겨졌던 스테빈의 얼굴이 멍하게 변하더니 차츰 환하게 펴지기 시작했다.
그 완벽에 가까운 허밍이 라이브였다니.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대어였다.
“어디서 그런 굉장한 보컬을…….”
“뭐, 운이 좋았죠.”
스테빈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설마… 작곡도?”
“음… 공동 작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그냥 그의 곡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전 그저 거든 거고요.”
“아…….”
스테빈의 당황한 표정을 바라보며 플록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왜요? 소개라도?”
약간의 빈정거림에, 스테빈이 흥분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가 날 찾아오겠지, 내가 관심을 보였으니.”
전 세계 음원 시장의 50%를 주도하는 카폰 레코드였다.
음반 회사로서는 세계 최고였고, 회사 자체적인 프로모션의 파워는 엄청났다.
앨범을 내고, 회사에서 밀어주기만 한다면 미 전역에 이름을 알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즉,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누구라도 들어오고 싶어 하는 회사였다.
어차피 스테빈 자신이 안달 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대어라서 흥분했던 것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뭐, 그도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는 했어요.”
“당연하겠지.”
스테빈의 말에 플록스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다… 라…….”
“그래, 어디서 활동하던 녀석이지? 그 정도 라이브 실력이라면 완전한 신인은 아닐 테고… 미국? 영국?”
“음… 직접 만나 보시면 알게 되겠죠.”
계속되는 빈정거림이 상당히 거슬렸다.
사실, 이번 전야제 무대만 아니었다면 다음 계약도 불투명했던 플록스였다.
그런 녀석이 이 한 번의 성공으로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스테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참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어차피 그 보컬을 직접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터.
이 불쾌한 대화를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자네… 태도가 많이 바뀌었군.”
“뭐, 회사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플록스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제 전성기는 끝났다고 판단하셨겠죠.”
“흠…….”
“근데, 어쩌죠?”
“…….”
“전 이제부터거든요.”
방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이번 축제가 끝나고 하게 될 계약 연장은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아… 준비하지 않으실 생각이셨나?”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가고 싶은 회사가 생겨서요.”
대답을 들으려 한 말은 아닌 듯, 그대로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을 눈빛이 너무 궁금했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통쾌하게 열어젖혔다.
“갑니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봤어? 처음부터 불타오른 거?”
진혁이 방긋 웃었다.
물론,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처음 두 곡은 진짜 예술이었지? 내 인생 최고의 무대였어! 아… 세 곡쯤 부를 때 아차 싶기는 했는데… 뭐, 다음엔 네 곡까지 제대로 할 수 있겠지.”
사실 직접 들었던 건 마지막 곡뿐이었는데…….
진혁은 그저 방긋 웃기만 했다.
쓰러졌다길래 걱정되어 찾아왔는데, 쉰 목소리로 삼십 분이 넘게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쌩쌩한 칼리였다.
진혁이 칼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멋있었어.”
벌써 다섯 번째 칭찬이었다.
그리고 칼리가 흡족한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다섯 번째였다.
“봤지? ‘래빗’이 인정한 거!”
유레이시가 짜증 나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것 역시 다섯 번째였다.
“콱, 그대로 실려 갈 것이지…….”
그녀의 독설에 칼리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이제 말 좀 이쁘게 하지? 요 앙큼한 사랑꾼.”
“닥쳐.”
“그 붉은 머리 피앙새는 어쩌고 혼자… 아야! 이 기지배가!”
“너 왕실 초청 한번 받아 볼래?”
“아, 죄송합니다, 공주님.”
“이 도마뱀이! 그 눈은 대체 뭐냐고!”
“아, 제가 눈이 원래 좀…….”
“확! 그냥!”
싸움이 시작되며 둘은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흐뭇하게 바라보던 진혁은 이 자리에 없는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제니스와 진혁을 이어 준 ‘시계태엽’은 온전히 열아홉 진혁의 감정이 담긴 곡이었다.
그때 영등포역에서 마흔셋의 진혁은 그들의 삶에 끼어드는 것을 주저했었으니까.
‘경험이라…….’
제니스가 불렀던 그 곡에 담긴 감정들은, 실제로 부랑자로 지냈던 그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실제로 겪은 경험이 무조건 옳은 것인가?
진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쩌면 경험이 쌓일수록 세상은 자꾸만 좁아지는 것이 아닐까.
어른의 경험과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열아홉 진혁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어제와도 같은 25년 전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뭐든 될 수 있어서 수많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소년과 성인의 그 중간 즈음.
이룬 것이 없었기에 두렵지 않았고, 세상을 깊이 알지 못했기에 무한한 상상이 가능했다.
책임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충분한 돈, 명성, 안정된 삶, 큰 집, 멋진 차…….
자신의 기억이 돌아와서 지금껏 이룬 것들이었다.
철저하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감정들만을 노래하며 얻어 낸 성과였다.
행복해하고 감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진혁 자신도 그 모든 것이 정답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마흔넷을 지우고 열아홉 진혁만이 남자, 보편적인 감정만을 좇으며 놓쳤던 것들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내가, 이런 음악을 원했던가?’
마흔넷 어른의 감정들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경험으로 쌓아 올려진 감정들은.
열아홉 진혁이 가졌던 그 상상 속 풍부한 감정들을 부정하게 했다.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슬펐고.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아팠으며.
알 수 없었기에 더욱 기뻤다.
알지 못했기에 얕았던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했기에 더욱 풍부하게 상상했었다.
문득, 지금은 외면하고 있던 마흔넷 진혁의 기억을 들여다봤다.
25년이라는 삶 속에서.
눈물 날 정도로 웃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가슴이 저밀 정도의 슬픔은 언제였는지.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 터져 버린 적은 있었는지.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감정을 꾹꾹 숨기는 방법을 갈고닦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말하면.
자아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주변이 되어 간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그리고 그의 경험들로 만들어 낸 음악도 상당히 멋졌다.
나이 먹으며 완숙해진 그 감정은 안정적이었고,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열아홉 진혁의 자아를 찾고 나니, 그 온화함이 맘에 들지 않았을 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 *
“야. 쟤 왜 저러냐?”
황지선이 벽을 노려보고 있는 까까머리를 바라봤다.
“아… 그게, 오늘 축제 돌아보더니…….”
창명의 대답에 황지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그나마 있던 기세도 확 꺾인 듯한데요.”
“뭐, 그럴 만도 하지.”
세계 최대의 축제.
수십만의 함성이 이곳저곳에서 마구 터져 나온 하루였다.
사실 황지선도 가슴이 콩닥대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자신을 알아봐 줬던 한국이 아니었고.
언제나 올랐던 메인 스테이지도 아니었다.
완전한 무명으로 오르는 무대.
백전노장인 황지선이었지만,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은 오직 음악만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황지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괜찮아. 자극이 좀 필요해, 저 꼬맹이는.”
“그래도… 이제 하루 남았는데…….”
“너도 뭔가 꺾였다?”
“아…….”
“싸우기도 전에?”
창명이 멍한 눈으로 지선을 바라봤다.
“한국인의 DNA에는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게 있어.”
“네?”
황지선이 주먹을 쥐었다.
“투쟁심.”
“아…….”
“뭐가 됐건 이기고 봐야지.”
“이게 무슨 스포츠도 아니고… 게다가 공평한 싸움도 아니잖아요.”
“맞아. 그러니까 더 이겨야지.”
“무슨…….”
“내 목소리가 세계에서 먹히지 않을 거 같아?”
“어…….”
“망설였다, 너.”
“아뇨. 누나 목소리 먹히죠!”
“테일이의 블루스는?”
“환상적이죠.”
손을 들어 까까머리를 가리킨 황지선이 방긋 웃었다.
“저 꼬맹이 목청은?”
“목소리만 치자면…….”
그 스웨덴의 샬롯이 깜짝 놀란 목소리였다.
“아마도… 세계적으로…….”
황지선이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국가 대표가 됐네?”
“아…….”
“그러니까 이겨야지.”
지선이 고개를 돌렸고, 창명도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풀 사이 오솔길이 보였다.
저 길을 따라가면 그들이 서게 될 ‘포레스트 스테이지’가 나온다.
“핸디캡이야.”
황지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스타크래프트에서 가장 강한 제4의 종족!”
“여기서 갑자기 그게 왜…….”
“아이디 앞에 태극기가 걸려 있으면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했지.”
창명이 피식 웃었다.
한창 방황하던 시기,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던 그녀의 인터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라고 못 할 거 같아?”
뭔가 조금 미심쩍은 응원이었지만, 창명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진혁이도 있는데 말이야.”
아, 이건 확실한 응원이었다.
창명의 고개가 더욱 힘차게 끄덕였다.
“마음 편하게 갖자.”
“네.”
“하던 대로만 하자.”
“네.”
“내가 축제를 구경하는 내내 나한테 한 말이야.”
“아…….”
“나도 떨려, 새끼야.”
그녀가 싱긋 웃었다.
* * *
탁자 위, 이번에 무대에서 희철이 부르게 될 세트 리스트가 펼쳐져 있었다.
적당한 편곡은 마쳤고, 이대로 공연한대도 충분히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곡들이었다.
진혁은 그 곡들을 노려봤다.
한국에서 포크송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통기타 음악은 70년대의 젊은이들을 상징할 정도였다.
눈을 감았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가장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시기.
군사정권의 통제 속에서 그런 굉장한 음악들이 나왔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장발, 미니스커트,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를 선호했던 청년 세대들의 행태를 퇴폐적으로 인식하며 이를 탄압했던 시기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포함된 ‘공연 활동 정화 정책’으로 인해 무려 222곡이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발매된 모든 음반 마지막 트랙에는 건전 가요가 수록되어야만 했었다.
약간이라도 ‘저항’의 냄새가 나면 독재 체제로부터 철퇴를 맞았던 시기였다.
대중음악이 가장 발전했던 때였지만.
그와는 반대로 문화 암흑기였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자유로웠어야 했던 젊은이들은.
준비하지 못한 채 감정을 숨기는 방법부터 배워야만 했고.
그렇게 나이 어린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맘껏 울지 못했고.
맘껏 웃지 못했고.
맘껏 소리치지 못했다.
그래서 은유적인 가사들이 넘쳐 났던 시기기도 했다.
눈을 떴다.
아름다운 표현들로 가득한 가사들을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의미들을 떠올렸다.
애늙은이처럼 꾹꾹 눌러 담은 감정들을.
한창 반항기 넘치던 열아홉의 언어로 풀어 내기 시작했다.
진혁이 펜을 들었다.
그리고 기존의 가사에 가차 없이 줄을 그었고.
서정적인 음표들을 마구 지워 댔다.
진혁의 콧노래가 트레일러 안에 가득 찼다.
곧.
음표로.
글자로.
그 지워진 부분들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철이 덜 든 열아홉 천재의 반항이 시작된 것이었다.
마흔넷 진혁을 배제한 이후.
처음으로 자신만의 감정을 담은 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