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ulous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연산홍 향기
-세상이 진짜 미칠 듯이 재밌어졌으면 좋겠어.
두 번째 파양을 겪은 그 일곱 살 소녀는 세 번째 양부모를 기다리며 그렇게 말했었다.
세상을 증오하고 증오하며.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잊으려 발버둥 치다가.
말하는 법도 잊어버린 소년을 향해 한참을 떠들었다.
소년은 멍하니 바다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산홍이 만발한 어느 봄날이었다.
* * *
“그니까 그쯤에선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카메라도 좀 봐 주고… 야. 듣고 있냐?”
“응?”
“하… 진짜. 공항에 기자들이 쫙 깔렸다고! 어차피 인터뷰는 없으니까 그냥 걸어 나가면 되는데, 그래도 사진은 남으니까…….”
“뭐, 그대로 찍히겠지.”
‘하긴,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이 아니었지.’
왕년의 C2K 충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하겠습니다. 좌석 벨트를 메주십시오. 감사합니다.
-We will be landing shortly. Please fasten your seatbelt. Thank you.
“오! 도착이다!”
길고 길었던 미국 원정이 비로소 완전하게 마무리된 순간이었다.
* * *
“아빠!”
분명 기억을 배제하고 경험을 지웠음에도 이렇게 안겨 오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는 딸이라는 존재가 주는 감정보다는 열아홉 진혁은 가져보지 못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주는 안락함의 느낌이었다.
여전히 미동하지 못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떠나기 전 이곳을 들렸을 때와 완전하게 달라진 진혁이었다.
지금은 두 인격체가 분리된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지금 열아홉 진혁은 마흔넷 진혁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불만을 가져도 되는 거잖아.’
깨어나 보니, 결혼도 이미 지나간 과거였으며, 소중한 생명을 처음으로 안아 보는 경험조차 과거였다.
직접 겪지는 못하고 기억으로만 전해 들어야 했던 과거.
‘어때? 그건 인정하지?’
이 정도의 불만은 당연한 거였다.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진혁이 피식하고 웃었다.
기억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데.
‘당시의 당신은 어땠을까?’
마흔넷 진혁이 서둘러 감정을 일깨우려 했다.
‘아니. 거기까지.’
이젠 그의 감정에 기대서는 안 됐다.
순전히 열아홉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 어린 마음으로도 여전히 가슴 벅찬 딸과 아내였다.
은서의 손을 잡아 아내의 손과 포개 잡았다.
‘부럽네, 진짜.’
진혁이 따스하게 미소 지으며 은서를 바라봤다.
“당분간 아빠가 좀 바빠질 수도 있는데…….”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눈은 열아홉 진혁에겐 참 어려웠다.
“엄마 좀 부탁할게.”
“치… 언젠 안 바빴나?”
“아…….”
“난 아빠 노래하는 거 진짜 좋아.”
은서가 활짝 웃었다.
“엄마도 진짜 좋아할 거야.”
포개어진 손가락이 조금 움직인 것도 같았다.
“우린 괜찮아.”
아주 약간 흔들린 아이의 눈동자가 열아홉 진혁의 가슴에 맺혔다.
엄마가 쓰러진 이후 아빠를 보살펴야 했고, 지금은 엄마를 보살피고 있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아이였다.
‘알아.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지금 가슴을 때려 대는 마흔넷 진혁의 질책은 당연한 거였다.
“빨리 돌아올게.”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듯.
미안함에 고개 숙인 열아홉 진혁의 마음을 도닥였다.
‘진짜 부럽단 말이야.’
어찌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을 만날 수 있었는지…….
진혁이 마주 웃어 주었다.
* * *
-야! 정태강! 이거 기획안 뭐야? 이런 방향으로 간다고?
“뭐… 일단은…….”
-일단은? 이게 될 거라고 봐? 지금 한국 분위기 체크 안 했어?
“대충 봤습니다. 역겨운 냄새 풀풀 풍기는 거.”
-그래. 그리고 그 구린내의 선봉에 우리도 있어.
“알죠. 공영 방송이니까.”
-야, 전에 예능 할 때도 겪어 봤잖아. 적당히 선은 지키면서…….
정태강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직접 듣고 보니 생각보다 더 역했다.
예능국장 박문철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시대가 그런 것이니.
태강의 대답이 없자, 역겨운 냄새를 감추려는 탈취제를 계속해서 뿌려 댔다.
-야. 이거 이대로는 절대 안 돼. 지금 왜 이런 분위기가 됐겠어? 야코 죽이는 거라고. 차일드 애플 때 딴따라라고 무시했다가 된통 당했던 인간들이야. 내가 보도국장 만나 봤는데, 지침 내려온 거 보니까 살벌하더라. 그러니까 그냥 완만하게…….
냄새의 원인은 그대로 두고 탈취제만 듬뿍 뿌려 댔을 때는.
보통 더 참기 힘든 악취가 되곤 했다.
“그게… 당연한 건가요?”
-뭐?
그래도 알게 모르게 자신을 챙겨 줬던 예능국장 박문철이었다.
그에게 화풀이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왠지 모를 짜증이 밀려오긴 했다.
앨런에게 자신도 다큐멘티스트라는 말을 했었다.
이대로 제도권의 안에 갇혀서는 온전한 기록을 그대로 보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분명 누군가의 입김에 방향은 그들의 입맛에 맞춰질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며 이미 결심은 굳혔다.
부끄러운 영상을 만들어 전 국민의 앞에 선보일 수는 없었다.
“지금 컴퓨터 앞이시죠?”
-어? 어…….
“jtk0327 느낌표 두 개.”
-응?
“제 사내 웹 하드 비밀번호요.”
-그걸 왜 갑자기…….
“들어가 보세요.”
-아… 기획서 따로 또 만든 거 있어?
대답하지 않고 느릿한 그의 키보드 소리를 듣기만 했다.
딸깍.
마우스 소리를 들어 보니 접속은 한 모양이었다.
“거기 제일 아래 폴더 보이죠?”
-어. 보여.
“그거 안에 있는 문서 출력해서 사인좀 해 주세요.”
-…….
마우스의 소리도 나지 않았고, 대답이 없다.
아마도 문서의 제목을 본 것일 테지.
-야. 태강아.
“네. 국장님.”
-너 이 새끼 더러운 꼴 다 참아 가면서 그렇게 버티더니…….
맞다. 진짜 바득바득 버텨 왔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그 안에서의 더러운 꼴이었지 이렇게까지 전국을 덮는 악취는 아니었다.
앨런의 앞에서 한국 언론 매체의 현실이 까발려졌을 때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젠 아니었다.
공영 방송이라는 족쇄에 채워진 상태로는 절대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고상하고 품격 있는 언어는 아닐 테니까.
“퇴직금이랑 뭐 잡다한 것들은 국장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하…….
“오래 고민했습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그간 감사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들었다간 애써 굳혀 놓은 결심이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상사와의 전화를 먼저 끊었다.
창문을 모두 열고.
동해고속도로의 정취를 맘껏 느꼈다.
바다 내음에 섞여 은은히 풍겨 나오는 소나무 향기는 정말로 상쾌했다.
계속해서 울려 대는 핸드폰의 벨 소리를 감상하며 묻어 있던 구린내를 멀리멀리 날려 버렸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다큐멘티스트가 된 것만 같았다.
* * *
누군가의 가치관이나 감정을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자식이든, 친한 친구이든, 배우자가 되었건,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속으로는 자신의 가치관이 인정받고 그걸 따라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단위가 굉장히 소소하고, 대상은 주변인으로 이루어졌기에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 그런 욕망을 드러낼 때는 사회가 들썩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회 지도층들은 가치관이 뚜렷하고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유명인을 경계했다.
보통은 포섭하려 했고, 그게 되지 않을 땐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미 안락한 고위층의 자리를 차지한 이들에게 ‘혁명’이란 소름 끼치는 단어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대중매체를 자신들의 손이 닿는 곳에 두길 원했다.
언제나 먹히는 ‘사회 지도층 티켓’이라는 최고급 보상을 미끼로.
“이제, 곧 총선입니다.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 사장?”
케이블 시사 전문 채널이면서도 공중파의 뉴스보다 시청률이 두 배나 되는 CTBS의 사장이자 간판 앵커.
이 시대 공정함의 아이콘 주희준이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봤다.
능글맞게 웃는 얼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대표님, 아직은 제가…….”
“아니야. 이번 총선은 대충 알다시피 박빙이란 말이지. 우리한테도 ‘공정’이라는 마스코트가 필요한 때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주 사장 몸값이 가장 높은 건 지금뿐이야.”
‘지금이 가장 높은 몸값이라.’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나락으로 보내 버리겠다는 협박이기도 했다.
“우리 좋게 좋게 갑시다.”
“일단 저도 긍정적으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정도로 달래 놓기는 해야 했다.
“그건 그렇고, 어제 클로징 멘트가 참 인상적이던데?”
“아…….”
“그 키워드가 참…….”
자신이 직접 작성하고 착잡하게 읽어 내려간 활자가 눈앞에 펼쳐졌다.
앞에 앉은 이가 충분히 불쾌해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물밑으로 은근슬쩍 내려온 보도지침을 정면으로 들이받았으니…….
-대중 예술을 향한 너무나도 날카로운 도덕적 잣대는 오히려 창의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런데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기민하게 반응할 줄이야.
“그냥 너무 몰아치기만 하면 오히려 반감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흐음.”
능구렁이의 눈가 주름이 깊어졌다.
아마도 만족할 만한 대답인 듯했다.
“주 사장이 역시 심려가 깊어.”
“감사합니다, 대표님.”
살짝 숙인 고개.
능구렁이의 시선에서 얼굴이 가려지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역시 여당 전체가 갑자기 몰아친 대중문화의 흐름을 겁내고 있는 것이었다.
당 대표까지 이런 자리에서 따로 언급할 정도라면, 아마 더 윗선까지도 신경 쓰고 있다는 얘기겠지.
확실히 이번 사건은 파급력이 대단했다.
세기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한.
문화를 향한 검은 손길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예술인이 등장할 줄이야.
그에 잠시 자신도 뜨거워졌던 것이었다.
클로징 멘트 후 보도국장의 당황한 얼굴은 정말로 재밌는 장면이었다.
“이번에 동해 소년의 인터뷰도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아마도 이 얘기를 꺼내려 했겠지.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공정하게 보여야지 그 후에 나오는 메시지가 더 신뢰감을 줄 수 있습니다.”
“하하. 그렇군. 주 사장 생각은 내가 잘 알겠습니다.”
하대하던 말투가 바뀌었다.
의심이 사라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주 사장님.”
“네. 대표님.”
내민 손을 잡았다.
악수.
서로 간에 무기가 없음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고개 숙인 주희준이 방긋 웃었다.
진짜 무기는 심장에서 두근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서… 선생님?”
“맞잖아. 동해 소년을 인터뷰하겠다는 거지, 날 부른 게 아니잖아.”
“그… 그렇지만…….”
희철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는 기자들의 카메라와 마이크에 혼이 쏙 빠진 상태였는데.
“새… 생방송이래요. 그 CTBS 뉴스 하우스요!”
“아까도 얘기했잖아.”
“앵커가 그 주희준이라고요!”
“괜찮아. 그냥 대답만 잘하면 돼.”
“뭘 아는 게 있어야 대답하죠!”
진혁이 방긋 웃었다.
“그냥 등대 계단이라 생각하고, 카메라는 갈매기고 방청객이나 스태프는 파도…….”
“아! 그 바다 드립 진짜…….”
희철이 짧은 머리를 박박 긁어 댔다.
“같이 가 줘?”
머리 긁기를 멈춘 희철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는 네가 하는 거다. 나는 그냥 보호자야.”
그것만 해도 어디랴.
희철의 끄덕임이 더욱 힘차졌다.
* * *
[대박! 동해 소년 뉴스 하우스에 나온대.]└오! 그 버벅거리는 애가?
└이번 주 금요일 위클리 핫이슈 말하는 거지?
└진짜 굉장하네. 하다 하다 뉴스 하우스까지.
└아, 그날 개그 찍는 거 아냐? 주희준 질문 살벌하잖아?
└70퍼 이상 단답형 예정임.
└거긴 질문 예상지도 안 주지 않음?
└예전에 임도유도 버벅댔었음.
└아무튼 우리 까까머리 출세했네.
└그러게, 진짜 굉장한 톱스타만 나오는 데잖아?
└와, 이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당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월드 스타임.
└자꾸 보니까 좀 귀엽긴 하더라.
└근데, 요새 기사들 분위기가 뭣 같아서 불안하네. 괜히 말실수하고 그러는 거 아냐?
└그니까. 그래도 주희준인데 공정하게 하지 않을까?
└맞아. 막 여권 인사들도 가차 없이 까고 그랬잖아?
└어제 클로징 멘트도 지금 언론들 분위기랑은 뭔가 달랐음.
└아무튼 진짜 대박이다.
└진혁느님도 나올까?
└노노. 갓끼님은 인터뷰 같은 거 절대로 안 함.
└하긴 지금까지 인터뷰 비슷한 건 황지선의 캔버스가 전부였지?
└맞음. 그분은 음악으로 얘기하심.
└아, 갓끼님은 또 잠적이신가.
└어디선가 또 폴짝하고 튀어나오실 거임.
└빨리 보고 싶다.
└지금 기레기들 분위기만 보면 확 뒤집어 줬으면 좋겠음.
└와, 상상만 해도 짜릿한데?
└생각난 김에 댓글이나 쓰러 가자.
└테일 기사 또 메인에 떴음. ㄱㄱ
└좌표 여기로!
* * *
칭얼거리던 희철이 가고.
진혁은 눈을 감았다.
마흔넷 진혁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 25년의 삶을 지우고, 열아홉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고 삶이 깊어지며 어쩔 수 없다며 순응했던 많은 것이.
철없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청년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온통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얼룩진 세상은 수많은 사람의 포기와 체념을 양분 삼아 더욱 노골적으로 계층을 분리했다.
그렇기에 올라가기 위한 발버둥만이 삶의 전부가 된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발버둥은 대물림되었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퀘스트에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음악을 만났지만, 마음 놓고 음악을 즐길 수도 없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힘겨운 삶에 치어 그 한 줌의 위로마저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재밌는 세상.’
마흔넷 진혁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열아홉 진혁은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축복인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무대를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갖길 원했다.
-세상이 진짜 미칠 듯이 재밌어졌으면 좋겠어.
진혁이 기타를 들었다.
열아홉 살의 치기 어린 감성에 젖으며, 현을 하나하나 건드렸다.
어디선가 연산홍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