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ulous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빡쳤거든요
-세상이 너무 바빠요.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니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지.’
서둘러 정신을 차렸고.
-논점이 벗어난 이야기를 나누기엔 조금 촉박하네요. 지금 들이받은 상대의 존재를 알고 있죠?
-높은 분들이죠.
-굉장히 불쾌해할 겁니다.
-그렇겠죠.
조금은 진지한 표정이어야 하지 않나?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다니…….
이쯤에서 아마도 한숨을 쉬었던 것 같다.
지금 상황을 확실히 설명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었다.
-사소한 무시조차도 엄청난 모욕으로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힘이 있고,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압니다. 아까 진혁 님이 한 말이 있으니까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게 압박할 방법을 찾을 겁니다.
-지금 걱정해 주시는 거죠?
많은 의미가 내포된 물음이었다.
지금 하는 모든 말이 어쩌면 겁을 줘서 포섭하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으니까.
-영등포역…….
얘기해야 할지 고민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한 신뢰감을 줘야만 했다.
-작년 그 봉투를 쓰고 공연하셨던 날, 제 막냇동생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
-주식으로 모든 걸 날리고 잠적했었죠.
극적인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방긋 웃어 주는 그의 얼굴은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작은 카페를 하나 열어서 새 출발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 봉투 밴드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진혁 님을 구원자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었다.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중립의 입장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지켜왔었다.
하지만 정부의 입김으로 모든 언론이 한쪽으로 기울자 그 무게를 맞춘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합리화했지만.
처음부터 동생의 삶을 되찾아 준 구원자의 편에서 응원할 생각이었다.
사실 지극히 사적인 감정인 것이다.
-진심 어린 걱정에 저도 감사드려요.
그가 마주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만들어 주실 수 있으세요?
-어떤…….
-그 높으신 분이요.
-아…….
이제야 자신의 저의를 믿어 주는 눈치였다.
-앵커님께도 압박이 있는 거죠?
-40년 내내 겪어 온 압박입니다.
-자리만 만들어 주세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인터뷰를 마치고 대기실에서 했던 대화였다.
지금이라면 아직 수습할 여지가 있을 것이었다.
적당히 굽혀 주고 적당히 얼버무린다면, 아직 쓰임새가 많이 남은 뮤지션을 망가뜨리지는 않을 터.
탁자 위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래서 여당 대표와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었다.
‘뭔가 찜찜한데…….’
마지막에 미묘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자꾸만 맘에 걸렸다.
‘설마…….’
이젠 축축하게 젖어 필터까지 분리되어 버린 담배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갑작스러운 인터뷰에 치기 어린 반골 기질이 나왔을지 몰라도, 그 후에 아차 싶었을 것이다.
그도 마흔이 넘은 어른이지 않은가.
생각이 있다면 더 큰 사고는 치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눈을 감았다.
그 해맑고 당당한 사람이 고개 숙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 자리에 다리를 놓아야 하는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운 하루였다.
* * *
“그래서 명색이 문체부 장관님이신데, 장관님도 같이 만나는 게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않겠습니까? 바쁘신데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대표님. 사실, 제가 친분이 조금 있기는 합니다. 무대에도 같이 올라 봤고… 뭐 이번 일이야 기강을 잡으려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아무튼 제가 말이 좀 통하긴 합니다.”
곽채군이 슬그머니 자신의 역할을 격상시키며 어깨를 폈다.
그리고 당 대표 권석엽을 바라봤다.
지금 시점에서 이 나라의 실세는 누가 뭐래도 저 서글서글한 얼굴의 사내였다.
이번 총선까지 잘 마무리한다면 차기 대권 주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며, 청와대까지도 움직이는 권력의 최정점이었다.
장관직을 맡으며 당의 대소사에서 밀려났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최대한 이 기회를 살려야 했다.
“뭐, 크게 사고 치고 보니 자기도 겁을 집어먹은 거 아니겠습니까? 대표님? 그러니까 먼저 만나자는 말을 꺼냈겠지요.”
“그렇겠죠. 거기다 주희준 사장이 양념을 좀 쳤을 겁니다. 자기 방송에서 사고가 났으니 수습도 자기가 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이번 총선이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아. 주 사장도 영입이 확실해진 겁니까?”
“세상에 이 금배지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빼더니 이번 일에서는 적극적이더군요.”
“하하. 역시 대표님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그 대쪽 같은 사람을…….”
“아, 주 사장도 같이 올 겁니다.”
“하하. 겹경사군요!”
손을 비비던 곽채군이 입꼬리를 올렸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된통 깨지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입지전적인 인물과 공정성의 대명사인 주희준 사장까지 포섭하는 자리였다니.
이런 자리에 동석한다는 것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큰 의미를 내포했다.
조진혁을 서포트 하던 상황에서 일이 터져 버려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는데…….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는 기회였다.
테이블 아래 숨겨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 *
입구에서 진혁을 기다리던 주희준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얼마나 오래 물고 있었는지 녹아 떨어진 종이가 혀끝에 느껴졌다.
찝찝한 느낌에 침을 뱉으려다가.
“안녕하세요!”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다.
“아… 오셨군요. 근데… 그…….”
정장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조금은 단정하게 올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복장이…….”
“조금 튀나요?”
찢어진 청바지는 골반에 걸쳐 있었고, 주렁주렁 매달린 체인에 큐빅으로 수 놓인 해골이 번쩍이는 반팔 티.
40대가 소화할 만한 패션이 아님에도, 꽤 잘 어울림이 대단했지만.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게 어디 사과하고 반성하는 자의 복장이란 말인가.
이미 그들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당장 어딜 가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
“이렇게 말씀드리긴 조금 그렇지만…….”
주희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정신이십니까?”
“네.”
해맑게 튀어나온 대답에 저도 모르게 울컥한 주희준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하…….”
청바지에 매달린 철조망 모양의 체인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예의 그 장난기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락커의 전투복이죠.”
“네?”
그가 손을 놓자 철그덕거리며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전투복?
“지금 그게 무슨…….”
주희준이 멍한 눈으로 진혁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흔들림이 하나도 없는 눈.
“들어가죠!”
그날 생방송에서 마이크를 받아 든 그 눈빛이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주희준의 머릿속을 뒤죽박죽 뒤집어 댔다.
‘설마…….’
그를 떠올릴 때마다 반복됐던 그 ‘설마’가 심장을 때려 댔다.
앞으로 터질 수도 있을 상황을 떠올리자.
불안감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되던 두근거림에 묘한 흥분이 섞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저 껄렁거리는 뒷모습에 그 흥분은 설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 것 같았지만.
그다지 나쁘지 않은 두근거림이었다.
* * *
“아… 저 또라이 진짜 어떡하냐.”
“쟤 뭔가 분위기가 확 바뀐 거 맞지?”
충기의 말에 상정과 장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먹고 그래도 생각은 하고 행동하는가 했는데…….”
“미국에서부터 애가 좀 맛이 갔어.”
“근데… 진짜 이래도 될까?”
셋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 진혁의 급발진은 거창한 정치적인 이념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단지, 자기가 재밌게 노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거기에 진혁이 떠올린 발상을 실행하려면 국회나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다.
충기가 고개를 저었다.
“야… 그냥 부탁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문체부 장관도 잘 구슬렸잖아.”
“내 말이. 꼭 들이받아야지 되나?”
셋이 달려들어 설득해 보려 했지만, 전혀 말이 통하질 않았다.
진혁이 음식점 입구로 들어갔고.
‘그게 더 재밌지 않아?’
진혁의 말이 떠오르자 셋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시한폭탄의 초침은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
“준비하자.”
상정이 태블릿을 터치했다.
* *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아. 장관님도 계셨네요? 오랜만이에요!”
“……!”
진혁이 방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 자네… 복장이…….”
권석엽이 물을 벌컥 마셨고, 눈치를 보던 곽채군이 말을 더듬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 이게 무슨…….”
그를 따라 들어온 주희준을 노려봤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의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크흠…….”
권석엽의 헛기침에 곽채군이 입을 닫았다.
“그래.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정치인이란 직업은 프로 중에도 프로여야만 했다.
첫 만남.
탐색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상대의 정확한 의중을 알기 전까지는 적당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렇기에 상대의 의사를 먼저 묻고 말을 낮추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바로 하대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심기가 뒤틀렸다는 말이었다.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물었다.
“그런 복장으로?”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주 사장, 지금 이게…….”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가 계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뭐?”
“안드레 최 라는 분이신데요. 국회 청문회에 불려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권석엽이 눈썹을 꿈틀댔다.
당시 그 청문회에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손수 디자인한 하얀색 번들거리는 옷을 입고 등장한 그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었다.
“그때, 높으신 분들이 정장을 입지 않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었죠.”
“그거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안드레 최’라는 이름 대신 본명을 대라며 윽박지르기도 했었고요.”
“당연하지. 어디 신성한 국회에 그딴 복장으로…….”
“잘못된 처사였다고 사과문 쓰지 않으셨던가요?”
“…….”
“여론이 좋지 않아서 억지로 쓰신 거죠?”
“크흠…….”
“디자이너가, 그것도 세계에서 굉장한 가치를 인정받는 분이 자기 작품을 입고 대중 앞에 나서는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직업상 최대의 예의가 아닐까요? 그리고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그의 예명 대신 본명을 대야 할 이유가 있었나요? 그저 청문회의 증인일 뿐이었는데 말이죠. 경찰서에 끌려 간 피의자도 아니었고요.”
방긋 웃으며 속사포같이 쏘아 대는 진혁을 노려보던 권석엽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곧 잠시 숨을 고르고, 험악한 눈빛만을 남긴 채 표정을 정리했다.
아마추어같이 흥분하다니.
얼른 감정을 다스렸다.
“오늘 좋은 뜻으로 만나자는 건 아니었군. 복장 지적 하나에 장황하게 따지는 걸 보니까 말이야. 그래서?”
“지금 입은 옷은 제 음악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래. 알아들었네.”
“감사합니다.”
“그럼 본론을 얘기하지. 인사도 나누기 전에 피차 감정은 상한 것 같으니.”
정치 인생 40년에 이토록 휘둘린 적이 있었던가?
여지없이 방긋 웃는 그 얼굴을 노려봤다.
대체, 어쩌자고 저러는 거지?
저 나이쯤이면 세상을 좀 알 나이 아닌가?
그 알량한 인기를 믿고 저렇게 나대는 것인가?
대한민국에서 언론을 수족처럼 부리는 정치인이 가진 힘을 모르는 건가?
다 된 밥상인 줄 알았는데, 조금 귀찮게 된 것 같았다.
차근차근 다시 압박해야 했다.
당근은 제쳐 두고 채찍부터 들어야 할 때였다.
“지금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겠지?”
“분위기는 파악했습니다.”
“그래?”
“더 세게 나오실 수도 있으실 테고요?”
“흠… 자네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나요?”
권석엽이 입꼬리를 올렸다.
간을 보는 것인가?
“없는 일도 떠들어 대다 보면 혹하는 게 대중이지. 이번에 나간 기사들도 실상은 별일 아닌 거거든.”
“…….”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저 태연한 얼굴에 두려움을 심어 주고 싶었다.
“끝에 ‘의혹’이라는 글자 하나만 넣어서 얼마든지 여론을 만들 수 있지. 대중에게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단지 물고 뜯을 거리가 필요한 거거든”
“이번처럼 말이죠?”
저 맹랑한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조금은 알아들은 것인가?
“연예인 하나 매장하는 건 일도 아니야.”
이렇게 일일이 말로 설명해야만 알아듣다니.
굳어진 상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제가 겁을 내야 하는 거 맞죠?”
“이제 좀 실감이 나는가?”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권석엽의 눈이 번뜩였고, 나머지 두 사람의 눈과 귀도 진혁을 향했다.
“실감이라…….”
그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후… 도저히 더는 못 듣겠네요.”
“뭐?”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
“제가 엄청나게 빡쳤거든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권석엽의 입이 쩍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