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ulous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일기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입을 달싹이며 캐럴의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경쾌한 멜로디와는 다르게 모두의 눈은 젖어 있었다.
그의 얼굴이 곳곳의 화면에 가득 찼다.
무대 뒤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태블릿에서, 핸드폰에서.
언제나 해맑게 웃던 그가 엉엉 울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자신 안에 꾹꾹 눌러 뒀던 감정들이 고개를 들자, 서럽게 터져 나온 눈물들이었다.
항상 밝고 즐거운 모습만을 보여 왔던 그도 저렇게 깊은 어둠을 숨기고 있었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세상 모두가 그런 것이었다.
그 사실을 직접 만나게 되자, 왠지 모를 위안에 북받친 설움이었다.
마치 고해 성사를 하듯.
숨겨 뒀던 자신의 아픔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어둠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되던 후렴구가 조금씩 느려지다가 곧 모든 악기가 멈췄다.
노래하던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제니스가 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섰다.
-어느 소녀의 이야기야.
그가 눈을 감았다.
* * *
제니스는 우연히 마주한 누군가의 기록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 혼자만 알고 있던 어둠이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누군가는 언제나 해맑게 웃고 있었기에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어둠.
그가 해맑은 웃음을 잃고 힘겨워했기에 감출 수밖에 없었던 어둠.
홀로 숨겨 두었던 그 이야기들을 조용히 읊조렸다.
바닷가 어느 성당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 * *
선하는 떨리는 손으로 눈을 훔쳤다.
그리고 특수 제작 된 휠체어에 앉은 여인의 어깨를 꼬옥 잡았다.
“괜찮을 겁니다. 목을 가눌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제법 힘이 들어가 있네요.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눈을 뜨고 있어요. 눈동자의 초점도 정상적으로 반응합니다. 이젠 환자의 의지만 남은 상태라고 봐도 됩니다.”
만약을 대비해 따라온 뇌 의학 전문의 윤성환이 다시 한번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실 휠체어는 힘들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간 침대를 세워서 있었던 시간도 꽤 되었기에 시도했던 것인데, 다행히 앉아 있는 것에 무리가 없었다.
아직 근육 운동 반응에 대한 검사를 진행하지도 않았었다. 아직 재활의 단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미 환자의 상태는 많이 좋아져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을 이렇게 앉혀 놓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축 늘어져 있는 팔과 다리지만, 환자 본인의 의지가 있기에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목을 지탱하는 부위만 잘 확인해 주시고, 갑작스러운 움직임만 피하신다면 안전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선하가 앙상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며칠 전 열게 된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렸다.
* * *
음흉한 속내를 알지 못하는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포털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알려 줬다.
남의 비밀을 엿본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마구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어디다 떠벌릴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저 그 옛날 표독스러운 고등학생의 흑역사를 엿보는 정도라고 여겼었다.
그렇게 그 비밀 댓글들을 보게 된 것이었다.
[당당한 짝사랑에 대한 고찰]중이병 같은 제목에 피식 웃었었다.
시기를 보니, H.B의 팬카페를 만든 첫날이었다.
본문은 비어 있었고.
마우스 휠을 돌려 아래로 화면을 내렸다.
그리고, 첫 댓글에서 멈칫했었다.
└입양아로 살아오며 눈치만 봐 왔던 내가 처음으로 그러지 않기로 했어. 이제부터 당당하게 쫓아다닐 거야!
└역시 몰라보네! 난 딱 알아봤는데! 구질하게 과거의 인연 따위를 무기로 삼지 않겠어! 당당하게 지금 모습만으로 쟁취할 거야!
└그 성당 기억 안 나? 연산홍 꽃밭! 와! 거기서 내가 얼마나 종알거렸는데! 진짜 몰라봐? 아무리 짧게 봤다고 해도! 이렇게 빤히 보면 대충 얼굴은 기억나야 하는 거 아냐? 확! 그냥!
└아. 당당하게 하기로 했었지.
└오늘 공연도 진짜 최고야! 정말 굉장해. 그 말도 하지 못했던 그 오빠 맞아? 와! 역시 내 남자!
└아. 내가 팬클럽 회장이라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라고!
└꽁꽁 묶어 두고 나만 보고 나만 듣고 싶다.
그 부티 나던 소녀가 입양아였다는 사실도 충격이었고, 둘이 마치 예전부터 서로 알고 있던 사이라는 뉘앙스의 글들도 놀라웠다.
그리고 당시의 표독한 소녀에게선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앙탈에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 약속했다!]└세상 사람들 전부 다 점프하게 만들어서 지구 움직이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나 녹음도 해 놨어!
└일단, 대륙별 인원 체크부터 해 놓을게. 아니다. 한곳으로 모으면 되잖아! 어디다 모아야 하지?
└약속 지키려면 오빠 진짜 유명해져야 하겠네!
이 부분은 선하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쓸데없는 공상을 진지하게 대화하던 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련한 그 기억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안 돼! 다 안 돼!]└일본 기획사 절대 안 돼!
└SJ도 안 돼!
└아깐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난 반대야! 일본에 가서 음악 하면 만날 수 없잖아! SJ에 들어가서 막 TV에 나오고 그러면 엄청나게 유명해질 텐데! 이렇게 바로 앞에서 볼 수도 없고! 뒷풀이도 못 할 거고! 너무 유명해지는 거 싫어! 나만 알고 싶다고!
└취소. 말도 안 되는 투정인 거 인정.
└그래도 팬클럽 회장은 영원히 내 거임.
└확, 어디 다쳤으면 좋겠다. 내가 병수발이나 들게.
선하는 이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이 이후 한참 동안 게시글이 없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 사고가 마치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만 같았을 것이다.
당시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몇 날 며칠을 울어 대던 소녀.
자신들도 슬퍼했지만, 그 소녀만큼은 아니었다.
그 엄청난 눈물의 의미를 이 글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렸을 소녀를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 왔다.
[…….]└오빤 일어날 거야! 그래야 내가 용서를 빌지.
└파이팅! 나 평생 기다릴게.
└SJ 아저씨들 진짜 착하다. 나중에 깨어나면 무조건 저기서 다시 노래해야 할걸? 거기 아저씨들이 병원비랑 다 해결해 준대!
└나 드디어 대학생이야. 공부 열심히 해서 오빠 먹여 살릴 테니까 깨어나기만 해!
└미안해. 나 때문에.
상정은 황지선 밴드에 들어갔었던 시점이었고, 충기는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장하는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때였다.
저마다 포기하고 각자의 길로 떠났을 때도, 소녀는 그의 곁을 지켰었다.
선하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이 기록이 더욱 가슴에 맺혔다.
자신은 그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기적]└아무것도 필요 없어. 오빠가 깨어났으니까. 노래를 못 해도 돼.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내가 오빠 다시 웃게 해 줄게.
└드디어 걸었어! 의사 선생님이 곧 뛸 수도 있을 거래! 아, 나 곧 취업한다! 기다려! 먹여 살려 줄게.
└퇴원하는 거랑 집 정리하는 거 도와줬으면 좀 쓰다듬어라!
└괜찮아! 곧 다시 노래할 수 있을 거야!
선하는 이 당시도 알지 못했다.
진혁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상정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삶에 치이던 때였고, 몇 년 전의 그 뜨겁던 홍대는 추억에만 남겨 둔 시절이었다.
흐릿했던 순간순간이 선명하게 다가오자 뭔가가 울컥하며 올라왔었다.
[파이팅!]└와. 꿈만 같아. 넷이 다시 뭉치다니!
└할 수 있어!
└괜찮아. 하다 보면 될 거야!
아마도, 충기가 모두를 모아 다시 밴드를 만들자고 했던 그때였던 듯하다.
진혁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던.
[프러포즈]└와, 결국 프러포즈도 내가 하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다시 한번 이런 일 있기만 해 봐! 나도 확 따라 죽어 버릴 거니까.
└협박 때문에 승낙한 건 아니지?
└어차피 이어질 거였어, 우린.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뒤늦게 둘이 함께 산다는 것을 알게 됐었다.
그 이후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왔고, 그때부터 왕래하며 지냈었다.
선하는 아련한 기록들에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었다.
혼자 힘들었을 소녀가 떠오르자 가슴이 메어 왔고, 그럼에도 씩씩하게 살아 준 모습이 대견해 또 먹먹해졌었다.
한참을 그렇게 과거를 그리다가 정신을 차렸었다.
지금은 말해 줘도 되지 않을까?
자세한 부분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어릴 때 둘이 만난 적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으니까.
진혁의 전화번호를 누르려다가 고개를 저었었다.
뒤늦게 남의 일기장을 훔쳐 본 죄책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은서야, 여기 어떤 글이 있는데…….
얼른 은서에게 바통을 넘겼었다.
그리고 그날, 제니스가 은서를 찾아왔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만들어진 음악이 지금 흐르고 있었다.
“너 깨어나면 밥부터 많이 챙겨 먹어야겠다. 무슨 뼈밖에 없네.”
당당하게 사랑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 당찬 소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 * *
‘와… 이 노래는 또 뭐지?’
갑자기 또 바뀐 분위기에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뭔가 잔잔한 일기장 같은 느낌이었다.
부드럽고, 아련한.
어딘가 두고 온 기억의 조각들.
말하지 않았기에 전해지지 않은 인연.
제니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툭툭 던져졌다.
이 노래는 한 소녀가 간직한 비밀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일기장에 던져 놓은 단편적인 이야기들.
어지러이 흩어진 퍼즐과도 같았다.
그의 삶과 연결하자 있어야 할 자리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니스 자신은 결국 완성하지 못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니스는 노래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조각들은 ‘그’가 채울 테니까.
그래서 그 어떤 감정도 싣지 않고 담담히 얘기했다.
앨런의 다큐멘터리로 알게 된.
세상과 단절된 소년을 떠올렸고.
그 소년과 소녀가 만났을 바닷가 그 성당의 모습을 상상했다.
향긋한 꽃내음을.
조잘대는 소녀를.
어둠에 갇힌 소년을.
하나씩 천천히 맞췄다.
제니스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이젠 당신이 마저 완성해야 해.’
자신이 가진 퍼즐은 가장자리뿐이었으니까.
제니스의 노래가 멈췄고.
칼리의 베이스가 끼어들었다.
곧, 그 리듬에 맞춰 다른 옥상들의 악기가 저마다의 소리를 더했다.
* * *
진혁은 멍하니 제니스를 바라봤다.
어둠 속의 아이도, 마흔넷 진혁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련한 기억이었다.
진혁이 어린 시절을 그 성당에서 지냈던 것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만, 소녀의 존재만큼은 자신만 알고 있는 기억이었다.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던 진혁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 줬던 단 한 사람.
석양에 물든 성모상, 그 옆에 만연한 연산홍, 말을 하지 못하는 소년, 조잘대는 소녀, 사철나무 뒤의 아지트.
아직 완성하지 못했던 아련한 멜로디가 떠올랐다.
지금은 멍해 있을 순간이 아니었다.
서둘러 기타를 잡았다.
머릿속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연주해야만 했다.
어둠 속 감정을 마구 토해 내고 나니, 더 간절해진 그리운 기억이었다.
지금이라면 그 멜로디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마음껏 그 소녀를 떠올렸다.
멸치를 너무나도 싫어했던 아이.
몇 번의 파양을 겪고, 너무 빨리 성숙했던 아이.
다시 만난다면 이번엔 자신이 조잘거려 줄 차례였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 진혁이 마흔넷 진혁을 바라봤다.
‘전에도 말했듯이, 난 그 소녀가 그리워.’
천천히 기타의 현을 건드렸다.
‘꼭 다시 보고 싶어.’
어둠 속 소년에게 있어서 가장 따뜻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태어나 단 한 번 받아 본 위로라는 감정을 떠올렸다.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이름도 모르기에 만날 수 없는 소녀.
그렇기에 더욱 간절한 기억이었다.
진혁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