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ulous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20
20화. 희망
[일어나. 시계태엽을 돌리자.]영어권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제는 그렇게 어색하지 않은 언어.
K-POP, 그리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연이은 성공으로, 세계 많은 사람이 ‘한국어’가 가진 느낌을 알고 있었다.
다만,
세계적 밴드 ‘Box-43’이 굳이 어눌한 발음으로, 그 언어를 외쳤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달랐다.
거기다,
저 반복되는 구절은, 마치 주문처럼,
세상에서 지워졌던 이들을 일으켰다.
처음 리버풀 동쪽 빈민가에서 시작된 버스킹은, 공연 트럭이 도착하자, 천천히 이동하며 이어졌다.
사람이 걷는 속도로 리버풀 외곽을 순회했고,
그 트럭의 뒤를 따르는 노숙인들의 수만 어느새 ‘추정 천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행렬을 보기 위해 나온 일반인들도 뒤섞여, 그 수는 몇만 명 단위가 되어있었다.
트럭 바로 뒤의 행렬만큼은,
이제 막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기 시작한 이들의 전용석이었다.
제니스가 “일어나! 머저리들아!”
외치자,
뒤의 행렬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시계태엽을 돌리자!”
화답했다.
리버풀 전역에 어눌하지만 강력한 주문의 합창이 퍼지면, 세상과 담을 쌓은 이들이 기어 나와 여지없이 행렬에 동참했다.
노숙인뿐만이 아니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집이 있다 뿐이지 노숙인이나 다름없었던 무기력한 이들에게도,
이들이 선사한 ‘톱니바퀴’는 유용한 부품이었다.
이미 2시간 전부터, 지역 방송사가 이 기적의 광경을 중계하고 있었고,
1시간이 지난 지금은,
영국 전역에 있는 방송사들이 속보로 다루고 있었다.
[신의 재림인가?]이 엄청난 광경에, 새로운 종교라도 생겨날 판이었다.
처음 공연을 시작했던 곳에 도착하자 기적의 트럭이 멈춰 섰다.
이미, 제니스의 목은 맛이 간 지 오래였고, 멤버들도 탈진 상태였다.
숨을 몰아쉬던 제니스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황망한 표정의 멤버들 뒤로,
이제 막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들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루워나!”
그가 한국어를 외쳤다.
많이 들어봤지만,
입으로 내뱉는 것은, 오늘로써 첫 경험을 하게 된 이들이,
“시기에퉤유어블 가무아!”
어눌하게 화답했다.
***
진혁은,
지구 반대편에서,
자신의 음악이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아빠! 출근 안 해? 짤렸어?”
딸아이가 교복을 입고,
현관을 나서며 소리쳤다.
‘아. 오늘도 지각이네?’
멍한 눈의 진혁이 부스스 일어났다.
***
“아. 죄송합니다!”
“어···. 거 신경 좀 씁시다. 조 과장.”
뭔가 떨떠름한 표정의 곽정수 차장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오늘은 어떤 혁명의 씨앗을 뿌릴까?’
잔뜩 기대했던 진혁이었는데,
뜻밖의 반응을 보이는 적장의 모습에, 사무실을 둘러봤다.
가득 퍼진 봄꽃 내음.
아, 혁명이 성공했구나.
넥타이를 맨 직원은 보이지 않았고, 와이셔츠 윗단추도 풀려 있었다.
키보드를 누르는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어제 느꼈던 뭔가 답답했던 감정이 싹 사라진 선율.
어제 뿌린 씨앗이, 이미 꽃을 피웠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사무실 가득 피어난 봄꽃.
진혁은 눈을 감고 그 향기를 만끽했다.
“그···. 조과장? 오늘 외근 알지?”
“네?”
“늘푸름 산부인과, 초음파기기 점검 있는 날인데···. 어. 불법 아냐. 이거. 원래 우리가 해야 하는···.”
“네! 가야죠! 일해야죠!”
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
책임을 따르지 않았던 혁명은,
나태함으로 얼룩져 대부분 실패했다.
“과장님! 차 빼 오겠습니다.”
민석이 벌떡 일어나며, 자켓과 넥타이를 챙겼다.
진혁도, 주머니에 있는 넥타이를 확인했다.
혁명은,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지,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조금 과격한 변화일 뿐.
진혁이 방긋 웃으며 곽정수 차장에게 고개 숙였다.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
늘푸름 산부인과.
서울 북부에서 제법 큰 규모의 여성병원이다.
결혼 포기 세대.
저출산.
암담한 지표가 매일같이 언론에 도배되었지만,
산부인과에 들어서면,
평일임에도 가득한 임산부들이 보인다.
저마다의 희망을 품은 예비 엄마 아빠들.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몇 달 후 만나게 되는, 소중한 미래를 기다리며,
잘 보이지도 않는 검은색 사진에 기뻐한다.
어쩌면,
‘희망’이란 감정이 가장 충만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티가 나지 않는 산모도,
만삭이 다 되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산모도,
저마다 배 위에 손을 얹고,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와 교감하고 있었다.
*
“아이고. 제수씨! 고생 많아요.”
“뭐, 고생은요.”
“하필이면 저딴 놈이랑 만나서···.”
산모의 옆에 앉아있는 남자가 산부인과 전문의를 노려봤다.
“헛소리 그만하고, 진료나 해라.”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닌 친구였다.
산부인과 전문의 김록영은, 친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아이가 셋이다.
그것도 아들만.
그런데 또 아이가 생겼다.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제수씨!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계획된 거 아니죠?”
“아. 저희 다섯째까지 계획했어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세상 강한 엄마.
록영은 그 말을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초음파기기가 준비되었다는 간호사의 말에,
이제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하는 배를, 조심히 안은 부부가 초음파실로 들어갔다.
“야. 5개월인데···.”
친구가 록영에게 슬쩍 신호를 줬다.
5개월이면 성별이 가늠되는 시기.
“뭐, 보자. 잘 보이는지.”
기기를 잡은 록영의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각오한 긴장감, 어젠 악몽까지 꾸지 않았던가?
내 자식도 아닌데, 이런 부담감이라니.
삐, 삐빅.
삐, 삐빅.
제법 팔다리가 또렷하게 보였다.
“머리 크기, 보이지? 평균이고, 어···. 아고 오늘 사진 찍는다고 팔도 벌려주네? 어, 다리는···.”
화면이 조금씩 내려가,
제법 모양이 만들어진 다리를 비추려 하자,
삐릭!
록영이 얼른 화면을 전환했다.
“어? 어디서 헛짓거리야?”
“응? 뭐··· 뭐가?”
“다 봤다. 선명한 로켓트.”
역시,
아들 셋 아빠의 눈은 예리했다.
세 번이나 봤으니,
록영만큼이나 정확하게 봤을 것이다.
“그, 아직 이맘때 성별이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음 진료 때 다시···.”
“괜찮아요. 록영씨! 우린 성별 상관없어요. 건강하기만 하면 돼요.”
아들만 셋이니,
딸을 원했을 만도 한데,
비웃으며 바라보는 친구를 보니,
정말 실망 같은 것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야. 아들만 키우다 보니까, 이젠 딸이 나오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걱정이더라.”
“하···. 하나 섞일 만도 한데···.”
“옷도 안 사도 되고, 장난감도 형아들 거 다 쓰면 되고. 돈 굳어서 좋죠!”
“그···, 그래도···. 혹시 또 모르니까···.”
자기 애도 아닌데 아쉬워하는 록영의 정강이를, 친구가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아기가 듣는다. 이눔아.”
아차.
산부인과 의사인 자기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사진 뽑아드릴 거고요. 4주 뒤에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말실수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제수씨.”
“아녜요.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고생했다. 있다 밤에 배그 한 판?”
“오늘 당직이다.”
“아···. 수고!”
세상 행복한 표정의 부부가 록영에게 인사했다.
대단한 친구였다.
아들이 셋인데,
전부 재우고 게임까지 하는 철인이었다.
정말로 아이를 좋아하는 부부였다.
어떤 산모는, 성별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자 펑펑 울어버리는 바람에, 난처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산부인과에서는 그리 드물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새 생명은,
생겨난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인 것을.
“안녕하세요. 좀 어떠세요?”
친구 부부가 나가고, 또 다른 행복을 품은 부부가 들어왔다.
“요새 좀 피곤한지 잘 안 노네요? 별 이상은 없었어요.”
“만삭 근처 가면, 간혹 사색에 빠지는 애들이 있긴 해요. 한 번 보죠!”
언제나 활짝 웃는 부부.
네 번의 시험관 끝에 얻은 소중한 생명.
그들의 실패를 함께 경험했기에, 지금 저 뱃속의 생명은 록영에게도 특별했다.
“어···.”
검은 화면, 흰색의 생명을 살피던 록영의 입술이 떨렸다.
새로운 생명을 품은 부부는,
참 눈치가 빨랐다.
방금 나간,
친구처럼.
“뭐··· 뭐가 이상한가요?”
“잠시만요.”
제발,
자신이 심장의 위치를 잘못짚은 것이길.
초음파기기가 신호를 잘못 잡은 것이길.
잠시 멈춘 초음파기기를 다시 움직였다.
“어···. 그게···.”
가끔,
산부인과를 선택한 것에,
후회가 밀려올 때가 있다.
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할 때.
이런 생각은 해선 안 되지만,
차라리,
심장이 멎은 채로 왔다면···.
체념하고,
바로 수술이라도 들어가면 될 텐데.
이처럼 미약하게,
‘살려주세요.’
라고 말하는 심장 소리가 들릴 때면,
자신의 무력함에 가슴이 미어진다.
“저···. 저희는 이런 경우를 이렇게 설명하곤 해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부부가 턱을 떨고 있었다.
다섯 번째 작별.
“보통은 아이가 숨을 거둔 뒤, 증상이 나타나 병원으로 달려오시곤 하는데···. 지금처럼 심장이 서서히 멎는 상황도 있어요.”
록영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가 엄마 아빠한테 인사하는 겁니다. 인사도 못 하고 가기 싫어서, 지금까지 버텨 준 거예요. 아주, 조금만 더 있다가 만나자고 얘기하는···.”
두 부부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바이탈 그래프와,
곧 끊길 듯 불규칙 적인 심장 소리.
“이 소리는, 인사하는 소리예요.”
“아··· 아직 죽지는···.”
남편의 말에,
록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경우는, 여지를 줘서는 안 됐다.
“심장이 미약하게 뛰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마음의 준비를···.”
수술하기엔 너무 늦었다.
당장 수술을 한다 해도, 확률이 희박했다.
운에 기대어,
산모의 생명까지 위험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많은 병과 중.
상황이 터진 후,
희망의 말을 전하기 가장 어려운 병과.
어쩌면,
가장 많은 죽음을 직접 마주하는 자리인지도 몰랐다.
이미 죽어 있거나,
혹은, 죽어 가거나.
간혹, 생명의 크기를 저울질해야만 하는,
산부인과 의사는,
뱃속의 작은 생명에게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록영은 이를 악물고,
머리를 숙였다.
단 두 달만 더 버텨줬어도,
빛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두 부부가 오열했다.
***
“과장님! 앉아서 좀 쉬시죠. 여긴 제가 하면 됩니다.”
산부인과 병원에 들어서자 민석이 팔을 걷어붙였다.
비어있는 진료실이 생기면, 후다닥 들어가 빠르게 점검하고 나오면 된다.
대기 시간이 길어서 조금 지루했지만, 나름 편한 외근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더 씩씩한 민석이었다.
진혁은 들어서면서부터 느껴진, 희망의 향기를 맘껏 들이켰다.
저마다 소중한 생명을 소중히 보듬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흔셋 진혁의 기억이 밀려왔다.
‘이거 봐!’
검은 사진 속, 콩알 하나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순간.
‘어. 움직인다.’
아내는 한참 전부터 느꼈을 태동.
남자로서 알 수 없는, 그 기적의 움직임.
‘이젠 오빠도 느껴지지?’
꽤 불러온 배에 가만히 얼굴을 대고 있자,
소중한 생명이 움찔했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난 후,
7개월,
엄청난 경험의 연속이었던 그 순간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같이 희망 가득한 얼굴로, 기적과도 같은 생명을 쓰다듬고 있었다.
갑자기,
그 희망찬 공기 가득한 공간 구석,
진료실 문이 열리자,
비틀거리는 절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열하며 주저앉았다.
세상 가장 빛나는 희망이, 절망으로 물드는 순간을 직접 대면 하자,
새 생명에 대한,
따스함만이 가득했던 마음 구석,
떠올리기 싫어 밀어뒀던,
아주 작게 자리한, 걱정과 두려움이 벌떡 일어났다.
그 감정의 변화는 너무나 명확한 것이어서,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숨을 죽였다.
축복의 ‘쓰다듬’이,
걱정의 ‘쓰다듬’으로 바뀐 순간.
떠들썩했던, 대기실에 정적이 밀려들었다.
진혁에게도 느껴진 이 절망은, 너무나도 깊고 어두웠다.
이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 걱정들을 다시 따뜻한 희망으로 바꿔주고 싶었다.
삽시간에 가득 찬 이 감정들을 도닥여 줄 수 있을까?
빛도 보지 못하고,
떠나간 작은 생명을 배웅해 주고 싶었···.
‘아!’
마흔셋 진혁이 머리를 때렸고, 그가 가진 지식이 흘러들었다.
만일, 저 만삭 뱃속의 생명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면, 지금 당장 수술실로 옮겨졌을 것이다.
남편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걸어 나왔다는 것은,
아직,
그 생명이 꺼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 음악이, 뱃속 생명에게도 닿을 수 있을까?’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공기정화 화분, 그 옆에 자리한 콘트라베이스가 보였다.
아마도 장식품일 터.
실제로 본 것도 처음.
연주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현을 가진 악기란 거기서 거기일 터.
장식용이지만,
제발,
소리가 나기를 기도하며 천천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