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aculous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49
49화. 녹음
카지노에 입장했고,
장하는,
신나서 달려가는 충기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충기는 마카오에도 갔었고, 라스베이거스도 갔었는데, 딱히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적당히 즐길 줄 알았기에 그런 것일 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생활비가 들어있는 은행 카드는 장하가 챙겨뒀었다.
장하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와본 카지노의 풍경은 생각보다 깔끔했고, 재밌어 보였다.
영화에나 봤던 룰렛이란 것이 있었고, 여기저기 오락기들도 있었다.
그림 맞추기인 것 같았다.
‘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감정이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어느 게임이건, 결과가 나오면, 그 위에 올려진 칩의 개수가 즉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보다 보니, 칩이 사라지는 것 보다는, 두 배로 늘어나는 것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장하가 주머니 속 손을 놀려봤다.
아까 교환한, 장난감 같은 칩의 감촉이 느껴졌다.
룰렛.
영화에서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숫자를 맞추거나, 색을 맞추거나, 홀짝, 하이 로우, 등등.
저 구슬이 멈추면, 누군가는 한숨을, 누군가는 환호를 질렀다.
그 모습이 꽤 재밌어 보였던 것일까?
한참 구경하던 곳에 자리가 나자···.
자신도 모르게 앉아 버렸다.
확률이 낮을수록 높은 배당을 가져가거나 더 센 힘을 갖는 것은, 대부분 게임이 그러할 것이었다.
어차피 교환한 칩까지는 쓰기로 했기에, 주머니 속 플라스틱들을 꺼내 놓았다.
장하가 손 위의 검은색 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런 게 하나에 만 원.
장하는 꽤 검소한 생활을 해왔었다.
도박이라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만일, 만 원짜리 지폐였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났을 것이다.
카지노에서 현금 대신 칩을 쓰는 이유가, 여실히 보이는 부분이었다.
대부분, 50%의 확률에 배팅했다.
색을 고른다거나, 높은 수 낮은 수를 찍거나, 조금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세로줄이나 숫자판 위에 칩을 놓았다.
규칙을 잘 알지 못하는 장하는, 가장 알기 쉬운 색깔을 맞추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회전판이 돌아갔고, 딜러가 구슬을 반대로 굴렸다.
잠시 고민한 장하가, 검은색에 칩을 올려놓았다.
그제야, 정신없이 굴러가는 쇠구슬에 집중이 되기 시작했다.
딜러가 배팅을 멈췄고, 구슬이 제 자리를 찾아 천천히 이동했다.
붉은색 21.
장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0%의 확률.
고작 색깔 맞추기에 졌는데,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그 한순간에 만원이 날아갔지만, 장난감 같은 플라스틱 조각이라서였을까? 그저 게임에서 졌다는 것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은 인상 좋은 아저씨는 검은색 칩 두 개를 받아들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하는,
그 아저씨가 딴 칩 두 개를 보고···,
순간 정신을 놓아 버렸다.
룰렛이 돌고, 구슬이 올라가고.
장하의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테이블에 올려놓은 칩이 모두 사라졌을 때, 장하의 표정은 있는 대로 화가 나 있었다.
확률.
그 단어의 정리가 필요했다.
‘어떻게, 내가 놓은 자리의 반대로만 구슬이 들어가지?’
이를 부드득 갈고,
‘에이, 그래도 한 번은 맞겠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현금 인출기 앞이었다.
“재밌게 놀았어? 아까 보니까 룰렛 하던데?”
“어···. 어?”
“와, 난 슬롯머신만 했는데, 벌써 개털 됐다. 너 더 안 할 거면, 남은 돈 나 주라.”
충기가 손을 내밀었다.
순간, 장하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태각시로 돌아갈, 택시비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금 인출기에 적힌 잔액은,
[3,200원]이었다.
*
“와. 넌 진짜 도박하면 안 되겠다. 어릴 때부터 다혈질인 건 알았지만···. 와···. 어떻게 2백만 원을 홀라당.”
“어···. 미안.”
“에이씨. 이 시간에 누구한테 돈 보내달라고 전화하기도 쪽팔리는데.”
둘은, 혹시 모를 추적에 대비해 카드를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당량의 현금만을 그때그때 인출 해서 쓰고 있었었다.
이번 주, 둘이 써야 할 돈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널 데려온 내가 등신이다.”
장하의 큰 덩치가 마구 움츠러들었다.
카지노 앞, 줄지어있는 택시들을 바라보던 충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에헤이. 다 털렸어? 집이 어디야?”
웬 꼬장꼬장한 아저씨가, 고개를 저으며 등장했다.
“누구신데, 초면부터 반말이십니까?”
기분이 가라앉은 장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쯔쯔. 옜다. 택시비 이거면 돼?”
그가, 5만 원권 두 장을 내밀었다.
“어···. 초··· 초면에···.”
“이걸로 모자라면, 요 밑에 모텔에서 자고 버스 타고 가. 멀쩡한 놈들이, 집에 갈 차비도 안 남기고··· 쯧쯧.”
장하가 침을 꼴깍 삼키며, 손을 움찔거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택시 기사 하나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받아도 돼요. 이분 여기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차비 없는 사람들한테 돈 꿔주시는 천사 같은 분이시니까.”
택시 기사의 말에, 장하의 눈빛이 존경으로 바뀌었다.
“이자는 알아서 주고, 혹시라도 나중에 또 만나면, 그때 갚으면 돼.”
아저씨가 지폐를 흔들었다.
“웬만하면, 또 안 만나면 좋고.”
“감사합니다. 어르···.”
장하가 얼른 손을 뻗는데, 그 앞을 충기가 막아섰다.
“저기 혹시···.”
처음부터 뭔가 낯이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윤석준 대표님?”
“응?”
충기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맞죠?”
동그래진 아저씨의 눈을 보니,
SJ 엔터테인먼트의 전 대표가 확실했다.
***
게임이라는 것은, 상당히 자극적인 요소들의 집합체다.
경쟁, 우월감, 짜릿함, 폭력성, 도박, 성취감, 그로 인한 흥분과 각성을 일으키는 도파민의 분비.
그 외에도 현실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수많은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사람들은 쉽게 빠지곤 했다.
물론, 재미 그 자체로의 맥락에서는 취미의 영역으로서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만, 이를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이르는 일이 많아졌고, 결국엔 ‘게임 중독’이라는 새로운 병명까지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의학적으로 ‘중독’이라는 말을 넣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기는 했지만,
한 번 도파민 과다분비를 경험한 이들은, 그 이상의 자극을 찾게 되곤 했다.
현세대에서는 스마트폰의 공급으로, 게임을 접하는 게 훨씬 쉬워졌으며, 어디서나 핸드폰을 들고 게임에 몰두하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인도 제어하기 힘든 ‘즐거움’이기에, 아직 자제력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은 ‘중독’에 더욱 취약했다.
그랬기에 초등학교 저학년, 핸드폰을 처음 손에 넣게 된 아이들은,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야! 나 ‘천 계단’ 백만 넘었다!”
“어. 난 그거 지웠음.”
“뭐? 더 재밌는 거 나왔어?”
“게임 질렸어.”
“응?”
태권도 도장이 있는 건물의 계단에서, 학원 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게임의 실력도 인기의 요소가 되곤 했는데, 유행하는 게임을 하지 않으면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게임에 빠지곤 했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거 봤어?”
“뭐야 이게?”
아이가 내민 핸드폰에는, 푸른 초원이 연상되는 그림 하나만 가득 차 있는, 유투부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이거 가만히 듣고 있으면, 엄청 신기해.”
“뭐?”
“내가 보내줄 테니까,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봐봐.”
“별 재미 없어 보이는데···.”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눌러, 링크를 확인한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삑삑삑삑 삐리릭.
“다녀왔습니다!”
학원을 다 마친 아이가 현관을 들어서며 우렁차게 외쳤다.
물론,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아빠는 요새 매일 야근이라 늦을 테고, 엄마도 오후 근무여서 두 시간은 혼자 있어야만 했다.
사실, 그게 편했다.
잔소리 듣지 않고 게임을 할 수 있었으니까.
가방을 던져놓고, 얼른 핸드폰 충전기를 꽂았다.
아까 아슬아슬하게 갱신하지 못한, 최고 기록을 넘길 예정이었다.
화면이 켜졌고,
친구들과의 단체 톡방의 알림이 거슬려 그것부터 지우려다 문득, 아까 봤던 그 영상이 떠올랐다.
‘도대체 뭔데 그러지?’
이맘때 아이들은, 궁금하면 일단 눌러봐야만 했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시작되었고, 화면 가득 숲이 펼쳐졌다. 차르르, 알 수 없는 청량한 소리가 더해졌다.
‘흠?’
귀가 즐겁기는 한데, 그다지 확 와닿는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기타?’
전자기타라고 했던가? 이런 소리를?
아이는 새롭게 들리는 멜로디에 집중했다.
쿵쿵거리는 소리도 났고,
다그닥거리는 소리도 났다.
그렇게 갸웃하던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리로 들려오는 것인지, 환청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새가 지저귀고, 동물들의 발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의 스피커가 아닌,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본 아이가 다시 핸드폰을 봤을 때는, 아까 낮에 친구가 보여줬던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와, 신나겠다.’
저도 모르게 초원에 빠져든 아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변신 로봇도 함께 있었고, 호랑이가 갸르릉댔으며, 엄청나게 순한 티라노 사우르스가 꼬리를 흔들었다.
아이의 손짓에, 날개를 파닥이는 새들이 화면 밖에서 날아다녔다.
게임을 할 때 느끼는 그 ‘재미’와는 전혀 달랐다.
이 초원에서는, 꼭 이기지 않아도 됐고, 올라가는 숫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마음껏 상상하며 놀기만 하면 됐다.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앞은 전혀 깜깜하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과는 또 다른 초원이 펼쳐졌고,
맑고 예쁜 목소리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상상 속 모험을 계속했다.
핸드폰 속, 게임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이 생겨났다.
***
두 번째 영상은,
같은 채널에서 올라온 영상치고는 그렇게 빠른 성장은 아니었다.
첫 영상이, 영유아기 아가들에게 빠르게 퍼졌던 이유는, ‘맘카페’와 여러 커뮤니티의 엄마들 사이에서의 입소문 때문이었다.
그 효과에 대해서 공유하는 게시글이 많아졌고, 아가들은 어른들에 의해서 영상을 접하게 되었었다.
어쩌면, 처음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기도 했다.
초등학생들은 조금 조건이 달랐는데,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그 영상을 접해야 했다.
사실, 이미 게임에 빠진 아이들은 다른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의 성향에 따라서도 집중도의 격차가 컸다.
어떤 아이는, 첫 화면에 눈이 동그래지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몇 번을 재생하고야 그 느낌을 알게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간 학습되었던, ‘재미’의 최고봉은 ‘게임’이라는 고정관념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조회 수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나, 이전 동영상에 비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었다.
한 번 접한 아이들은 계속해서 영상을 재생했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는 접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전국의 대부분 초등학생이 이 영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색깔 카드’에 이은 ‘풍경 카드’ 영상이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퍼지던 때,
어른들은, ‘J.H’라는 이니셜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비틀즈의 ‘I Will’ 커버 영상은, 꾸미지 않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홀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이 전부였다.
워낙 자극적인 것들이 빠르게 소비되고 있던 이때, 너무나도 수수한 섬네일이었기에 더 관심을 끌기도 했다.
지금 전국은 밴드 붐이 일고 있었고, 다른 기획사들은 저마다 신인 밴드들을 키우느라 혈안이 되어있던 때였기에, ‘솔로 신인가수’는 또 다른 차별점이 있었다.
그렇게,
영상을 터치한 이들은,
그 맑은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
머리 위에서 찍힌 탓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감정이 묻어나는 고갯짓만으로도, 사람들의 심장이 술렁였다.
화려한 특수효과도 없었고, 보정작업도 딱히 없었다.
그래서 더 신선한,
‘J.H’라는 알파벳이, 서서히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수는 지금 막, 직장에 사직서를 낸 상태였다.
***
“어···. 그럼, 데뷔가 확정···.”
“쉿.”
“아. 네.”
곽정수 차장이 서둘러 입을 닫았다.
이미, 음악 동호회 강사와 있었던 일을 대충 알고 있는 그였다.
그날,
동호회 연습실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은, 이 근방 회사에 쫙 퍼진 상태였다.
때마침, 강사도 바뀌었기에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어느 대형 기획사에 전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강사와 친분이 있었던 곽정수였기에, SJ 엔터테인먼트에서 있었던 일을 겉핥기로나마 전해 들은 터였다.
그랬기에, 지금 책상 위에 올려진 ‘사직서’는 예상했던바.
“원래는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곽정수와 눈이 마주친 진혁이 방긋 웃었다.
“뭐, 워낙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제 선에서 대충 정리해볼게요. 남아있는 연차도 있고···.”
곽정수가 진혁의 손을 잡았다.
“그간···.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진혁이 앞으로 유명해진다거나,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기에 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날의 ‘혁명’이후, 계속해서 목구멍을 맴돌던 말을 이제야 내뱉고 나니, 곽정수는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아뇨. 요즘 잘하시잖아요.”
그랬다.
진혁에 의해,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된 그는, 부하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는 서투르기는 했지만, 진심이 담겨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기 욕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귀부터 쫑긋 세우며 다가갔던 흡연실이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요새는 거리낌 없이, 부하직원들과 농담을 주고받고는 했다.
그렇게,
회사에서의 진짜 ‘어울림’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사직서를 올려놓은 자신의 입사 동기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과장···.”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형님.”
곽정수 차장을 바라보며,
진혁이 방긋 웃었다.
***
진혁은, 사무실을 찬찬히 둘러봤다.
마흔셋 진혁이 처음 입사하여 앉았던 책상의 위치부터, 한 계단씩 오르듯 바뀐 자리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여러 일들이 있었을 테지만, 15년이나 자리했던 공간은, 그저 시원함만을 주지는 않았다.
열아홉 진혁에게 전해진 마흔셋의 아련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삶.
직장이란, 삶의 가치를 가장 완연하게 드러내는 곳이기도 했다.
벗어나고 싶은 작은 세상일지 몰라도,
오랜 시간 함께한 그곳은,
어떤 이에게는, 젊음이었고, 열정이었으며, 목표였다.
그에게 있어서, 한 축을 이루는 ‘역사’였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다.
사실, 말이 되지는 않지만···,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쌓아가는 역사가 모여, 사회를 완성 시킨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모두에게,
지금 있는 그 자리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키보드의 다닥거림, 오래된 사무용 의자의 삐걱임, 종이 넘어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은 진혁은 이 공간의 음률을 가슴에 담았다.
눈을 떴고,
마흔셋 진혁이 가진 역사 중, 가장 존경할 만한 부분인, ‘15년의 역사’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작별 인사를 보냈다.
***
“아! 안 그래도 담당자한테 얘기는 해 놨네.”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진봉구 이사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SJ에서 나온 영상···.”
-네. 저 맞습니다.
“오. 역시.”
-아마, 곧 대중들 앞에 서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네. 그때 되면, 다시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알겠네. 내 준비해 둠세.”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끊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던 진봉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연결점을 만들어 놓고 싶었던 이사장이었기에, 이번 그의 부탁은 반가운 일이었다.
비밀리에 운영할 수 있는 유투부 채널이 필요하다 했고, 기업 바이럴 마켓팅용 채널 하나를 넘겨줬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준 그 채널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그에 창출된 수입도 어마어마해졌다.
아직 정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그들을 대신해, 비밀 계좌를 만들어 그 수입을 대신 관리해주고 있었다.
그 수입을 이제 원주인에게 넘기는 것뿐이지만, 이렇게라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 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몇 달 전에는, 가면을 쓰고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유투부로는 전국의 아기들을 사로잡았다.
모르긴 몰라도, 요새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그 영상도, 조만간 뉴스에 나올 터였다.
거기다,
본인이 직접 등판한다는 소식까지.
그를 만나고 난 후, 무료할 틈이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까?
진봉구 이사장이 환하게 웃었다.
***
SJ 엔터테인먼트의 홍보팀은 지금 초비상이었다.
오늘부터 녹음에 돌입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리키PD의 성격상, 녹음을 시작했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래도 촉박했다.
문제는,
지금 데뷔하는 가수를, 직접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앨범 커버 컨셉도 정해지지 않았고, 도대체 ‘빌어먹을 신비주의’는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도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홍보팀장 유지은은,
만일, 오늘 퇴근 시간까지도 대표를 만나지 못한다면, 사직서를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뭐, 말만 하면 뚝딱 나오는 줄 아나.’
그녀가 씩씩대며 복도를 걷던 때, 저 멀리서 진훈이 달려왔다.
“어! 진훈씨!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꽤 능력 있는 그녀가, 다 쓰러져 가는 이 회사에 아직도 붙어있는, 가장 큰 이유가 가까워졌다.
중학생 때부터, 오로지 ‘비투스’가 있는 ‘SJ’에서 일하는 것만이 목표였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맴돌던 ‘사직서’는 진훈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어. 팀장님! 지금 녹음 끝났대요.”
“네?”
“아. 그 신인이요.”
“뭐?”
오늘 녹음 시작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팀장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진훈이고 뭐고, 당장 컨셉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무조건 사표를 던질 태세였다.
“저도 같이 가요.”
“네.”
지은은,
얼마나 대단한 신인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