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13
천사(天絲)의 집 (3)
거미줄을 걷어내 지하실의 입구를 열어젖히자 까마득한 암흑이 자태를 드러냈다.
문짝 너머의 심연에는 난간 없는 대리석 계단이 창백하게 늘어져 있었고, 계단의 주변에는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이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집어삼키며 공허하게 펼쳐져 있었다.
지하 밑바닥에 묻혀있던 심연은 랜턴의 불빛을 집어삼켜서 저마다 다른 밝기의 어둠을 만들어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어둠이 연체동물처럼 스멀스멀 흐느적거리는 광경은 닳고 닳은 사냥꾼의 눈으로 보기에도 기이했다.
‘서울의 지하철이든. 데이드럼의 공방이든. 높은 놈들의 감각은 여전히 불가해하단 말이지.’
맨정신인 이들이라면 분명 기겁했을 것이고, 돌아버린 인간이라면 홀려버렸을 풍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돌아버리는 것마저 질려버린 사냥꾼은 숨을 들이쉬어 호흡을 가다듬은 뒤 죽은 디에고의 시신을 챙겨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구가 밀봉된 상태를 보면, 디에고도 여길 내려가진 않았겠지. 아니, 못 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군.’
한 손에 쥔 랜턴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내려가던 재환은 몇 걸음을 내딛은 다음부터는 두 눈을 감은 뒤 육감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겼다.
랜턴에서 피어오르는 불빛마저 산산이 흩어지고, 언제 무엇이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이 기이한 공간에서는 육안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보다 예지력으로 주변의 흐름을 읽어내는 편이 차라리 더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심해를 향해 잠수하는 잠수부처럼 신중하게.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죽은 디에고의 시신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무게추 삼아.
주변의 흐름을 읽어내며 심연을 향해 나아가던 사냥꾼은 이 기이한 공간에서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그는 흐름을 읽어내는 감각을 한껏 곤두세웠다.
‘공간도 일그러져있고. 물리 법칙도 제멋대로고… 덕분에 고생하는 건 나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놈들 몫인 거지. 데이드럼의 권속들이 우주비행사용 헬멧을 뒤집어썼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테고.’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샬롬에 내려온 천사는 서울에 내려온 성자들과 닮아있었다.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공간을 개조하는 것은 성자들의 악취미였고, 개조된 공간의 성질이 밤하늘을 닮아있다는 점 역시 성자들의 취향과 동일했다.
여기에 더해 계단을 내려갈수록 그는 뇌리가 뒤흔들리는 감각을 희미하게 느꼈고, 이는 인간이 성자를 마주할 때 나타나는 징조 중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수많은 괴물의 피를 마시고 성자를 사냥해 별의 심장을 먹어치운 덕분에 상당히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성자를 마주하는 감각은 피부를 타고 흘러들어와 뇌리에 남은 흉터를 서늘하게 자극했다.
‘아무리 천사라고 이름이 붙었어도, 성자는 성자지. 이름만 다른 건지. 아니면 천사 흉내를 낸 건지는 직접 봐야 알겠지만…’
정확하게 70개의 계단을 내려갔을 때, 그는 사람 크기만 한 문이 자신을 가로막는 모습을 예지력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지력으로 알아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두 눈을 뜬 그는 문 너머에서 사람 하나 정도 크기의 거미가 문 위에 올라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환은 랜턴을 들어 올려 거미의 모습을 확인했다. 시선을 마주한 거미는 우아하게 거미줄을 내려보내며 재환을 향해 속삭였다.
[이제 됐어. 거기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아이를 내게 주렴. 그러면 네가 더 깊은 지하로 올 수 있게, 횃불을 만들어줄 수 있어.]거미의 자태는 비단처럼 우아했다. 거미줄처럼 새하얀 실타래로 이루어진 몸체는 속세에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은은하게 뿜어냈고, 다리에 돋아난 솜털과 온몸에 새겨진 문양에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마력이 녹아들어 있었다.
기이하면서도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역겨운. 모순된 개념이 혼재된 존재를 올려다보던 재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의 정체를 확신했다.
‘역시 성자였군.’
거미에게서 느껴지는 희미한 별의 기운을 찾아낸 재환은 디에고를 내려놓은 뒤 품속에서 핸드캐넌을 꺼냈다.
그리고 죽은 디에고의 시신을 거미줄에 올려놓는 대신 디에고의 내장을 향해 핸드캐넌을 겨눴다.
저 거미가 본체가 아닌 분신이고, 디에고의 시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목적이 뭔지부터 말해. 거래든 계약이든. 최소한의 신용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신용. 신용이라…]거미는 거미줄을 엮어 디에고를 받아낼 그물망을 만들며 말을 이었다.
[믿고 싶지 않다면 믿지 않아도 좋아. 다만 맨몸으로 이 계단을 더 내려온다면, 네 명줄이 대신 타오르게 될 거야. 맨몸으로 어둠 속을 파고드는 건, 맨몸으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거랑 다를 게 없으니까. 그리고…]거미는 스산하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성자 특유의 웃음소리가 뇌리를 관통하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너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를 사냥할 목적이든, 진실을 알아낼 목적이든. 어느 쪽이든 끝장을 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게 너희 선지자들의 본성이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너희들은 설령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끝을 갈망하지.]디에고를 받아낼 그물망을 완성한 거미는 그물망을 땅에 놓은 채 문짝의 위로 올라갔다. 거미는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재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그 아이의 시체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렴. 그리고 내가 손도 대지 못하게 갈기갈기 찢어서 태워버려. 그렇게 해서 네가 만족한다면, 나는 너를 말리지 않아. 어디까지나 네게 그럴 마음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거미의 주변에서는 희미한 별빛만이 싸늘하게 깜빡거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 여유로운 자태를 바라보던 재환은 한숨을 내쉰 뒤 디에고의 시신을 그물망으로 옮겼다.
그는 정보가 필요했고, 상대는 정보를 틀어쥐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이상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고, 만약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아쉬운 쪽이 누구인지 역시 명확한 일이었다.
디에고의 시신이 거미줄에 담기자 거미는 천천히 거미줄을 당겨서 디에고의 시신을 회수했다. 시신을 회수한 그녀는 외과의처럼 정교한 움직임으로 디에고의 내장을 꺼내 거미줄로 엮기 시작했다.
[잘 선택했어. 산 사람의 몸을 태우는 것보단 이미 죽은 사람의 몸을 태우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니까. 죽은 자의 죽음으로 산자가 연명하는 거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지.]“말이 많군.”
재환은 느긋하게 내장을 손질하는 거미를 향해 핸드캐넌을 겨누며 말을 이었다.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하는 게 좋을 거다. 너 같은 괴물이랑 수다나 떨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니까. 그 횃불이라는 거나 빨리 만들고, 용건이나 빨리 말하라고.”
그가 거미에게 적의를 느끼는 이유는 간결했다.
지금까지 만나온 성자들은 모두 뒤틀려있었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도덕과 윤리를 초월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지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성좌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농락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해해. 그게 당연한 거지.]사냥꾼이 드러낸 적의는 살기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를 대하는 거미의 태도는 바람결을 즐기는 귀부인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대화를 하려면 너도 나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나비들의 도시에서 거미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너무 눈에 띄면 아무도 거미줄에 걸려주지 않아 굶어 죽고, 너무 외진 곳에 숨어있어도 먹을 게 부족해서 굶어 죽긴 마찬가지니까. 선을 넘지 않으면서 줄타기를 하는 거야말로 거미로 태어난 이상 따를 수밖에 없는 숙명인 거고, 피할 수 없는 고독인 거지.]재환은 대답 없이 거미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눴고, 거미는 내장을 손질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침묵 속에서 내장은 점차 핏기를 잃었고, 창백한 살덩어리는 거미줄로 엮여 고치가 되었으며, 한 덩어리의 고치가 완성되자 거미는 디에고의 팔뚝에서 발라낸 뼈를 막대 삼아 횃불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당신 같은 괴물을 본 적이 있어. 그 괴물도 당신처럼 거미 형태였지. 안개를 다루고. 사람을 조종하는 괴물이었어.”
거미의 습성에 대해 듣던 재환은 눈살을 찌푸린 채 ‘거미’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 괴물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 건지. 말동무가 필요한 거라면, 이것부터 먼저 대답해봐.”
거미의 모습을 한 성자는 서울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 중 하나였다. 처음 서울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 그는 속삭임이 ‘경계의 거미 미스크네’라고 명명한 성자에게 저지당해 죽은 적이 있었고, 이 ‘경계의 거미’는 ‘추종자’가 아니라 ‘관리자’라고 분류되어 특별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한때 암브락사스의 종이 되었을 때 인지한 거미 성자의 위격은 다른 성자들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는 거미 성자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재료로 사용하는 다른 성자들과는 달리 서울의 진실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이미 꿰뚫어본 것처럼, 거미의 탈을 뒤집어쓴 성자는 완성된 횃불을 건네며 말했다.
[네가 짐작한 게 맞아. 무대 관리자라는 점에서, 그녀와 나의 본질은 동일한 셈이지. 하는 일과 뒤집어쓴 껍데기는 달라도, 결국 뿌리는 똑같이 거미인 거니까.]“관리자… 관리자라…”
거미가 건넨 횃불을 바라보던 재환은 거미를 향해 겨눴던 핸드캐넌을 힘없이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이 세상이 무대고, 모든 사람들이 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사람도, 괴물도, 정해진 배역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는 비밀을 틀어쥔 거미를 올려다보며 핸드캐넌을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이 빌어먹을 각본은 도대체 누가 쓴 건지, 궁금하기도 했지. 그런 놈이 있으면 찢어 죽여버리겠다고 맹세한 적도 있었고. 지금까지는 사냥에 빠져서 생각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지. 그런데… 당신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드는군.”
빈손이 된 그는 거미가 건넨 횃불을 집어 들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수도, 거미를 사냥하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의지로. 내 마음대로 선택하는 일들이, 전부 누군가의 꼭두각시놀음이라는 생각 말이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들도 전부 광대 짓이 되겠지.”
그가 성자를 끔찍하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지닌 힘 때문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성자들이 별에서 내려온 초월자일지라도 지상으로 내려온 이상 힘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힘과 지혜를 갈고닦는다면 설령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냥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수차례 성자를 사냥해왔음에도 그들이 지닌 인지 능력과 지혜만큼은 인간의 식견으로는 여전히 불가해했고, 그렇기에 그는 성자나 성자에 준하는 존재들을 상대해왔음에도 여전히 그들을 끔찍하게 여기고 있었다.
[네 걱정은 이해해. 많은 사냥꾼들이 그러다가 미쳐버렸고, 너 이전의 선지자들 역시 괴로워했으니까.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많은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지. 무지야말로 가장 큰 축복인 거고, 가장 큰 아이러니이기도 하지.]거미는 횃불을 받아들인 재환을 내려다보며 그에게 충고했다.
[네가 고를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야. 저 하늘의 별들처럼 이 무대에 열광하거나, 다른 이들처럼 무지한 채로 춤추다 쓰러지거나. 아니면 나와 같은 이들처럼 무대를 관리하는 일에 손을 뻗거나. 어느 쪽을 골라도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해. 다만 한 가지 충고하자면… 이럴 때일수록 네가 바라는 게 뭔지 아는 게 중요하단 거야.]“바라는 것이라…”
횃불을 쥔 재환은 다른 손에 라이터를 쥔 채 중얼거렸고, 그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거미가 앉아있던 문이 스스로 열리며 그를 맞이했다.
[잘 생각해. 네가 이 무대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얻고자 무대로 뛰어든 건지 떠올려 봐. 너는 무엇을 위해 사냥꾼이 되었고, 입가에 피를 묻혔는지를.]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거미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실타래로 이루어진 몸체는 허공에 산산이 흩어졌고, 완전히 사라질 무렵이 되자 거미는 그에게 속삭였다.
[앞으로 700계단 남았어. 남은 얘기는, 네 생각이 전부 정리되면 나누자.]마침내 거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문 앞에 홀로 남은 재환은 손에 쥔 횃불을 바라본 뒤 라이터를 켜서 횃불에 불을 지폈다.
‘그래.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지.’
죽은 자의 내장으로 만들어낸 불꽃은 수은 빛깔의 연기를 내뿜으며 은은하게 타올랐다. 그 모습이 달빛과 닮았다는 감상을 떠올리며, 그는 문 너머에 있는 700개의 계단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