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22
마지막 악상 (1)
언젠가 연금술사는 말했다. 사냥이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회귀도, 괴물도 없는 세상이 온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고.
그 말에 사냥꾼은 한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이상 몰랐다는 변명은 할 수 없었고, 자신이 저지를 죄악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푸른 달이 사라진 세상에는 무엇이 남는가.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흐르는가. 꿈에서 깨어난 사람과 괴물에게 얼마나 많은 원망을 받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이상, 그는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도피처가 자살뿐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자살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면, 이대로 샬롬에 묻히는 것 역시 나쁠 것 없는 선택이었다.
달이 뜬 날에도. 달이 진 날에도. 죽음은 언제나 다정한 그의 동반자였다.
그렇기에 사냥꾼은 대답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샬롬을 떠났다.
설령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비탄과 눈물뿐이더라도. 남겨진 것이 이미 멸망한 것들뿐일지라도.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국이 아닌 고향에 묻히길 선택했다.
* * *
서울로 향하는 밤하늘 저편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을 두들기고, 성대를 기름칠하여, 천상으로 이어지는 악상. 사람과 괴물 모두의 마음을 뒤흔드는 성자의 지휘봉은 사람과 건물을 오선지 삼아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 음악을 들어주시길. 부디 이 음악이 당신에게 닿기를. 이 벅차오르는 마음이 당신에게 울림을 줄 수 있기를.
하늘 너머의 하늘에 닿기 위해 발버둥치는 음악의 일렁임에 귀를 기울이던 재환은 계단을 오르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간절함이 담긴 명곡이 귓가에 흘러들어오자 메마른 마음에 빗물이 스며든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음악이라.’
음악은 마음을 울린다. 음악은 진동이고, 진동은 울림이며, 울림은 곧 울음이다. 그렇기에 훌륭한 음악이 심금을 울리는 것 자체는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울림의 깊이가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문제였다. 악상의 성자가 갈고닦은 명곡은 지상에서 연마되어 천상으로 뻗어 나갔고, 그 여파는 지표면을 넘어 지하까지 영향을 줄 정도였다.
‘이제 와서 음악 감상이라니. 아니면… 오히려 이제야 감상할 수 있게 된 건가.’
많은 현자들이 달의 울음에 감동한 것처럼, 재환은 악상의 성자의 선율 앞에 발걸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설령 상대가 사람을 악기로 쓰는 괴물이라 하더라도 그 실력만큼은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하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도망치거나 부정하기에 바빴으니까.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음색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지금까지 거장을 마주한 인간은 미치거나 부서졌다. 하지만 밑바닥을 빠져나온 회귀자는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이는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성자의 안배일수도, 혹은 심연을 마주한 끝에 괴물에 가까워진 결과물일 수도 있었다.
둘 중 어느 쪽이 진실일까. 아니면 둘 모두 진실일까. 그 해답은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였기에, 그는 다만 마음의 일렁임을 받아들인 뒤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가야지. 이미 괴물이 된 거여도. 아니면 마지막까지 장단에 놀아나는 거여도. 해야 할 일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각오는 이미 되어있었다. 앞으로 어떤 유혹이 찾아와도. 어떤 가시밭길이 속내를 헤집을지라도. 그는 이 악몽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각오가 되어있었고,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이 역시 감내할 각오마저 되어있었다.
‘가자. 음악 감상이나 하려고 되돌아온 건 아니니까. 놈을 죽이고 나면 이 음악도 잠잠해질 테고, 서울도 다시 조용해지겠지. 그리고…’
심호흡을 끝낸 그는 서울로 향하는 입구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마음가짐이 끝나자 심장의 박동은 안정되었고, 악상의 울림 역시 전보다 한결 무디게 느껴졌다.
‘…그러고 난 다음엔. 마침내 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계단의 끝자락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고 계단 너머를 향해 올라섰다. 그러자 밤하늘 너머의 어둠이 포근하게 그를 감쌌고,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어 지하철의 공기를 만끽했다.
용산역. 서울의 밑바닥. 서울의 공기 역시 피비린내와 먼지가 뒤섞여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울로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에 남다른 감회를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서울. 나의 고향. 내가 나고 자란, 괴물의 도시.
조용히 눈을 감았던 그는 다시 눈을 뜬 뒤 무기가 보관된 캐비닛을 향해 걸어갔다. 샬롬으로 이어지는 출입구는 그가 나옴과 동시에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그는 이제 샬롬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얌전히 잠들 기회는 이제 영영 사라진 셈이었다.
‘탈태. 그 여자는 탈태라고 불렀지.’
새로 새겨진 문양의 빛을 쫓아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탈바꿈을 꺼냈던 캐비닛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빈 캐비닛 너머를 바라보던 그는 캐비닛의 벽 너머를 탈바꿈의 끝자락으로 긁어냈고, 긁혀나간 자리에 새로운 문양이 새겨지는 걸 확인했다. 샬롬의 심장부에서 연금술사에게 받은 문양과 동일한 형상이었다.
‘선물이라…’
벽에 새겨진 문양의 모습이 드러나자 손등에 새겨진 문양에서 은은한 별빛이 일렁였다. 자리를 찾은 열쇠가 자물쇠와 공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샬롬의 유물을 찾을 때처럼, 그는 손등을 옮겨 열쇠로 자물쇠를 풀었다.
‘이게 있으면 내가 원하는 형태로 흉기를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괜히 이 문양을 탈태라고 부른 게 아니군.’
철컥 거리는 기계 장치 소리. 그리고 뼈와 톱니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벽은 사라졌고, 사라진 자리에는 제법 널찍한 크기의 열쇠 구멍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연금술사가 탈바꿈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소형 공방이었다.
‘오래 신세를 졌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였으니까. 최악의 최악까지. 늘 함께였지…’
적어도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무기를 떠나 보내려 하자 그의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 무기에 녹아든 피와 땀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잠이 들 때도. 죽어갈 때도. 이 무기는 늘 그의 곁을 지키며 이 긴 여정을 함께해왔다.
‘그래도 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나비를 잡으려면 허물부터 벗어야 하는 거니까. 놈들의 살가죽을 찢고 심장까지 닿으려면 가볍고 날카로운 편이 낫지. 이제 서울에 괴물이라 부를만한 놈은 데이드럼 같은 성자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손에 익은 무기일지라도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령 가족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무기일지라도 도구는 도구일 뿐. 아무리 많은 피와 땀이 녹아있더라도 그 무게는 사람의 것에 비하면 무거울 수 없었다.
‘껍질을 벗기고 칼날만 남기자.’
결정을 끝낸 그는 탈바꿈을 열쇠 구멍에 꽂았다. 그러자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톱날이 회전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날붙이가 갈려나가는 소리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마치 무기가 지르는 비명을 닮았기에. 재환은 손잡이를 놓은 채 그 굉음을 마주 봤다. 저 소리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동반자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무기의 뼈대와 관절이 깎이고, 쇳덩이가 갈려나가는 굉음과 함께. 모든 공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고 마침내 새로운 무기가 열쇠 구멍에서 빠져나오자 재환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면 심장에 닿을 비수만 남을 테니까.’
탈태 끝에 남은 흉기는 간결했다. 튼튼하고 날카로운 칼날. 탈바꿈과 수은을 녹여 만든 신비학의 정수. 탈바꿈처럼 형태를 바꾸는 기능은 없지만, 내구성과 예리함을 동시에 갖춘 이 무기라면 탈바꿈으로는 가르지 못했던 가죽이나 외피마저 쉽게 잘라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이것만으로도 흉기로서는 여느 보검을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했지만, 그는 칼날의 색채가 수은 빛을 띠고 있다는 점을 더 눈여겨보았다.
‘이제 칼날에 바를 독만 준비하면 되겠어. 굳이 칼날에 수은을 섞은 것도 그런 의미일 테니까. 연금술에서는 수은만큼 좋은 촉매도 없지.’
수은. 물처럼 흘러내리는 은. 상온에서 액체인 몇 안 되는 금속. 수은은 촉매이고, 촉매란 전령이니. 옛 연금술사들은 이를 메르쿠리우스라 불렀으며, 지상에 내려온 괴물을 저승으로 보내려면 수은보다 나은 촉매는 없었다.
‘칼날에 수은이 담겨 있으니 독 제작은 좀 수월하겠어. 수은 다루는 법이랑 연금술 지식은 밑에서 배워뒀으니까. 이제 남은 건…’
역사의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재환은 칼날을 칼집에 넣었다. 저 기척을 낸 것은 자신을 마중 나온 데이드럼의 하수인들이었다.
‘…놈의 장단에 취하지 않게, 템포를 잃지 않는 거겠지.’
악상의 성자는 신선한 악곡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집어삼킬 정도로 굶주려있었고, 이는 이제 막 심연에서 빠져나온 사냥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괴물이 악상에 굶주려있듯, 사냥꾼 역시 이 악장의 끝을 갈망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사냥꾼님.”
하수인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한 뒤 그를 출구로 안내했다. 그는 당장 하수인의 목을 베는 대신 그의 뒤를 따라 어두컴컴한 용산역의 출구를 빠져나왔고, 그러자 사냥꾼을 마중 나온 ‘악기’들의 모습과 축제 준비에 한창인 서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은 여전히 별처럼 반짝거렸고, 피와 살점으로 만든 악기들은 도로와 건물 사이사이에 뿌리내려 각자 자신이 맡은 선율과 박동을 연주하였으며, 조율사와 기술자들은 악기와 무대를 점검하며 최고의 축제를 완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거리를 거닐었다.
카니발. 달을 위한 사육제. 최고의 악기인 인간으로 연주하는 오라토리오. 이곳에선 모든 것이 악기가 될 수 있었고, 사냥꾼을 마중 나온 하수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저 하수인은 지금 정장을 입은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이는 찰나의 신기루일 뿐. 데이드럼이 촉수를 부드럽게 움직이고 나면 저 사람 역시 자신이 맡은 선율을 연주할 수 있도록 뒤틀릴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구태여 인간의 모습으로 마중 나온 이유는 사냥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고, 저 어두컴컴한 나락에서 기어 올라온 이 진귀한 소재를 온전한 형태로 악상을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땅에 남은 거의 모든 것을 악상으로 뽑아낸 이상, 이 땅의 가장 밑바닥에서 무르익은 사냥꾼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소재거리였다.
“어서 가시지요. 주인님께서 귀하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본격적인 연주에 앞서서, 도움이 될 거라 하시더군요.”
사람의 모습을 한 악기를 바라보던 재환은 이 ‘선물’이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지만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데이드럼을 죽일 악상이라면 이미 준비해두었지만 이를 연주하려면 데이드럼의 묵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 일단은 어울려주지.’
결국 그는 곧바로 괴물을 사냥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드럼은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괴물이고, 이 도시를 지휘하는 지배자였다. 지금 당장 난동을 피워봐야 사냥감과의 거리만 더욱 벌어질 뿐, 시간과 체력만 낭비하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뒤틀린 서울의 풍경을 뒤로한 채 데이드럼이 준비한 무대로 나아갔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인간으로 자아낸 세레나데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