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25
마지막 악상 (4)
나에게 남은 것은 음악뿐입니다. 음악을 사랑하여 죽음을 포기했고, 음악을 사랑하여 사람을 그만뒀습니다.
저편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울음소리. 심장을 뛰게 하는 생명의 고동소리. 아이. 어른. 남성. 여성. 사람 하나하나가 자아내는 발소리와 숨소리. 하나의 별에 담긴 무수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는 지금까지 보내온 나날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언젠가 모두 사라질 테고, 언젠가 음악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면 저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모든 음악이 전부 비슷하게 들려 견딜 수 없게 된다면, 음악을 연주할 수 없는 저에게는 무엇이 남게 될까요.
달은 오늘도 밝고, 답은 오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만이 제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겠지요. 적어도 아직 음악을 하고 있을 때까진 빛날 수 있을 것이고, 제 심장의 고동도 꺼지진 않을 테니까요.
* * *
괴물의 방식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실습에 불과할지라도. 괴물의 몸체를 인간이 연주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시켰을지라도. 이미 배워둔 지식과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부드럽게 건반을 누를지. 바이올린의 현을 켤 땐 어떤 흐름으로 흘려낼지. 그리고 악기에서 쏘아 올린 울림이 주변에 어떻게 퍼져 나갈 지까지 고려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기교로 끝날 뿐 예술이 될 순 없었다.
‘연습은 이 정도로 충분해. 이 이상 연습하는 건 무의미하겠지.’
연주를 끝낸 재환은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의 주변에는 그의 ‘연습’에 휘말린 괴물들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악기이기 이전에 연주자이길 바랐던 괴물들은 사냥꾼의 칼에 의해 분해되었고, 악기로 전락한 뒤에는 그의 연주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그가 연주했던 연습곡에는 성자를 상대했을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미의 은닉. 괴조의 기만. 사랑의 정원. 자상의 우울. 실낱의 신비. 망자의 염원. 마지막으로 악상의 울림.
하나하나가 오케스트라로 연주해도 모자랄 교향곡이었고, 이를 하나의 악기로 축약하는 것은 데이드럼 수준의 거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기예였다. 그렇기에 수백 번의 연습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항상 미완인 채 끝났지만, 재환은 이러한 실패에 개의치 않고 연습을 끝냈다. 애초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습이었다는 것은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음악가가 되려고 연주했던 건 아니니까. 음악에 심취하지 않으려면 이 정도가 적당해.’
그는 부서진 ‘악기’를 뒤로한 채 근처에 있던 고층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 미리 자리를 잡았던 괴물들을 하나씩 악기로 분해하며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
‘중요한 건 기교가 아니라 울림. 놈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중요한 거지.’
사방에서는 여전히 선율이 속삭였다.
귀를 기울여. 더 가까이. 가까이 귀를 기울여. 그리고 리듬에 온몸을 맡기는 거야. 촉촉이 스며드는 음표의 물결에 흠뻑 빠지자.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는 악기들의 행렬을 봐. 저들의 표정은 어찌나 즐거워 보이니. 상상해보자. 너 또한 저들과 하나가 되어 노래한다면 얼마나 기쁠지. 그 황홀경을 맛본 이들에게 이 세상은 이미 낙원일 거야. 그러니 이제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거지. 죽을 때 내지르는 단말마마저 저들에게는 음악의 일부가 될 테니까.
머릿속의 신경 하나하나를 자극하는 속삭임에 재환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뇌를 향해 속삭이는 이 울림은 더 나은 삶을 갈망하는 본능의 목소리였다. 이는 육신을 지닌 존재라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고, 이를 벗어날 방법은 육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뿐이었다.
‘낙원. 낙원이라… 그래, 모두들 이미 낙원에서 살고 있지. 낙원이란 건 자기가 느끼기에 충분하면 그만인 거니까.’
이 세상은 이미 낙원이다. 시간은 무한하고, 생명 역시 무한하다. 행복해질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행복에 심취하여 영원에 가까운 향락을 누릴 수 있었다.
설령 그 모습이 인간의 관점으로는 뒤틀렸을지라도. 인간이길 포기해야만 누릴 수 있을지라도. 낙원의 주민이 된 이후에는 이런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대수롭지 않은 잡념에 불과했다.
‘낙원에 내 자리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옥상에 도착한 그는 이미 자리를 잡은 괴물들을 둘러봤다. 바이올린. 트럼본. 콘트라베이스 형상의 괴물들이었다. 합주를 통해 선율을 쌓아올리던 괴물들은 옥상에 도착한 불청객을 향해 시선을 모았고, 재환은 칼을 뽑으며 숨결을 가다듬었다.
‘이미 걷어찬 자리니 어쩔 수 없지.’
한 호흡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칼을 휘둘러 괴물들을 조율하였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콘트라베이스의 살결을 가다듬고, 현이 너무 많아 음이 흔들리던 바이올린에게 칼집을 놓아주었으며, 우렁차기만 하던 트럼본의 힘줄을 잘라 힘 조절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한순간의 조율이 끝나자 괴물들은 악사에서 악기로 전락하였다.
‘나한테 낙원은 너무 과분하고, 편하게 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니까. 부러워해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거야.’
난자당한 괴물들의 표정은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한때 음악가이자 연주자였던 자들로서 자신들이 더 나은 악기로 거듭났음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설령 마지막에 남는 게 지옥이어도. 나는 끝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
재환은 잘게 손질된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핏물이 흐르고 팔다리가 잘렸어도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현과 활만 연주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 연주자가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예지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어떤 도구를 다루더라도 금방 익숙해질 수 있다는 점은 예지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달은 비명을 사랑한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죽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어머니처럼.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친 재환은 칼날을 활로 사용하여 바이올린의 현을 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줄과 칼날로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울려 퍼지자 거리를 행진하던 악기의 행렬이 옥상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저 선율의 주인은 누구인가.
무수한 연습 끝에. 완성에 가까워진 선율이 귓가를 적신다. 빗물이 땅을 적시듯. 눈물이 가슴에 스며들 듯. 거의 모든 나날이 비극이었던 남자의 연주는 비명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혹은 자신의 주인 되는 자들을 위해 연주해왔던 낙원의 악기들에게 비극으로 절여진 선율은 신선한 전율을 선사했다.
‘하지만 너희는 비명을 내지 못하지.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울림은 주지 못하니까.’
달은 비명을 사랑했고, 데이드럼은 비명을 연주했다. 하지만 아무리 비명을 연주해도 데이드럼의 선율은 달까지 닿지 않는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괴물이 오늘 죽을 수 있는 인간의 절실함을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설령 연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얄팍한 모작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데이드럼은 인간으로 하여금 달의 심금을 울릴 연주를 연주하도록 하였고, 여기에 더해 인간을 재료로 사용하여 자신의 악상을 구현하려 했다.
다만, 아무리 많은 습작을 쌓아도. 아무리 많은 실패를 거듭해도. 데이드럼은 결국 자신이 바라는 경지에 닿을 수 없다. 이미 박제된 몸으로 살아 숨쉬는 육신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고, 죽을 수 없는 몸으로 연주하는 절박함 따위로는 심금을 울리는 울림을 낳을 수는 없었다. 영생 덕분에 거장이 됐으나, 영생으로 인해 걸작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 데이드럼의 딜레마였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선율이 절정을 향해 나아가자 바이올린에서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만. 이제 그만. 고통도 고동도 이제는 그만. 이런 연주는 자해나 다름없으니 이제는 그만. 차라리 칼날로 손목을 긋는 게 덜 아플 테니 이제는 그만.
선율의 울림은 깊어져 갔고, 이에 따라 울림에 닿은 모든 것들은 우울한 악상으로 물들었다. 어떤 괴물은 슬픔에 겨워 목놓아 울었고, 어떤 악기는 우울함을 견디지 못한 채 부서졌으며, 데이드럼의 조율사들은 이 이질적인 선율을 배제하고자 떨리는 손끝으로 별빛으로 이루어진 쐐기를 옥상을 향해 떨어뜨렸다.
‘이제는 피날레만 준비하면 되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녀석이 먼저 손을 쓰겠지. 그러지 않곤 못 배길 테니까.’
인간의 몸으로 괴물의 악곡을 연주하는 것은 조금 고상한 자해행위일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사방에서 빗나가는 말뚝을 관객 삼아 연주를 계속하였다.
현 하나를 켤 때마다 핏줄이 끊어지는 통증이 느껴지고, 음표 하나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꿰뚫리는 감각에 신음이 새어나온다. 손가락에 새겨진 굳은살 너머에선 살갗이 갈라져 핏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이 그의 숨통을 쥐어도 그는 칼날을 쥔 손을 놓지 못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연주한다면 데이드럼을 사냥할 오랜 계획이 완성될 테니. 이 악장의 끝에 기다릴 사냥을 떠올리면 도저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멈춰!”
“연주를 멈춰!”
“그만! 그만해! 우리를! 그분을 뺏어가지 마!”
악장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조율사들은 절규했다. 말뚝은 빗나가고, 사냥꾼에게 닿을 수는 없으니. 이 연주가 끝난 뒤에 기다릴 결말이 그들의 눈에 선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절규로는 연주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연주는 오직 단 하나의 청중을 위해 준비한 악곡이었고, 그 청중이 이 도시의 주인인 이상 그들이 쏘아낸 쐐기는 허망하게 빗나갈 뿐이었다. 쐐기가 박히는 소리. 괴물의 환호와 절규. 그 속에서 울리는 사냥꾼의 연주가 절정을 향해 나아갈 무렵. 서울의 중심부에서 고동소리가 들렸다.
[그만. 그 정도면 되었습니다.]묵직한 중저음과 함께 고동은 음성이 되었고, 성자의 목소리와 함께 도시의 모든 소음이 정적을 맞이했다. 괴물이 뒤틀리던 소리도, 정신없이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도, 조율사의 절규도, 재환의 연주마저도. 모든 소리가 사라진 도시에는 데이드럼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좋은 연주였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몰라도, 제 마음에는 여운이 남은 연주였어요. 설령 이미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일지라도, 역시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울림이 나오는군요.]데이드럼의 말에 재환은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곡을 연주하든 데이드럼이 그 곡을 이미 만들어두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가늠하기 힘들 지경의 시간동안 무수히 많은 악곡을 만들어온 괴물에게 ‘완전히 새로운 곡’을 들려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스로 지옥불로 뛰어드는 생명이란 어찌나 애절한지. 이제는 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전부 당신 덕분입니다.]고동소리를 흘리던 데이드럼은 자신의 촉수 하나를 들어 올려 밤하늘을 가리켰다. 부드럽고. 우아하게. 안개 낀 하늘 너머로 별을 헤아리던 그는 자신의 별을 찾아 촉수로 겨눴다. 전율 탓인지. 아니면 애절함 탓인지. 촉수의 끝자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덕분에 마지막 악상을 완성할 영감이 떠올랐으니까요. 마치… 머릿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군요…]별을 겨누던 촉수의 끝자락이 부드럽게 흐느적거렸다. 지휘를 시작한 지휘자의 손짓이었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대기가 공명했다.
음악이란 울림이고, 울림이란 진동이니. 천상을 향해 뻗어 나간 진동은 데이드럼의 본체인 별까지 닿아 공진을 일으켰고, 데이드럼의 별은 공진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산산이 부서진 별. 재환은 잠깐의 반짝임과 그 아득한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한 별의 자살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은 그에게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데이드럼은 그런 재환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목소리에는 일종의 환희가 느껴졌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죽음을 앞둔 괴물 역시 자유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인간은 죽기 직전에 가장 자유로워지는 법이죠. 나 역시 지금, 자유를 느낍니다.]작품의 완성을 앞둔 거장의 목소리. 목숨을 대가로 최후의 악장을 연주하려는 괴물을 향해 재환은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이 길었던 사냥이 끝자락에 닿았음을 직감하자 칼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연주를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번 연주가 마지막이 될 거란 예감이… 강렬하게 드는군요.]지상에서 죽기로 결심한 거장이 촉수를 들어 올려 지휘를 시작하려 했다. 주변에서는 그의 악기들이 거장의 지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이 괴물뿐인 오케스트라.
그 한가운데에서 홀로 인간으로 남은 사냥꾼은 칼날에 맹독을 발라 대답을 대신했다. 성자의 심장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달을 사냥해 이 악몽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끝을 원했고, 갈망의 크기는 데이드럼 못지않았다. 굶주리고 메말라 있다는 점에서 괴물과 사냥꾼은 동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