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27
마지막 악상 (6)
사랑. 당신에게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 무한한 시간, 드넓은 공간, 아득한 지혜. 그리고 아름다운 광명까지. 하나하나가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이었고, 받아도 되는지 의문일 정도로 귀중한 보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받은 것이 진정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그것만은 지금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당신은 너무나 멀고, 이 거리감을 좁힐 방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오랜 세월을 보내도, 저는 여전히 어리석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가야 할 길을 모르고, 끝내야 할 길도 모르죠. 영원히 방황하다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저의, 그리고 저희 모두의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진실 앞에 두려웠던 날도 있었고, 절규하던 날도 있었습니다. 오랜 밤을 지새우며 홀로 곡을 쓰던 나날이었죠.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오늘도 달빛은 찬란하고, 당신은 눈이 부시니까요. 그러니 이 악장의 끝에 제 몸이 어떻게 되든지. 그리고 제가 써온 악보들이 어떻게 되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악상을 떠올리던 나날은, 그리고 이를 연주하던 나날은 즐거웠으니까요. 당신에게 바치는 세레나데는 늘 황홀했습니다. 시간 가는 줄. 그래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 * *
사냥꾼이 성자를 향해 달려들던 그 순간, 절정에 닿아 무르익은 음악은 무르익은 화원처럼 만개하여 해질 대로 해어진 사냥꾼의 내면을 꿰뚫은 뒤 들쑤셨다. 데이드럼의 음악은 마지막까지 걸작이었다.
‘왜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어. 왜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을까. 구하려고 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고막을 잃은 귓가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샬롬이 그의 뇌리를 향해 속삭였듯, 거장의 음악 역시 진동을 통하여 그의 뇌리에 울림을 낳았다. 그리고 감각이 데이드럼의 ‘울림’을 음악으로 인식하자 ‘울림’은 그의 마음에 일렁임을 낳았다.
‘떠올려 봐. 네가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 아주 먼 옛날. 한때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너라면 전부 다 떠올릴 수 있어. 그렇지?’
그는 일렁임을 무시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에선 데이드럼이 남긴 울림이 느껴졌고, 주변에서는 으스러진 건물의 잔해와 녹아내린 괴물의 파편이 흩날리고 있었다.
‘샬롬의 지혜라면 괴물을 사람으로 되돌릴 수도 있어. 사람이 괴물이 되는 데 괴물이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은 또 뭐가 있을까. 너도 이미 알고 있지만, 굳이 인정하긴 싫었던 거야. 그렇지? 인정하게 되면 그 잘난 사냥꾼 놀이가 끝나게 될 테니까.’
마음을 후벼 파는 이 목소리는 데이드럼의 것이 아니었다. 데이드럼은 단지 자신이 연주하고 싶었던 걸작을 연주할 뿐.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재환 자신이었고, 그렇기에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도 재환이 묻어두었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딱지가 앉은 상처를 뜯어내는 몰골이었다.
‘봐. 볼 수 있어. 한강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다른 도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금이라면 볼 수 있어. 두 눈을 뜨고 마주 봐. 네가 무엇을 망치려고 하는지. 무엇을 짓밟으려 하는지 똑똑히 보는 거야.’
내면의 목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목소리는 무의식이 스스로 생각하여 내린 결론이었고, 사냥에 매진하였을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영감의 산물이었다. 일렁임이 낳은 파문은 발소리를 낼 때마다 점점 커져만 갔고, 재환은 선율의 흐름에 따라 시야가 일렁이는 기분마저 느꼈다.
‘귀를 더 열어. 조금 더 경청하는 거야. 솔직하게 가식을 벗어던지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일렁임이 심해지자 그는 칼을 지팡이 삼아 발걸음을 멈췄다. 지면에 꽂힌 칼은 부러질 듯 흔들거렸고, 재환은 피를 토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숨결을 가다듬기에 급급했다.
‘말해봐. 이게 네가 정말 바란 일이었는지. 아니면 사냥꾼들의 충동질 때문인지. 네가 세뇌당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런 걸 원했던 건지. 네 입으로 스스로 말해보는 거야. 이제 네게는 사냥꾼의 속삭임 따위는 들리지 않으니까.’
몽롱해진 의식 너머에서는 선율이 일렁거렸고, 일렁이는 선율 너머에서는 사냥꾼이 되었을 무렵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는 진정으로 이 악몽이 끝나길 바랐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설령 그 끝에 멸망만이 남을지라도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자신의 목숨마저 제물로 바쳐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데이드럼의 음악이 그의 뇌리를 자극하고, 자극받은 두뇌가 이제 끝이 머지않았다는 예감을 떠올리자 먼 옛날의 각오는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 사냥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고, 마침내 마주하게 될 악몽의 끝을 떠올리게 되면 사냥을 향한 의지에 망설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맞아. 맞는 말이야. 사실은 지금도 할 수 있으니까. 하려면 할 수 있지. 시간은 언제나 충분했으니까.’
처음 사냥꾼이 되었을 당시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괴물에게서 자신을 지켜내기에도 급급했고,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렇기에 그는 속삭임에 이끌려 괴물을 사냥하는 것에 몰두하였고, 오직 이 길만이 이 악몽을 끝낼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저 선율 앞에서 그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지옥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생긴 지금이라면 무언가를 부수고 죽이는 길 대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쌓아나가는 길을 걸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무지하지 않았다.
‘성자의 피. 그 위대한 혈액을 개량하면 회귀자를 계속 늘릴 수 있으니까. 회귀자가 계속 늘어나면 회귀자들의 도시를 세우고, 그다음에는 회귀자들의 나라를 세우고. 괴물과 싸우는 기술을 가르치다 보면 언젠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만들어지겠지. 과정이 혹독하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망상에 가까운 일이었다. 회귀는 달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지 끝날 수 있었고, 성자를 상대하는 회귀자들이 언제까지고 온전하게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거란 보장 역시 없었다. 여기에 더해 단 하나의 성자가 사람을 증오하기 시작하면 어떠한 재앙이 벌어지는지 몸소 겪어본 이상, 회귀자의 숫자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괴물. 괴물을 사람으로 되돌리는 거. 그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야. 몸을 되돌릴 순 없어도 사람의 지식을 가르치면 그만이니까. 이미 어딘가에서는, 괴물이랑 사람이 서로 소통하면서 살고 있겠지.’
사람과 괴물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사람과 괴물은 노력하기에 따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고, 그 역시 성자라는 괴물과 소통 아닌 소통을 여러 번 나눠본 경험이 있었다. 모든 괴물에게 사람의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괴물과 사람이 서로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암브락사스. 데이드럼. 사냥이란 살업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두 성자가 일궈놓은 서울은 한없이 낙원에 가까운 도시였고, 사람과 괴물이 서로를 이해하며 조화롭게 사는 것은 노력하기에 따라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지. 신이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했으면 이미 만들어졌을 테니까.’
흐릿해지는 정신 너머로 선율이 색채를 띠며 물결쳤다. 달빛에 비친 선율의 색채는 형형색색의 무지개빛깔로 흩어졌고, 흩날린 선율은 바닥과 건물에 부딪혀 물거품처럼 조각났다.
부서지고. 녹아내리고. 이지러지는. 세상에 끝나가는 풍경. 그 속에서 재환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데이드럼. 아, 데이드럼.’
잔해를 밟고. 시체를 넘어. 산산이 부서진 데이드럼의 조각을 발판삼아 그는 단상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가 노리는 것은 선율과 함께 사라지기 직전인 데이드럼의 심장이었다.
‘적어도 갈 때는.’
한없이 닳고 닳은 끝에 데이드럼의 몸체는 사람보다 조금 더 큰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연기와 같은 몸체에서는 서너 개의 촉수가 가늘고 부드럽게 움직이며 지휘를 계속하고 있었고, 그의 주변에선 지휘를 받은 선율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악장에 방점을 찍기 위한 화음을 쌓았다. 화음에 담긴 음표 하나하나에는 귀를 잃은 청중마저 눈물을 흘리게 할 감동이 담겨있었고, 선율에 담긴 일렁임을 뛰어넘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뒤틀리는 울렁임이 전신을 강타했다.
“심장. 네 심장만큼은… 받아가야겠어…”
마침내 괴물 앞에 마주한 사냥꾼은 칼날을 뽑아들었다. 이 순간 그에게 다른 무기는 필요 없었다. 날카롭게 날이 갈린 칼날 하나. 정교하고 부드럽게 살을 절개해낼 칼날 한 자루만 있다면 다 죽어가는 성자의 심장을 뽑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에 성자의 신경을 마비시킬 맹독이 더해진다면 일말의 저항도 받지 않고 성자의 심장을 취할 수 있으리라.
[마침내.]가슴팍에 칼날이 꽂히는 것과 함께 데이드럼은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토록 고대하였던 악장의 방점이 찍히는 순간에 그는 환희를 느꼈다.
[마침내…!]사냥꾼은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칼날을 움직였다. 심장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도록.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여. 이 위대한 피의 그릇이 달을 사냥할 그릇의 원재료가 될 수 있도록. 그는 사냥꾼으로서의 힘과 정교함을 담아 심장 부근을 잘라내었고, 피 묻은 자신의 몸을 그릇 삼아 분리된 심장이 사라지지 않도록 두 팔로 담아내었다. 어미 새가 알을 품은 모양새였다.
[마침내… 마지막 악장이 완성되었…군요.]세찬 이명. 데이드럼의 유언이 끝나자 그의 몸체에서는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귀를 찢고. 심장을 터트리는. 별의 고동소리가 담긴 이 이명이야말로 거장이 꿈꿔온 최후의 선율이었고, 악상의 성자 자신조차 죽기 직전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마지막 음표였다.
‘데이드럼. 아, 데이드럼.’
신경을 뒤트는 이명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이명이 끝남과 동시에 데이드럼의 연주가 멈췄다. 비명을 닮은 이 이명은 분명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이명에 담긴 선율에 그는 전율했다. 단말마마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거장의 심장을 취한 사냥꾼은 눈물 흘렸다.
‘당신은. 당신은 죽어서. 완성되었군.’
한 순간의 이명에 그의 인지력은 부조화를 일으켰다. 그는 분명 데이드럼을 사냥하려 했고, 어째서 데이드럼을 사냥하려 했는지 역시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드럼이 연주한 최후의 선율을 듣자 그는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음악이란 저토록 아름다운데. 단말마가 이토록 찬란할 수 있는데. 사냥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고, 복수란 것이 무슨 의미를 남길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괴물을 죽이고 살업을 쌓는 다 해도 저 선율보다 나은 의미를 낳을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저 아름다운 선율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슬픔으로 이어졌고, 선율의 주인인 거장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 심장을 옥죄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부조리함을 그는 본능적으로 인지하였으나, 더 이상 손 쓸 방법은 없었다. 그의 몸과 마음은 진작에 한계를 맞이한 지 오래였고, 데이드럼의 심장을 절개한 것을 끝으로 모든 기력을 소진하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덕분에 끝을 보는군요.]쓰러지기 직전. 그는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 역시 알고 있었다. 데이드럼을 살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광인. 그 광인이 성자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가 까마귀 성자의 것을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사냥꾼으로서의 직감은 지금 당장 칼을 뽑아들고 총을 겨누라고 호소하였으나, 그에게는 더 이상 칼을 뽑을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칼을 뽑아들 육신도. 사냥에 나설 정신도. 모두 데이드럼을 사냥하기 위해 불살라버렸고, 잿더미만 남은 심신으로는 데이드럼이 남긴 잔향을 버텨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푹 쉬어도 돼요.]까마귀의 까악거림을 닮은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흐려졌다. 칼날을 지팡이 삼아 지탱하고 있던 자세가 무너졌고, 까마귀 가면을 쓴 여인은 사냥꾼이 품에 쥐고 있던 데이드럼의 심장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가슴에 품었다.
[당신이 내 일을 대신해주었으니, 당신이 못한 마무리는 내가 대신 도와줄 테니까요. 그게… 우리의 계약이었거든요.]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여인의 말에 재환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저 말이 거짓일까. 아니면 이제는 정말 끝인 걸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을 거란 예감과 함께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심신은 더 이상 무언가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차라리 두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끝나있기를. 허황된 상념과 함께 그의 의식이 끊겼다. 까마귀 소리만이 잠든 사냥꾼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