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29
끝자락의 풍경 (2)
눈을 뜬 재환은 자신에게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정신을 차렸음에도 여전히 몽롱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 그랬지…’
그는 되돌아온 의식을 다잡은 뒤 정신을 가다듬었다.
사냥. 사냥은. 사냥은 분명 순조롭게 끝났다. 어두운 뒷골목. 긴 기다림 끝에 맞이한 밤. 인적이 끊긴 도시. 술에 취한 행인 한 명. 목격자 하나 없는 시점. 조심스럽게 뒤로 다가가 칼로 목을 긋고, 튀긴 혈흔을 지운 뒤 쓰레기더미에 시체를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킬 미봉책이었으나 그는 경찰에 쫓기게 되어도 상관없다 여겼다.
어차피 이미 미쳐버린 목숨. 감옥에 갇혀 말라죽든 스스로 목을 매든 별반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한 모금. 단 한 모금의 피를 마신 뒤 그는 동공이 커지는 것과 함께 몽롱하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청량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면서 괴물. 괴물이면서 사람. 타인의 피를 단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그는 사냥꾼으로서의 감각을 되찾았고, 이와 동시에 미래를 읽어내는 감각 역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감각이. 감각이 확장되며.
하늘너머에서 구름이 넘실거리는 감각이 피부에 와 닿았다. 담장에 쌓인 먼지가 바람을 타고 춤추는 흐름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찰나의 황홀함. 감각이 확장되는 짜릿함. 인간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충족감.
하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던 것도 잠시. 그 뒤에 깨우친 진실을 맞이하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 아아. 이건…. 그런 거였…군…’
으슥한 골목길. 어둠에 내려앉은 거리. CCTV 하나 없는 사각지대. 그곳에서 홀로 사냥을 끝낸 재환은 눈앞의 시체를 내려다본 뒤 얼굴을 감싸 쥐었다. 시체는 여전히 괴물의 모습이었으나, 그는 몰려오는 죄악감에 익사 당할 것만 같았다.
사람이면서 괴물. 괴물이면서 사람. 괴물의 모습을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괴물의 모습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를 것은 무엇인가.
한껏 예민해진 감각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켰고, 그 사람 또한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사랑받았던 날들이 있었음을 일깨웠다. 평소였다면 불필요한 감수성이라 여겼을 사실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정보가 외면할 틈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입이 근질거렸던 거야.’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이를 악물었다. 한 모금의 피를 마신 순간 그는 예지력 역시 되찾았고, 핫껏 날카로워진 지력은 까마귀 성자가 어찌하여 이런 세상을 그려낸 건지 게걸스럽게 파헤쳐내었다. 아는 것이 힘인 세상에서는 정보력이 곧 생존력이었기에, 이는 생존본능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 괴물은. 그래서 떠벌리고 싶어서… 안달이었던… 거였어…’
예지력은 가장 먼저 까마귀 성자가 그려낸 청사진을 읽어내었다. 먼 훗날. 인류의 정신이 충분히 성숙해졌을 때. 아득히 발전하여 더 이상 기아와 전쟁과 역병 따위로 고통받지 않는 시대가 왔을 때. 그런 날이 오게 됐을 때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다른 사람에게 팔이 몇 개가 달렸든, 몸에 껍질이 돋아났든, 몸이 얼마나 흐물흐물해졌는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어울리는 세계.
혐오는 없고, 장애도 없이. 사랑만이 남는. 괴물 따위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언젠가 인류가 도달하게 될 종착점 중 하나를 떠올리자 재환은 숨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미련해 보였을까.’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아 별을 헤아렸다. 지상에서 빛나는 전깃불에 별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구름 너머에서 반짝거리는 별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별이 될 텐데. 날개를 얻고 떠올라 하늘에서 빛나게 될 텐데. 오늘이 아니면 내일에라도. 내일이 아니면 내년에라도. 내년이 아니면 다음 세대. 다음 세대가 아니면 수십 세대가 지난 뒤에라도… 멸망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국 하늘로 돌아가겠지. 언젠가는. 언젠가는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이전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앞으로도… 반복되고…’
감각을 되찾은 재환은 뇌의 주름이 모조리 뒤엉키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순간에 대량의 정보가 해일처럼 몰려온 탓이었다.
‘관리자. 지식의 성자. 예지의 까마귀. 마태오 신부는 그렇게 미쳤고, 다른 사냥꾼들도 이렇게 미쳐버린 거겠지. 이제는. 이제는 좀 이해가 가.’
상대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세계라니.
눈이 부시다 못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국가도, 국경도, 경찰도, 군인도, 전쟁과 다툼마저 없는 세계. 모두가 순리에 따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낙원. 한없이 천국에 가까운 이상향. 인류가 언젠가 도달해야 할 종착역.
까마귀 성자가 그려낸 청사진은 샬롬의 사냥꾼들이 그려낸 청사진보다 아름다웠다. 사냥꾼의 방식으로 복수를 이행한다면 남는 것은 멸망뿐이지만, 이대로 크로드의 청사진을 따르기만 한다면 희망이 넘실거리는 신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심장. 데이드럼의 심장은 귀하지. 복수에 쓰기엔 아까울 정도로, 귀한 보물이야.’
데이드럼의 심장을 가질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자명했다. 인류를 신세계로 이끌 영도자와 머릿속에 복수밖에 남지 않은 살인자. 둘 중 누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나갈지는 명확했고, 그렇기에 재환은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욱한 구름 너머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창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저게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군…’
달에게는 무한한 힘과 권능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그마한 별 하나 정도는 쉽게 가루로 만들고 새로운 별에 생명의 씨앗을 뿌릴 수도 있었다. 성자든 괴물이든 인간이든 저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랑 다를 게 없었다.
‘저걸 죽인다고 해서… 세상이 더 좋아지는 건 아닐 테지. 달도. 성자도. 괴물도. 다 죽이고 나면. 그러고 나면 뭐가 남을까. 아니. 아니지. 뭐가 남기는 할지. 그것부터 생각해야지. 그래야 저울질이 될 테니까.’
복수를 끝내면 무엇이 남을까. 폐허뿐인 도시? 괴물이 된 사람들? 미쳐버린 사냥꾼? 시체나 다름없어진 식물인간?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계산해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은 그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지구가 남아나기는 할지 걱정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샬롬의 계획대로 달을 살해하는 것에 성공하더라도 그 이후에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고, 달이 죽은 이후의 세계는 아무리 지혜를 모아도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상의 영역이었다.
“아. 그래… 사실 간단하지…”
그는 땅에 떨어진 칼날을 주웠다. 사람을 죽인 칼날. 이 칼날 하나만 있다면 사람 한 명을 더 죽이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이 되지 말란 법 역시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나만 없어지면 돼. 그러면 된 다 이거지… 이젠 잘 알겠어.”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그는 실소를 흘렸다. 이 모든 상황이 그에겐 역겹게 느껴졌다. 아름다움. 도덕. 낙원. 이상향. 인류의 미래. 이 숭고한 가치를 위하여 단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가족과 친구를 위하여. 혹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위하여.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선량함을 지니고 있고, 이는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할 원동력이 되곤 한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 스스로 희생할 의지가 없다 하여도, 한 사람을 희생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희생양을 찾아 거래하거나, 제물을 찾아 희생시키거나. 어느 쪽이든 인류는 답을 찾아낼 것이고, 재환은 인류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인지하였다.
“이제는 알아.”
그는 칼날을 쥔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침내 그는 평화로웠던 일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고,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 역시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뭘 원했는지. 확실하게 알겠어.”
지식은 충분하였고, 그는 선택할 준비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칼날을 쥔 손에 힘을 준 뒤, 까마귀 성자를 찾아 밤거리를 걸었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은 그를 까마귀 성자의 은신처로 인도하였고, 아직 까마귀 성자의 부활이 온전치 않음 역시 속삭이고 있었다. 이 세상이 온전한 형태로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고, 그가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 역시 증거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무서웠던 거야.”
끝이 끝이 아니게 될까 봐. 죽는 게 죽는 게 아니게 될까 봐.
죽은 다음에 무슨 꼴을 겪게 될지. 세상이 어떻게 뒤틀려 비명을 지르게 할지. 하루아침에 뒤바뀐 세상 앞에 그는 절규했고, 그 절규가 그를 사냥꾼의 길로 내몰았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죽이려고 하는 거고.”
처음에는 단지 끝을 원했다. 이 모든 악몽에서 도망치게 해달라고.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닫고. 영원히 아무것도 몰라도 좋으니. 그저 평안한 잠을 자게 해 달라고.
이를 위해 그는 밤거리를 달렸고, 괴물을 살해하였으며, 인간이길 그만두어도 좋으니 괴물이 돼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괴물은 괴물, 인간은 인간.
아무리 괴물이 되려 하여도 그는 온전히 괴물이 될 수는 없었다. 완전히 괴물이 된다는 것은 영원히 잠들 수 없는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영원히 달을 쫓는 위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괴물이 되지 못했다. 괴물이 되는 것으로는 악몽이 끝나지 않으니, 괴물에 가까워지면서도 인간이길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눈여겨본 성자들은 그를 충동질하였다. 갸륵한 사냥꾼. 너는 결국 인간이로구나. 아무리 괴물이 되려 발버둥쳐도 너는 결국 인간이니. 차라리 사람을 뛰어넘어 별이 되는 것은 어떠하니.
“죽을 기회는 많았어. 기회는 많았지. 그만둘 기회는. 얼마든지 많았지.”
그는 숨을 죽인 채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옥죄여오는 속삭임. 스산한 밤 공기. 거리를 달리는 발소리. 한껏 확장된 감각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내달리며 그를 까마귀에게로 인도하였다. 이 순간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웠다.
“그런데. 그런데 고작 이런 식으로. 죽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야.”
한참을 내달리던 그는 어느 쇼핑센터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옥상에 둥지를 튼 까마귀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저 까마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저 까마귀가 지식의 성자이자 관리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죽을 바엔. 죽일 수 있는 건 다 죽이고 가야지. 그러려고 나는… 여기까지 온 거니까.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이건 변하지 않아.”
대답을 끝낸 재환은 까마귀가 기거하는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길고 어지러운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