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30
끝자락의 풍경 (3)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몇 번의 밤이 반복되었을까.
또다시 눈을 뜬 재환은 자신에게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정신을 차렸음에도 그는 여전히 몽롱한 기분이었고,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 그랬지…’
그는 달빛에 비친 거리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겨울날 한기를 머금은 아파트 단지. 그곳에서 각자의 기행에 열중한 괴물들. 아이를 잃은 어버이의 곡소리. 넋이 나간 행인들의 느릿한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익숙했기에 끔찍한 일상이었고, 바라볼수록 아려오는 악몽이었다.
‘이게 내 선택이었지.’
사냥은 순조롭게 끝났다. 까마귀 성자는 그의 손에 살해당하였고, 거미 성자는 달을 지상으로 인도하였으며, 지상에 내려온 달은 그릇에 담긴 뒤 사냥꾼의 손에 살해당하였다. 그날 이후 회귀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안개의 장벽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지상에는 더 이상 성자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사냥꾼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고, 그 역시 회귀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그토록 갈망하던 ‘끝’을 손에 넣었다.
‘그래. 끝났어. 전부 다 끝났지.’
그는 저편에서 들려오는 사람과 괴물의 곡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저들이 어째서 울 수밖에 없는지 알고 있었다. 꿈은 깨어지고, 사람들은 눈을 떴으니. 지난날의 기억이 되돌아오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돌려줘!”
재환은 비명에 담긴 속내를 읽어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람과 괴물을 가릴 것 없이 주변에 모인 모든 이들이 그를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돌려줘요. 제발 되돌려줘!”
떠나간 별을. 깨어진 꿈을. 사라진 사랑과 낙원을. 당신이 부순 우리의 미래를.
“되돌려줘. 부탁이니 제발. 원래대로 되돌려줘. 제발! 제발! 제발 되돌려줘!”
“부탁이야! 부탁할게! 제발!”
미래를 볼 수 있는 만큼 과거 역시 볼 수 있었기에. 재환은 저들의 사연이 어떠한지 역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갓 태어난 아이를 잃은 신혼부부. 저들은 성자와 회귀 덕분에 아이를 되살려낼 방법을 찾았고, 그들의 은총 덕분에 아이가 장성하는 모습까지 보았다. 하지만 달이 떨어지고, 회귀가 끝나면서 그들의 꿈은 깨어졌다. 시간이 원래대로 되돌아오자 그들은 죽은 아이의 시신을 움켜쥐며 울부짖었다.
“사냥꾼. 사냥꾼 짓이야. 사냥꾼이 그분들을 쫓아낸 거야…!”
부모가 괴물이 되는 꼴을 눈앞에서 보게 된 학생이 말했다. 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그는 까마귀 성자의 은총을 받아 괴물이 된 부모를 모시고 살 방법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성자가 떠나고, 회귀가 끝나면서 부모와 소통하던 날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부모가 서로 죽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학생은 절규했고, 그는 이 일의 근원인 사냥꾼을 찾기 위해 밤거리를 헤맸다.
“사냥꾼을 찾아라!”
별들이 그려낸 이상향에 감화된 주민들. 혹은 별들이 자아낸 악몽에 적응한 소시민들. 그중에는 재환이 기억하는 얼굴 역시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대피소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 폐허가 된 도시에서 카페를 연 바리스타. 시범 사격을 권유하던 경찰. 물자를 모으기 위해 거리로 나선 자원봉사자. 기도를 멈추지 않던 종교인. 아이를 데리고 피난을 나선 부모.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그들이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든. 괴물의 몰골을 하고 있든. 별들이 그려낸 세상에 적응했던 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사냥꾼! 사냥꾼을 찾아라!]비명인 듯, 울분인 듯 모를 울음소리. 부르는 방식도, 발음도, 어순도 달랐지만, 그는 자신을 찾는 저 울음소리에서 평생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악몽이라 여겼던 세상이 저들에겐 희망이었고, 그 희망은 그의 손에 부서졌다. 이제 더 이상 회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괴물이 된 이들 역시 원래의 몰골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은 간절함과 비통함을 담아 사냥꾼을 찾았다.
[대답해! 대답을 내놔!]하나로 어우러진 목소리. 이 순간 그들은 서로의 겉모습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서로 같은 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뿐이었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사냥꾼. 당신은 어째서 우리의 꿈을 부쉈나요. 어째서 죽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막은 건가요. 왜 그토록 끝을 보지 못해 안달이 났나요. 어째서. 왜. 어째서.]하나로 뭉친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뇌리를 타고 흐르는 선율. 눈매를 자극하는 곡소리를 뒤로한 채 그는 아파트를 내려갔다. 한 손에는 피 묻은 소방도끼가 쥐어진 채였다.
[보세요. 당신이 부순 도시를. 남은 거라곤 폐허뿐인 세상을. 서울. 서울 너머. 세상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네가. 아니, 당신이 부순 거야. 당신이 부순 거예요.]갈피를 잃은 목소리. 저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분명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 목소리를 여러 번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어제였는지, 저번 달이었는지, 아니면 작년이었는지. 아니면 오늘 아침이었는지. 확신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기억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현기증에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죽는 것도 방법이겠지…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
그는 소방 도끼를 쥔 채로 현관 앞에 마주 섰다. 바깥에선 그를 발견한 사람과 괴물이 울부짖던 것을 멈춘 채 그를 응시했다.
[당신은 후회하나요.]사람과 괴물이 일제히 입을 모아 물었다.
길바닥. 아파트 외벽. 다른 단지의 창문 너머. 수백 개가 넘는 눈동자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고, 그는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과 괴물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아.”
그는 도끼를 휘두를 자세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죽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무기를 쥔 채였다.
“몇 번을 반복해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또 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이거 하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
악몽은 분명 끝났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났기에 서울은 여전히 멸망한 채였다. 폐허가 된 도시. 사람과 괴물의 시체가 널브러진 거리. 곳곳에서 풍겨오는 썩은 내와 피비린내. 죽지도 못한 채 신음하는 사람들. 길을 잃은 채 방황하는 괴물들. 끝없는 사냥 끝에 이성을 잃어버린 사냥꾼들.
모든 것들이 망가진 채였고, 재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이대로 몇 세대가 지나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이미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죽은 것은 죽은 채로. 고장 난 것은 고장 난 채로.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채로. 남겨진 사람과 괴물은 별을 잃은 세상에 새롭게 적응하여야 했다. 별이 떠난 세상에 사람들은 유기되었다.
[당신을 원망해.]차갑게 굳어버린 목소리. 그 말을 끝으로 하모니를 이루던 목소리는 산산이 흩어졌다. 남은 것은 갈 길을 잃은 살기와 형태를 잃은 울부짖음과 절규뿐. 거리에서. 아파트 외벽에서. 사방에 뚫린 창문에서. 사람과 괴물로 이루어진 군중이 일제히 재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신 때문이야. 전부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아니었어도. 당신만 아니었어도!
울음과 절규로 이루어진 원망을 한몸에 받으며, 재환은 가장 먼저 달려든 괴물의 머리를 소방도끼로 내려찍은 뒤 이를 발판삼아 군중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가 사람과 괴물 사이를 누비며 도끼를 휘두르자 피와 살점이 흩날렸고, 비명 사이에는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숨이 끊어지는 단말마가 섞여 들렸다.
‘어려울 건 없어.’
그는 쉴 틈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처음 괴물을 사냥했을 때처럼 거칠고 무자비하게. 사방에서 달려드는 사람과 괴물 사이를 누비며 몸놀림에 박차를 가하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그는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이미 익숙하니까.’
몸을 한계까지 내몰자 심장이 요동치며 피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릴수록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이 익숙한 지옥 길에 몸이 길들여진 탓이었다.
‘늘 그랬던 대로. 늘 해왔던 대로. 하던 일을 마저 하자.’
악몽은 끝났다. 이제 성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시간 역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달이 사라졌음에도 괴물이 여전히 괴물이듯, 회귀가 끝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사냥꾼이었다. 그렇기에 악몽이 끝났음에도 그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그는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와 위안을 느꼈다. 세상에 죽지 못하는 자들이 아직도 이렇게 많다니. 자신과 닮은 자들이 이토록 많다니. 형언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며 군중 속에 녹아들었다. 피와 살이 튀는 난투극 속에서 그는 저들과 동류였다.
[너는 그걸로 만족하는구나.]그렇게 한참 동안 피를 튀기고 있을 때. 어느새 주변에 있던 사람과 괴물이 시체가 된 순간. 홀로 남은 그는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백 장의 하얀 날개. 깃털만큼이나 빼곡한 눈알의 숫자. 천상에서 내려온 전령. 생사의 이치에 통달한 까마귀. 지식의 성자.
끝난 줄 알았던 악몽이 착각이었음을 깨닫자 재환은 식어가던 피가 다시 들끓는 기분을 느꼈다.
또 속였군.
적의와 함께 살의가 피어올랐고, 까마귀 성자는 그런 사냥꾼을 내려다보며 지상을 향해 천천히 하강했다.
[별로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그걸로 만족했어. 네 덕에 나는 시간을 벌었고, 보고 싶었던 건 전부 봤으니까.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 가능성. 변수. 그중에서 어떤 게 내게 자유를 줄 지도, 모두 알게 됐어. 전부 네 덕분이야.]재환은 땅으로 내려오는 까마귀 성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었고, 어디까지가 착각이었는지 이 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사냥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뿐. 자신의 생사를 농락하던 괴물이 버젓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도 축하해줄게. 늙은 사냥꾼.]거리는 천천히 좁혀져 갔고, 그는 까마귀 성자의 심장을 찾아 달려들었다. 다리의 근육이 터져버릴 기세로 내달리던 그는, 결국 까마귀 성자의 가슴팍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심장이 있어야 할 부분을 내리친 순간, 까마귀 성자는 한 마디의 속삭임을 남긴 채 새하얀 깃털들을 흩날리며 사라졌다. 마치 물거품이 되는 모양새였다.
[너는 네가 바라던 결말을 얻게 될 거야.]휘두른 도끼가 허공을 갈랐고, 그 자리에선 깃털들이 함박눈처럼 떨어지며 사냥꾼의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거리. 아직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일그러지는 의식의 경계. 속에서부터 치밀어오는 구역질 나는 감각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분노와 함께. 재환은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으며 두 눈을 파내었다. 이제 곧 깨어질 꿈이었기에 내지를 수 있는 절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