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35
사냥의 끝 (4)
무대. 그릇. 독약. 모든 준비가 끝나자 지하 깊은 곳에서 인형 하나가 깨어났다. 겉모습은 외투를 걸친 남자처럼 보였으나 인형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그가 태어난 이유는 다른 모든 사냥꾼의 대리인으로서 마지막 사냥을 행하는 것이었으니. 얼굴은 물론 성별과 나이마저 그에게는 필요 없었다.
뼈와 살은 죽은 사냥꾼의 시신과 유품으로. 흐르는 피는 그릇을 만들고 남은 괴물의 피로. 신경과 내장은 성자가 자아낸 실타래와 현자들이 고안해낸 기계장치로.
단 하룻밤을 위해 만들어진 사냥꾼의 대리인은 마지막 사냥을 위한 준비가 끝났음을 깨우친 뒤 자신을 담은 관의 문짝을 열어젖혔다. 사방에서는 달에 꽂힌 닻을 끌어당기기 위해 톱니바퀴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고, 톱니가 부딪치는 소리 틈새로 나지막하게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릇은 준비되었다.]인형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속삭임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그릇이 놓인 요람이었다.
[대리인이여. 우리 모두를 대신할 사냥꾼이여.]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인형은 요람 앞에 도착했다. 인형이 가까워지자 울음소리는 사라졌고, 인형은 조심스럽게 완성된 그릇을 가슴에 품은 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달을 사냥하라. 악몽의 근원인 달을 사냥하라.]남자면서 여자이고, 노인이면서 아이이며, 부모이면서 자식인 목소리. 죽은 사냥꾼들의 속삭임은 그 말을 끝으로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저들의 역할은 그릇이 완성된 시점에서 끝났으며, 저 마지막 속삭임은 몸과 마음이 모두 녹아내리기 전에 내지른 단말마가 시차를 두고 도착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인형은 뒤를 돌아보는 대신 지상을 향한 발걸음을 쌓아올렸다.
계단 하나에 유골 하나. 발소리 하나는 유언 한 마디. 그가 걸친 모든 옷가지는 사냥꾼의 유품이었었고, 그의 호흡 하나하나 역시 사냥꾼의 피와 땀에서 비롯되었으니.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인형은 사냥꾼을 대신하여 살아가야 했다.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말고,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마라. 네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무대에 올랐으며, 무엇을 행하고 죽어야 하는지 떠올려라. 단 하루. 오직 이날을 위해 우리는 네게 모든 것을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지상에 가까워지자 인형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되새기며 가슴에 품은 그릇을 소중히 껴안았다.
사냥꾼의 대리인. 사람과 괴물의 피와 살로 만들어낸 기계장치. 죽은 사냥꾼들의 의지 이외에는 감정을 느낄 수 없도록 설계된 인형.
그가 달을 담아낼 그릇을 다정하게 껴안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고,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그릇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유독 따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 어떤 사냥꾼이 오더라도 그릇에 애틋함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주여. 우리의 주인 된 분이시여. 우리는 어찌하여 당신이 어린아이의 몸에 담기려 하는지 알 수 없나이다.]계단의 끝자락. 지상으로 넘어서는 경계선에 다다르자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려왔다. 성자의 것인지, 사냥꾼의 것인지, 아니면 둘 모두의 것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었으나 인형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저 속삭임 역시 죽은 사냥꾼들의 단말마와 같은 종류의 잔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간절히 바라건대. 모든 것이 부디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당신이 처음 우리를 사랑하였듯이 마지막까지 우리를 사랑할 수 있기를. 당신과 가장 닮은 심장을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주었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자비를 베풀기를.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당신이 우리 모두의 어머니임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나이다.]속삭임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는 출구를 빠져나와 지하철의 타일을 밟았다. 여기서부터는 서울. 마지막 심장을 반납한 사냥꾼의 도시. 마지막 사냥이 행해질 무대.
이제 이 역을 빠져나와 도로로 나서면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될 터였다. 그렇기에 대리인은 사냥꾼의 피를 바치던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릇을 제단에 올리고, 마지막 사냥에 쓰일 무기를 챙겨가기 위해서였다.
독약 발린 수은 검. 마지막 성자 사냥꾼의 유품.
인형은 경건한 몸짓으로 제단에 ‘그릇’을 올린 뒤 칼날을 챙겼다. 제단 옆에 쓰러진 칼날에서는 죽은 사냥꾼의 잔향이 일렁거렸다.
한 소절. 한 소절.
죽은 사냥꾼이 남긴 잔향은 뱀처럼 인형 속으로 파고들었고, 울림이 가슴에 닿자 인형은 자신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칼날에 남은 잔향은 굶주림과 갈망이 없던 인형에게 사냥꾼은 독기를 불어넣었고, 사냥꾼의 집념을 받아 마신 인형은 달을 향한 살의가 무엇인지 깨우쳤다. 그렇기에 이 순간 인형은 맹독으로서 완성되어 비수를 가슴에 품었다.
‘나는 사냥꾼이다.’
인형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옛 사냥꾼이 칼날에 남긴 유언. 한때 성자를 사냥하던 남자의 집념이 마음이 없던 인형을 일깨웠다.
‘달을 사냥하자. 달을 죽여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끝내자.’
그는 긴 세월 지하에 파묻혀있던 나날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지상으로 향했다. 꾸물거릴 틈은 없다. 망설일 틈도 없다. 제단에 그릇이 바쳐진 이상 이제 곧 제의가 시작될 것이고, 마지막 제물이 덫에 걸릴 것이니. 이 길었던 사냥을 끝내려면 한시도 지체해선 안 되었다.
‘나가자. 지상으로 가자. 이 지긋지긋한 사냥의 끝을 두 눈으로 보자.’
칼날의 주인이 바랐던 것은 단 하나. 달의 죽음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는 것. 그 갈망을 대신하기 위해 그는 지상을 향해 달려나갔다. 바깥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유독 자욱하게 낀 안개와 푸른 달이 뜬 밤이었고, 자욱하게 낀 안개를 타고 거대한 거미가 내려오는 광경이었다.
경계의 거미. 하늘의 전령. 지상과 천상을 잇는 탯줄. 도시를 요람으로 만드는 자. 비밀과 은닉의 관리자. 사냥을 완성할, 마지막 제물.
저 위대한 짐승의 몸체를 보았다면 누구나 경배하였을 터였으나, 인형의 몸체를 얻은 사냥꾼은 거미를 노려보면서도 달려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몸으로 사냥할 수 없다면 인간의 몸을 쓰지 않으면 그만인 법이니. 이는 인간의 감각으론 인지할 수 없는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옛 사냥꾼이 고안해낸 지혜였으며, ‘불가해’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두뇌를 쥐어짜 낸 결과물이었다.
‘내려와라 괴물아. 어서 내려와 그릇을 찾아라. 오늘 네 피로 그릇을 채우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느리지 않은 속도로. 사냥꾼의 집념을 품은 인형은 달려나가 한 건물의 옥상에 자리 잡았다.
구름 위에서는 안개로 짜낸 실을 따라 거미가 내려오고, 지하철의 천장은 거미의 하강과 함께 좌우로 갈라졌다.
[어머니. 우리의 주인 되시는 분.]거미의 과업은 잘 여문 그릇을 수확하는 것이었을 터였고, 그렇기에 이 거대한 거미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느긋하고 경건한 자태로 달에게 바칠 그릇을 향해 내려와 손을 뻗었다.
[이리로 오소서. 당신을 위해 더 넓은 요람을 준비해두었나이다. 다음을 위한 희곡 역시 미리 짜 두었나이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무엇이든. 당신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쥐어짜 낼 수 있습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리할 것입니다.]그리고 거미가 정성스레 그릇을 쥐어 천상으로 올라가려던 순간. 사냥꾼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거미의 등에 착지하였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옛 사냥꾼들이 오랜 세월 연마해온 사냥 기술 덕분일 수도 있었고, 세상의 모든 이목이 거미와 ‘그릇’에 쏠려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만 알 수 있던 것은 이변을 느낀 거미가 거미줄을 움직이려 했고, 사방의 안개가 사냥꾼을 덮치려던 순간 머리를 향해 달려나간 사냥꾼은 그대로 거미의 두뇌를 향해 칼을 내려찍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렇군요, 어머니.]칼이 꽂힌 거미는 발버둥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 대신 심장의 성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역시 순리임을 깨우친 뒤 그릇을 제단에 내려놓았다.
[이 또한. 당신이 바라는 대로.]칼에 묻은 독이 스며들자 거미는 몸을 옆으로 뉘어 도로에 몸을 눕혔다. 마지막 순간. 평소였다면 능히 읽어낼 수 있는 ‘앞날의 흐름’을 어째서 읽어내지 못한 것인지. 그리고 어찌하여 성자 사냥꾼이란 괴물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인지. 요람을 준비하는 관리자로서 주인의 뜻을 읽어낸 거미는 조용히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마침내 마지막 관리자가 쓰러졌다.
그 사실에 기쁨에 겨운 듯 인형은 거미의 머리에서 칼을 뽑아들었고, 이와 동시에 서울에 드리웠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시퍼런 달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한 색채로 거리에 앉는다. 사라진 안개 너머에서는 밤하늘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었고, 밤하늘 곳곳에는 그릇에 담긴 도시들의 모습이 별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파리. 베이징. 뉴욕. 프라하. 오사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드니. 인천. 로스앤젤레스. 블라디보스토크. 콘월.
서울과 마찬가지로 그릇에 담긴 도시는 저마다 요람으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샬롬의 그림자를 탯줄 삼아 달을 중심으로 연결되어있었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릇이 완성되자 서울은 달을 향해 다가갔다. 달빛을 가리던 안개가 사라지자 그 찬란한 광휘가 지면에 그대로 내리꽂히고, 달빛을 견디지 못한 생물은 녹아내렸으며, 사냥꾼의 피와 살이 섞인 인형 역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그렇기에 인형은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기 전에 거미의 뱃속에서 거미줄을 꺼내 닻과 그릇에 연결한 뒤 쏟아지는 달빛을 피해 지하철의 그늘에 몸을 숨겼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릇에 달이 담기길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달이여. 잔혹한 우리의 신이시여.’
닻에 꽂힌 달은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고, 흐르는 피는 닻을 따라 지상으로 떨어졌으며, 마침내 지상에 도달한 피는 거미줄을 따라 그릇에 흘렀다.
1초. 1분. 1일. 1년. 혹은 1만 년.
찰나인지, 혹은 영원인지도 모를 시간 동안 인형은 달의 피가 그릇에 담기길 기다리며 닿을 않을 기도를 올렸다.
‘우리에게 처음 사냥을 허하였던 것처럼.’
탯줄에 달의 피가 스며들자 아이는 울음소리를 흘렸다. 새로 태어나는 것에 대한 기쁨일까. 아니면 살아가야 함에 대한 한탄일까. 그도 아니면 언젠가 죽을 날에 대한 절규일까.
희노애락을 품은 울음소리가 도시 전역에 울려 퍼지고, 이윽고 그릇에 온전히 피가 옮겨 담아졌을 때. 아이의 몸에 담긴 천국을 향해 인형은 다가갔다.
달빛에 닿아 피부는 녹아내리고, 뼈와 관절은 거미를 사냥할 때 부서졌다. 다만 그럼에도 몸을 움직일 수 있던 것은 그가 사냥꾼의 집념을 담은 그릇이었으며, 마지막 사냥을 위해 준비된 맹독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이 사냥의 끝에 일용할 양식이 남기를. 간절히 비나이다.’
그릇 앞에 도달한 인형은 두 손을 모아 아이의 목을 틀어쥐었다. 눈이 녹아내린 탓에 아이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설령 눈이 멀쩡하였더라도 표정을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울고 있다 하여도 그것이 슬픔일지, 아니면 기쁨일지. 그 속내는 오직 아이 자신만이 품은 비밀일 터였다.
한 호흡. 그리고 또 한 호흡.
아이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것과 함께 녹아내린 몸체가 아이의 피부에 닿았다. 죽은 사냥꾼이 흘린 피와 눈물이 떨어지는 모양새였다. 괴물은 사람의 피와 눈물을 마셨고, 사람은 괴물의 피와 체액을 마셨으며, 그릇은 사냥꾼의 모든 것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한 방울. 또 한 방울. 녹아내린 인형이 천국에 닿을 때마다 모든 것이 깨어지고 녹아내렸다.
시간과 공간. 인과와 법칙. 환상과 현실. 기억과 실체. 개념과 사물. 역사와 순간.
찬란한 광휘와 함께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처럼 덧없이 사라지고, 앞으로는 미지만이 남게 되려던 그때. 맹인이었던 인형은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인형은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끼며 기적처럼 눈을 뜨게 되었다.
마지막 자비일까. 아니면 찰나의 여흥일까. 눈을 뜨게 된 인형은 마지막 순간 아이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사실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인형의 의식은 덧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사냥은 완수되었고, 꿈은 깨어졌다. 남은 것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다.
에필로그-깨어진 꿈
사냥이 끝나고 꿈이 깨어지던 날. 문밖에서 들려온 우드득거리는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또 돌아온 건가.
반쯤 체념한 채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문을 열면 괴물이 된 아버지가 어머니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있겠지. 괴물이 된 아버지를 마주하면 또 사냥이 시작되겠지. 그는 여전히 회귀의 굴레에 길들여져 있었고, 늘 그랬던 대로 사냥에 나서려 하였다.
하지만, 거실로 나선 그는 도끼를 찾는 대신 선 채로 굳어버렸다. 조금 전 들었던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어머니의 허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라 괴물의 머리가 부서지는 소리였고, 머리를 부순 것은 괴물 자신이었다.
이미 토막 나 누워 계신 어머니의 시신. 그리고 침입자의 흔적 따윈 없는 거실의 풍경. 모든 정황이 아버지의 자살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늘 행해왔던 사냥의 루틴이 무너지자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쉬러 가셨구나.
마침내 긴 악몽이 끝났음을 직감했을 무렵. 그는 베란다로 걸어가 달빛을 확인했다.
새하얀 달빛.
사실 달빛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시체처럼 시퍼런 빛깔이 눈에 익은 탓이었다.
다만 오늘 밤에 뜬, 싱그럽게 빛나는 저 달빛에는 생기가 넘쳐 보였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의 피부색처럼. 한눈에 보아도 무해하고 순진해 보였기에 그는 더 의심하는 대신 소방 도끼 하나를 챙겨 바깥으로 나섰다. 지금은 꿈에서 깨어난 것을 실감하고 싶었다.
끝났구나.
그는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도로를 따라 거리를 걸어갔다. 기억을 되찾은 사람과 괴물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자살하거나, 아니면 잃어버린 낙원을 떠올리며 발광하였다. 숨을 죽인 채 날이 밝기 기다릴 수 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평범하게 살아왔던 소시민과 자신의 행적에 부끄럼 없는 철면피뿐. 대부분의 서울 시민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 마음껏 끝을 누렸고,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과 괴물만을 해치우며 마침내 쟁취한 끝을 만끽하였다.
드디어 끝났구나.
괴물과 광인과 백치가 넘쳐나는 거리. 그 한복판에서 그는 끝을 실감하며 무릎을 꿇었다. 다리의 힘은 풀렸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마음 같아서는 땅바닥에 키스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굳어버린 몸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괴물의 피도 마시지 않고 밤새 날뛴 탓에 탈진한 탓이었다.
이제는 나도 원 없이 죽을 수 있겠구나.
수백 년.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시간을 견뎌온 탓에 정신 역시 한계를 맞이한 지 오래였다. 기억을 다루는 요령을 깨우친 덕에 뇌가 터지지 않았을 뿐. 괴물의 피를 마시지 않아 연약해진 심신은 몰려오는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렇기에 그는 손에 쥔 소방도끼를 떨어트린 채 아스팔트 바닥에 등을 맡겼다. 마침내 바라 마지않던 끝을 쟁취하였으니. 이대로 죽어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서늘한 아스팔트 바닥은 관처럼 아늑했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은 향처럼 다정하였다. 사냥을 못하게 된 사냥개가 쓸모없는 것처럼, 사냥이 끝난 사냥꾼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역할을 다한 시점에서 살아남을 의미는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다정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였을 무렵. 그는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저물어가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생기 넘치는 저 달빛은 먼 옛날 떠올랐던 달의 환생인가. 아니면 그저 새롭게 태어났을 뿐인 신생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일 뿐인가.
목숨이 촛불처럼 타들어 가 끝에 이르렀을 때. 그는 처음 달빛이 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혹을 품었다. 미쳐 날뛰던 성자도, 속삭이던 사냥꾼도 없는 밤이었으니. 그가 품은 의혹에 대답해줄 이 또한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바로 다음 순간. 저 달이 비명을 지르더라도 이미 떠나간 이들은 침묵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흐릿해지던 시야가 조금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옛 사냥꾼들이 보증하고 성자들이 예견하였으니 그런 일은 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삶도 죽음도 동전처럼 뒤집어지는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절대’라는 말을 확증할 수 있을까. 먼 옛날 미쳐 날뛰었던 그 ‘달’처럼 저 달 역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을까.
시야가 또렷한 채로 의식을 잃어가던 그는 땅바닥을 긁으며 한 가지 욕심을 품었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기적과도 같이 목숨을 부지한다면. 그럴 수만 있으면 글을 쓸 수 있기를. 꼭 글이 아니어도 좋으니, 괴물을 사냥해온 나날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기를 원했다.
명예 때문은 아니었다. 동정을 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먼 옛날 괴물이 달과 함께 미쳐 춤추던 시절에 사람이 존재하였음을 누군가에게 남기길 원했다.
나 역시 당신처럼 좌절하였고. 당신처럼 울부짖었으며. 당신처럼 무너지고 부서졌음을 박제하여 전할 수 있기를.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지옥보다 더한 악몽일지라도 그 과정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속삭이고 싶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숨소리는 흐릿해지고.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달빛과 별빛이 하나로 어우러질 무렵. 그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성을 잃고 방황하는 광인일까. 성자를 그리워하는 신자일 수도 있었고, 사냥꾼의 살인을 단죄하러 온 협객일 수도 있었으며, 친지의 복수를 기억하는 원수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의식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느꼈다. 들어본 적 있는 여성의 목소리로,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기억나요? 나랑 했던 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들려오는 것은 끊어질 듯 위태로운 숨소리뿐. 그마저도 바람 소리와 괴물의 울음소리에 묻혀 들릴 듯 말 듯하였으니, 그녀의 귀가 밝은 편이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을 터였다.
“당신이 이겼어요. 진 건 나였고요.”
세상에는 여전히 괴물이 많았고. 미친 사람 역시 여전히 널려있었으며. 괴물이 없던 시절의 평화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만 그녀는 먼 훗날의 일을 생각하는 대신 쓰러진 사냥꾼의 숨소리를 확인한 뒤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저물어가는 저 달빛은 아기의 살결처럼 생기 넘치는 하얀색이었다. 먼 길을 오느라 지친 몸이었으나, 달의 침묵을 원하던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을 지새울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사냥꾼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라 마지않던 아침이 사냥꾼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