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17
달에서 온 색채 (5)
그는 꿈을 꾸었다. 괴물의 꿈이면서 사람의 꿈이기도 한 꿈.
그 꿈은 얼어붙은 별에 달빛이 내려오면서 시작됐다. 영원히 얼어있을 것만 같던 별은 달빛을 받아 바다와 강물, 그리고 빗물을 얻었다.
얼어붙은 대지에 물이 흐르자 달의 부스러기가 별을 향해 떨어졌다. 부스러기에 묻은 세균이 생명의 씨앗이 되어 별에 뿌리내렸다. 생명을 잉태한 별에서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나타난다.
인간은 짐승을 사냥하고, 식물을 기르며, 문명을 일궈냈다.
인간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움막을 지었고, 움막은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건물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명이 번성하여 별이 인간으로 가득 찼을 때, 달은 기쁨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천체가 회전하며 생명의 파동이 별을 훑고 지나간다.
사람들이 기쁨에 겨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기를 자랑하기 위해 배를 가르는 사람이 보인다.
달빛에 비친 인간의 장기가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다.
자신의 몸을 터트려 선율에 반주를 넣는 사람이 보인다.
몸이 터져나가는 선율은 덧없기에 황홀하다.
누군가는 팔다리를 여러 개 늘려 홀로 군무를 췄다.
누군가는 다른 이들과 몸을 합쳐 독무이면서 군무인 춤을 추었다.
하나는 여럿이 되고, 여럿은 하나가 된다.
생명의 이치가 담긴 춤사위는 사람을 진리로 이끈다.
그리고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진리를 깨우친 ‘인간’은 날개를 얻어 별이 되었다.
별이 된 ‘인간’은 달빛을 향해 날아갔고, 그들은 달빛과 함께 또 다른 별을 찾아 여정을 떠났다.
영겁의 세월을 거쳐 수많은 여정이 반복되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꿈에서 깨어난 것은 익숙한 모습의 별이 눈에 들어왔을 무렵이었다.
그는 그 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푸른 별의 이름은 지구였다.
* * *
찰나의 꿈에서 깨어나자 눈앞에 보인 것은 괴물의 팔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 줄기였다. 민달팽이를 닮은 촉수가 달려들자 재환은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본능적으로 촉수를 피했다.
‘방금 그건… 대체…’
속이 울렁거리고, 시야가 흐릿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떠오른 풍경을 이해할 틈도 없이 괴물의 공격이 이어졌다. 뱀처럼 뻗어오는 촉수를 도끼로 튕겨낸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뒤 숨을 들이켰다.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자살… 차라리 자살…’
현기증과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자 그는 진지하게 자살을 고민했다. 저 괴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깎여나가고, 마주 서는 것만으로도 이성을 갉아먹는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괴물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러니 이번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능력치를 더 높인 뒤 다시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번에는 ‘지혜’라는 능력치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실마리를 잡았으니, 지금 죽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 것도 아니었다.
사는 것은 추잡한 일이지만, 죽는 것은 정결한 일이다. 살아있는 것은 끊임없이 먹고 싸야 하지만, 죽은 것은 영원히 평화롭기 마련이니까. 지친 정신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유혹했다.
‘차라리… 차라리…’
그는 괴물의 형상을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에서 끊임없이 눈과 귀, 입술이 피어나는 괴물의 모습에 의지가 꺾여나갔다.
본능이 뇌를 향해 속삭였다.
도망치자. 일단은 도망치고 나서 생각하자. 정신이 멀쩡해야 뭐든 할 수 있는 법이니까.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다시 도전하자. 총알도 넉넉히 받아오고, 괴물 피도 충분히 마시고, 계획이랑 전략도 세워서 다시 도전하자. 뭘 해도 지금보다는 나을 테고, 지금보다는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이대로 난간에서 뛰어내려 다음을 기약하자.
그렇게 점점 뒷걸음질을 치며 옥상의 난간으로 밀려가던 순간, 그는 저편에서 또다시 날아오는 촉수의 끝자락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을 보았다.
촉수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촉수가 그를 ‘껴안기’ 위해 퍼져나갔다. 그리고 휘감겨 들어오려는 촉수가 그의 무의식을 자극했다. 그는 ‘껴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포옹…’
혐오스러운 자극이 되살아나자 굳어있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포옹. 아버지. 괴물. 포옹! 아버지!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과 함께 날아 들어오는 촉수의 중심부를 쳐냈다. 요행에 가까운 반격이었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
정신을 차린 그는 이를 악문 채 도끼를 연달아 휘둘렀다. 도끼날이 박힌 촉수에서 괴물의 피가 튀겼다. 괴물이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자 또다시 뇌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요행으로 얻은 기회를 살리는 것은 이제 그의 몫이었다.
‘이럴 때마다 매번 도망가라고?’
찰나의 순간에 여러 감각이 한 번에 소용돌이쳤다.
한계까지 몰려온 피로로 인해 코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아드레날린에 절여진 몸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휘청거린다. 눈앞에 침대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온몸이 휴식을 요구하면서 그를 충동질하던 찰나, 그는 촉수에 꽂힌 도끼에 힘을 줘 촉수를 땅바닥으로 내리쳤다.
워낙 힘줄이 질긴 탓에 이 정도 충격으로 잘리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는 땅에 처박힌 촉수를 왼발로 밟은 뒤 왼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남자에게 겨눴다. 발에 밟힌 촉수가 뭍에 나온 생선처럼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자살하면 안 되지. 누가. 누가 이 정도로! 누가!’
총구가 흔들리는 것을 억누르며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거리는 대략 7m. 몸통을 노리면 웬만해서는 맞을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그리고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뼈에 총상이 생기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동전만 한 구멍이었고, 잠깐이면 재생될 상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잠깐이라도 틈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
그는 괴물의 비명소리를 신호로 삼아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에게 7m정도는 단 두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온몸에 공기가 쓸리는 감각과 동시에 도끼를 쥔 팔이 괴물의 머리를 향해 포물선을 그렸다. 달려오는 관성이 그대로 담긴 일격이었다.
한 걸음 내디뎠을 때.
괴물이 다른 손으로 촉수를 뻗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저 촉수는 그에게 닿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대응이 너무 늦었다.
고작 반 박자 늦었을 뿐일지라도, 이 정도 거리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50마리 넘게 괴물을 사냥한 덕분에 익힌 감각이었다.
두 걸음 내디뎠을 때.
탄력을 받은 도끼가 괴물의 머리를 향해 날아든다. 세차게 바람을 가르고 나아간 도끼가 괴물의 살점을 터트리며 뻗어 나갔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괴물이 뻗었던 촉수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균형을 잃은 탓에 조준에 실패한 것이다.
‘부족해.’
머리를 터트리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이미 한 번 재생한 부분이니, 두 번 재생하지 말란 법은 없었으니까.
그는 옆으로 뻗어 나가던 도끼의 관성을 이용해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원심력까지 받은 도끼로 이번에는 괴물의 몸통을 후려쳤다.
‘부족해…’
도끼를 휘두르는 행위에 가속이 붙는다. 탄력을 받은 도끼가 짐승처럼 날뛴다. 심장의 두근거림에 온몸의 피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온몸을 태워 피어오르는 생명의 열기에 그는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더, 더, 더, 더!’
한 번 불이 붙은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더 빠르고. 다 강하고. 더 날렵하게!
저 괴물이 입도 놀리지 못하고, 팔조차 뻗을 수 없도록. 괴물을 토막 내고, 토막 난 뼈와 살을 조각내고, 조각난 살점을 도끼와 발로 짓이기는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순간 괴물은 온전히 괴물이었고, 그는 괴물을 토막 내는 것에 열중했다.
손의 피부가 찢어진다. 괴물의 살점이 찢겨나간다.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괴물도 비명을 질렀다.
감각이 문드러진다. 괴물 역시 문드러졌다.
수십, 수백 번의 도끼질이 끝날 무렵, 그곳에는 더 이상 괴물이 없었다.
괴물이었던 살점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재환은 숨을 몰아쉬며 잘게 짓이겨진 괴물의 살점을 바라봤다. 그리고 꿈틀거리며 재생하려는 살점들을 발로 짓이겼다. 그런 행위를 수십 번 정도 더 반복하던 그는, 어느새 재생하려는 징조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피로 물든 현장을 바라봤다.
‘끝난… 건가…?’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얼떨떨한 기분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더 이상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알이나 귀, 입술로 이루어진 날개가 돋아나지도 않았다. 귀를 찢는 비명이나 뇌로 파고드는 환영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달빛만이 옥상 위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겼다고?’
승리? 승리. 승리!
생경한 단어가 넘쳐흐른 나머지, 그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승리. 승리라니. 사람이 괴물이 되는 현상만큼이나 기이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하하…”
괴물이 보여준 풍경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었다.
과거이자 미래인 기억. 종말과 멸망, 창세와 탄생이 담긴 이미지.
그 위대한 이미지를 보여준 당사자는, 지금 잘게 다져진 살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푸하하하하하!”
승자와 패자가 역전된 아이러니한 광경 상황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미친 괴물을 상대로 승리라니!
승리, 승리, 승리!
이 말도 안 되는 결과에 그는 부조리함을 느꼈다. 사람을 침으로 쏘아 죽인 벌레가 된 심정이었다.
“하하….하… 하아…”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나니 몸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몸이 점차 나른해지면서 미뤄뒀던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온다.
흥분으로 마비됐던 통각이 되돌아오면서 온몸이 근육통과 찰과상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통제도 받아오는 건데.’
그는 아쉬워하면서도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자 피와 살로 범벅이 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릎을 꿇은 뒤 도끼로 패인 바닥에 고여있는 피를 양손으로 담았다. 죽은 괴물의 피를 마시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그릇에 피가 가득 찼습니다] [피를 사용해 그릇을 강화하십시오] [문자를 읽어 강화 대상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피가 그릇을 강화합니다] [지력이 상승하여 더 많은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상승한 지력: +3] [괴물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현재 레벨: 63] [강화 가능 능력치(+10)] [근력: 30] [민첩: 20] [체력: 10] [내구: 20] [재생: 10] [지혜: 22] [현재 지력: 3]‘많이도 오르네.’
재환은 괴물 열 마리를 잡은 것 이상으로 레벨이 오르는 것을 담담히 살펴봤다. 레벨이 오른 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이 괴물이 다른 괴물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은 직접 상대하면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 괴물은 아무리 육체가 뛰어나도 지혜를 올리지 않았더라면 마주 서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대였다.
‘지력이라… 지능? 아니면 인지력, 인지 능력 같은 건가?’
그는 획득한 능력치를 모두 재생에 분배했다. 무리하게 몸을 사용한 반작용으로 온몸의 근육이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의약품이 부족해질 것을 생각하면 재생에도 어느 정도 투자할 필요는 있었다.
‘그런데…’
재생 능력치의 효과로 근육의 통증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피로는 여전히 남아 있었어도 몸이 나아지는 기분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저건 도대체 언제부터 날 보고 있던 거지?’
하지만 몸 상태가 나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자신을 지켜보는 ‘무언가’의 시선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을 부유하는 그 ‘무언가’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무언가’가 흐느적거리는 수백 쌍의 날개로 둥둥 뜬 채 고고한 자태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수백 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 괴수가 기척도 없이 나타난 것을 보며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불가해가 나타났을 때의 감각이었고, 곧이어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사냥 대상: 불가해(不可解)] [분류: 추종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괴물 중 하나.] [사냥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쳐다보고 있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면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는 시선을 거뒀다. 그러자 두통이 한결 나아지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지력 때문에 그런 건가…? 아니면 지혜?’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가해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단지 그 거대한 날개들을 흐느적거리며 그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하늘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뒤로 한 채, 그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마트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좀 쉬고 나서 생각하자.’
불가해를 상대한 후유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불가해와의 싸움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혹사시키는 일이었고, 그런 상태로 저 괴물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결국 남은 일은 휴식을 취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것뿐이었다.
마트에 전시된 가구 코너를 찾아낸 그는 새 이불의 포장을 뜯은 뒤 침대 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늘 밤 저 괴물의 괴물이 이 건물을 부술지, 아니면 그가 무사히 아침을 맞이할지.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하늘의 뜻에 달려있었다. 쉬는 것 하나마저 운에 맡겨야 하는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