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47
사냥하거나, 사냥당하거나 (3)
3월 12일 오후 11시 35분.
사냥을 끝내고 대피 구역의 숙소에 도착한 재환은 창밖에서 추적추적 쏟아지는 비를 바라봤다. 비는 저번보다도 더 이른 시점부터 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망자 새끼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의자에 앉아 지난 결투들을 떠올렸다. 그는 디에고에게 패배한 뒤에도 3번 더 망자들에게 도전했고, 그 3번 모두 디에고에게 당했을 때처럼 비참하게 패배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미 죽은 사냥꾼들에게 농락에 가까운 패배를 4번씩이나 겪은 것은 그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못 이겨. 피지컬 차이도 심하고, 사람 상대하는 경험 차이도 심해. 이대로는 100번 도전해도 100번 지겠지.’
그는 괴물을 사냥하는 것이라면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사냥한 괴물의 숫자를 전부 합하면 어림잡아 천 마리가 넘은 만큼, 웬만한 괴물은 이제 별다른 체력 소모 없이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냥꾼을 상대하면서 괴물을 사냥하는 것과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인 괴물과 달리 사냥꾼은 도구와 속임수를 능숙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긴, 괴물 사냥꾼이 괴물보다도 멍청하면 그게 이상한 거긴 하지….’
샬롬의 사냥꾼들은 영리했다. 첫 번째로 싸운 사냥꾼인 디에고는 연막탄으로 자신의 몸을 숨긴 뒤 그를 농락했고, 두 번째로 싸운 사냥꾼인 마리는 그가 자리 잡은 건물을 통째로 폭발시켰으며, 세 번째로 싸운 사냥꾼인 빌헬름은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물약을 써서 그를 암살해버렸고, 마지막으로 싸운 사냥꾼인 알프레드는 그가 저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다른 건물의 철문을 뜯어서 엄폐물로 사용한 뒤 그가 자리 잡은 건물로 돌격했다.
그리고 건물 내에서 알프레드와의 정면승부마저 패배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고민했다.
‘능력치를 더 올리고 도전하는 방법도 있겠지. 피지컬 차이는 능력치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
그의 능력치는 현재 지혜에 지나치게 편중되어있었다. 지혜가 낮을 때 성자의 지식을 떠올리면 그대로 죽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혜를 한계까지 올리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은 그 역시 내심 인지하고 있었지만, 성자의 지식으로 인해 셀 수 없을 만큼 죽어야 했던 기억은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어 그의 선택을 방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혜에 투자할 능력치를 다른 곳에 분배한다는 선택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천천히 생각하자. 아직 시간은 있어… 이제 암브락사스는 없으니까. 일주일 만에 서울이 망하는 경우는 없겠지.’
그는 창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암브락사스를 꺾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심장을 받았던 그 순간, 그는 성자에게 심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성자에게 심장이란 지상에서 머물기 위한 닻이었고, 심장을 잃은 성자는 더 이상 지상에 머물 수 없기에 하늘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심장이 자신에게 녹아든 이상, 그녀가 다시 되돌아오진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이 비만 안 내렸어도, 더 여유 있게 도전해 보는 건데…’
하지만 암브락사스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되돌아갈 때마다 비가 내리는 시점이 빨라졌고, 다른 성자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시로 들려오는 성자의 비명 소리가 그의 신경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
그는 눈을 감은 뒤 저편에서 들려오는 성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어느 성자가 세차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누가! 누가 감히 ■■■■■를!] [■■■■■! ■■■■■! ■■■■■!] [■■■■■! 왜! 당신은! ■■■■■!]바깥에서 요동치는 성자의 목소리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높아진 지력과 사냥꾼으로서의 직감이 저 목소리의 주인이 이 비를 내리는 거라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원통함을 읽어낸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민했다.
‘사람한테 친절한 성자는 아니야. 저대로 놔두면 크게 사고를 치겠지. 암브락사스 때처럼.’
점점 거칠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그는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이대로 성자를 사냥하러 가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다시 샬롬으로 가서 사냥꾼을 상대하는 것이 옳은지 결정해야 했다.
‘나중을 대비하면 실전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실 그래서 지금까지 총이랑 탈바꿈으로 상대하려 했던 거고.’
그는 샬롬에 가기 전까지 사냥꾼을 상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마태오 신부를 상대로 싸워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사냥꾼이 아니라 괴물에 가까웠으니 예외에 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젠가 사냥꾼과 싸워야 할 경우를 대비해서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샬롬의 사냥꾼들에게 도전했다.
강철우와 한사랑, 그리고 설지훈을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사냥꾼 역시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변수 덩어리라고 봐야 했기 때문이다.
‘한사랑… 그 여자도 용산으로 간다고 했지….’
그는 자신의 몸을 차지한 사냥꾼들이 모두 용산역으로 갔던 것을 떠올렸다. 디에고에게 패배한 이후, 그는 대피 구역에 도착할 때마다 한사랑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그때마다 그녀가 용산으로 갔다는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는 행적이 달라진 것을 확인한 그는 그녀가 어째서 자살했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도 기억이 유지되는 거야… 위대한 피 때문에 지력이 높아져서 그런 거겠지…’
한사랑의 자살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완전히 미쳐버렸거나, 시간이 되돌아간다는 걸 알아낸 게 아닌 이상 자살을 해서 용산으로 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용산이라……’
그는 낙원의 지배인이 되었을 당시의 기억과 암브락사스가 보여줬던 환영에 대해 떠올렸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서울의 밑바닥에는 ‘사냥꾼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그곳에는 다수의 사냥꾼들이 서로를 죽여서 피를 모으고 있으며, 이 모든 일에는 ‘사냥꾼 성자’가 연관되어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용산에 뭔가가 있긴 있는 거야. 그게 사냥꾼 성자랑 관련이 있을 테고.’
그리고 처음 괴물의 피를 마셨을 때, 속삭임은 그에게 ‘우리는 사냥꾼이다’라고 말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창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노려봤다. 이제는 자신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속삭임의 정체가 무엇인지 실마리를 잡은 것만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그냥 꼭두각시 신세일지도 모르지. 내 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성자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걸지도 모르고.’
아직까지는 추측의 영역에 불과했지만, 그는 사냥꾼 성자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목소리의 주인일 거란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샬롬의 사냥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냥꾼 성자’에게 피를 바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망상은 그만하자. 생각만 하다 보면 끝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 용산으로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샬롬의 사냥꾼들이 용산으로 향하던 일을 떠올리며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볐다.
‘서울 중심부에 대한 기억만 필름이 끊긴 것처럼 흐릿한 것도 수상한 일이니까. 힘을 기를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
‘사냥꾼 성자’가 다른 성자들 중에서도 격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만나기 전에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암브락사스 때 그랬던 것처럼 정신이 무너져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다시 샬롬으로 가자. 아직 안 써본 방법이 남아있으니까.’
결국 그는 샬롬에 방문해 사냥꾼과 싸우는 것을 택했고,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최후의 수단’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준비한 마지막 무기는 괴물을 사냥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장에게 빌려온 대전차 로켓 판처파우스트 3이었다. 이 무기를 빌리기 위해 대대장을 설득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빌리는 것에 성공하자 이만큼 든든한 무기가 또 없었다.
물론 탱크에게나 쏴야 할 물건을 사람에게 겨눈다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그에게는 체면을 차릴 자존심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못 이길 게 뻔하니까. 애초에 샬롬 사냥꾼들도 샬롬식 무기를 쓰는데, 나라고 현대식 무기 쓰지 말란 법은 없지.’
마지막으로 샬롬에 방문하기로 결정한 그는 우의를 뒤집어쓴 뒤 장비를 챙겼다. 그동안 샬롬식 무기에게 당했던 애환을 현대식 대전차포로 되갚아줄 생각을 하자 한편으로는 설레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 간사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는 비 내리는 거리를 따라 지하철로 향했다.
* * *
샬롬에 도착한 재환는 광장이 보이는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가 미리 자리를 잡았다. 지붕의 구조가 뾰족한 탓에 자리를 잡기에는 불편한 위치였지만, 실내에서 대전차 로켓을 쏴서 후폭풍을 뒤집어쓰는 것보단 나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개의 벽이 좁혀져 오는 것과 함께, 그는 사냥꾼이 광장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재환은 자신을 발견한 뒤 인사를 건네는 사냥꾼을 향해 판처파우스트 3을 겨냥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지혜를 투자하고 남은 능력치 중 대부분을 민첩에 투자했다.
‘치사하다고 하진 맙시다.’
순식간에 조준이 끝나는 것과 함께 대전차 로켓이 사냥꾼을 향해 날아갔다.
‘사냥꾼이 무기를 가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까.’
한순간에 200m를 주파한 대전차 로켓은 사냥꾼에게 명중했고, 재환은 이름 모를 사냥꾼이 폭발에 휩싸이는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한 줌의 양심이 비겁한 방법으로 사냥꾼을 쓰러뜨렸다는 죄책감을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안타까움은 폭연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폭연이 걷히고 나자 만신창이가 된 사냥꾼이 넝마가 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씨발…”
그는 판처를 재장전하는 대신 K1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사냥꾼을 향해 K1을 조준하며 되뇌었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세찬 총성이 한동안 이어졌고, 빈사상태였던 사냥꾼은 결국 쏟아지는 총알 세례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는 쓰러진 사냥꾼에게 다가가 탈바꿈을 꽂아 넣는 것으로 사냥을 마무리했다.
그는 사냥꾼이 산산조각 난 자리에 나타난 출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어떻게 사람이야… 괴물이지.”
괴물보다 더 괴물 같았던 사냥꾼을 뒤로한 채, 그는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사냥꾼의 기억을 통해 그가 어떻게 대전차 로켓을 견뎌냈는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