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91
만인의 지옥 (8)
악마가 내건 계약의 조건은 간단했다.
범죄자를 고문하고, 그 모습을 자신에게 질릴 때까지 보여주는 것. 악마는 오직 이것만을 힘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내걸었고, 남자는 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쓰레기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질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만만해하던 남자에게 그릇에 임한 악마는 충고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부 허상이며, 영원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언젠가 결국은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죄수들이 꾸는 악몽도 언젠가 끝나는 날이 올 것이고, 그날이 오면 아무리 견고하게 쌓아올린 지옥일지라도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복음에 가까운 충고에 남자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날이 오기 전에 죄수들의 정신을 부숴놓겠다. 아무리 시간이 되돌아가도 잊을 수 없도록 갈기갈기 찢어놓겠다.
살아있는 것이 저주스럽도록, 언제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뇌리에 새겨놓겠다.
한이 서린 남자의 말에 악마는 웃었다.
한동안 그에게서 좋은 악상을 뽑아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예언에 가까운 수준으로 강력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숫자를 세는 것마저 무의미해질 정도로 많은 날이 지난 어느 날,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지옥에 질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죄수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더라도 처음 복수에 성공했을 때만큼 즐겁지는 않았고, 희열이 느껴지지도 않았으며, 만족감 역시 날마다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권태는 그의 마음을 서서히 좀먹고 있었고, 그는 언젠가 악마의 말대로 이 지옥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에 점점 불안해했다.
만약 지금까지 망가트려 놓은 죄수들의 정신이 어느 날 백지상태가 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웃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도저히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불만과 불안의 굴레에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갔고, 그런 그에게 악마는 마지막 악보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영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영원에 가까운 찰나라면 있을 수 있다. 시간의 수레바퀴에도 변하지 않을 단 하나의 선율. 몸과 영혼을 바쳐야만 연주할 수 있는 이 선율을 당신이라면 분명 연주해낼 수 있다.
악보를 받아든 남자는 그 악보를 보는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이 악보를 연주하는 순간 자신이 관리하던 죄수들의 정신은 영겁의 지옥 속에서 영원토록 썩어가게 될 것이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몸과 정신 역시 산산이 조각나게 될 것이 분명했으며, 자신이 이 악보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까지 한순간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남자는 악보를 두 눈에 새겨서 외운 뒤 자신의 입에 쑤셔 넣었다.
악마가 말한 ‘종말의 날’이 언제 오더라도 이 악보를 연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래로 쌓아올린 지옥의 끝이 다가왔을 때, 그는 피와 살로 연주하는 피날레를 준비했다.
* * *
탈바꿈의 칼날로 강철우의 어깨를 꿰뚫은 재환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강철우에게서 흉흉한 기운이 풍겨오는 것과 함께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관객. 관객들은 어떻게 됐지?’
그가 강철우의 오른손을 핸드캐넌으로 쐈던 것은 자해를 하는 것이 객석에 앉은 관객들을 조종해 통증을 전이시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강철우가 대못으로 자해를 하려는 것을 막았지만, 그것이 관객들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것으로 이어질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객석을 바라본 재환은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수만 명의 관객들이 대못으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을 보며 서늘함을 느꼈다.
이제 곧 무언가가 시작된다.
그렇게 판단한 재환은 탈바꿈의 칼날을 뽑아낸 뒤 곧바로 강철우에게서 멀어졌다. 갑옷 틈새로 칼날을 찔러넣어 피해를 누적시키려던 계획이 수틀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심장. 지금부터는 한 번에 심장을 노려야 돼.’
재환은 핸드캐넌의 탄환을 재장전하며 강철우를 노려봤다.
‘양팔을 못 쓰는 지금이 적기야. 이번에는 손으로 막는 건 못할 테니까. 가슴의 갑옷으로 막는 대신 손으로 막았다는 건, 핸드캐넌으로 저 갑옷의 가슴팍을 뚫을 수 있다는 거겠지.’
핸드캐넌의 탄환이 강철우의 심장을 감싼 갑옷을 뚫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별의 심장이 성자의 힘을 사용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심장 부분에 장갑을 덧대어뒀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환은 핸드캐넌의 가늠쇠 너머로 강철우를 노려보며 결정을 끝냈다.
‘일단 쏘고 봐야지. 고민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에게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일은 이제 새삼스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서울이 어느 날 미쳐버린 이후 확실하게 보장된 것 따위는 없었고, 무엇이 언제 변해버려도 이상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재환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핸드캐넌의 총성이 경기장을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강철우의 가슴이 꿰뚫렸다.
재환은 별의 심장이 으스러지면서 수은 빛깔의 가루가 허공에 퍼지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끝났다.’
그는 집중력이 한껏 끌어올려 진 덕분에 별의 심장이 부서지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보이는 것을 두 눈에 담았다.
‘드디어 끝났어. 이걸로 자경단도 해체되겠지.’
별의 심장은 별에서 내려온 괴물인 성자에게 닻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닻을 잃은 배가 바다 위에서 일렁이는 파도에 떠밀려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성자 역시 심장을 잃게 되면 지상에서 힘을 잃고 천상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괴물도 어쩔 수 없는 걸, 사람이 어쩔 수 있을 리 없지. 마지막에는 기운을 잃은 것 같긴 했지만, 그렇게 지독했던 블레인도 결국은 심장을 잃고 승천해버렸으니까.’
그렇게 조각 난 별의 심장이 허공에 퍼지는 것 바라보던 그때, 재환은 자신의 귓가에 기이한 음색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기이한 음색은 객석에 앉아 있는 수만 명의 스크린 관객들에게서 들려오고 있었고, 재환은 곧이어 스크린 관객들의 모습이 기이하게 뒤틀리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나…’
재환은 쓰러진 강철우의 시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 뒤 앞으로 나아갔다.
‘차마 자기 손으로 끝낼 순 없으니, 내 손을 빌린 거였어. 마음만 먹으면 심장 근처에 쇳덩어리를 더 끼워 넣는 것 정도는 미리 준비해 둘 수 있었을 테니까.’
배에 대못이 박힌 스크린 관객들의 모습은 썩어 문드러진 채 비명을 지르는 죄수들의 모습을 비췄고, 재환은 쓰러진 강철우의 투구를 벗긴 뒤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죽어야 완성되는 복수라…’
재환은 죄수들의 비명으로 연주되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닥을 적신 별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복수를 할 때는 무덤을 두 개 준비하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복수가 끝나면 자기도 무덤에 묻힐 각오를 해야 하는 거니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죄수들의 탄식은 죽은 사냥꾼을 위한 장송곡이 되었고, 조각난 별의 심장은 썩어 문드러져 새까매진 스크린 인간들의 곳곳에 스며들어 반짝거리는 밤하늘이 되었다.
‘자경단이 없어져도 죄수들은 영원히 고통받겠지. 이 악몽을 아예 끝내버리고, 서울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는 게 아닌 이상… 영원히 그럴 테니까.’
두 손에서 수은 빛깔로 빛나는 별의 심장을 바라보며 재환은 생각에 잠겼다.
별의 심장이 부서진 여파로 경기장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예지력이 돌아온 덕분에 그는 자신이 무너진 경기장의 파편 때문에 죽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능성은 낮겠지. 성자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허약하고, 벌레나 다름없는 처지니까. 방금 전에도 강철우가 좀 더 버티려고 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였고.’
강철우의 몸과 마음이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람의 몸과 마음으로 성자의 힘을 다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미친 짓이었고, 집념과 지혜가 없다면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실성해버리거나 두뇌가 터져버릴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성자가 아닌 인간의 몸으로 해왔던 강철우의 몸에 부담이 쌓이지 않을 리가 없었고, 재환은 그의 몸 상태가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결국 강철우의 죽음이 반쯤은 자살이나 다름없었고, 재환은 자신이 조금 더 일찍 강철우를 만났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성자의 힘을 빌려 쓰는 사냥꾼도 겨우 이겼는데, 성자들을 사냥해서 악몽을 끝낸다는 건 미친 짓이지. 강철우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죽을 수 있었던 거고.’
용산에는 사냥꾼 성자가 있었고, 강철우는 사냥꾼들이 용산으로 가려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곳에 이 악몽을 끝낼 가능성이 실낱같이 남아있었고, 그 일말의 가능성이 이 악몽을 끝낼 실마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사냥꾼 성자가 사냥꾼 편일 거라는 보장은 없고, 설령 사냥꾼 편이라고 해도 사람의 편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 성자란 것들은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미쳐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사람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지.’
재환은 두 손에 담긴 별의 심장을 입으로 가져갔다. 경기장이 무너지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고, 죄수들의 비명으로 연주되는 음악은 점점 더 빠른 박자로 연주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지. 내가 아무리 나약하고, 상대가 아무리 초월적이라고 해도, 이대로 주저앉아있을 순 없으니까.’
수은 빛깔로 빛나는 핏물과 살점을 흡수한 그는 가슴에서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았다. 이대로 저 음악 소리와 함께 경기장에 파묻혔다간 저 죄수들과 똑같은 신세가 되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너질 땐 무너지더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수는 하고 가야 하는 거니까. 자기 목숨으로 죄수들을 부숴버린… 이 인간처럼 말이지.’
강철우와는 처음부터 성격이 맞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복수에 눈이 먼 인간이었고, 자신의 뜻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않은 외골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환은 죽은 사냥꾼이 완수해낸 복수만큼은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자신의 부모가 죽는 모습을 수백 번이 넘도록 겪게 만든 이 세상을 미칠 정도로 증오했고, 할 수만 있다면 강철우가 해낸 것 이상으로 되갚아주고 싶었다.
“다시는 보지 맙시다.”
수류탄이 터지기 직전, 그는 죽은 사냥꾼에게 말을 남겼다.
“당신이나 나나 별로 다를 바 없는 처지니까.”
그 말을 끝으로 수류탄이 폭발했고, 재환의 몸은 산산이 조각나 경기장에 흩어졌다.
이제 경기장에 남은 거라고는 영원토록 썩어가면서 비탄과 절규를 연주하게 될 죄수들뿐이었고, 이들의 음악은 경기장 바깥을 넘어 악상의 성자의 귓가에 흘러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