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 Hunter of Destroyed Seoul RAW novel - Chapter 95
공방과 신비의 도시 (1)
열차가 승강장에 멈춰 서자 사냥꾼들은 각자 짐을 챙겨서 내리기 시작했고, 재환은 한사랑을 따라 열차를 내리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하루는 바쁠 거예요. 첫날에는 밤이 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 많거든요. 혈맹이랑 공방에도 들러야 하고, 거점도 구하고, 총알이랑 보조무기도 만들어야 하죠. 매번 하는 일이긴 하지만, 항상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라니까요.”
열차에서 내린 재환은 승강장에 샬롬 출신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보며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샬롬의 시민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이들의 조력을 받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혈맹이라… 이름만 들으면 사냥꾼들 조직을 부르는 말인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아요?”
“네, 맞아요. 일종의 사냥꾼 협회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사냥꾼들끼리 모여서 괴물의 피를 나누기로 약속하는 거죠. 일종의 점조직 같은 게 여러 개 있고, 서로 괴물의 피를 공유하면서 힘을 기르는 거라고 보시면 돼요.”
한사랑은 그렇게 말하며 역을 빠져나왔고, 그녀를 뒤따라가던 재환은 지하철에서 보았던 샬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감회에 젖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샬롬은 결투에 임하는 단 두 명의 사냥꾼을 제외하면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도시였지만, 지금 보게 된 샬롬에는 이국적인 옷을 입은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눈 안경을 쓴 신사, 드레스를 늘어뜨리며 귀금속으로 치장한 귀부인, 마차를 몰고 가는 마부, 연미복을 입은 채 걸어가는 부부,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용인들, 책이 들어있는 가방을 한 손에 쥔 채 걸어가는 학생, 넝마를 걸친 채 구걸을 하는 부랑자까지.
살아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샬롬의 모습은 비록 우중충한 안개에 가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번화해 보였고, 한사랑을 따라 샬롬의 거리를 걷던 재환은 ‘살아있는’ 거리의 모습을 보면서 서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서울 역시 이토록 번화했던 것은 마찬가지였고, 할 수만 있다면 괴물을 멸종시켜서 서울의 모습을 번화했던 시절로 되돌리는 것이 그의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혈맹이란 건, 지구 출신 사냥꾼들이 중심이 되나 보네요.”
재환은 사뭇 평화로워 보이는 샬롬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해했다. 그는 이 거리의 모습에서 감회를 느끼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거리의 모습이 일종의 신기루나 다름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대의 샬롬에는 아직 괴물이 대대적으로 나오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만약 괴물이 본격적으로 나왔으면…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일 리가 없으니까요.”
그는 괴물이 나타난 직후 서울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는 한사랑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말이 맞아요. 푸른 달이 뜨기 전에도 괴생명체나 괴현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괴물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건 오늘 밤부터거든요. 오늘 밤부터 사람들은 괴물이 되고, 괴물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괴물에게서 살아남아야 하는 거죠. 시민들이든, 사냥꾼이든, 처지가 비슷한 건 마찬가지예요.”
한사랑은 그렇게 말하며 샬롬의 광장을 향해 걸어갔고, 광장의 근처에 있던 선술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사냥꾼 혈맹 중앙 광장 지부에요. 외지에서 온 사냥꾼들이 모여서 괴물의 피를 공유하고, 정보와 귀중품 같은 걸 교환하는 곳이죠. 원래는 그냥 술집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들 여기를 모임 장소로 쓰더라고요. 아예 담당 사냥꾼까지 생기기도 했고요.”
재환은 한사랑을 따라 건물의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적지 않은 숫자의 사냥꾼들이 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거나 물건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재환은 사냥꾼들이 얘기를 나누는 대상에 샬롬의 시민들 또한 포함되어있음을 보면서 의아해했다.
그리고 재환의 그런 모습을 눈치챈 한사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능숙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샬롬의 유력 인사들이에요. 저 사람들한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설명하고, 지원을 약속 받을 수 있게 설득하는 게 먼저 온 사냥꾼들이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주로 공방이나 대학 출신도 있고, 나중에 사냥꾼이 될 사람들을 설득하는 편이죠. 오늘 밤부터 도시가 난장판이 될 텐데, 아군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한사랑은 그렇게 말한 뒤 재환을 접수대로 안내했고, 재환은 그곳에서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한 뒤 사냥꾼 혈맹에 가입했음을 증명하는 명패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외국어여도 말이랑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걸 보면… 여기가 지하철에 있던 그 샬롬이 맞긴 한가 보군…`
그렇게 명패를 챙긴 재환은 다른 사냥꾼들과 대화를 나누던 한사랑에게 돌아와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는 쉽게 가입하게 해주네요. 혈맹이라길래 좀 더 깐깐할 줄 알았거든요.”
재환의 말에 한사랑은 먼저 대화를 하던 사냥꾼과 얘기를 끝낸 뒤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재환님도 알고 있겠지만, 사냥꾼들은 보통 서로 거리를 두는 편이에요. 일종의 동족 혐오 때문이기도 하고, 다들 어느 정도는 미쳐 있는 게 정상일 지경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해 깊게 관여를 안 하려고 하고, 큰 기대도 안 하게 되는 거죠. 새로운 사냥꾼이 왔는데 별 관심이 없는 건,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한 거죠.”
한사랑은 재환이 혈맹에 가입하자 다음 목적지를 향해 안내하려 했지만, 재환은 곧바로 그녀를 따라가는 대신 제자리에 서서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 말이 맞죠. 사냥꾼들끼리는 서로 역겨워하기 마련이니까요. 서로 거리를 두는 게 정상이죠.”
재환은 그렇게 말한 뒤 한사랑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요. 나도 사냥꾼이고, 당신도 사냥꾼인데, 왜 이렇게 나한테 협력하려고 하는지 말이에요. 보아하니 당신도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은데… 첫 주차 정도는 나 없이도 무사히 보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출구로 걸어가던 한사랑은 발걸음을 멈춘 뒤 등을 돌렸고, 그 순간 재환은 한사랑의 표정에서 스쳐가는 ‘무언가’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무언가’는 회귀자 특유의 허무함과 고독감처럼 보였고, 재환은 한순간 뿐이지만 한사랑의 진심을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재환을 바라보던 한사랑은 숨을 들이쉰 뒤 재환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맞아요. 첫 주차 정도는 재환 님이 없어도 보낼 수 있죠. 아니, 사실 혼자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멀리 갈 수 있어요. 저도 여기서 기도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한사랑은 그렇게 말한 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를 본 순간 재환은 그녀가 한때는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던 자원봉사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문제는 여기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실은 점점 알게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내 힘만으로는 여기서 마지막까지 버틸 수 없구나. 마지막까지 남는 건 내 역할이 아니구나. 그런 것을 말이에요. 아무리 죽을 때마다 기억이 희미해져도, 가장 중요한 것들은 마지막까지 남는 법이니까요.”
한사랑의 표정을 살피던 재환은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서 회귀자들 특유의 허무감이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냥꾼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었던 것도 그런 거겠지.’
한사랑의 말을 듣던 재환은 주변을 살피며 씁쓸해했다. 처음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냥꾼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명이 강한 사람이어도, 몇 번이고 실패하다보면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 감정이 무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주변을 훑어보던 재환은 다시 시선을 한사랑에게 돌렸고, 한사랑은 평소처럼 다정함을 담아 재환에게 말을 이었다.
“이 도시의 마지막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가 있을지도 모르고,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가 있을지도 모르죠.”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연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그래도 저는 믿고 싶어요. 사람은 부서지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고요. 아무리 세상이 가혹하고, 미쳐가도, 괴물한테 잡아먹히고 농락당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그래서 아직까지 십자가를 놓지 못하는 거고, 이 도시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죠.”
씁쓸하게 웃던 한사랑은 재환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한 적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남은 사냥꾼이, 달을 사냥하고 악몽을 끝낼 거라고요. 누가 퍼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게 재환 님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사냥꾼이 샬롬에 온 건, 엄청 오래간만이거든요.”
한사랑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재환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회귀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날을 세울 때가 아니긴 하지. 선량한 괴물도 있었는데, 선량한 사냥꾼이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는 자신이 사방에 사냥꾼들이 널려있는 환경으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졌음을 인정하며 한사랑에게 사과했다.
“먼저 의심해서 미안해요. 세상이 워낙 험하다 보니, 좀 예민해졌나 봐요.”
“괜찮아요. 재환님만 그랬던 건 아니거든요. 사냥꾼들끼리는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란 말도 있을 정도거든요.”
그렇게 너스레를 떤 한사랑은 재환을 출입구로 안내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공방 거리로 갈 거예요. 총알이랑 소모품들 만들 재료를 구하려면, 안면을 터 두는 게 좋거든요. 혈맹이 괴물의 피와 정보를 주로 나누는 곳이라면, 공방은 서로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거나 만들어주는 곳이니까요.”
재환은 한사랑을 따라 공방 거리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기서 재료나 제작 도구 같은 건 어디서 구하는 거예요? 이제 막 샬롬에 온 사람들한테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될 만한 걸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재환의 질문에 앞서가던 한사랑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돈이 없어도 돈이 될 만한 지식은 있으니까요. 샬롬 사람들은 외지인들한테 호의적인 건, 그만큼 외지인들의 지식이 귀중하단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그녀는 근처에서 증기를 내뿜는 건물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샬롬의 별명은 공방과 신비의 도시에요. 옛날부터 온갖 신기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연구하는 걸로 유명했거든요. 그 근본이 바로, 우리 같은 외지인들이고요.”
재환은 그녀가 가리킨 건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의 곳곳에 붙어있는 기계장치는 스팀펑크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기이했기 때문이다.
‘탈바꿈이나 총검만 해도 그렇지. 이 정도 무기는 기계공학이 어지간하게 발달한 게 아니면 만들기 힘드니까. 샬롬 출신 사냥꾼들은 다들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
그는 한사랑의 말에 수긍하며 거리를 걸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을 지나 공방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많이 바쁠 거예요. 샬롬 사람들한테 기술도 팔아야 하고, 거점을 구해서 바리케이드도 쳐야 하고, 그다음에는 사냥에 쓸 도구들도 만들어야 하거든요. 밤에 객사 당하지 않으려면, 낮에 미리 준비해야 하는 건 서울이나 샬롬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공방 거리에 세워진 시계탑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해가 질 거예요. 사람도, 사냥꾼도, 모두 괴물이 되는 밤이 머지않았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