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0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97)
“음,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에요.”
은근한 말속에 듬뿍 담긴 것은 협박이 분명했다.
에스탄은 애송이를 삐딱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느릿하니 남은 옷차림을 챙기면 에스탄이 입을 열었다.
“뭘 원하지?”
간단한 물음과 함께 재롱을 기다린다는 듯한 노인의 표정이 또렷했다.
투란은 그 표정이 뜻하는 바를 읽어 내면서 방긋 웃었다.
“마석이죠. 아, 마석을 달라는 말이 아니고요…… 마석에 대한 이야기, 그게 어디서 나오는가, 그 주변은 안전한가, 세상에 어떻게 퍼져 나가는가 따위…… 그런 거 있잖아요, 마법사들이 좋아 죽는 이야기.”
“마법사만 좋아 죽고 너는 좋아 죽지 않는 이야기냐?”
에스탄이 살짝 짓궂은 눈길로 묻고 있었다.
투란이 바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당당함이 넘쳐나서 뻔뻔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돈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죠. 금보다 훨씬 귀하다니까. 근데 그거 돈으로 바꾸기 쉬운 것인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 기회에 알면…… 뭐, 나도 마법사만큼 좋아 죽을지도 모르죠. 어때요,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에스탄은 가만히 가죽 장화를 발에 끼우고, 외투를 걸치면서 귀를 기울이는 채로 자기 할 일을 마치는 모습으로 투란에게 말한다.
“널 보낸 마법사가 누구든, 대강의 이야기는 알고 있을게야. 그럼에도 너에게 별말 하지 않고 보냈다는 것은…… 선입견 없는 새로운 의견을 네가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이런 낯선 곳에서도 당당하게 낯선 늙은이를 협박할 수 있는 녀석이니 무능하지도 않을 테고…… 긴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
“들어가요? 어디로…….”
돌연 배낭을 챙겨 올리면서 맺어지는 말에 투란이 어리둥절했다.
에스탄은 말보다 행동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배낭이 놓였던 자리에서 고리를 하나 찾아내 당겼고, 고리와 이어진 밧줄이 배낭과 가방을 토해 냈던 부분을 당기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초에 계단을 막는 출입문을 감추고 그 위에 가방과 배낭을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우와?”
투란이 짧게 감탄하는 소리를 흘렸다.
에스탄은 먼저 계단에 발을 디디면서 바윗돌 위에 올라앉은 투란을 올려다보면서 말한다.
“걱정 마라, 나도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길동무 삼아 가는 동안에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물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다 죽어 가던 늙은이가 죽기 전에 해 준 이야기라고 둘러대 주길 바란다만.”
“그러죠!”
냉큼 바윗돌에서 뛰어내리면서 투란은 눈을 반짝이는 채로 대꾸했다.
에스탄이 그런 투란을 살짝 어이없이 보다가 바로 쓴웃음을 짓고 계단을 밟으며 내려갔다.
좁고 긴 계단은 내려가면서 느릿하니 나선의 형태로 변화했고, 좌우 벽의 폭이 조금씩 넓어져 갔다. 그리고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 싶을 무렵에 옆으로 열린 통로가 드러났다.
내려가는 사이에 투란은 에스탄을 졸졸 따라가면서 바로 묻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라고니아는 그런 투란의 뇌리에 잔뜩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군. 묘지기와 해골 패거리의 난투 탓에 자연스럽게 쌓여 있는 이질적인 마력을 이용해서 감췄어. 애초에 이 묘지의 일부였으니, 이렇게 열리기 전에는 그냥 지하의 뒤틀린 틈새려니 하고 말게끔 말이야. 이런 식의 석조(石造) 장치는 옛날 유물에서나 나왔을 법한데…….
‘뭐, 드라코눔의 마법으로 세상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잖아. 거리의 요술쟁이 손놀림은 진짜 마법사도 혹하게 한다는 말 몰라? 그냥 그런 거잖아.’
투란은 투덜거리는 드라고니아를 달래듯,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꾸하면서 에스탄이 다시금 길잡이 역할을 하는 모습을 잘 지켜봤다. 가는 길에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에스탄은 이 지하 통로를 그런 길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대강 가늠해 봐도 묘지에 바위 묘지기가 기어올라 왔던 그 절벽 어딘가로 뚫린 구멍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때, 투란은 에스탄이 지하 통로를 벗어나 절벽에 들러붙은 선반 같은 샛길에 서는 것을 봤다.
어느새 어둑해진, 해가 빨리 저무는 지역이기도 했지만 절벽의 틈새에 얹힌 곳이라 한층 더 어두운 길목에서 에스탄이 돌아서며 말한다.
“조금 더 내려가면 캠프가 있다. 그곳에서 하룻밤 쉬고 갈 거야. 불 피우고 이야기해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지. 가자.”
외길로 된 계단과 통로에서 하지 않던 말을 해 주는 까닭을 투란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절벽 아래에서 콸콸거리고 들려오는 물소리, 꽤 거리가 있는 듯했지만 왠지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빠르다고 부추기는 듯이 들려왔다. 에스탄은 그 부추김에 넘어가지 않고 절벽의 어딘가에 붙어 있을 캠프를 목적지라 밝힌 셈이었다.
“기대되네요, 어떤 캠프인가.”
정말로 기대하는 표정으로 투란이 말하니, 에스탄이 흘깃 돌아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바로 대꾸한다.
“언더섀도우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온 커다란 벌레가 뚫어 놓은 구멍 같은 곳이지. 하지만 중간이 끊어져서 막혀 있고, 양쪽으로 열린 입구 덕분에 캠프로서 아주 쓸 만한 모양이 돼 버렸다. 가 보면 금방 알 거야.”
이 말대로 투란은 오래 내려가지 않아 볼 수 있었다.
절벽에 붙은 샛길보다 더 넓게 자리 잡은 빈터, 선반처럼 올려진 것은 똑같은 상황인 듯하지만 그 빈터의 한구석이 깊이 절벽을 파고들면서 저 아래 어딘가로 향하는 굴이 된 채였다.
―3, 4킬로는 거뜬히 내려가는군. 똑바로 뚫린 것처럼 보인다만, 중간부터 이리저리 꼬여 있고…… 붕괴된 탓에 끊어졌어. 정말로 언더섀도우 깊은 곳까지 그대로 닿을 것 같은 굴이야.
드라고니아가 살짝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사이에 투란은 굴 입구 한구석이 정돈되어 있고, 거기에 은촛대까지 서넛 박혀 있는 광경을 보면서 어이없어하는 중이었다.
“무슨 거실 같네요?”
에스탄이 굴 벽 한쪽의 파인 곳에 배낭을 내려놓으면서, 은촛대에 바로 불을 붙이면서 대답한다.
“맞아. 기왕이면 튼튼한 저택에 머무는 기분을 내고 싶었으니까.”
그 대답보다 투란은 불을 붙이는 방식과 불이 붙은 다음에 은촛대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마법의 흐름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맨손을 은촛대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딱 튕기는 시늉을 하니, 허공에서 철제 건틀릿이 불쑥 튀어나와 삐걱거리면서 그 손가락 움직임을 흉내면서 강렬한 마찰을 일으켜 불을 붙이잖는가!
게다가 그렇게 괴상하게 은촛대 하나가 밝혀지니, 나머지 은촛대도 덩달아 불이 켜지면서 묘한 마법이 그 징조를 드러냈다.
“어, 이건…… 안전한 건가요?”
투란이 허공을 더듬듯이 손끝으로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하며 묻는 말에 에스탄은 한구석에 접혀 있던 조그만 의자를 꺼내 펼쳐 내미는 채로 대답한다.
“아주 안전하지. 몬스터 로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캠프를 만들어 주는 거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몬스터 로드도? 대단한 마도구네요?”
“그래, 대단하지. 마석을 이용해서 한층 더 강화된 마도구이기도 하고.”
“강화……?”
투란은 어리숙한 손짓으로 의자를 받아 앉으면서, 의자 하나를 더 꺼내 맞은편에 앉은 에스탄을 보며 갸웃했다.
에스탄은 앉은 채로 손이 닿는 배낭 안을 뒤척이면서 탱탱하게 부푼 가죽 물통과 머리에 써도 될 듯한 가죽 그릇을 꺼냈다. 겹쳐진 가죽 그릇이 둘로 나뉘고, 아래로 볼록하니 액체를 담을 모양이 되었다.
투란에게 그 가죽 그릇 하나를 건네면서 물통을 기울여 향긋한 음료를 따르는 채로 에스탄이 말을 잇는다.
“마석이 가장 잘 쓰이는 부분이 마법의 강화야. 마도구가 간직한 마법이든, 마법사가 직접 그 자리에서 영창한 마법이든 마석은 강화의 촉매로 쓰이지. 오래된 마도구가 마력이 모자라면 그 마력을 보충해 주기도 해. 그래서 옛 유물을 얻은 경우, 그게 마도구라면 마석을 필요로 하게 되는 거지. 상아탑은 그런 오래된 유물을 실물뿐 아니라 지식으로도 간직한 곳이니까, 마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하지만…….”
또르르, 투란이 든 그릇에 이어 자신의 그릇에도 음료를 따라 바로 두어 모금 마신 다음에 에스탄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상아탑의 마법사가 마석이 있는 곳을 직접 탐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거야. 마석이 발생하는 곳은 당연히 마력이 잔뜩 뒤틀린 곳이기 쉽고, 상아탑의 마법사는 그런 곳에서 자기 역량을 제대로 발휘 못 하거든. 어지간한 수준의 상위 마도사라야 겨우 버텨 내는 정도지. 그러니까 자네 같은 몬스터 로드를 보내서 조사를 시킨 것이겠지. 응? 왜?”
“몬스터 로드라고 어떻게 알았지요?”
의아함을 얼굴에 담아 투란이 묻고 있었다.
이미 말을 하다가 그 의아함을 눈치챘던 에스탄이 피식 웃었다.
“저 촛대가 알려 줬지. 감싸 안고 보호할 대상이 평범한 사람인지, 마법사인지, 심술궂게 마법을 훼방 놓으려는 몬스터 로드인지 불꽃이 다르게 반응하면서 그대로 알려 주거든. 그 신호를 읽어 내지 못하면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는 촛불이겠지만. 마물을 막아 내는 마법인 때문에 그런 계열의 탐지 효과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어. 아무튼…… 마석에 대해 알고 싶은 일이 뭐라고 했지?”
홀짝, 그릇에 담긴 향긋한 음료를 맛보면서 투란이 불쑥 묻는 말에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한 다음에 말한다.
“출처? 아마 그걸 알아다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글쎄…… 출처가 아니라 한 뭉텅이 가져다주는 편을 더 좋아할걸?”
“어, 그야…… 한 뭉텅이 구할 수는 있는 거예요?”
“그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위험을 감수할 탐구심이 있다면, 그 위험을 이겨 낼 능력이 있다면 쉽고 아니면 목숨 날아갈 거야.”
에스탄은 시원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어딘가 투란이 죽은 척하는 것을 훼방 놓겠다고 말할 때의 은근한 협박을 흉내 내는 낌새가 있었다. 이를 모르는 척하면서 투란이 묻는다.
“왜 위험한데요?”
“마석 주변에는 마석에 이끌려 온 마물, 언데드, 괴수 따위가 있으니까. 마석이 박힌 자리도 주변에 마력으로 기괴한 현상을 일으키는 영역이 되기도 하니까. 뭐 하나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하면 알기 쉬우려나?”
“흐흠, 그런 곳에서 잘도 마석을 캐서 들고 다니시는군요?”
슬그머니 투란은 에스탄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시늉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연륜이 박힌 주름을 머금은 에스탄의 낯빛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마석의 마력을 끌어당겨 그 힘을 강화할 수 있는 모빌 아머…… 마갑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어. 마석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내 마갑은 몇 배나 강해지거든. 말하자면 마석 주변의 위험한 뭔가보다 내 마갑이 훨씬 더 위험해지는 셈이야. 아, 내가 마갑을 쓰고 있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겠지? 시침 떼면 보기 흉해.”
“뼈다귀들 두들겨 패던 철갑기사들 말이죠?”
투란은 조금 뚱하니 대꾸하고 말았다.
그게 뭐냐고 시침 떼면서 모빌 아머란 것에 대해 캐물으려 했는데, 에스탄이 먼저 세게 때린 셈이니까.
“그래, 내 인생을 이모저모로 아주 기괴하게 바꿔 놓은 것들이고…… 거의 내 일생을 함께해 온 동반자이기도 하지. 은퇴도 같이 할 녀석들이고…… 이쯤 되면 말이 없어도 절친한 벗이라고 해야 할 판이야. 푸후후훗.”
어딘가 자조적인 에스탄의 웃음과 함께 이야기가 잠시 멈췄다.
투란은 그 모습에서 깊은 세월을 잠시 가늠할 수 있었다.
어쩐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에스탄이란 길잡이 할배가 훨씬 더 살아온 듯한 분위기…….
“위험이 덜한 곳에서 구한 마석은, 질이 나빠요?”
“위험할수록 마석의 품질이 좋아지기는 해. 하지만 위험이 없는 곳이라고 꼭 나쁜 마석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가까운 곳에서 괜찮은 마석을 구할 수 있는 건가요? 여기보다 로즈벨에 더 가까운 곳에서는 마석을 구하지 못해요?”
“언더섀도우 밖에서 마석이 나오는 곳은 내가 몰라. 어딘가에 있겠지만, 내가 아는 것은 전혀 없어.”
에스탄이 다시 물통을 기울여 음료를 따라 줬다.
얌전히 그 음료를 받아 홀짝이면서 투란은 물끄러미 에스탄을 바라봤다.
마치 마석에 대해 조금 더 물을 것을 궁리하듯…….
하지만 그런 투란을 보며 에스탄이 피식 웃고 말한다.
“내가 왜 죽은 척했는가 궁금하지?”
“그야, 당연히 궁금하죠!”
방긋 웃는 채로 투란이 날렵하게 대꾸했다.
에스탄은 푸훗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받은 의뢰랑 상관없잖아? 게다가…… 마석이 아닌 내 얘기를 마법사에게 하는 것은 참아 줬으면 해. 내가 죽은 척해야 할 이유가 늘어나는 셈이니까.”
“흐흠?”
투란은 눈을 가늘게 뜨는 시늉을 하면서 에스탄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마치 어디에서 현상금이라도 걸렸냐는 듯, 그래서 말을 하는 척하고 숨기는가 따져 보겠다는 듯!
하지만 에스탄은 그런 투란에게 언더섀도우의 지형과 마석에 대한 이야기만을 더 늘어놓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