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0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999)
“호오? 본명인가? 그렇군, 본명이었군! 보통 카엘이나 투란이라면 나이 들면 이름을 바꾸는 것도 고려할 만한 일이지. 뭐, 대부분 그러다 보니 고집스럽게 본명인데 어쩌냐고 버티는 사람도 많기도 한데…… 자네는 이름을 바꿀 생각인가? 오? 아니군! 좋은 생각이야, 많은 사람이 같은 이름을 쓴다 해도, 그들과 자네를 구별해 내는 일은 남의 일이지! 하하핫, 헷갈려서 자네를 제대로 지목할 수 없어 답답한 것은 자네가 아니라 남들 아닌가! 하하핫.”
유쾌하게 흘러나오는 프릿의 목소리,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대뜸 휘젓는 프릿의 손짓 아래에서 의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 보이는 거리의 요술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팔에 찬 토시가 마법 주머니야. 상당한 마도구인데? 기능도 기능이지만 몬스터 로드의 고유 마력을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다니…….
드라고니아는 전혀 흔한 일이 아니라 짚으며 놀라고 있었다.
‘내 블랙레온보다 더 좋다는 말이야?’
투란은 드라고니아가 블랙레온을 꽤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는 것을 떠올리면서 지금 놀라는 까닭을 슬쩍 캐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좋다 나쁘다가 아니야. 제작에 사용된 소재가 정령의 가호를 잔뜩 받은 오우거의 가죽 따위가 아닌데도 거의 블랙레온과 버금가는 마법의 효과를 보인다는 말이다. 저거…… 대체 누가 만들어 낸 거지?
드라고니아의 말에 담긴 관심은 투란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투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은, 짧으면서도 분명한 물음이었다.
“마법사세요?”
그 순간, 프릿의 얼굴이 왠지 조금 더 하얗게 보였다.
투란은 그것이 은촛대의 광채가 일렁인 탓인지, 아니면 프릿이 너무 밝게 웃는 탓에 핏기까지 사그라든 탓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프릿의 입술이 빨갛게 보이고 얼굴을 스쳐 가는 불그스름한 핏기는 잠깐 착각해서 잘못 봤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에 대해 드라고니아가 곧바로,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듯 말한다.
―아니, 네 착각이 아니야. 이 작자…… 체내 혈류가 굉장히 기묘하다! 뭐지, 마치 피가 제멋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피하(皮下) 영역을 나돌다니…… 이게 대체…….
투란으로서는 눈을 깜박이면서 방금 전에 던진 자신의 물음에 대해 프릿이 뭐라 답하는가를 기다리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드라고니아가 파악한 것처럼, 왠지 프릿의 혈관 속에는 뭔가 기묘한 것이 얼핏얼핏 꿈틀거리는 듯한데 그때마다 살갗의 핏기가 싸악 가시면서 사람의 살갗이 하얀 돌…… 상아탑을 장식하는 대리석의 색조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처음 보는 사람인 프릿에게 뭐라 묻기는 좀 애매한 처지 아닌가.
특히나 곁에서 격정적으로 프릿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노인까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안에서 나왔느냐고 내가 물었잖아! 딴소리하지 말고 내 말에 대답부터 하라고!”
처음 프릿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묻고 있었지만 경쾌한 태도로 투란을 향해 떠들어 대는 말만 꺼낸 것에 대해서 한층 더 격분한 낌새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태도와 말투였다.
대답하지 않으면 주먹이라도 날릴 듯한 분위기까지 슬슬 풍겨 나오니, 프릿이 혀를 차면서 살짝 눈알만 굴리는 표정으로 에스탄을 흘깃하면서 대답한다.
“당연히 굴 파고 나왔지. 아래에서 올라오느라고 힘들었다고. 그렇게 꽉꽉 처막힌 줄 알았으면 그냥 지상으로 돌아 나왔을 텐데…… 아, 정말 힘들었어.”
에스탄이 곧바로 이에 대해 반박했다.
“웃기지 마! 굴을 파긴 누가 파! 당신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굴을 파고 나오는 낌새도 전혀…… 마법? 설마? 셀리아! 함께 와 있나? 도대체 어떻게!”
마구 떠들다가 어느 순간에 스스로 답을 찾는 듯이 말이 뒤틀리면서 에스탄의 눈길은 프릿이 나온 굴 안쪽으로 다시 휙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길에 호응하듯 한 사람이 허공을 출렁이면서 느릿하니 모습을 드러내니…….
‘저 아줌마가 셀리아?’
투란은 에스탄의 말을 곱씹으면서 새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을 재빨리 훑어봤다.
아무래도 하는 짓이 마법사로 보이는데, 프릿보다 살짝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에스탄보다는 훨씬 어려 보였다. 어둡고 그늘진 곳이라면 이십 대 후반으로 볼 만도 했지만, 털이 모락모락 피어나듯 채워진 하얀 외투와 무장한 낌새가 역력한 가죽 바지, 가죽 갑옷이라 할 만한 웃옷 차림새는 적어도 서른은 넘겼다는 듯한 노련함과 연륜을 풍겨 내는 모습이었다.
―마법사 맞다, 한데…… 숨어 있었던 시늉을 하면서 나오기는 했다만, 지금 도착했어. 이동하는 과정을 감추고 도착해서 그 장막을 거두는 속도가 아주 빨랐어. 덕분에 원래 거기 있던 것처럼 나오기는 했다만…… 마석을 굉장히 많이 지녔는데?
드라고니아가 가만히 상황을 분석하는 듯하다가 화들짝 놀란 말로 하던 이야기를 매듭짓고 있었다.
투란도 셀리아의 외투와 장화, 바지 곳곳에 감춰진 마석의 기척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에 나름대로 놀라고 있던 참이었다.
‘이 할배, 덜렁 하나 갖고 있었는데…… 저 아줌마는 뭐 저리 많아?’
에스탄이 헌터 일행 앞에서 잠깐 보여 줬던 본보기 마석, 셀리아는 그에 못지않은…… 어쩌면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듯한 마석을 가공해서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 마석의 마력만으로도 어지간한 대마법은 거뜬히 펼쳐 낼 듯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 내는 채로!
에스탄의 고함이 투란의 궁금함을 물리치듯 터진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어째서, 어째서 둘이 한꺼번에 저 아래에서 여기까지 뚫고 나왔냐고! 도시는? 나라는? 황제 폐하 노릇해야 할 사람이랑 도시 방어를 책임질 수호 마법사가 한꺼번에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제정신이야? 당신들,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우와, 누가 누구한테 책임감을 가르치려고 해? 에스탄, 그 도시와 나라의 재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란 것부터 생각해야지! 재상이 냅다 튀어서 죽은 척하고 도망치려 해 놓고 나한테 따지나? 셀리아한테 따지나?”
프릿이 고함에 대응해서 내놓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고 나긋나긋하며 낮았지만, 기묘할 정도로 선명하게 은촛대의 빛이 그려 내는 울타리 안쪽을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무 선명해서 에스탄의 고함보다 더 똑똑히 잘 들릴 지경이었다.
그 소리에 질린 듯, 혹은 자신의 책임을 묻는 말에 움찔하고 울컥해서 힘이 빠지기라도 한 듯 에스탄이 훅훅 몰아 내쉬는 숨을 가다듬어 대꾸한다.
“안 한다고 했잖아! 재상이고 뭐고, 난 모르는 일이라고 했잖아! 하고 싶다는 놈 시키라고! 그놈 아니라도 시킬 놈들 많기도 하잖아! 난 이제 그만 떠나고 싶다고! 내가 할 일은 다 해 놨잖아! 왜 여기까지……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왔지? 프릿, 셀리아! 도대체 여기 어떻게 온 것이냐고!”
프릿은 히죽 웃으면서 ‘글쎄?’라는 작은 대꾸를 했다.
그 말투, 태도 속에 완전히 약 올리고 놀려 먹고 싶다는 의지가 담뿍 담겨 있다는 것을 곁에서 보는 투란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분위기를 통해 프릿과 셀리아, 에스탄이 꽤 오랫동안 함께해 왔다는 것 또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고.
셀리아가 주름 사이로 핏대가 서는 에스탄을 향해 나른하고 느긋하게 말한다.
“완벽한 탈주 계획이 들통나서 억울해? 억울해하지 마, 에스탄. 우리도 네 계획을 망가뜨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온 것은 아니야. 음, 그냥 너 있는 곳을 찾아와야 할 필요가 있어서 그랬는데…… 오다 보니 네가 지상에서 죽은 척했다더라? 우리 황제 폐하인 프릿은 그게 너무 재밌어서 굴이 뚫리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온 거고 나는 마력을 좀 채우고 온 거야.”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을 찾아왔다고 말하는 건가? 셀리아, 마법사의 수수께끼는 그만두고 말해! 대체…….”
에스탄이 억울함과 분노를 꽉꽉 눌러 담듯이 물으려 했다.
셀리아는 그런 에스탄의 앞에 손을 내밀었고, 손가락 끝으로 투란을 가리켰다.
그 손짓은 에스탄의 말을 멈추게 했다.
살짝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에스탄은 셀리아가 프릿이 아닌 투란을 가리키는가를 다시 확인했고, 프릿은 그런 에스탄에게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채로 말한다.
“딱히 에스탄을 쫓아온 것은 아닌데…… 에스탄이 투란을 만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에스탄을 쫓을 수밖에 없었어. 응, 미안해. 투란만 만나지 않았으면 에스탄의 탈주 계획은 성공했을 텐데.”
“이 애를 알아?”
숨을 고르면서, 에스탄이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투란을 훑어 내리는 눈길로 묻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프릿과 투란의 접점이 보이지 않아서 당혹스럽다는 듯…….
투란도 그런 에스탄에게 완벽하게 공감하면서 묻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에? 나요? 왜 나요? 나 이 근처에 처음 오는데? 어떻게 날 찾아…… 이 영감님이랑 여기서 이러고 있을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요?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에스탄이 어리바리한 채로 버벅대는 투란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끼어들어 대신 말을 했다.
“프릿, 투란을 만난 적이 없으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날 추적해 온 것을 얼버무릴 생각은…….”
“예견자랑 만났어.”
뚝 자르는 프릿의 말은 간략했다.
투란이 ‘예견자?’라고 갸웃하며 그게 뭔가 의아해했다.
―예견자(豫見者)? 예언자를 말하는 거잖아? 뭔가 다른 부분이 있는 건가?
드라고니아가 찌푸린 듯한 낌새를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뭐? 예언…… 아, 썩을! 대삼림의 오르카, 쿤토르만 예언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싸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그딴 예언자가 있다고? 대체 무슨…….’
“대체 무슨! 예견자라니, 내가 아는 예견자를 말하는 거라면…… 그 괴물 년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야? 프릿, 미쳤소? 셀리아, 말리지 않았단 말이오?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에스탄이 낯을 구긴 채로 버럭 소리치고 있었다.
투란은 눈을 깜박이면서 슬그머니 눈알을 굴렸다.
에스탄이 대신 할 말을 해 주는 셈이니 프릿과 셀리아가 무슨 대답을 하려는가 궁금해서 기다리려 보는 시늉이었다.
프릿은 이런 투란의 태도를 엿본 듯.
“음, 우선…… 에스탄, 진정해. 내가 찾아간…… 아니, 일단 만나러 가기는 했지만 불러서 간 거야. 중요하고 좋은 말을 해 준다고 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내 탓은 아닌 거지! 그렇지, 셀리아?”
“그렇죠, 프릿. 에스탄도 알고 있잖아? 예견자가 먼저 거래를 청해 오면, 그건 받아들일 만한 일이란 것. 하물며 이번에 예견자, 그 괴물 년이 제안한 것은…… 에스탄, 네가 먼저 들었다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입에서 피를 토할 정도로 부르짖을 일이었어.”
셀리아가 방긋거리는 웃음과 함께,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서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투란은 이런 상황을 ‘아, 꼭 받아들일 이야기였나?’ 하며 흘깃거렸지만 에스탄은 단숨에 이를 뭉개겠다는 듯이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하? 뭔 헛소리야! 그 괴물 년이 십이혈족을 제압할 방법이라도 알려 준답디까? 내가 왜 피를 토하면 그년의 제안을…… 제안을…… 무슨 제안이었는데? 프릿, 그 괴물 년이 무슨 제안을 하면서 예견해 준 거요? 프릿! 실실 웃지 말고 대답을 해! 이 망할 황제 폐하야!”
비웃으려고 나오던 말은 투란이 새삼스럽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게 하는 프릿과 셀리아의 기묘한 웃음, 태도와 분위기에 뒤틀리면서 으르렁거림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오래 놀릴 생각이 없다는 듯한 프릿의 대답은 꽤 쉽게 나왔다.
“역시 우리 재상! 가서 보고 듣지 않아도 바로 무슨 제안이었나 알아 맞히네! 하핫, 역시 우리 재상이 최고야!”
에스탄의 주름진 얼굴에 허탈함이 가득 채워졌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할 말이 없다는 듯하고 생각이 사라졌다는 듯한 무표정이 드리워졌다.
―맞췄다면…… 무슨 십이혈족을 제압하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뜻인데?
드라고니아가 맹한 투란에게 오고 간 이야기를 정리하듯 중얼거렸다.
투란은 그 정리한 말에 바로 반론을 들이댈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없지?
드라고니아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짐작조차 안 된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리고 프릿은 빙그레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을 투란에게 들이대면서, 마법의 토시에서 꺼낸 의자까지 당겨 바싹 무릎이 닿을 정도로 붙여 앉은 채로 하던 말을 잇고 있었다.
“투란, 예견자가 말했어. 전설의 이름을 물려받은 자를 여기서 만날 거라고 말이야. 에스탄과 함께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광경을 봤으니까, 에스탄을 쫓아가서 이 어둑해질 무렵에 어두운 구멍을 열고 나가 보라고 말이지. 무슨 이야기인가 전혀 모르겠지? 하핫,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예견자가 그러더군. 투란에게는 이것을 보여 주면 될 거라고.”
휙휙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묘한 이야기 끝에 프릿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살짝 펼쳐지면서 손바닥 위에 구슬 하나를 올려놓고 있었다.
투란은 그 구슬 속의 태엽 장치를 보며 맹하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어?”
태엽이 감긴 틀을 감싼 구슬 안에 톱니바퀴가 가득했고, 그 톱니바퀴에 뿌려진 듯한 붉은 기름이 꿈틀거리면서 점점이 박힌 눈알 같은 거품을 드러냈다가 터뜨렸다가 하는 괴이한 형태였다.
그 모양을 보기 무섭게 투란은 문장 깊은 곳에서 호응하는 몬스터의 본능, 하나도 아닌 두 가닥의 본능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