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1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03)
시야가 흔들렸다.
위도 아래도, 옆으로도 아닌 흔들림이었다.
무엇이냐고 따지고 생각하기 전에 투란은 그것이 다가올 시간과 지금의 시간 사이의 흔들림이라고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에 따른 대처 또한 생각 없이, 본능에 따라 자신이 행하고 있다는 것을 투란은 왼쪽 팔뚝을 방패처럼 내세우면서 깨달아야 했다.
‘아, 너무 빨랐나?’
문제는 아직 방패를 들 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 순간은 금방 다가올 터였으나, 지금 투란이 할 일은 아르고누스가 미쳐 날뛰듯이 눈동자를 삼키고…… 몬스터 엠블럼이 아닌 순수한 몬스터의 본능으로서 내민 눈동자를 삼켜 순식간에 투란의 뇌리에 꽂아 넣듯이 미간 사이에 뿌리내린 채로 돋아나게 한 부분부터 살펴야 했다.
그러면서 투란은 자신에게 이 기괴한 눈알을 넘긴 상대, 예견자라 불리는 존재에 대해서도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알을 내밀고 투란이 낚아채자마자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모습은 어딘가 평정을 잃은 듯했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가를 헷갈려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럼에도 예견자는 그 괴이한 음성을 토해 내면서 아까처럼 투란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중이었다.
―1천의 눈동자를 품고 지배하는 존자(尊者)여! 사명(使命)을 끝낸 저에게 안식을 허락하소서…….
방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랑 전혀 다른 분위기를 머금은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투란이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아르고누스가 매우 흡족한 기분을 드러내면서 저 하소연에 응해 주고 있었다. 그 대응으로 인해 눈앞에 지금 당장 펼쳐지는 광경이 투란을 놀라게 했다.
‘수정뇌옥(水晶牢獄)? 아니, 그게 뭔데 내가 알지?’
예견자의 몸에서 부르르 떨리는 돌기둥의 힘에 호응하듯 미세하게 피어나는 수정의 가루, 그 속에서 자글자글 끓어오르듯이 피어나는 검은 거품…… ‘크리스탈 애쉬’와 ‘파라블랙․잉크’의 조합은 이제까지 투란이 몰랐던 방식을 드러내며 알려 주고 있었다. 보자마자 그것이 아르고누스의 능력, 기교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투란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저 기술(奇術)을 이름까지 정해 알아차린 자신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본능을 발현시키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을 관측해서 몬스터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 능력을 응용하고 단련하는 기술(技術)을 연마해 왔지만, 그 방식이 몬스터 로드의 전통적인 단련법이기에 그래 왔지만 이렇게 보자마자 이름이 착착 튀어나와 뇌리에 새겨지는 일은 없었잖은가!
그러나 이 놀라움을 더 되새기고 검토할 틈이 없었다.
예견자가 몸에서 아르고누스의 흔적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꿈틀거리며 그 몸을 휘감고 있던 그 흔적이 주르륵 흘러내리면서 예견자에게서 분리(分離)되어 투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투란이 뭘 어쩔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에 닿은 시커먼 잉크, 맑은 수정의 광채를 머금은 액정(液晶)이 흡수되고 있었으니…….
아르고누스가 여전히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크리스탈 애쉬’와 ‘파라블랙․잉크’의 혼합물…… 오랫동안 떨어져 나가 있던 자신의 파편을 회수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렇게 ‘회수(回收)’한 눈동자의 힘 또한 투란에게 과시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을 대비하던 투란은 순식간에 그 으스대는 풍경 속에 마음이 휩쓸려 버렸다.
* * *
‘어라? 이건?’
늘 볼 수밖에 없던 문장의 풍경이 아니었다.
마음이 휩쓸린 광경이라 당연히 문장의 풍경이겠거니 했는데…….
조금 놀랐지만 투란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어째서인가 이 광경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 탓도 있었지만, 도도하게 그 중심에서 찰랑이고 일렁이는 빛의 무늬를 자아내는 것이 ‘투란․아르고누스’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육각형의 방, 마치 수정으로 이뤄진 벌집의 단면을 보는 듯한 풍경이 팽창하고 수축하듯 펼쳐져 있었지만 그 중심은 명백하게 빛의 무늬였고 그 맥동이 이 광경을 지배하고 있었다.
투란은 이 광경이 몬스터 엠블럼, 문장과 별개로 아르고누스가 독자적으로 구현해 냈고 더욱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이라 ‘느끼고 알’ 수 있었다.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예견자에게서 건네받은…… 손을 움직인 몸짓만 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거의 강탈한 것이나 다름없는 눈알, 도도하게 빛의 무늬 중심 놓인 채로 크리스털 세공까지 장식으로 두른 듯한 눈동자였다.
‘아니, 지금 이런 거 볼 때가…….’
한번 더 아르고누스가 형성한 심상의 풍경을 둘러보려다가 문득 투란은 자신이 매우 바쁜 상태란 것을 되새기려 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떠오르기가 무섭게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질 수 있었다.
‘여유가 있네?’
사고(思考) 가속과 비슷했다.
의식의 흐름이 한없이 빨라진 탓에 세상이 멈춰진 듯 보이는 감각의 영역.
아르고누스가 꾸며 놓은 풍경 속에 마음이 닿는 순간부터 투란을 감싼 현실은 시간과 격리된 것처럼 멈춰진 채였다. 이 풍경을 마음껏 보고 느긋하게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도 될 시간의 여유가 생긴 셈이었다.
다만 이 여유는 ‘악마의 심장’이 뇌를 두들기며 의식을 가속화한 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감각적인 반응 속도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세상이 멈춰진 듯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의 시간과 단절되고 격리된 듯한 ‘장소’에 투란이 머물고 있는 듯했다.
‘이것도 그 눈의 힘이구나?’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저 눈동자가 빛의 무늬 속에 자리 잡기 전에는 없던 일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대체 뭘 저리 열심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꺼내지도 않고 투란의 마음에 떠오른 의문에 대해서 아르고누스 역시 어떤 언어의 형태가 아닌 대답을 해 왔다.
수정의 벌집이 새로운 치장을 머금으며 움직였다.
가장 먼저 빛의 무늬, 중심을 향해 몇 개의 수정 육각형…… 방이라고 해도 좋고 상자라고 해도 좋은 육각형의 구멍이 움직였다. 그 육각의 테두리, 모서리에는 붉은 금이 가 있었고 그 몇 개 안에 담긴 눈동자는 투란에게 낯익었다.
고르고니아, 골든 드레이크와 함께 투란 자신의 눈알이 담긴 것이니까.
그 주변으로 역시 붉은 금을 머금은 채로 옮겨진 육각의 수정 상자 속에 담긴 것 또한 투란에게 낯설지 않았다. 모두 투란이 아는 눈알, 눈동자였으니까.
그 곁으로 새롭게 옮겨 오는 붉은 금이 없는 몇몇은 낯설었다.
낯설었지만 투란은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알 수 있었다.
섬광을 뿜어내고 터져 나가는 눈깔꽃, 독의 분말과 포자를 터뜨리는 눈깔꽃, 가시를 쏘아 내는 눈깔꽃…… 한때 알고 싶어 했고 갖고 싶어도 했던 마물의 눈알들!
그리고 레드 드레이크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박힌 눈알까지…….
‘설마?’
문득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아르고누스를 삼켰던 그때, 이미 아르고누스가 품고 있던 눈알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때문에 어떤 눈알을 형성한다 한들 그것이 무슨 힘을 지녔는가,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전혀 알 수 없게 돼 버렸잖은가. 아무것이나 하나 골라냈더니 빛에 닿는 순간 망가졌을 뿐이고!
그 ‘기억’을 지금 아르고누스가 보여 주는 것인가?
그렇다면 저 예견자의 눈은…….
‘아니, 기억이 아니라 미리 보여 주는?’
투란은 자신의 생각을 바로 고칠 수 있었다.
드라고니아처럼 핀잔을 담은 쓴소리로 놀려 대며 알려 주는 것과는 달랐다.
아르고누스는 언어가 아닌 풍경 속에 의지를 담아 투란이 원래 알던 것처럼 지각(知覺)하게 해 주고 있었다.
이 또한 저 눈동자에서 비롯된 힘…….
정리되고 구획되며 그 발현될 때의 상황을 미리 보여 주게 된 풍경을 둘러보면서 투란은 새로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예견자, 대체 뭐야?’
그리고 현실이 답을 하고 있었다.
* * *
“캬아아아! 페르! 저주받은 신의 자식이여! 페르아르곤! 이 추악하고 흉악한 자여! 네가 감히, 감히 그라이아이의 눈동자를 훔쳐 냈느냐! 이 그라이아이를…… 나를 왜곡했더냐! 저주할 것이다, 아르곤의 왕자여! 너를 저주할 것이다! 어떤 신이라 해도 널 구할 수 없게끔 저주할 것이야! 끼아아아앗!”
노파(老婆)라 해야겠지만 노파일 리는 없는 자가 외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꾸미고 있던 예견자의 본래 모습이라고 해야겠지만, 결코 조금 전의 존재일 리가 없는 괴기한 몰골의 노파…… 너무 괴기해서 노파라 할 수 없는 자가 투란을 향해 손가락을 들고 저주하고 있었다.
달걀에 기다란 가발을 씌워 놓고 온갖 주름을 가득 채운 얼굴, 눈알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구멍조차 없이 베여 나간 코의 빈자리를 채우는 콧구멍만 보이고 그 아래로 열린 입은 위아래로 뭉툭한 이빨을 하나씩만 지닌 채였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몸매와 기본적인 생김새로 인간 여성의 형태…… 노파라고 추측해야겠지만 도저히 저 뒤틀린 형체를 인간 여성이 노화한 모습이라 여기기는 힘들었다.
그런 모습을 훑어보면서 투란은 자신이 무엇을 대비했는가를 깨달았다.
‘아, 저주…….’
강력하고 끔찍하며 사악한 저주였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막아 낼 수 없는 저주.
하지만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끌어낸 마물, 지옥 밑바닥을 훑어 내서 끌어 올린 괴물에게 그 저주는 좀 다른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할짝, 날름, 할짝.
팔뚝에서 열린 입, 그 입에서 가늘고 길게 흘러나온 혀가 움직여 맛보며 격렬한 즐거움을 느꼈다. 지옥에서 불려 나온 마물이 어떤 세상에서도 구할 수 없는 진미(珍味)를 즐기고 있었다!
‘대체 뭔 짓이냐고.’
미묘한 한숨이 잘게 투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저 예견자, 스스로를 그라이아이라 칭하는 노파는 조금 전까지 ‘수정뇌옥’으로 구속당한 채였다. 단순히 묶여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지배에 의한 구속이었다. 그 지배를 받으면서 투란을 이 자리로 부르는 일을 꾸몄고, 아르고누스가 탐하는 눈동자가 박힌 눈알을 건넸다.
하지만 이제 그 지배가 풀리고 나니, 저 난리를 토해 내면서 저주하고 있었다.
투란이 아닌 다른 자…… 아마도 아르고누스와 닮았거나 비슷한 힘을 지닌 자로 여겨지는 누군가에게 당해서 저 꼴이 된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란을 향해 격렬한 위력을 담은 저주를 토해 내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될 상황까지 예견해 놓고 투란에게 이미 그 대책을 심어 놓은 다음에 저러고 있으니…… 아무래도 자신이 속박당하고 지배당한 상태에서 뭔 짓을 했는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듯했다.
허공을 메우며 돌기둥 무리를 연이어 후려치듯 격하게 맥동하던 저주의 힘은 투란의 팔뚝에서 돋아난 수십 개의 입이 핥고 삼켜 지웠다. 그러는 사이에 더 크게 벌린 입들이 계속 열렸기에 그 버팀목 노릇을 하는 투란의 팔뚝은 붉은 가죽의 기둥처럼 바닥을 찧고 투란의 키 높이를 능가하듯이 커져 있었다.
저주의 힘은 더욱 사납게 삼켜졌고, 그 과정에서 투란은 붉은 가죽과 안개가 뒤섞이며 자유롭게 형상을 바꿀 수 있는 지옥의 마물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저주를 맛보고, 냄새 맡고, 핥고 삼키는가를…… 더불어 어떻게 가죽과 안개의 형체가 섞이고 바뀌는가까지도!
이렇게 자신이 쏟아 낸 저주가 망가지고 지워지는 것을 그라이아이는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온갖 노쇠의 징후를 간직한 몸이 서서히 빛으로 변해 사라져 간 탓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그 역할이 끝났으니 지워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소환식이 해제되는 꼴이군.
드라고니아의 속삭임이 투란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게 했다.
‘소환? 소환되었다가 해체당하는 거라고? 그럼, 이 돌무더기는 대체 뭘…….’
그라이아이는 사라지고 있었지만 격하게 울고 있는 돌기둥 무리는 그 중심을 한낮처럼…… 이 언더섀도우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광휘가 휘날리는 풍경처럼 꾸며 놓고 변화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 중심에 투란을 덩그러니 홀로 남겨 둔 채로, 그라이아이는 실컷 저주하고 그 결과는 알지 못한 채로 사라져 버리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투란은 이제 뭘 어찌해야 하는가?
이 돌기둥 무리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 하는가?
‘우자트?’
돌연 투란의 뇌리를 스쳐 간 한마디가 있었다.
―뭐?
드라고니아가 흠칫했다.
투란은 스쳐 간 그 한마디를 마음속에 다시 끌어내며 되뇌었다.
‘우자트.’
키릭, 끼릭, 꽈드득.
자연스럽게 내민 오른쪽 손바닥에서 태엽과 톱니의 눈알이 돋아났다.
그 눈알 속에서 피어난 작은 소리는 그라이아이가 사라진 빈자리를 자극한 듯했다. 둥근 기둥이 탁자처럼, 묘한 받침대를 올려 받친 채로 치솟고 있었다. 마치 태엽과 톱니의 눈알이 내는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