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21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12)
―이쪽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고, 저쪽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다. 게다가 들이대는 도구의 수준조차 다르군. 정말 프릿 쪽에 어울려서 싸워 볼 참이냐?
드라고니아의 평가는 냉혹했다.
투란은 그 평가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인왕도의 사람들이 잔뜩 호응해 주는 모양이기는 했지만 프릿의 말재주는 어딘가 엉성했다. 어쩌면 투란 자신은 공감 못 해도 이곳 사람들만 아는 어떤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살짝 들기는 했지만, 고작 저런 말에 이끌려서 저기 몰려오는 정돈된 군단과 싸워야 할까 하는 의문이 더 높이 치솟을 뿐이었다.
‘저건 대체 뭐냐?’
게다가 망루에 올라 보니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군단이 몰고 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기묘한 공성 병기, 투란에게는 갑옷을 입은 거인처럼 보이는 괴물이 쿵쾅쿵쾅 발을 구르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쇠뭉치가 갑주 형태를 띤 것뿐인데, 그것이 속에 진짜 거인이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걷고 있었다.
정상적인 인간의 군단이라 해도 저런 것이 끼어 있으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한데 저 군단은…… 모조리 수은의 피를 흘릴 것 같은 존재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인간의 형상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에 맞서 높은 성벽을 세워 놓기는 했지만, 드라고니아가 이리저리 관측을 하면서 한층 더 비관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흡혈종, 인간을 기반으로 한 녀석들이 주류이기는 하지만 기묘한 짐승 같은 형태도 섞여 있다. 아무래도…… 그 어보미네이션인가 싶다만, 그것 말고도 정상적인 형태의 인간 모습을 한 군단을 꾸미고 있는 꼴이 더 위험해 보이는군. 저건 제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니까. 인간의 전투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뱀파이어의 군단이 인간처럼 싸우자는 건데…….
투란도 그런 상황을 충분히 엿보고 느낄 수 있었기에 이 자리에서 대체 뭘 해야 하는가 알 수가 없었다. 저 안에 뛰어들어서 몬스터의 형상을 꺼내 미쳐 날뛰어야 하는가? 아니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가를 한구석으로 물러서서 구경하고 있어야 하는가?
“프릿이 오는군.”
바루하가 복잡해지려는 투란의 기분을 느낀 듯, 저편에서 한창 떠들면서 인왕도의 사람들을 부추긴…… 전투에 앞서 북돋운 프릿이 망루에 올라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망루에 올라오자마자 프릿은 투란이 눈을 깜박이면서 바라보는 모습에 살짝 웃음 지었고 가까이 붙어 거의 이마가 맞닿을 듯이 얼굴을 들이밀고는 속삭이기 시작했다.
“겁 먹지 마. 아, 그냥 전하는 얘기야. 그래, 이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겠고 어찌해야 하나 헷갈릴 거야.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투란, 너에게는 예견의 마녀가 남긴 말이 있거든.”
“그 마녀가요?”
투란은 움찔했다.
―이 상황을 예지하고 있었다고?
드라고니아는 꽤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프릿이 숨을 고르면서, 살짝 가까이 와서 무슨 말을 지껄이는가 감시라도 하듯이 엿들으려 하는 바루하를 향해 흘깃 눈웃음까지 흘린 다음에 투란에게 또박또박 똑똑히 들리도록 말하고 있었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라, 산악을 짓이기는 눈빛이 맴도는 화원의 주인이여. 붉은 늑대의 가호를 감추지 마라, 피의 숙명이 담긴 어둠조차 삼키는 늑대의 옥좌는 그대의 것이니…….”
투란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벙긋거리려다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입을 다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프릿은 그 순간에 투란의 눈매가 좁혀들었다가 펼쳐지면서 퍼뜩 뭔가 알아차리는 표정으로 미묘하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듯했다. 곧바로 전언을 멈춘 채로 강하고 사납게 프릿이 투란의 이마에 바싹 자신의 이마를 대고, 눈과 눈이 마주치도록 하며 말하고 있었다.
“운명대로 모든 것이 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 여기서 투란 네가 물러나 구경꾼이 된다면, 인왕도는 파괴된다. 내가…… 우리가 이 언더섀도우에서 백 년 이상을 분투해서 간신히 손에 넣은 성과, 유일한 보금자리인 인왕도가 사라지고 우린…… 거의 모두가 죽고 몇몇이 살아남아도 다시 언더섀도우를 떠도는 꼴이 되고 말 거야.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숨어다니는 사냥감이 되겠지! 나는 그 일을 막기 위해서 마녀를 찾아갔고, 거래를 했다. 투란, 마녀가 말한 너의 힘이 진짜인가 아닌가 나는 몰라. 아니, 여기 너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혀 없어! 부탁한다, 투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한숨이 가볍게 투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와 프릿의 입가에 부딪혔다. 그리고 투란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저 거인은…… 진짜 거인이에요?”
저쪽의 군세 속에 도드라진 형체를 살짝 손짓하며 묻는 말이었다.
프릿은 빙긋 웃었고, 귀를 쫑긋거리고 있던 바루하가 대답한다.
“머신기어, 기가스 레벨의 머신기어야. 진짜 피와 살로 이뤄진 거인족이 아니다. 크기는…… 딱 거인족처럼 십여 미터 안팎이지만, 저 금속 장갑은 어지간한 강철과는 수준이 다른 물건이지. 저 백은의 혈족이 들고 다니는 백금장(白金裝)이라는 무장을 몇백 배로 강화하고 확대해서 입혀 놓은 셈이니까.”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데, 바위 요정족의 표정 속에는 프릿의 말에 대한 신뢰와 함께 투란에 대한 깊은 의구심이 가득 드러난 채였다. 바루하가 딱히 투란이 지금 해 준 이야기를 못 알아듣나 알아듣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프릿이 꺼낸 말, 투란이 구원자라 하면서 들려준 마녀의 전언에 대해서 한껏 의아해하고 의심하는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과연 그 구원자란 이름을 투란이 감당해 낼 것인가를 의심하는 듯도 했다.
프릿은 그런 바루하의 심정을 아는 듯했지만 그저 빙긋 웃음과 함께 투란을 바라볼 뿐이었고, 투란은 뇌리를 스쳐 가는 드라고니아의 빠른 말을 들으면서 뭔가 궁리하는 척했다.
―하클이 저절로 움직이는 태엽 기관의 인형을 거대하게 했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저런 것이 된다고 생각하면 납득하기 쉬울 거야. 문제는…… 그 소재가 수은의 피를 좔좔 흘리던 뱀파이어 녀석들의 장비라는 건데…… 저 크기로 그렇게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어. 꾸며 놓은 꼴로 봐서는 변형보다는 중장갑 형태로 유지될 듯하다만…… 얇고 가늘어 보일 때도 상당히 성가신 재질인 듯한데, 불로 달구면 그대로 성벽에 붙어서 불 지를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까 그런 식으로 대처하는 것은 관두는 편이 좋을 거야. 저것이 성벽에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멀리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만…… 투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짧게 묻는 말로 이야기가 끝나고 있었다
투란은 잠깐 사이에 숨을 고르고 가만히 몸을 돌리며 망루에서 경치 구경하듯이 가만히 오른손을 올려 눈가에 대는 중이었다. 마치 프릿의 말, 바루하의 말에 뭔가 결정했다는 듯했고 그 결정에 따라 무슨 짓을 하겠다는 듯이 보이는 태도였다. 하지만 드라고니아는 그 마음속에 미묘하게 퍼지는 씁쓸함, 단호함을 느끼면서 투란이 뭘 하려는가 짐작도 못 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야. 애초에 너무 좋은 선물이었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녀석들, 확실히 몬스터인 거 맞지?’
약간 기묘한 물음이었지만 드라고니아는 분명하게 대답할 필요를 깨달았다.
―언어(言語)와 기술(技術)을 갖추고 다룰 줄 아는 지능(知能), 명백한 자아(自我)마저 형성하고야 있지. 하지만 저 녀석들은 몬스터 로드가 그 정수를 갈취해 낼 수 있는 몬스터일 뿐이다. 언더섀도우에 아주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그 본성은 이 세계의 정상적인 일그러짐과는 전혀 상관없는 몬스터일 뿐인 존재다. 밤을 틈타 언더섀도우 밖으로 나간다면, 세계를 혼란시키고 파괴할 이질적인 존재가 분명하지. 아직 설명이 모자란가?
‘아니, 넘치는 설명에 감사할게. 망설일 필요가 없네, 내가 사람이고 몬스터 로드이니까.’
입가를 살짝 뒤틀면서 쓴웃음을 매단 채로 투란은 천천히 눈가에 댔던 오른손을 옆으로 주욱 뻗었다. 그 순간, 손끝부터 까맣게 물들면서 단숨에 번져 올라온 잉크가 어깨까지 휘감으며 팔의 형태 위에 덧씌워졌다.
시커먼 잉크 속에서 둥글게 볼록거리며 눈알이 쑥쑥 돋아났다.
투란의 오른팔은 그렇게 시커먼 채로 두어 배가량 두껍고 우람하게 확장되었다. 팔을 그대로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힘들 듯한 크기였다. 하지만 투란은 아주 가볍게 치켜올린 시커먼 손바닥을 활짝 펼치는데, 그 손바닥에 꽃잎 같은 눈꺼풀을 지닌 눈알이 서넛 박힌 채로 깜박거리고 있었다. 눈알은 곧 대여섯이 되었다가 하나둘 정도로 줄었다가 하며 잉크 속으로 잠겨 들었다 나왔다 하는 기묘한 움직임을 반복했다. 뭔가를 바라보는 듯, 가늠하며 노려보고 싶어 하는 듯…….
한구석에서 조용히 구경하던 바루하가 그 눈알, 눈꺼풀의 형상에 신음하는 듯이 몇 마디를 흘린다.
“폭안화(爆眼花)? 설마……!”
번쩍.
바루하의 목소리가 여운 속에 흐려질 때, 눈알 하나가 새하얀 섬광을 피워 내면서 사라졌다. 그 눈꺼풀인 꽃잎이 으스러지며 흩어졌다.
눈알이 부서지고 터뜨린 광휘는 어둠이 가득하고 성벽과 도시를 감싼 빛 열매와 빛 넝쿨이 겨우 밝히던 풍경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듯한 거대하고 새하얀 섬광이었다.
망루에서 피어난 섬광은 저 멀리에서 우람한 체격을 과시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철갑의 거인을 삼키듯이 뻗어 나갔다. 한없이 커다랗게, 넓게, 멀리 닿을 수 있다고 과시하는 것처럼.
철갑의 거인 하나가 발목 아래만을 간신히 남긴 채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안개가 되어 증발해 버린 듯했고, 그 주변도 섬광에 덩달아 쓸려 나간 흔적으로 넓게 움푹 팬 고랑 같은 꼴이 돼 버렸다.
번쩍, 번쩍.
투란의 손이 두어 번 더 흔들렸다.
섬광이 거대하게 두 줄기로 뿜어졌다.
뱀파이어 군세의 세 곳, 중심이 되어 주는 듯했던 철갑의 거인…… 기가스 레벨의 머신기어 셋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주변을 맴돌던 뱀파이어의 무리도 함께 지워져 버렸다.
혼란이 바로 흘러넘쳤다.
인간의 귀에는 거의 닿지 않을 듯한 처절한 비명이 멀리서 잔뜩 울려 퍼지고 당황해서 터뜨리는 괴성만이 성벽에 간신히 와 닿는 듯했다.
투란은 왼쪽 눈구멍에 우자트를 끌어내 두리번거리면서 다시 오른팔을 휘둘렀다.
번쩍, 번쩍…….
광채가 몇 번을 이어졌다.
철갑 거인을 지워 버린 집중된 거대한 빛줄기가 넓게 확산되면서 퍼져 나갔다.
뱀파이어의 군단이 혼란 속에 머물고 있던 어두운 지형이 새하얀 빛의 장막, 바람결에 밝혀졌다.
그 빛은 뱀파이어의 군단을 덧칠하며 지워 버렸다.
하지만 전멸은 아니었다.
―빠르군, 멀어질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했나? 성벽으로 돌격해 오고 있다. 그 이상한 가속 능력이 가능한 개체가 많이 남은 모양이야…… 대강 한 삼천? 십분의 일 정도니까, 그래도 소수가 남았다고 해야겠지?
드라고니아가 담담하게, 너무 담담해서 냉정하게 들리는 말을 하고 있었다.
투란은 가만히 와해돼 버린 군단의 태세를 허물고 개별적인 기량을 이용해서 인왕도로 돌격해 오는 수천의 뱀파이어를 둘러봤다. 그리고 바로 프릿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프릿, 기습은 여기까지. 저 남은 패거리는…….”
“인왕도의 전사들이여!”
프릿은 투란의 목소리에 바로 망루의 벽 위로 올라서면서, 장대한 성벽의 정상인 성루에서 한번 더 치솟은 망루였지만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는 모습으로 외치고 있었다.
어느새 망루에 올라온 셀리아가 그 외침에 바로 마법을 걸었기에 프릿의 목소리는 다시 인왕도의 성벽이 울려 내는 것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무리는 우리 몫이다! 저 피에 굶주린 마물들에게 왕 노릇하는 인간의 격노를 맛보여 줄 때가 왔다! 가자아아아!”
프릿이 망루에서 도약했다.
바루하가 바로 으르렁거렸다.
“야, 이 바보 폐하야! 네가 앞장서면……!”
한 박자 늦게 투란이 입술을 달싹이며 한마디 흘려 낸다.
“……흐어?”
―지휘관이어야 할 놈이 뭐 하는 짓이야!
드라고니아도 황당한 듯 으르렁거렸다.
마법을 끝낸 셀리아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웃었다.
“하여간 저 버릇은 고칠 생각이 없다니까.”
망루에 남은 누가 뭐라 떠들든 말든, 프릿은 이미 삼십오 미터의 성벽 정상에서 다시 십오 미터를 치솟은 망루에서 저 아래 성벽의 초석까지 추락……하듯이 낙하했고 힘차게 발 구르는 소리를 내면서 뱀파이어 군단의 나머지 패거리를 향해 돌격해 나가고 있었다.
홀로 3천을 모조리 감당하겠다는 듯한 무모함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가자아아!”
“폐하! 같이 가!”
“으하핫, 백은의 혈족 피 맛 좀 보자!”
단순함과 포악함이 섞인 외침과 함께 성벽에서 그대로 아래로 투신하는 이들이 있었다. 인왕도 성벽의 장대한 규모 탓에 얼핏 세어도 수천은 될 듯 보였고, 투란에게는 그들이 모두 몬스터 로드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