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2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13)
“헤에, 백안(百眼)의 아르곤은 전설로만 들었는데…….”
갑작스럽게 투란의 곁을 스쳐 가며 들려온 셀리아의 목소리였다.
투란이 ‘그거 아닌데요?’라고 입술을 달싹이려는 순간, 셀리아는 프릿처럼 도약하고 있었다. 저 아래를 향해, 날개가 없어도 자신이 새라고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곧이어 흘러나오는 마력은 셀리아에게 보이지 않는 날개를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프릿처럼 그대로 바닥을 꿰뚫듯이 내려가지 않고 부드럽게 활강하며 날개를 펼친 닭처럼 보였으니까.
―마력 장벽이랑 같은 원리야. 마력을 그대로 형상화해서 물질적 특성을 구현해 낸 것이지. 저런 방식으로는 터무니없이 마력이 소모되기는 한다만…… 마석을 소모하는 것으로 대처하는군. 이곳이 아니면 저런 짓을 하지 않겠지.
드라고니아는 셀리아의 마법에 대해 떠들었다.
투란은 셀리아가 남긴 말에 대해 바루하를 물으려 했다.
한데 백안의 아르곤이 뭐냐고 묻기 위해 열린 투란의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전혀 엉뚱한 경고였다.
“바루하, 저쪽으로 물러나요. 구경만 해도 되니까.”
말과 함께 투란은 바루하에게서 멀리, 망루의 가장자리에 바싹 몸을 붙였다.
바루하는 무슨 일인가 묻지 않고 재빠르게 투란의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다만 구경만 하란 말은 무시하고 허리춤에서 뭔가 꺼내 손에 쥐고 있었다. 몸을 꽉 감싼 허리띠에서 어찌 저런 것이 나왔는가 의아했지만, 투란은 바루하를 보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면서 검게 물든 오른손…… 더 이상 손이라고 부를 부분이 없는 형상이 돼 버린 팔을 들어 올렸다.
누런 눈알 위로 회색 멍울처럼 맺힌 눈동자가 시커멓게 물렁거리고 울렁거리는 살갗에 볼록 튀어나왔다. 그 옆으로 가득 꽂힌 씨앗으로 장식된 듯한 눈알도 솟구쳤다. 두 눈알은 투란의 팔뚝에서 끔벅거리며 서로를 보는 듯한데…….
허공이 출렁하며 사람의 형상이 튀어나온 것을 두 눈알은 똑바로 마주 봤다.
튀어나온 자는 날카로운 꼬챙이처럼 보이는 칼을 든 채였고, 화려한 백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차림새로 망토까지 흩날리고 있었다. 그 입에서 격노한 말이 튀어나올 때는 그 손에 들린 꼬챙이 같은 칼이 투란을 찌르기 위해 내밀어지고 있기도 했다.
“이 교활하고 천한 것! 감히…….”
푸악, 촤악.
투란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투란의 팔뚝에서 누런 눈알과 씨앗 눈알, 둘이 동시에 터져 나갔고 날카롭지만 꼬챙이 같은 칼은 누런 구름과 얽힌 씨앗 속에서 셀 수 없이 터져 나간 가시를 막아 낼 수 없었다.
그 가시와 구름을 뒤집어쓴 자는 허공에서 망루 쪽으로 기울어졌고, 투란이 살짝 비켜서는 자리로 굴러떨어지듯 처박혔다.
화려했던 금색과 은색의 차림새로 붉은 핏발이 드러났고, 눈꼬리를 타고 수은처럼 흘러내리던 눈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입고 있는 의복과 몸이 한꺼번에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오는 듯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째서 수은처럼 보이던 피가 느닷없이 본래의 붉은 색채로 변해 가는가는 투란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팔짱 끼고 구경하는 자세가 된 바루하에게 뭐라 묻는 대신에 투란은 다시 경고 비슷한 손짓을, 비어 있는 왼손으로 멀어지라 듯이 살랑이는 손짓을 하며 짧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아직.”
바루하는 말없이 기다렸다.
투란은 우두커니 선 채로 저편에서 시작되려는 싸움을 구경하려는 듯이 눈길을 보냈다.
곧 망루에 떨어져 내린 채로 죽어 버린 듯한 뱀파이어가 흘리는 붉은 피가 누렇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가시에 할퀴어지고 갈라진 자잘한 상처에서 수은처럼 흘러내리다가 본연의 핏빛이 되더니 금방 누런 구름의 분말처럼 뭉치고 부서져 내리는 중이었다. 화려한 옷차림 또한 그 누렇게 변해 가는 과정에 휩쓸린 듯이 부서지고 있었다. 온전한 것은 꼬챙이처럼 보이는 칼만 남은 듯했다.
저편에서의 싸움은 요란하게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고, 그 이상한 풍경은 투란에게 ‘피스톨?’이란 한마디를 중얼거리면서 갸웃하게 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바루하가 귀를 쫑긋하며 뭐라 입술을 달싹이려는 순간, 허공이 찢어지면서 투란을 향해 휘둘러지는 장검이 나타났다.
장검의 형체가 드러나는 순간, 그 칼자루를 쥔 자의 모습 또한 허공에 나타났다.
말없이 장검을 휘두르는 자는 망루 바닥에 뒹구는 자의 상황을 본 듯, 투란의 시커먼 오른팔 쪽을 피해 왼쪽에서 나타나 투란의 머리부터 어깨, 심장을 내리긋는 칼질을 하고 있었다.
투란은 가볍게 왼손을 휘둘러 그 검격을 단도 같은 손톱으로 튕겨 냈고, 한 걸음 옆으로 디뎠다가 미끄러지는 동작과 함께 붉은 털이 숭숭 돋아난 왼손을 뻗어 할퀴었다. 손톱의 끝자락이 제대로 화려한 옷자락을 베었고, 살갗까지 파고드는 상처를 남겼다.
키릭, 묘한 소리는 바루하가 막 팔짱을 풀고 아까 꺼낸 뭔가를 뒤틀고 있는 탓에 났다. 하지만 바루하는 자신의 동작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미약하게 난 상처로 보일 뿐이었던 할퀸 자리에서 피 분수를 뿜어내며 장검을 지팡이 삼아 버티려 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그럴 필요를 없애고 있으므로.
투란이 다시 간격을 좁히려고 한 걸음 딛는 순간.
“라이칸스로프……가 아니로군? 이건…… 어떤 괴물의 손톱인 거냐? 어떻게…… 백금왕(白金王)의 백작인 나를…… 고작 이런 상처만으로…….”
뱀파이어, 스스로를 백작이라 칭한 자가 기울어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팡이 노릇을 하려던 검이 그 손에서 떨어져 나갔고, 그 머리가 그대로 망루의 돌바닥에 처박혔다. 무겁게 떨궈진 탓인가 머리 한쪽이 깨지며 피가 터져 나오는데, 역시 수은의 색채를 담지 않은 붉은 피였다.
하지만 백작 뱀파이어의 피는 누런 분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거품을 머금은 채로 망루 바닥을 적시며 퍼질 뿐이었다.
투란이 가만히 그 모습을 보며 완전히 죽은 것인가 기웃거리려 했다.
“그 붉은 털이랑 손톱, 그림울프의 것이냐?”
참았던 숨을 토해 내듯이 격하게 바루하가 묻고 있었다.
투란은 살짝 놀라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루하의 눈길이 바로 누렇게 부서져 가는 분말이 곰팡이처럼 엮이는 쪽을 향하며 다음 물음이 바로 나온다.
“저건 독 포자…… 폭안화의 독 포자였지?”
“눈깔꽃의 독 가루, 그거 맞아요.”
조금 다른 낱말로 투란이 대답했다.
바루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투란이 고른 낱말도 맞다고 인정했다. 다만…….
“죽도록 찾아도 못 찾는 독 포자였는데…… 섬멸광의 폭안화와 독 포자의 폭안화, 그걸 자유롭게 다루는 아르곤의 능력…… 게다가 그림울프라니, 너 정말 언더섀도우에서 뱀파이어를 물리칠 구원자가 될 수 있는 모양이다.”
기묘한 이야기를 끈적한 말투로 더할 뿐이었다.
투란의 낯이 살짝 찌푸려졌다.
‘붉은 늑대’, 그림울프의 손톱은 장검을 튕겨 냈지만 미묘하게 금이 간 채였다. 형상을 해체하고 다시 형성하면 그만이기는 한데, 어지간한 칼날로는 이 손톱에 상처 내지 못할 터였으니 저 백은 혹은 백금으로 만든 듯한 장검이 보통 물건은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의아한 일은 어째서 이 손톱에 살짝 긁힌 것만으로 뱀파이어가 피를 철철 흘리는 꼴로 죽어 나자빠졌나 하는 것.
―왜 갑자기 그림울프를 골라는데?
드라고니아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하나씩 짚어 보자는 듯이 물었다.
‘봤으니까, 프릿이 말했잖아. 미래를 두려워 말라고. 그게 예견의 마녀가 넘긴 눈을 이용하란 얘기였지. 게다가 미리 눈깔꽃이랑 붉은 늑대를 말해 주기도 했잖아. 그 마녀, 이 상황을…… 정말 예견해 놨던 셈이지.’
조금 묘한 기분으로 대답해 주면서 투란은 바루하를 바라보며 묻는 말을 꺼냈다.
“그거 대체 뭐죠? 찌르기만 하려는 칼에 가끔 그런 자루를 붙이기는 해도, 대롱처럼 뚫린 육각형 몽둥이, 그렇게 짧은 몽둥이를 어디다 쓸 수 있는 거예요?”
투란의 눈길이 바루하가 들고 있는 물건에 고정된 채로 나오는 물음이었다.
바루하는 자신의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고 투란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춤추는 산맥에서 이쪽으로 바로 건너온 것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어. 이건…….”
쾅, 콰쾅, 콰콰쾅!
저편에서 터진 벼락 치는 소리가 바루하의 말을 끊었다.
투란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오른팔에 돋은 눈알이 모조리 데굴거리는 꼴로 저쪽의 싸움터를 바라봤다.
수천이 격돌하는 싸움터에서 폭음을 터뜨린 것은 인왕도 쪽이었다.
서로 맞닿으려는 찰나, 일제히 바루하의 물품이랑 닮은 것…… 피스톨을 겨냥해서 저런 폭음을 연속으로 터뜨린 광경이었다. 그 폭음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고 긴 메아리가 되어 전장을 헤집듯이 퍼지고 있기도 했다.
―뭐지? 피스톨에 뭔 울림통을 달아 놓은 거야?
드라고니아가 메아리를 파악하면서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다.
투란이 놀라는 표정을 보며 바루하가 곁에 다가와 선 채로 말을 잇는다.
“제국에서는 불법 물품으로 소유금지 된 것이고, 춤추는 산맥에서는 그 특이하고 괴팍스러운 환경 때문에 쓸모없는 것. 그게 바로 이 피스톨과 라이플, 총화기(銃火器)라 부르는 무기다.”
설명을 들으면서 투란의 두 눈은 푸르스름한 톱니와 태엽이 가득한 눈동자를 띄운 채로 저편을 바로 코앞에 둔 것처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의문은 곧바로 투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폭약? 작약을 써서…… 볼트? 뭘 쏴 낸 거죠? 왜 저렇게 오래 떨리면서 소리를 내는 거죠? 뱀파이어만 잡는 무기인가요? 춤추는 산맥에서는 왜 쓸모가 없는데요?”
닥치는 대로 짚는 두서없는 소리였다.
바루하는 곧바로 저쪽에 몰입하는 투란을 떨떠름하게 흘깃했지만, 대답은 차분하게 바로 꺼내 놓고 있었다.
“손톱 크기의 쇠구슬, 조금 길쭉한 쇠구슬을 쏴 낸다. 거기 마석 가루를 바르고 세공해서 축성(祝聖)의 효과를 내게 하지. 어쨌든 뱀파이어는 성물(聖物) 쪽에 약하니까. 춤추는 산맥에서 이런 총화기를 보기 힘든 까닭은, 화약이 제대로 점화되지 않기 때문이야.”
“점화? 아니, 춤추는 산맥에서도 펑펑 터지는 도구는…….”
쿠쿵, 콰쾅, 쾅쾅…… 키이잉, 위이잉.
저쪽의 소리를 귀에 담으면서 투란이 물으려 하는 말에 바루하가 바로 고개를 젓고 끊으며 이야기를 잇는다.
“춤추는 산맥에서 뭔가 터지는 물품을 만드는 놈들은 대부분 몬스터의 파편을 사용하지. 연금술사 또한 몬스터의 파편을 외면하지 않고 선호하는 곳이기도 하고, 마법사는 그냥 마법으로 뭔가를 터뜨리려 하지. 이런 총화기에 사용되는 통제된 폭발을 일으키는 화약은 만들지를 못하니까.”
“통제된?”
“그래, 터질 때 담고 있는 그릇도 몽땅 때려 부숴야 하는 폭발물이 아니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꾸역꾸역 작은 불꽃만 피워 내는 연료는 총화기에 쓸 수 없어. 적든 많든 단숨에 불이 붙어 터져 나가면서, 담고 있는 그릇을 부숴 버리는 일이 없는 화약. 그게 총화기의 핵심이다.”
“으음…… 그럼, 저 메아리는 뭐예요? 터질 때마다 길게 울리는데…… 아주 싫어하네요?”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넘기면서 투란이 다시 묻고 있었다.
뇌리 한구석에서 피스톨과 라이플에 대해 떠들려 하는 드라고니아를 느꼈기 때문인데, 드라고니아도 저런 메아리를 흘려 내는 총화기는 모르는 듯했으니까.
바루하는 망루의 낮은 담장에 몸을 기대면서 대답하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청각은 인간과 달라. 더욱 짐승에 가깝지만, 짐승보다 예민한 부분이 있지. 그 청각을 괴롭히려고 만든 울림통을 붙여 놨지. 다른 곳의 보통 총화기는 그저 터지는 소리만 나지만, 이곳에서 만든 것들은 뱀파이어를 위해 나름대로 개조한 셈이야.”
“어, 근데…… 쏘는 쪽도 별로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투란이 슬그머니 덧붙이며 묻는 척했다.
입가를 뒤트는 묘한 웃음과 함께 바루하가 대답한다.
“그야, 뱀파이어의 힘을 끌어내는 중이니까. 감각이 뱀파이어랑 비슷해진 상태에서 들으면 괴롭지. 뭐, 애초에 저 녀석들이 가장 괴롭다고 느끼는 음역을 포착해서 만들기도 했고.”
“몬스터 로드가 아주 많군요. 어, 음, 인왕도에 사는 사람이 전부 몬스터 로드인 것은 아니겠죠?”
슬쩍 더하는 물음이었지만 투란은 굉장히 심각했다.
조금 뒤늦은 듯했지만, 갑작스럽게 덤벼 오는 녀석들을 미리 봤기에 그쪽에 대한 대처를 먼저 했지만 저렇게 많은 몬스터 로드가 한자리에서 우글거린다는 상황은…… 자칫하면 모두 다 함께 미쳐 날뛰는 몬스터의 군단이 서로 죽이고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잖은가.
바루하는 투란의 심각한 염려를 모르는 듯, 느릿하고 차분해서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분명한 말투와 태도로 답을 해 주고 있었다.
“전부 언데드 헌터는 아니지. 하지만 절반 조금 안 되는 수이기는 해. 어디 보자, 한 십만 명 모였으니까 그중에서 4만 몇천은 되려나?”
말이 나오지 않아 투란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거나 말거나 뭔가 자신만의 호기심에 빠져든 것처럼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뇌리에 쏘아붙이는 말을 했다.
―눈알 흘러나온다고! 두 번째 덤빈 놈, 장검 옆을 봐! 머리에 눌려 있으니까, 꺼내 봐! 얼른!
투란으로서는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뱀파이어의 피 묻은 눈알이 흘러나오거나 말거나 뭔 상관인가 하는 생각부터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