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2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17)
“놀랍군, 정말로 인간이 호르트의 눈을 장비할 수 있다니.”
담담한 목소리가 텅 빈 벽을 치듯이 울려 퍼졌다.
투란은 즉각 주변을 확인했다.
백금왕으로 보이는 한 명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그런 투란의 눈길을 알아차린 듯, 담담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기묘한 웃음을 섞은 채로 울려 나온다.
“이곳은 나만의 거처.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 말에 투란은 바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확인해야 했다.
“백금왕?”
“그렇다. 알고 온 것 아니었나?”
재미있다는 듯, 하지만 어이없기도 하다는 듯이 되묻는 말이었다.
투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보는데 찾는 사람…… 뱀파이어 맞나 어떻게 알아? 아, 멀쩡해 보이는데 뱀파이어 맞기는 해요?”
살짝 근심이 어린 물음으로 말이 맺어지니, 백금왕이 아까와 달리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내가 인간으로 보이기라도 한단 말이냐? 하하하핫, 이게 대체 몇천 년 만에 듣는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하하핫!”
“미친놈?”
웃는 백금왕을 향해서, 투란이 그저 웅얼거리듯이 입안에서 굴린 소리였다.
하지만 백금왕의 웃음이 순식간에 잘게 쪼개지며 찌푸린 표정이 되는 꼴은 그 입안의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버릇이 없구나. 감히 내 앞에서 나를 매도하다니…… 하지만 아직 화내지 않으마. 아직 내가 너에게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제안?”
투란은 어리둥절했다.
메워지기는 했지만 지붕을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데,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것인가?
―이러고 있을 때냐?
이렇게 드라고니아가 바로 짚고 있기도 했지만, 투란이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바깥에서 날뛰는 프릿과 그 군단이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터였다.
“음, 미안하지만 밖에서 많이 죽게 둘 수는 없거든. 뱀파이어랑 노닥거리며 시간 끌다가 그러면 굉장히 미안하잖아. 그러니까…….”
투란은 느릿하니, 하지만 분명하게 한 걸음 내디디면서 백금왕의 자세를 살피고 공방의 요처를 찾으며 중얼거렸다.
백금왕이 그런 투란을 보더니 조금 색다른 미소를 지었다.
“하찮은 열매 무리의 목숨 때문에 이 백금왕의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니, 어처구니없으나 그 무리가 아니었다면 네가 여기 올 일도 없었을 테니 관대하게 이해하겠다. 그리고…… 이야기할 시간도 내도록 해 주지.”
우우웅.
궁전이 울렸다.
백금왕의 말이 무슨 뜻인가 투란은 생각하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사방에서 요란하게 일어나던 소동, 난리가 순식간에 잦아들고 있었으니까.
드라고니아가 밖에 두고 온 프로브를 통해 확인까지 해 줬으니 상황은 분명했다. 다만, 의아함은 남아 투란에게 묻게 했다.
“뭘 한 거지?”
“기다리게 했다. 네가 나에게 대답할 시간만큼.”
백금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살짝 낯이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투란은 다음 걸음을 딛지 않고 멈췄다.
멈추고 나서 보니 새삼 백금왕의 외모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백금이나 백은과 달랐고, 붉은 눈동자를 받쳐 주는 눈알은 기묘한 회색이었다. 핏기 없는 살갗은 회색의 광채를 띠기는 했지만 머리카락의 빛깔과 닮은 흰색…… 입고 있는 옷의 재질은 백은의 뱀파이어 군단이 갖췄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것이 몇 배는 더 공들이고 비범하게 했다고 과시하는 듯했다.
이렇게 투란이 살피는 사이, 백금왕이 이야기를 잇고 있었다.
“내가 너와 대화하고자 하는 까닭부터 들어라. 그러면 너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특별한 상태인가를 알게 될 터이니…… 언데드 헌터니 뭐니 하는 어설픈 존재라서가 아니다. 그 눈…… 호르트의 눈을 안와(眼窩)에 밀어 넣고도 멀쩡한 것이 너를 특별하게 한다. 하나뿐이어야 할 눈이 왜 둘인가는 좀 희한하다만…… 호르트의 은총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는 일이지. 음, 그러고 보니 넌 호르트에 대해서 뭘 알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알 수 없기에 듣고 있던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드라고니아는 아는 바가 있는 듯했지만 투란은 자세히 들은 적이 없고, 딱히 귀를 기울일 이야기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세상의 이런저런 신전이 품고 있는 온갖 일에는 관심을 갖지 말라고 들었으니까.
백금왕은 잠깐 물끄러미 투란을 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득한 먼 옛날 이 땅에 강림했던 신성(神性), 때로는 짐승의 모습을 했고 때로는 인간의 모습을 했으며 때로는 정령의 형상조차 드러냈던 수많은 신성 중에 직접 그 화신(化身)을 이 세계에 드리웠던 성스러운 자. 유한한 생명의 형상을 입고서 올바른 존재로서 이 세계를 거닐었던 신성, 바로 호르트라 불리는 신이다. 빛의 신이라고도, 창공(蒼空)의 신이라고도 하지. 우자트는 그 화신이 세계에서 사라질 때, 불멸의 유품으로서 남았다. 그래, 호르트가 자기 화신의 눈을 하나 빼서 세상에 남긴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 눈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신성을 품은 눈알을 눈구멍에 박는 것만으로 그 능력을 활용할 수도 없지. 보통은 미쳐 날뛰거나 온몸이 쇠약해지면서 죽는다. 신성한 유물이 저주받았다는 이야기가 까닭없이 떠돌지는 않는 셈이다.”
잠시 백금왕의 말이 멈췄다.
투란은 가만히 그런 백금왕을 바라만 봤다.
드라고니아가 열심히 둘러본 바로는 아까 성이 울린 이후로 프릿과 그 군단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 중이라 했으니 미묘하게 이야기를 들을 시간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백금왕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는 알 수가 없었다.
설마 호르트의 눈, 우자트를 끼우고 왜 쇠약해져 죽지 않았느냐 따지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몬스터 로드인 투란에게 어떻게 그 눈알을 눈구멍에 박아 넣었냐고 비전이라도 있느냐고 묻는 것도 아니었다.
투란 스스로도 기계 괴수인 고르곤, 온갖 눈알을 다 굴릴 수 있는 아르고누스가 있었기에 우자트가 그 기능을 발휘할 뿐이라고 느끼고만 있을 뿐이잖은가. 거기에 무슨 성스러운 존재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백금왕이 의혹 어린 투란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다시 웃음을 띠고 멈췄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우자트를 눈으로서 활용했던 이들이 있었지, 호르트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동안 말이다. 축복이 가득한 시절이었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그 시기가 지난 후, 우자트는 아무도 쓸 수 없는 신의 유품이 되었다. 이제까지, 네가 내 앞에 서는 지금까지 말이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프릿을 놓아 보낸 일이 말이다.”
“놓아 보내?”
투란이 눈매를 좁히면서 되뇌었다.
백금왕의 웃음이 짙어졌다.
“우자트는 귀한 것이다. 애초에 이 성의 가장 깊은 곳에 아주 은밀하게 보관되고 있었지. 설혹 아무도 쓸 수 없다고 해도 그 귀중함은 변함이 없잖느냐? 하지만 그렇게 보관만 하고 있어서는 그저 아무도 쓸 수 없는 과거의 유산, 내다 버리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폐기물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우리는 끝없이 찾아 헤매고 있었다. 다시 그 축복의 시절을 재현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라 믿고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마녀의 제의는 반가운 일이었지.”
“예견의 마녀?”
한층 더 좁혀진 눈매로 투란이 되뇌듯 물었다.
백금왕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야기를 잇는다.
“그래, 그 마녀가 제의한 일이었다. 가장 깊고 안전한 곳이 아니라, 적당히 누군가 훔쳐 갈 수 있는 곳에 우자트를 내놓으라고. 프릿이란 도적이 훔쳐 내 가면서도 일부러 그러도록 방치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곳에 두라고 말이다. 그러면 프릿이 우리가 찾던 이를 대신 찾아 줄 것이라는…… 예견을 바탕으로 한 제안이었다.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수천 년을 기다려 온 일이거늘!”
듣고 있던 투란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투란의 마음속에는 저절로 으르렁거림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더 휘말려 있는 거야! 그 마녀, 바란 일도 아니라더니 뭘 그리 성실하게 여기저기 들쑤셔 놨던 거냐고!’
드라고니아는 더욱 침착하게 상황을 되짚기 시작했다.
―미래의 일을 미끼로 프릿과 백금왕을 동시에 현혹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너에 대해서는 대체 뭘 미리 봐 둔 거지?
‘응?’
투란은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예견의 마녀가 뭔가 떠들기는 했는데, 깊이 생각해 보질 않았잖은가.
그에 대해 생각할 틈은 없었다.
백금왕이 천천히 손을 내밀면서 한층 더 붉게 빛나는 눈동자로 투란을 응시하는 채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 혈족이 되어라. 이 백금왕의 휘하가 되어라. 나를 섬겨라. 나 이외 누구도 섬길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 그 눈을 지니고, 황금의 혈통을 부활시키는 일에 협조해라. 이것이 내가, 이 백금왕이 너에게 베푸는 자비이니라. 받아들이겠느냐?”
키릭키릭, 궁전 곳곳에서 뭔가 움직이는 낌새가 있었다.
한마디마다 물컹거리면서 백금왕의 주변에서 흘러나와 요동치는 마력도 있었다.
―함부로 대답하지 마라! 계약의 마법인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구성인가 알 수가 없다. 저 마력, 너무 이상해! 불길하고 끔찍한 것이 허튼 대답이라도 바로 너를 옭아맬 것 같거든!
드라고니아가 곧바로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란은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거절한다!”
말과 함께 곧바로 몬스터 로드의 고유 마력이 강인한 생명력을 담은 채로 투란의 몸에서 맥동하며 장벽을 세우듯이 휘감고 있었다.
다가오던 백금왕의 마력이 바로 투란의 장벽에 부딪혔다.
허공을 갉아 내고 으스러뜨리면서 생명을 지닌 자를 자극하는 끔찍한 힘이 요동치면서 궁전 안을 채우듯이 퍼져 나갔다. 몬스터 로드의 고유 마력, 오러의 형태를 바탕으로 꾸민 장벽이 방어해 낸 셈인 듯한데…….
“왜 거절하느냐? 아, 혹시 뱀파이어가 되면 두 번 다시 햇살을 볼 수 없다는 말을 믿고 있는 것이냐? 그래서 언젠가 다시 햇살 아래로 돌아가기 위해서 거절하는 것이냐?”
백금왕은 이미 거절을 예상한 것처럼 담담하게 머뭇거림 없이 묻고 있었다.
투란은 눈매를 사납게 하면서 바로 대답한다.
“쯧! 몬스터 로드에게 뭔 헛소리야. 뱀파이어의 힘이 탐나면, 잡아 삼키면 되는데! 애초에 널 때려잡으려고 왔다고, 내가!”
말과 함께 멈췄던 걸음도 다시 내디뎌 가는 투란이었다.
한데 이런 투란을 보면서 백금왕은 한층 더 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핫, 과연 마녀의 예견은 틀리지를 않는구나.”
“거절할 것을 알면서 물었냐?”
투란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면서 백금왕에게 다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다가가는 사이에 투란의 왼손에는 ‘붉은 늑대’의 발톱이 손톱이 되어 치솟는 중이기도 했다.
이런 투란의 모습에도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백금왕은 앉은 채로 웃으면서 말을 잇고 있었다.
“최상의 결과는 너 스스로 나를 따르는 것이었으니까. 내 설득을 받아들인다면 너에게도 최상의 결과였을 텐데…… 우매한 열매의 몸이니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 내 잘못이 아닐 수 없구나. 하하핫. 하지만 너의 결정이 어떻든, 나는 우리가 기다려 온 것을 얻을 것이니라. 이렇게 말이다.”
투란의 걸음이 멈춰졌다.
말을 맺음과 함께 백금왕의 붉은 눈동자가 거울이 된 듯한 백금 광채를 흘렸고 우자트의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본 순간이었다. 그 순간 백금왕의 눈동자는 백금의 거울인 것처럼 투란의 눈동자, 우자트를 담고 있었다.
투란은 온몸으로 우자트에서 일어난 여리고 미묘한 파동이 번지면서 마비된 듯한 감각을 느꼈다. 우자트가 둘이라 그런가, 이리저리 엮인 파동은 두텁게 얽힌 그물처럼 투란을 촘촘히 감싸 오는 듯했다.
‘이거 뭐야?’
의아함이 떠올랐지만 입술과 혀까지 굳었기에 투란은 소리조차 못 냈다.
백금왕이 그런 의문에 답하듯,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면서 말한다.
“축복의 시절, 우자트를 사용했던 자들이 모두 성스럽고 훌륭하지는 않았다. 교만에 휩싸여 우자트의 힘을 자기만의 욕심, 욕망을 채우는 일에 거침없이 휘둘러 대는 경우도 많았지. 바로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백금안은 그때 우자트를 억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하하핫, 네가 스스로 협조했더라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텐데.”
푹, 푸푹.
투란은 몸을 관통하는 백금의 창을 느꼈다.
궁전의 바닥이 요동치면서 치솟은 창이었다.
백금성, 그 소재는 백은의 뱀파이어들이 사용한 장비랑 정말 똑같았던 모양이었다.
백금왕이 그 왕좌에 앉아 꼼짝도 않는 모습으로 궁전의 바닥을, 벽을 변형시켜 투란을 꿰어 버리고 있으니!
“염려 말아라, 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자트의 소중한 숙주(宿主)이잖느냐. 하하핫, 그러면 이제 프릿에게 벌을 내릴 차례인가.”
도도한 웃음, 오만한 표정으로 백금왕이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