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2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18)
우우웅.
궁전이 다시 한번 울렸다.
백금왕의 웃음이 사라졌고, 표정이 뒤틀렸다.
“무슨……?”
궁전이 처음과 똑같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싸움을 멈추고 관망하란 신호를, 처음과 똑같이 보낸 것이다.
백금왕이 두 번째로 내보낸 신호는 프릿과 그 일당을 모조리 죽이란 것이었는데, 궁전은 백금왕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는 것처럼 처음과 완벽하게 똑같은 울림을 신호로 토해 냈다.
“어떻게?”
백금왕은 이변(異變)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명령을 담은 신호라도 매번 똑같지는 않았다.
언어를 대신하는 것이기에 명령을 내릴 때마다 담겨 있는 말투, 미묘한 어감을 반영해서 신호는 조금씩 달라졌다. 때문에 이제까지 한 번도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울린 적이 없었다.
한데 지금 울림은 처음과 전혀 차이 없이 아주 똑같았다!
백금왕의 눈길이 창에 꿰인 투란을 향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죽지 않았고 꿈틀거리는 중이었지만 투란이 대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묻는 말이었다.
그 대답은 백금왕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과격하게 돌아왔다.
치잉, 우드득, 째앵.
궁전 바닥에서 솟아났던 백금의 창이 금이 갔고 일그러졌다가 으깨져 버렸다.
그 파편의 단면은 이글거리는 붉은 광채가 매달려서 달아오른 쇠란 어떤 것인가를 과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투란의 목소리가 거칠게, 둔탁하게, 무겁게 울려 퍼졌다.
“썩을 것이…… 아니, 흡혈종이니까 썩지도 않을려나? 누구 앞에서 수작을 부려? 아, 진짜…… 어제오늘 이리저리 휘둘려서 짜증 났는데!”
막말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 겁을 잃은 투덜거리는 꼬맹이가 지껄일 듯한 말투에 딱 어울리는 막말, 그 대상이 된 백금왕은 당혹스러운 듯했다. 단지 그 말 때문만이 아니라 백금의 창을 깨부순 투란의 몸 곳곳에서 이글이글 뭉클거리는 용암의 자취로 인해서.
“라바 비스트? 마물, 괴수를 삼키는 언데드 헌터라도 그건 잔해조차 손도 못 대는 것이 아니었느냐?”
“응? 라바 괴물은 삼킨 사람이 없다고? 흐흠, 흥미로운 이야기야.”
콰득, 우지직.
새로 일어나 몸을 휘감는 백금의 밧줄과 사슬을 낡고 썩은 끈처럼 끊어 버리면서 투란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고 있었다. 백금왕이 한 말에서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감상까지 중얼거리는 채로.
백금왕의 표정이 험악해졌고, 그 눈동자가 붉은 광채를 잃을 정도로 환한 백금의 색채로 물들면서 투란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자트가 그 거울 같은 눈동자에 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노랗게 물들고 광택이 없는 유기질(有機質)의 눈동자가 비쳤다.
투란의 눈구멍, 양쪽에 자리 잡은 눈알은 광택을 잃어버린 듯한 황금빛의 눈동자를 드러낸 채로 백금왕의 응시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냉혹한 비웃음과 함께 투란의 목소리가 울렸다.
“우자트에 간섭하는 것 말고는 아무 효과를 못 내는 거였어? 에이, 왕씩이나 되는 분의 눈깔인데, 그러면 곤란하지! 내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말이야.”
“감히!”
뒤늦게 말뜻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백금왕의 반응은 몇 박자 늦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투란은 백금왕과 손에 닿을 거리까지 와 있었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그 두 눈을 쿡 찌르고 있었다.
백금왕이 무슨 일인가 겨우 느꼈다 싶은 순간, 투란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이미 눈알 둘이 데굴거리며 굴러내려 손바닥 위에 얌전히 올려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투란의 다른 손이 큼직하게 부풀어 백금왕의 머리를 움켜쥐었고 바로 힘줄이 손등에 돋으며 그 머리를 으스러뜨릴 듯한 찰나였다.
“크아아앗!”
괴성과 함께 백금왕의 몸이 흩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있던 의복조차 모조리 그릇에서 쏟아진 수은 방울처럼 튀며 터져 버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방울은 곧바로 은구슬처럼 튀고 굴렀고 저편으로 제멋대로 흘러 나갔다.
“호오?”
투란은 허공을 쥐어 버린 듯한 손을 다시 원래 크기로 되돌리면서 돌아봤다.
튀며 구르고 흐른 수은 방울은 중간에 작은 날개로 간혹 드러내는 채로 투란에게서 멀어진 곳에서 다시 뭉쳐 들고 있었다. 뭉치면서 꿈틀거리며 이뤄내는 형체는 분명히 백금왕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복구한 백금왕은 자신의 옆구리를 움켜쥐면서 비명 같은 신음을 섞어 떨리는 목소리를 흘려 내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옆구리의 의복은 뼈와 피가 엉긴 내장이 망가진 모양과 함께 통째로 사라진 채였다. 정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라진 옷감보다 뜯겨 나간 옆구리의 상처가 보통 험악하지 않다고 놀랄 듯했다.
하지만 백금왕은 그 상처에 놀란 것이 아닌 듯했다.
“어떻게……?”
사납게 변해 가는 목소리를 흘려 내면서 투란의 허리춤을 향해 사나운 눈길을 쏘아 보내는 중이었다.
분명히 한 손으로는 눈알을 파냈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잡아 왔으니 멀쩡한 인간이라면 비는 손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투란은 허리 어림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손으로 흩어져 흘러내려 가는 백금왕의 옆구리 부분을 그물질해서 포획한 채로 들고 있잖은가!
결코 멀쩡한 인간의 몸이 아닌 투란의 모습에, 그 기괴한 그물을 든 손이 지닌 능력에 백금왕이 놀라고 있을 때 투란도 놀란 듯이 말하고 있었다.
“와, 눈알이 새로 돋았네?”
백금왕의 눈구멍에는 시뻘건 눈알이 회색의 눈동자를 품은 채로 채워져 있었다.
조금 전에 뽑아낸 백금의 눈알과 다른 듯하지만, 사물을 보는 시각이란 측면에서는 전혀 지장이 없는 멀쩡한 눈알이 곧바로 빈자리를 채우며 돋아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더불어 한 움큼 사납게 물리고 베여 나간 듯이 보였던 옆구리의 상처 또한 시뻘건 혈액이 뭉클거리며 거품을 내고 채워 버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매끈한 살갗을 두르고 멀쩡해지고 있었다. 금과 은의 장식으로 된 의복 또한 그 회복에 호응하듯 궁전에서 끌어낸 백금으로 찢긴 부분을 채워 저절로 수선되었다.
―묘하군. 몸이 상처 난 부분은 의복도 찢긴 채라니?
드라고니아가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투란은 그 중얼거림을 외면하듯이 백금왕을 향해 묻는다.
“뱀파이어라서 그런 재생 능력을 마구 발휘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이 궁전이 특별해서 그럴 수 있는 거야? 어느 쪽인가 궁금하네…….”
백금왕은 대답 대신에 자신의 격노를 드러내면서 투란을 쏘아보고 뭔가 험한 말을 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투란과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백금왕의 입은 굳어졌고 목에서 새는 숨소리만 간신히 흘려 냈을 뿐 말은 전혀 토해 내지 못했다.
투란이 그런 백금왕을 노란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히죽 웃었다.
“백금의 눈알일 때랑은 다르지? 그럴 거야. 몸이 온통 마비되면서 돌이 되어 가는 기분이잖아? 그렇지? 하지만 진짜 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돌처럼 굳어지는 것뿐이야. 이건 그런 눈이거든.”
낄낄거리는 말투, 다분히 놀리고 비웃는 의도가 가득 담겨 있는 말이었다.
백금왕의 붉은 눈알에서 핏줄이 돋아났고, 눈가로 번져 가며 얼굴 곳곳에 힘줄과 핏줄이 함께 곤두서는 모습이 되었다. 그 핏줄, 힘줄은 금세 백금왕의 목과 어깨, 가슴과 허리까지…… 의복조차도 호응해서 그 핏줄이 도드라지는 형태를 꾸며 내는 중이었다.
격노한 백금왕의 표정, 그 기괴한 자태는 마비를 풀고 강렬한 반격을 시도하려는 모습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란은 작은 한숨을 쉬면서 여태 열심히 자극하면 꺼내 놨던 비웃음을 싹 지우면서 작게 속삭였다.
“그래 놓고 튈 궁리를 하다니, 참 대단한 왕이야.”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그 너머로 새어 나가지 않은 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백금왕의 모습이 은색 안개로 변하듯이 흐릿해졌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한 광경만 그 자리에 남겨졌다.
그리고 저 먼 궁전의 벽 한쪽이 백금의 광채를 짙게 머금고 일렁이며 궁전 밖의 풍경을 비춰 내는 듯한 둥근 창문을 연다 싶을 때, 은색의 안개가 그 창문을 향해 바람처럼 흘러 나가려 했다.
하지만 은색 안개는 창문 앞에 흐릿하게 채워진 보라색 바탕의 붉은 안개를 만나면서 창문에 닿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은색 안개가 다시 백금왕의 모습으로 변한 것처럼 또렷해지는데, 등을 창문 쪽에 들이밀면서 투란을 혐오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백금왕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투란이 그런 백금왕을 향해 발끝을 돌리고 세게 밟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백금왕이 딛고 선 자리에 흐릿하게 돋아나던 낡은 포석이 또렷해졌고, 백금왕의 주변을 채우는 듯한 낡은 벽의 무늬가 허공을 채우듯이 나타났다.
백금왕이 놀라 뭐라 하려는 듯한 순간, 투란이 말한다.
“얘기는 나중에 한가할 때 천천히 듣지.”
포석과 벽이 훅 꺼지면서 백금왕 또한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백금의 궁전이 꿈틀거리며 기괴한 울림을 토해 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 울림은 백금왕을 놀라게 했던 것, 처음의 울림과 역시 똑같았다.
투란은 백금왕에게서 뽑아낸 눈알 둘을 손바닥 사이에서 굴리며 바라봤다.
시커먼 잉크빛 가죽이 손바닥에서 열렸고, 한없는 톱니와 태엽으로 이뤄진 틈새가 드러나며 찰랑이는 검은 기름을 흘려 내는 듯했다. 백금의 눈알 둘은 그 속으로 떨궈지며 부서지듯이 분해되면서 그 일부가 되어 섞여 들었다.
손을 털어 내면서 투란이 잠시 눈을 감으며 마음을 정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했던 드라고니아가 조금 있다가 묻는다.
―도망칠 것이라고 예견했나? 전혀 그런 태도라고 보이지는 않았다만.
‘어? 음, 나도 그렇게 봤지. 하지만…… 곧바로 궁전 밖으로 튀는 모습이 겹쳐 보였어. 그다음에 프릿이랑 모두가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많이 죽는 것도 보였지. 놔줄 수 없었어.’
―녀석의 신호는 어떻게 베낀 거냐? 역시 사룡의 감각인가?
‘어, 뭐…… 대강 비슷해. 백금안인가 뭔가가, 왕이라 그런지 녀석이 끼고 있던 것이 그 백작인가 하는 놈이 끼고 있던 거랑 꽤 차이가 났잖아. 우자트가 멋대로 뒤틀리면서 오히려 나를 간섭하고 방해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었고. 그게 전부…… 뭐랄까? 파동? 파문? 아무튼 사룡은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알 수 있더라고. 아,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한가할 때 하고! 이제 어쩐다냐?’
새삼 텅 빈 궁전을 돌아보면서 투란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백금왕은 일단 성채 안으로 포획했는데, 이 빈 궁전에서 뭘 어찌해야 하는가?
밖에서 대치 중인 프릿과 그 군단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가?
살짝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투란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일단 프릿을 몰래 불러서 의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불러오는가 또한 난제가 아닌가!
하지만 드라고니아가 불쑥 색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뭘 어쩔 줄 몰라 하냐? 우자트를 써. 백금왕이 우자트의 대용품으로 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잖아. 그렇다면 진짜 우자트를, 둘이든 셋이든 마구 박아 넣고 쓸 수 있는 너라면 이 도시를 원하는 형태로 다시 꾸밀 수도 있어. 프로브를, 옵저버도 섞어 프로브와 함께 운영한다면 놓치는 것 없이 네 마음대로 다룰 수 있기도 하지. 도시 전체가 네 마음대로라면, 더 싸울 필요도 없이 끝난 셈이잖아? 모조리 가둬 버려도 되고…… 백금의 창과 칼로 그대로 난도질하든 갈아 버리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잖아. 뭘 고민하는 거냐?
듣고 있던 투란은 눈을 끔벅거리면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되는 건가?’
의아해하면서도 투란은 시험해 봐야 했다.
곧 투란의 한쪽 눈에는 다시 우자트가 드러났다.
그 눈동자가 백금의 벽과 바닥을 훑었다.
백금의 궁전이 가볍게, 간단하게 호응했다.
―엥? 야, 왜 하필…….
투란이 마음에 그린 그랑츄의 조각이 벽에서 돋아나고 기둥에 박힌 무늬처럼 드러나는 광경에 드라고니아가 투덜거렸다.
피식 새는 웃음과 함께 투란은 이제 뭘 해야 하는가 알 수 있었다.
‘좋아, 이렇게 된다면…… 프릿 어딨어?’
드라고니아가 곧바로 지금 투란의 위치와 프릿의 위치를 시각화해 비춰 줬다.
백금성, 그 중심의 첨탑을 수호하는 주변 탑의 한 귀퉁이에서 적을 노려보면서도 여유 있게 미소짓는 프릿의 당당한 모습은 투란을 살짝 찌푸리게 했다. 뭔가 고생은 투란이 하는 사이에 엄청 으스대고 자랑질만 하는 듯한 모습 아닌가!
―적을 앞에 두고 발발 떠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만? 적진 깊숙이 쳐들어온 지휘관으로서는 바람직한 모습 맞잖아.
드라고니아가 슬그머니 달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응?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쳇.’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투란은 곧바로 프릿의 곁에 집중했다.
그래도 잠깐은 프릿을 놀려 볼 기회가 있다는 점이 투란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을 머금게 했다.
“프릿, 이리 와요.”
프릿은 자신이 딛고 선 자리 옆에서 꾸물꾸물 백금이 치솟아 입술을 만들고 지껄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