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2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19)
촤르르!
백금의 첨탑, 그 중심에서 나선으로 흘러내린 계단이 프릿 앞에 꽂혀 들었다.
이쯤 되면 다들 프릿을 향해 초청이라도 온 상황이란 것을 금방 알 수밖에 없었다.
굳이 앵앵거리는 기묘한 목소리가 바닥에서 불쑥 치솟은 굵은 대롱 입술에서 울려 나오지 않더라도 명확한 상황인 셈이었다.
이에 대해 프릿의 군단 쪽에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함정?’이라는 나직한 속삭임이 오갔는데, 대치하고 있던 백금성의 뱀파이어 쪽에서는 첨탑을 향해 항의라도 하는 듯한 말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중에서 바로 프릿 앞에서 노려보던 뱀파이어, 다른 누구보다 화려한 중무장을 드러낸 하나의 외침이 도드라졌다.
“왕이시여! 어찌하여 저런 미천한 것을 성전(聖殿)으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서 불쑥 치솟은 백금의 대도(大刀)가 그 목을 뎅겅 잘라 버렸다. 그 절단된 머리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대도의 형체가 흐물거리며 그물처럼 변해서 냉큼 휘감더니, 곧바로 바닥 깊이 잠겨 버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일인가 제대로 파악한 이가 아직 드물 때, 백금성 전체를 울리는 듯한 맹렬한 파동이 거대한 목소리처럼 울렸다.
“닥치고 꼼짝 말고 있어라! 나의 분노를, 인내를 시험하려 하지 마라!”
아직 다들 멍한 채로 이게 무슨 말인가 눈만 깜박일 때, 프릿이 헛기침과 함께 돌아보면서 셀리아와 인왕도의 군단을 향해…… 덤으로 백금성의 뱀파이어 쪽에도 들으란 듯이 말한다.
“기다려 봐. 이 도시를 마음대로 다루는 자가 불렀으니 가 봐야잖겠어? 무슨 일인가는…… 분노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기다리고들 있어.”
마법이 보탠바가 없었지만 프릿의 목소리는 주변으로 작은 메아리가 되어 구석구석 퍼져 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프릿은 누가 대꾸하기 전에 재빠르게 계단을 밟고 번개처럼 내달렸다. 걷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속도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진짜 번개처럼 빨랐다.
그렇게 프릿이 첨탑, 그 성전이라는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마자 계단이 출렁이면서 빗방울처럼 흘러내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프릿은 그 성전 속에 홀로 멀뚱거리면서 서 있는 투란을 보자마자 물었다.
“백금왕은?”
“아, 여기 조금 남았는데…….”
괴상한 말과 함께 투란이 허리춤을 휘감았던 세 번째 손을 쓰윽 내밀고 있었다.
프릿은 그 팔이 왜 각질로 덮여 있냐라든가, 무슨 벌레 괴물의 앞다리를 잘라다가 허리에 붙였냐든가, 흉악스러워 보이니 그건 좀 치우자든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록 그런 말을 단숨에 잔뜩 쏟아 낸 듯한 표정은 지었지만, 프릿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 각질로 덮인 괴물 앞다리에 손가락만 붙여 놓은 듯한 흉악스러운 손에 들린 투명한 막을 지는 그물 속에서 꿈틀거리고 출렁거리는 백금 광채와 붉은 핏덩이가 뒤엉킨 괴이한 물질에 대해서였다.
“그게 조금 남은 백금왕?”
왠지 살짝 목이 멘 듯한 목소리였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한다.
“네, 황금빛 피가 흐르거나 하지는 않던데요?”
“그럴 리가?”
프릿이 가다듬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되묻고 있었다.
투란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눈짓과 함께 다시 확고하게 말한다.
“여기 있던 것은 특이한 뱀파이어 한 마리뿐이었고, 자기가 백금왕이라고 했어요. 이게 남은 것이고…… 음, 우자트로 이 벽을…… 아니, 이 백금성을 전부 관리할 수 있다는 것도 떠들어 댔죠. 아, 이게 멀쩡할 때 한 말로는…… 프릿이 일부러 훔쳐 가도록 했다는 소리도 하던데요?”
일단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일방적으로 이용당해서 프릿이 울컥할까 지켜보는데, 프릿의 대답은 담담하게 흘러나와 오히려 투란을 움찔하게 했다.
“알아. 예견의 마녀가 진짜 누구 편인가를 서로 몰랐으니까. 피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내달릴 수밖에 없었지. 그나마 우리랑 휴전하고 있던 까닭도 마녀의 견제가 심한 탓도 있었고…… 그럼, 이게 정말 백금왕의 남은 것 전부란 말이지?”
“네, 왕이란 뱀파이어의 피니까 강한 정수가 담겨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사념(思念)인가 잔념(殘念)인가도 그만큼 강하겠죠?”
백금왕이 떠든 부분에 대해 시원스럽게 넘기는 프릿을 새삼스럽게 보고 감상하면서 투란은 멀쩡한 손으로 그물 보자기를 옮겨 다시 내미는 채로 대답했다. 투란의 허리춤에서 아라크레온의 지체(肢體)가 그 형상을 지우니, 프릿은 슬그머니 그물 보자기를 받아 들고 있었다.
한편으로 대담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조심스러운 그 모습에 투란의 입가가 웃음을 참는 듯이 실룩거렸다. 그 눈치를 금방 파악한 듯, 프릿이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재빨리 말한다.
“강할 거야, 이 망할 놈은 자기 입으로 수천 년 살았다고 했지만 우리가 아는 것만으로도 천 년 이상을 이 언더섀도우에서 싸돌아다니며 버틴 놈이 맞으니까. 백작 이하의 뱀파이어도 그 피를 적당히 걸러 내고 용량을 제한해서 조금씩 삼키지 않으면 언데드 헌터…… 몬스터 로드가 그 피에 잔존하는 사념이 발생시킨 자아에 거꾸로 먹히고 말아. 왕의 수준이라면…….”
내친김에 오는 동안 투란이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떠들다가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가 자제하는 듯이 프릿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재빨리 그 낌새에 올라탄 듯,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투란이 주절주절 떠든다.
“프릿은 왕이라도 상관없이, 용량 제한도 없이 걸러 낼 필요도 없이 삼켜 버릴 수 있다고 하던데요? 오면서 인왕도 아저씨들이 그러던데, 프릿이라면 왕과 맞서서 그 피를 빼앗을 수 있다고. 그래서 뱀파이어 귀족들, 로드 이상의 녀석들이 프릿을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던데 말이죠…….”
프릿은 동화를 읊조리는 듯한 투란을 보며 어이없어했지만, 곧 짙고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걸치면서 대답한다.
“그건 내게 그놈들이 상상도 못 한 기억…… 사념이 이미 깃들어 있기 때문이야. 뱀파이어라면, 이 언더섀도우의 모든 마물(魔物), 어떤 괴이(怪異)라 할지라도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압도적인 사념이 말이야.”
“이를테면?”
구체적인 말을 회피하는 프릿을 보채는 투란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프릿이 금방 씁쓸한 기분을 지운 듯, 명랑하게 대답을 하면서 그물 보자기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온 세상을 불 지르는 연옥, 어둠과 대지까지 모조리 짓이겨 버리는 인페르노라는 화염의 기억이지!”
“예? 인페…… 아, 그건! 엥?”
기억 귀퉁이를 털어 내며 인페르노에 대해 떠올리던 투란은 프릿이 피 묻은 손가락을 바로 가슴에 대는 광경에 놀랐다. 그 가슴에 검게 피어난 얼룩이 투란이 전혀 본 적도 없는 것이라서 한층 더 놀랐고, 그 얼룩이 분명히 몬스터 엠블럼이란 사실은 투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매의 문장도, 천칭의 문장도 아닌…… 어쩌다 투란이 뒤집어썼고 투란 말고는 아무도 모를 듯한 펜릴, 늑대의 문장도 아닌 문장이었다. 검은 해골이 아래턱에 뼈 받침을 한 듯한 무늬는 아주 작았지만 투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검은 해골은 받침인 뼈들을 풀어 헤쳤고, 두 팔을 벌리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눈구멍이 붉은 광채로 물들며 손가락 끝에 걸린 핏방울을 아기 새처럼 받아마시는 듯한 광경…… 투란은 자신이 착각하지 않고 분명히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골의 문장이로군. 흐음, 역시 언더섀도우의 특성에 따라 전승된 모양인데.
드라고니아가 짐작했다는 듯, 살짝 우쭐거리면서 아는 척했다.
프릿이 붉게 물들어 가는 눈알로 투란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타락한 문장, 언데드 헌터의 타락한 문장이라고 부르지. 이곳에서는…… 몬스터 로드라든가 몬스터 엠블럼이란 말을 대신해서 말이야. 음, 이 기회에 알아 두는 것도 좋겠지. 투란, 뱀파이어란…… 크읏!”
갑자기 낯을 구기면서 프릿이 이를 악무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아래 쌍으로 불쑥불쑥 돋아 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가를 두어 번 되풀이했다. 그리고 조금 붉은 색조가 가라앉고 하얀 눈자위가 또렷해지는 채로 프릿이 투란을 향해 웃음 지으면서 말을 잇는다.
“한 방울의 피에 잠재력을 모조리 담을 수가 있다, 그게 뱀파이어야. 그러니 실제로 피의 용량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얼마나 강한 사념이 담겨 있는가를 따져 봐야 해. 하지만 그걸 측정할 방법 따위는 당연히 없어, 인간에게는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몬스터 로드가 사념 가득한 뱀파이어의 피를 파악할 수는 없단 이야기지. 하지만 이미 경험을 쌓은 선배가 있다면 뱀파이어의 피는 아주 좋은 힘의 소재가 되어 주는 거야. 인왕도의 전사들처럼 말이지! 하지만 모두가 언데드 헌터가 될 수는 없어. 부르는 말이 다르다고 몬스터 로드가 다른 뭐가 되지는 않으니까. 뱀파이어는 열매가 씨앗을 잃어버린다면서 싫어했지만, 우리는 싸워야 할 수를 늘릴 방법을 잃는 것이 되니까 함부로 언데드 헌터의 수를 늘려서는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푸아핫!”
“우어! 괜찮아요?”
억지로 쥐어짜 내듯 이야기하다가 숨을 거칠게 몰아 내쉬면서 휘청이는 프릿이었고, 투란은 날뛰면 한 대 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듯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눈치를 살피는 채로 묻고 있었다.
“투란, 주먹 풀어.”
다시 자세를 잡은 프릿의 첫말이었다.
“에? 아, 에헤헤.”
어설픈 웃음과 함께 슬그머니 손을 터는 시늉을 하는 투란이었다.
프릿이 키득거리더니, 곧바로 그물주머니에 자기 주먹을 꽂듯이 담갔다.
그물주머니 안에서 요동이 일어났고, 금색과 은색이 섞인 액체가 치솟았다.
프릿이 손을 꺼내면서 그물주머니가 비었다는 듯이 투란에게 내밀었다.
투란은 그 안에 맴돌던 붉은 피의 흔적이 프릿이 꺼낸 손등으로 옮겨지면서 그 팔뚝 속으로,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백금왕의 피를 프릿이 모조리 처리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과연 얼마 안 되는 용량이지만 이렇게 단숨에 처리해도 되는가, 프릿이 그럴 수 있는가 투란이 가늠하려 할 때…….
쿵.
금색과 은색이 섞인 액체가 프릿의 목덜미를 휘감고 몸을 휘감으며 의복이 되는 듯하다가 한쪽 어깨로 뭉쳐 들었고, 곧바로 팔뚝을 타고 옆으로 흘러 나가 공중에서 굵고 긴 창의 형태로 변해 바닥에 꽂혀 들었다.
투란은 그 변화를 모조리 지켜봤지만 순식간이었기에 뭐라 할 틈이 없었다.
후욱, 소리 나도록 깊은숨을 몰아 내쉬면서 프릿이 힘차게 다시 말했다.
“뱀파이어의 피에 잔류하는 사념은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자아를 분열시키는 독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니야. 피의 힘을, 뱀파이어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해서 모조리 알려 주기도 하니까. 강력한 피를 얻었다고 해도 그 잠재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를 모른다면, 저급한 피를 얻어 완벽하게 활용하는 놈보다 약하고 잡아먹히기 쉽거든. 물론 그 힘의 활용법을 아는 대신에 아예 성격과 인격이 다른 놈이 돼 버릴 수는 없지. 머리가 둘 달려서 한쪽은 지식만 보관하게 하는 능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런 재주가 없는 대신에 우리는 답을 찾아냈어. 언데드 헌터라 불리고, 열매 취급당하는 언더섀도우의 몬스터 로드와 평범한 인간은 전혀 모르는 춤추는 산맥의 방식으로 말이지!”
“다녀온 적이 있군요?”
“거기 갔던 탓에 내가 여기 와서 이 짓거리를 하게 돼 버렸지! 흐으읏.”
갑자기 굉장히 억울해하는 프릿이었다.
투란은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곧 기억 속의 고난을 떨쳐 낸 듯, 프릿이 투란에게 가슴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 내밀면서 말한다.
“걸러 내기, 몬스터 로드의 비전인데 알아?”
“어? 아…… 듣기는 했어요. 꽤 오래전에 널리 알려져서 이제는 비전이라고도 안 하던데…….”
투란은 프릿의 손가락 끝에 걸린 핏방울을 흘깃하면서 대답하고 있었다.
프릿이 빙긋 웃으면서 투란의 가슴을 향해 손가락을 더 가까이 옮기며 말한다.
“뱀파이어의 피는 아무리 강력한 사념을 담고 있어도 열두 번 걸러 내면, 세 사람 이상의 몬스터 로드라면 여섯, 일곱 번 정도만 거치면 그 사념을 순수한 기억으로, 남에게 고스란히 전해 들은 이야기처럼 간직할 수 있어. 자, 얼른 받아.”
“나랑 지금 여기서 걸러 내기 하자고요!”
투란이 황당한 듯이 설마설마하면서 다시 핏방울을 보고, 이제는 그냥 핏방울이 아니라 몬스터 엠블럼이 자아낸 몬스터 에센스의 응집(凝集)이란 것을 느끼면서 되묻고 있었다.
걸러 내기, 그것은 인간의 본능으로 몬스터의 본능을 억제하는 기교.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의 정수는 아래로 가라앉혀 지워 버리기도 하지만, 뭉쳐서 밖으로 뿜어낼 수도 있다. 받아 줄 사람이 없다면 금방 공중에서 마력과 함께 흩어져 사라질 뿐이지만, 받아 줄 다른 몬스터 로드가 있다면 정수는 한번 걸러진 채로…… 정수를 품었던 몬스터 로드의 본능과 성격이 미묘한 심상의 형태를 띤 채로 함께 담겨 전승된다.
때문에 이 전승은 굉장히 특이한 효과를 드러냈다.
그 효과는 정수가 옮겨질 때마다 몬스터 로드는 그 안의 본능과 자신의 본래 성격, 모습을 심상 속에서 격리하고 분리해 바라보기가 쉬워진다는 것.
이를 몇 차례 되풀이하면 강력한 몬스터조차 아주 쉽게 다룰 수 있는 굉장한 비전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