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3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24)
잠깐의 침묵.
프릿은 텅 빈 신상의 눈구멍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묻는 말을 꺼냈다.
“아직 남은 일이 또 있나?”
투란은 이게 무슨 뜻인가 갸웃했다.
드라고니아는 대강 눈치챈 듯했다.
―유해라 불리는 신상이다, 대사제와 마찬가지인 아티팩트.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을 봉인된 채로 마냥 존재할 까닭은 없지. 부여받은 사명이 사라지면 보통 저절로 소멸하는 것이 저런 아티팩트야. 그런데 아직 멀뚱거리고 있으니까 묻는 말이다.
투란에게 빠르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단숨에 머리를 스쳐 간 그 설명은 투란 스스로 놀랄 정도로 빠르게 납득되기도 했다. 그리고 곧바로 투란이 입을 열게도 했다.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매의 부리가 조금 웃는 것처럼 휘어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눈을 한번 깜박거리는 사이에 부리는 여전히 백금 바탕과 황금 무늬를 품은 채로 달칵거리며 투란에게 되묻고 있었다.
“무엇을 알고 싶은가, 우자트의 주인이여?”
왠지 꾸며 낸 듯한 말투에 투란과 프릿이 눈가를 실룩였다.
하지만 따지지 않고 프릿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투란은 바로 묻고 있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강해 보이기도 하는데, 왜 여태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거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해볼 시간은 많았잖아요?”
“세월은 여유로웠지. 하지만 나는 마물이 아니며, 악마의 사도가 아니다. 이 세상에 초빙된 손님, 그 손님이 남긴 선물을 품은 상자에 불과하지. 세상의 이치를 바꿔 버릴 수 있는 선물을 함부로 퍼뜨리는 것은 상자의 역할이 아니다. 오로지 요청에 의해서만, 작은 지혜를 통해 말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 의무를 통해, 우자트의 주인에게 전할 말도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지. 내가 그대들에게 요청한 것은 먼 옛날, 이러한 시대를 예측한 자가 당부한 바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게 원하는 바가 있다면 청하라. 하지만 그 청이 이뤄지는가 마는가는 내가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
투란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 표정의 의미를 프릿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게 뭔 수작이야?’라든가 ‘사기꾼?’이라고 따지고 싶어 하는 기분.
하지만 그래도 백금과 황금으로 생겨 먹은 채로 말하는 신상이니까 무슨 신기한 이야기를 더 하려는가 기대하며 살짝 망설이는 모습!
그런 낌새로 투란의 입은 다음 물음을 흘려 냈다.
“그 예측이란 것 말인데요…… 까마득한 앞날을 미리 엿보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죠? 당장 눈앞의 일, 그다음의 일만 해도 오락가락하고 헷갈리기 쉽잖아요. 아니, 미리 엿봤다고 해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전혀 모르는데, 그럴 때는 대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미리 봤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럴 때는 또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몇 마디가 더듬거리며 나오는가 싶다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프릿은 투란을 다시 보면서 자신이 읽었다 생각한 표정과 꽤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투란은 정말로 고대부터 남겨진 신의 파편, 그 화신의 유해란 것에게 지혜를 구하는 듯하잖나.
신상은 조용히 투란을 향해 부리를 겨누는 듯한 모습으로 되묻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예견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를 어떻게 갖추는가, 그것이 알고 싶은가? 그라이아이의 눈이 지닌 예견의 힘이 두려운 때문인가? 이 자리에 그대가 서게 된 까닭이 그라이아이의 예견대로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거슬리는가?”
투란의 고개를 까닥거리듯이 끄덕거리고 있었다.
뭔가 투란 자신이 한 말에 비하면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된 듯한 것이 콕콕 짚어 주는 듯하니 달리 고리를 저을 까닭이 없기는 했으니까.
신상의 부리가 미묘한 웃음이라도 머금은 듯 꿈틀거리는 낌새와 함께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눈을 감는 법이겠지. 호기심과 자극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의지를 가다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감당해 낼 지혜를 자신할 수 없다면, 그저 지금 당장 벌어지는 순간의 다음만을 살짝 엿보는 정도로 만족해야지. 그래, 지금 네가 두려워하며 하는 그대로. 바보스럽다고? 아니, 그것은 바보처럼 보이는 지혜로운 판단이란다. 그러니…… 우자트의 주인이여, 두려워 말라. 운명의 사슬이 그대를 묶고 있다 해도, 그 사슬이 그대에게 끌려갈 뿐이다. 그 사슬에 그대가 이끌려 휘둘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믿어라.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그대가 품은 몬스터를 믿고 여기 프릿을 믿어도 괜찮아. 이 그림자 아래 어둠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프릿에게 배워라. 그러면 된다.”
말이 이어지면서 신상은 날개를 접었고, 두 팔을 교차해 가슴에 얹으며 가만히 한쪽 무릎을 접어 바닥에 대며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여운이 맴도는 메아리처럼 이야기하는 소리가 흐릿해지다가 말이 멈추고 나니 눈구멍이 비어 있는 백금과 황금의 조상(彫像)이 돼 버린 듯 고요해졌다.
프릿이 그런 신상을 향해 나직하게 묻는다.
“이제 끝? 호르트의 유해, 이젠 더 이러쿵저러쿵 않는 거야?”
투란은 흠칫하는데, 신상의 부리가 단단히 굳어진 채로 메아리 같은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이 몸은 머신기어의 유물로서 남겨질 것이다. 머신기어 호르트. 하지만 성스러운 호르트의 의지는 이제 사라질 것이야. 백금의 눈이 머신기어 호르트를 움직이는 열쇠이니…… 우자트의 주인이여,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잘 있게, 프릿.”
“잘 가, 다시 오지 마. 또 만나기 싫어.”
프릿은 냉정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어이없어 프릿을 보고 신상을 보는 투란에게 둘이 미묘하게 닮은 웃음이라도 띄운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곧이어 신상에서 깊은 정적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 정적을 프릿이 어딘가 씁쓸히 바라보는가 싶었다.
“망할, 어디 가는 것도 아니구먼! 겨우 원래대로 된 거잖아! 으아, 진짜! 어쩌란 거냐고! 뱀파이어였던 놈들이 인간 흉내 내는 꼴을 수십만이나 보게 해 놓고! 아오옷, 진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떠드는 말이었다.
어이없는 듯했지만 투란은 금방 프릿의 말이 꽤 심각한 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뱀파이어에서 인간으로.
말은 쉽다.
백금의 도시에 봉인되어 있던 신의 파편이 드러낸 바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실제로 우자트를 통해 백금의 도시를 움직이며 백금안의 효용성까지 파악했지만 신상의 기묘한 제안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의 가능성에 대해 추측할 리도 없었다. 게다가…….
―다시는 못 할 일이었잖아.
드라고니아도 짚고 있는 대로 신상이 아까처럼 기능할 때에나 통하는 방법이었다.
한번 내려진 축복, 한번 뒤틀려 저주가 된 것을 다시 돌이키려면 최초의 신성한 의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 없다고 신상이 못 박아 버렸으니, 백금의 도시에서 다시 백은의 일족이 되는 경우에는…….
‘잠깐, 인간에서 다시 뱀파이어가 될 수 있는 걸까?’
복잡한 생각을 하던 투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이 백은의 일족, 황금의 혈통이란 녀석들이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고 수를 수십만…… 인간으로 남겨진 경우 말고 뱀파이어인 채로 선라이트 서클의 햇살에 재가 돼 버린 경우까지 포함하면 가히 백만을 가뿐히 돌파했을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 불어나 있었던 것인가?
하물며 이들은 십이혈족 중의 하나라잖던가.
오다 몇 마디 주워 들은 바에 따르면 언더섀도우의 변두리, 비교적 햇살의 흔적이 엿보이는 곳에 머물고 있는 특이한 혈족이라고도 했다.
때문에 인왕도와 가까웠고, 어쩔 수 없이 기묘한 휴전 관계를 유지했다고…….
“프릿, 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 녀석들이 있다면, 다시 뱀파이어로 변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 대체 어떻게 수십만이 넘는 뱀파이어가 있었던 거죠? 뱀파이어도 결혼해서 애를 낳고 수를 늘려요?”
투란은 억측을 멈추고 묻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이 언더섀도우의 특이한 상황을 몇 마디 듣고 제대로 파악할 리가 없으니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묻는 셈이었다.
프릿이 한숨부터 쉬고 투란에게 조금 지친 눈길을 보내면서 답한다.
“햇살에 재가 되기 싫어서 잠깐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놈들도 가득할 거야. 백은의 일족은 몇 가지 처리를 한 다음에 백금의 관에 담겨 있다가 나오면 뱀파이어가 되는 놈들이지. 애를 낳는 경우는 없어. 애를 낳도록 인간을 재배하고 관리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돌아다니는 것은 전부 뱀파이어였어요. 인간은 뱀파이어의 활동 영역에 없었는데요? 이 도시 어디에도…… 못 찾겠는데요?”
투란은 조금 놀라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뱀파이어에게 잔뜩 주의하다 보니 정작 이 도시에 머물 것이라 여겼던 인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햇살이 뿜어 나오든 말든 인간이라면 딱히 주의할 리가 없기도 해서 잠시 관심 밖에 둔 점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 다시 둘러보니 백금의 도시 안에 인간은 인왕도에서 몰려온 이들뿐이었다.
하지만 프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백금의 도시는 백은의 일족이 자랑하는 성역이야. 식량창고를 꾸며서는 성역의 존엄이 상처 나지. 저기, 이 도시를 감싸고 치솟은 뾰족한 바늘 같은 산…… 저 여섯 산의 지하에 돌로 된 도시가 있어. 지상으로 노출되지 않는 지하 영역, 거기에 인간을 번식시키고 재배하는 도시…… 뱀파이어 녀석들은 그냥 지저 농장이라고 불러 대는 곳이 있어. 거기서 온갖 짓거리를 시키다가 그중에서 몸뚱이가 제법 괜찮다 싶고 오래 부려 먹고 싶다 싶은 인간을 데려다가 백은의 혈족으로 만드는 거야. 일단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것이 백금의 관인데…… 그건 다 치워 버려, 투란. 그러고 나면 다른 혈족처럼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방법만 남을 거야. 백은의 일족이랍시고 뻐기는 녀석들은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지. 남은 것은…… 어떻게든 뱀파이어라는 귀족이 되고 싶어 미친놈들인데…… 그건 시간을 두고 찾아내서 짓뭉개 놔야지, 다른 방법이 없네. 아, 그보다…… 셀리아랑 바루하 좀 불러 줘. 그냥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와도 좋고. 후우.”
떠들다가 지쳤다는 듯이 한구석에 풀썩 주저앉고 있었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투란은 일단 셀리아를 찾았고, 바루하도 찾아낸 다음에 말을 전하면서 바로 길게 이어진 백금의 대롱을 만들어 둘에게 들이댔다. 둘이 대롱 속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백금의 알처럼 감싸고 끌어당겨서 프릿 곁에 바로 데려다 놓을 때까지, 불과 두어 번 눈을 깜박일 동안이었다.
오자마자 바루하가 먼저 눈을 부릅뜨면서 멈춰 버린 호르트의 유해, 신상을 가리키고 묻는다.
“이건 뭐냐?”
“머신기어 호르트.”
프릿은 간단하게 넘어가려는 듯이 대답했다.
바루하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묻는다.
“성스러운 자취가 느껴지는데?”
프릿이 딴청 피우면서 입을 다물었고 어쩔 수 없이 투란이 대답해야 했다.
“조금 전까지 성스러운 의지를 담고 막 떠들고 있었어요. 음, 여기 뱀파이어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서, 그렇게 해 달라고 제안을 하고 있었죠. 뭐, 그다음은 듣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백금, 황금의 조각상이 되셨습니다!”
바루하가 노려보는 눈길이 점차 험악해졌기에 투란은 큰 소리로 말을 마치면서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프릿에게 나머지를 따지려면 따지란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따지고 든 것은 바루하가 아닌 셀리아였다.
“인간이 되었다 치고, 말썽 부리지 못하게 제압할 방법은? 프릿, 그럴 방법이 있으니까 그러라고 냅둔 거지?”
이번에는 프릿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투란. 우리에게 유일한 방법은 투란이야. 이 도시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니까. 백금왕도 처치했고…… 구원자답지?”
슬그머니 투란을 치켜세우면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왠지 함께 우쭐거리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투란은 재빠르고 냉정하게 그 말에 트집 잡듯이 보태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나뿐만이겠죠. 하지만 백금왕의 눈알만 있으면, 그 눈알을 꼽으면 프릿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음, 뱀파이어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채로 눈알만 꼽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우자트로 도시를 제어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일리가 있군.”
바루하가 납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셀리아도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었는데 바로 다음 질문을 내놓고 있었다.
“도시 말고는? 백은의 일족이 자랑하던 장비는? 그 장비를 생산하고 조작하는 부분은 어때?”
“넹?”
투란의 대꾸는 맹했다.
어쩔 수 없었다.
도시 전체를 바라보느라 바빴으니까.
저런 세세한 부분은 관심 둘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정 모르는 셀리아의 눈길은 살짝 험악해지는 듯했다!
결국 프릿이 웃음과 함께 대신 대답을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