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3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26)
Chapter 206. 굴하람의 백 일 후
하늘은 눈부신 금빛 햇살을 무시하듯이 파랗게 흰 구름을 품은 채였다.
희미하게 깜박이는 눈꺼풀 틈새로 그 파란빛이 보였을 때, 투란은 자신이 뒤통수부터 등짝, 엉덩이에 이어 종아리와 발뒤꿈치까지 단단한 땅바닥에 대고 누운 채란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
‘어라?’
어딘가 몸이 이상한가 싶었지만, 몸은 멀쩡했다.
발딱, 허리를 튕겨 몸을 일으키며 투란은 휘휘 주변을 둘러봤다.
한편에는 하늘까지 닿을 듯이 치솟는 모래의 장막, 그 너머로 그림자가 짙게 어둠으로 변해가는 듯이 보이는 풍경이 선명했고 반대편에는 듬성듬성한 산과 숲, 멀찍이 마을의 한쪽이 살짝 보이는 듯한…….
“굴하람?”
투란의 중얼거림이 기억을 더듬듯이 흘러나왔다.
곧 투란은 어리둥절해서 갸웃했다.
어째서 자신이 굴하람이 보이는 언더섀도우의 경계에 멀뚱거리고 누워있었을까? 앉아서 다시 생각해봐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은가?
―기억 안 나냐?
“일어나셨습니까?”
드라고니아가 툭하니 묻는 말도, 갑작스럽게 뒤통수에 꽂히는 말도 투란에게는 조심스럽게 들렸다. 마치 투란이 지금 미쳐 날뛰다가 진정하기는 했지만, 다시 바로 미쳐 날뛸지 몰라서 주의하는 듯한 분위기의 말투.
맹하니 투란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일단 뒤를 돌아봤다.
드라고니아야 어디 가지 않을 테고 해롭지도 않지만, 뒤통수에서 뭐라 떠드는 작자는 몽둥이를 들었을지 칼을 들었을지 잘 모르겠으니까.
“음…….”
옆구리부터 어깨너머까지, 칼자루가 잔뜩 삐져나온 모습이 돌아보는 투란의 눈가에 바로 드리워졌다. 어떻게 봐도 온갖 칼부림을 준비한 듯한 여러 자루의 장검, 단검을 몸에 잔뜩 두른 채였고 장화의 한편에도 비수 한 자루는 넉넉히 감춰져 있을 듯이 보이는 무장이었다.
‘누구셔?’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 내지 못한 채, 투란은 일단 드라고니아에게 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눈을 끔벅거리면서 이 완전무장하고 조용하고 공손하게, 몬스터 로드가 미쳐 날뛰는 상황인가 파악하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일어났느냐고 물었던 작자가 누굴까 열심히 투란이 생각하는데…….
“칼탄, 칼바르의 칼탄입니다.”
검고 매끈한 수염으로 턱과 코를 장식한 작자가 역시 공손하게 말하고 있었다.
대뜸 이름부터 밝히는 모습으로 봐서 아무래도 오늘 투란이 처음 보는 사람인 듯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모르는 것이 아주 당연하잖나?
“어, 그니까 나는…….”
―넌 칼탄을 아주 잘 알아. 하지만 지금 기억을 못할 뿐이지.
드라고니아가 한숨처럼 웅얼거리고 있었다.
‘뭐?’
―최소한 기억을 덮어 눌렀다는 정도는 기억할 줄 알았다만, 그것도 함께 파묻은 거냐? 너답다면 너답기는 하다만…….
혀를 차듯이 보태지는 드라고니아의 몇 마디.
투란은 칼바르의 칼탄이란 자를 조심스럽게, 의미 없는 웃음을 띠고 바라보는 시늉을 하면서 주변을 다시 재빠르게 훑어봤다.
‘여기, 굴하람 주변이지? 나, 여기 왜 있냐?’
드라고니아는 그냥 한숨 쉬는 시늉을 했다.
“굴하람의 묘지 앞입니다. 지저 궤도를 이용해서 바로 나올 수 있는 곳이지요. 처음 언더섀도우로 들어서실 때, 이곳을 이용했다고…… 프릿 폐하와 함께 이야기하시고는 했지요.”
투란의 의문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칼탄이 눈알 굴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고 있었다. 그런데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아련하게 슬퍼 보이는 표정이 칼탄의 눈가에 슬그머니 매달리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뭔가 투란 자신이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잖은가.
‘왜……?’
―왜는 뭐가 왜야. 거의 십 년 넘게 곁에서 함께 싸웠는데 하루아침에 모르는 사람이 돼버렸잖아. 너였으면 냅다 주먹질하고 발길질부터 하고 있었을 거잖아. 기억날 때까지 패보겠다고.
드라고니아가 짜증을 가득 담아 투덜거림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덜거림 몇 마디에 투란은 가슴이 철렁하면서 퍼뜩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백금왕을 제압하고 백금의 도시에서 호르트의 유해를 끌어내고…… 그 신상과 이야기하고 뱀파이어 수십만을 인간으로 되돌리고, 그러면서 언더섀도우의 일에 깊게 끼어들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걱정하고…… 다시 알드바인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언더섀도우를 벗어났을 때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떠올린 대담하고 독특했던, 망상인 듯했던 계획.
언더섀도우로 들어가서 사흘간, 그사이에 겪은 일까지만 기억하는 자신과 그 뒤를 모두 겪은 자신을…….
‘성공한 거야?’
겨우 마음을 다스리면서 투란은 입을 다물고 드라고니아에게 물었다.
―성공? 이게 무슨 실패할 일이냐? 메타모픽 서펜트를 그따위로 써먹는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저질렀을 뿐이잖아. 그래도 십수 년이면 잊어버리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너도 참 징그럽다.
역시나 한숨과 짜증을 섞어 드라고니아가 대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투란은 자신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과연 자신의 문장은 이전과 어찌 다를까?
집중하는 투란의 모습에 칼탄은 바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투란이 무엇을 하는가 역시 금방 알아차린 듯한 태도였다.
‘나를 잘 아나?’
문장의 풍경 속에 마음을 떨구기 전에 투란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니까. 너랑 십여 년 이상 함께 언더섀도우에서 싸워왔다고 했잖아!
‘으흠.’
살짝 덮어버린 기억을 더듬어 볼까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 전에 투란은 먼저 문장의 풍경에 마음을 떨구고 있었다.
깊고 세심하게…….
* * *
“우와, 생생하네?”
투란의 외침이 풍경을 울렸다.
어제인가, 혹은 반나절 전인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자트를 이용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더듬던 그 순간과 지금의 풍경에는 분명한 격차가 있었다.
보이드의 광활함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속에 자리 잡은 몬스터의 정수는 보다 또렷하게, 보다 활발하게 그 형상을 갖춘 채로 제멋대로 보금자리를 틀고 영역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문장의 풍경이 거대한 세계이고 그 안에 둥지라도 튼 새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처음의 감상을 살짝 접어두면서 투란은 먼저 ‘천칭’의 기둥 정상 언저리에 자리 잡은 알부터 살폈다. 평소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몬스터의 형상을 모아 두고 적당히 배분하기 위해 모아둔 것이니까.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자마자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샤머닉 트롤과 ‘붉은 늑대’, ‘악마의 심장’을 기본으로 삼아 아르고누스의 작은 성채, 마그마 로드의 외각, 은근히 등을 장악하고 웅크린 듯한 아라크녹스의 무리……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듯한 정수 틈새로 으스스한 분위기의 핏줄이 맴돌며 맥동하고 있었다. 그 맥동과 함께 카보닉의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다가 불룩거리는 핏줄 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숨기는 것까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낯선 광경이었다.
“이게 뭐냐?”
툭하니 투란이 던지는 물음이었다.
순간, 투란은 한없이 많은 톱니가 맞물린 기둥 근처로 별이 솟는 것을 느꼈다.
높은 곳을 장식하던 별빛무리의 한 점이 툭 떨어진 듯했고, 곧바로 맥동하며 떠들기까지 하는데…….
“뱀파이어의 피를 헬임프의 혈관으로 감싸고 카보닉을 그 안에서 구현해 낸 것이지. 그렇게 해서 뱀파이어의 피를 원할 때 바로 증발시켜서 카보닉의 중재를 통해 제어하는 틀을 만든 거야. 나름 잔머리를 굴렸다고 해야겠지만, 불타오르는 채로 다뤄지는 피 때문에 언더섀도우의 강력한 뱀파이어조차도 너를 피해 다닐 지경이었지. 언더섀도우 밖에서도 그럭저럭 쓸 만하니까 남겨둔 거야. 딱히 주의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기도 하지만, 보다시피 악마의 심장 줄기를 섞어서 본능적으로 제한을 두기도 했다. 그나마 몸에 남겨진 추억인 셈이야.”
드라고니아가 불만스럽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투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되놰야 했다.
“카보닉?”
별빛 한 점이 잠깐 기묘하게 맥동했다.
드라고니아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듯하는 맥동 끝에 다시 말이 흘러나온다.
“긴 얘기 짧게 하면, 투란 너 언더섀도우에 역병의 수해를 몇 구역 만들어놨다. 뱀파이어의 이동을 견제하면서 아케인 비스트까지 막아내는 방벽으로 말이야. 프릿과 몇몇에게 카보닉을 전해서 제어방식도 알려 줬고. 자세히 듣고 싶냐?”
“아니, 지금은 아니야.”
몇 마디에 담긴 흉악함이 투란을 한 걸음 물러서게 했다.
도대체 언더섀도우에서 뭔 짓을 했던 것일까?
기억이 나질 않으면 답답해서 얼른 다시 되살리고 싶어지려나 했는데, 지금 몇 마디에 투란은 바로 기억을 참 잘 파묻었다는 기분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투란은 뱀파이어의 피를 머금은 헬임프의 핏줄이 맥동함을 느꼈고, 다시 카보닉이 스산하게 흘러나오다가 재빨리 숨는 것을 깨달으며 당연한 의문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저기, 달랑 핏줄 하나? 다른 몬스터는?”
별빛 한 점이 살짝 코웃음 치듯이 일렁이면서 스윽 옆으로 움직이며 삐죽한 빛줄기 하나를 뻗어 내는 채로 대답한다.
“유니콘홀드. 대부분 저 안에 숨겨 놨지. 어차피 급하면 다 튀어나올 테니까 별 상관없다고 말한 것은…… 투란, 너야. 언더섀도우의 기억 중에 몸으로나마 남겨둔 것은 저 핏줄의 융합체, 저것 하나다. 너의 덮어버린 기억도 유니콘홀드의 보호 아래에 잘 간직되었지. 지금 너의 상태는…… 단련된 몬스터 로드의 정신과 육체, 그것만큼은 고스란히 유지되지만 언더섀도우의 경험과 기억을 자극할 만한 것은 모두 밀폐, 보안처리되어 있어. 솔직히 의미를 모르겠다만, 알드바인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랍시고 날름 해치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말끝이 묘하게 한탄하는 듯한 것이 아무래도 드라고니아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해치워 버린 듯했다.
그 처리가 너무 완벽해서 투란은 오히려 지금 상황이 뭔가 어리둥절한 듯했고…… 그러나 역시 새로운 의문 한 가지는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있었다.
“저기, 저 칼탄은 왜 내 곁에 있는 거지? 기억을 날려 버리고 떠나는 거잖아?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너한테 적당히 들으면 되는 일 아니었어?”
별빛이 주춤하는 듯하다가 한숨 쉬듯이 일렁거렸다.
“그랬지, 그게 또 네 계획이었지. 하지만…….”
* * *
―칼탄은 너를 숭배한다. 폐허가 된 칼바르에서, 그 잔해 속에서 너와 프릿이 저 녀석을 찾아냈던 그때부터 칼탄은 황제인 프릿보다 너를 더 따랐고 줄곧 우러러 봤지. 뭐, 처음부터 주변에서 구원자라고 불러 대니까 그런 것 같기는 했다만. 열 살 겨우 넘은 어린애가 어른이 되면서 줄곧 봐온 것이 너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너랑 프릿이 다투면 칼탄은 사정 따윈 아랑곳없이 네 편을 드는 녀석이야. 그래서 너도 완전히 뿌리쳐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어영부영 함께 왔지. 아, 걱정하지 마라. 너 기억 억눌러 덮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미리 설명 다 해줬어. 그래도 남아서 저렇게 애처로운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하잖냐.
이어지는 긴 상황 설명에 투란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이 칼탄은 아직 꼬마일 때 투란과 프릿이 칼바르란 곳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십수 년을…….
‘잠깐, 십수 년! 너, 아까부터 십수 년, 십수 년 했잖아! 야, 나 대체 몇 년 만에 나온 거야? 아, 그 시간의 격차인가 뭔가였나? 시간 흐름이 다르네 뭐네 하던 거…… 야, 언더섀도우 밖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나, 대체 몇 년을 저 안에서 보내고 밖에서는 몇 년 만에 나온 거야?’
뒤늦게 투란은 날려보내 잊어버린 기억보다 주변의 상황이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묻고 있었다.
자신이 들어갈 때랑 똑같은 기억, 정신상태이면 뭐 하나.
세상이 몇 년 훌쩍 지난 채라면, 아무런 변화가 없이 몇 년 전 그대로인 투란이 오히려 이상한 미친놈일 뿐이잖나!
―에스탄이 확인하러 갔다, 굴하람에 들렀다가 돌아올 거야. 어림잡으면 반년, 길어도 일 년을 넘기지는 않을 거라고 했어. 너는…… 언더섀도우의 깊은 곳, 시간의 흐름이 가장 빠른 곳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니까. 안에서는 가능한 한 오래, 하지만 밖에서는 가능한 한 짧게 시간이 흘렀기를 바란다고 그랬지. 그게 네 계획에 어울리는 선택이기는 했다만.
‘에스탄? 그 할배, 같이 나온 거야?’
가만히 진정하며 듣다가, 흘깃흘깃 칼탄도 엿보다가 투란이 갸웃하며 되물었다.
다시 한숨 쉬는 낌새를 섞어 드라고니아가 대답한다.
―에스탄은 너랑 함께 갈 거야. 이번에는 진짜 은퇴, 언더섀도우에서 떠날 생각이라고 했지. 뭐, 프릿에게 또 잡힌다면…….
‘응? 프릿이 또 잡으러 와? 나는? 나랑 가는 거면 일 마치고 나온 거 아냐? 여기 칼탄……씨는 배웅 나온 거 아니었어?’
역시나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한 투란이었다.
그리고 칼탄은 저 편을 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으니.
“에스탄 재상께서 돌아오시는군요.”
저 멀리서 에스탄의 모습이 스윽 돋아나듯 보이기 시작했다.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