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3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27)
희끗한 머리카락이 한층 더 허옇게 물들어버린 듯한 얼굴과 함께 서서히 허리와 다리까지 드러나는데, 허리춤과 정강이 쪽을 반쪽 난 듯한 갑주로 감싸고 있었다. 허벅지 쪽에도 쇠막대를 토막 내서 엮어 붙인 듯한 묘한 장식이 달린 것이 꽤나 낯설어 보였다.
‘뭘 주렁주렁 저리 달고 있지?’
분명히 투란이 갸웃할 수밖에 없는 희한한 모습이었다.
―엑소기어(Exogear). 에스탄이 요즘 심하게 노년기를 겪고 있어서 달고 있는 거잖아. 투란, 저거 네가 붙여준 거야.
‘잉?’
드라고니아의 말투는 한층 더 깊이 한숨 쉬는 듯했고 투란은 움찔했다.
듣고 보니 조금 더 늙어버린 에스탄이 차고 있는 철갑이 방어용이 아니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걸을 때마다 매끈한 쇠막대와 철갑 정강이받이, 쇠장화가 연계되면서 힘을 보태주고 다리를 지탱해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허리를 감고 등받이 노릇을 하는 철갑 부분 역시 서서 걷는 것을 보조한다는 것도.
하지만 투란이 쉬이 납득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으니.
‘내가?’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딱히 저런 보조 도구를 만드는 것이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뭔가 근거는 없지만 당장 만들 수도 있을 듯한 자신감이 새록새록 피어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에스탄을 위해서 투란 자신이 그랬을까?
겨우 얼굴만 익히고 바쁘게 프릿에게 구원자라고 끌려간 것이 사흘 전 아니던가!
―그 사흘은 십수 년 전에 지나갔지. 칼탄도 기억 못하면서 에스탄과 어찌 지냈는가를 멋대로 짐작하나? 기억을 복구하고 따지든가.
‘이렇게 싹 지워 버린 까닭이 있나?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나, 사람 얼굴 정도는 기억해도 괜찮았잖아?’
문득 투란은 자신이 완전히 낯선 칼탄을 봐야하는, 에스탄에게 저런 것을 만들어줄 정도로 친분이 쌓였다는 것에 놀라는 어리둥절한 상황을 겪는다는 점이 이상했다. 어째서 이렇게 깔끔하게 언더섀도우를 겪은 자신을 분리해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백금왕을 처치하고 그 도시를 장악하면서 이런 상황을 궁리했던 일까지 기억하는데, 그다음부터의 일은 그야말로 한순간도 허용하지 않다니…….
남에게 들은 소문 정도로 희미하게나마 상황을 기억하는 편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아예 그동안의 일을 꿈도 꿔보지 못한 것처럼 만든 까닭이 대체 뭔가?
투란의 의혹에 대해 드라고니아가 쓴웃음을 섞은 말투로 이야기한다.
―뱀파이어의 피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기억조차도 피의 본능을 자극하고 그 안에 담겨진 개성, 능력, 성격을 고스란히 되살려내거든. 보통 뱀파이어라면 그냥 억눌러버릴 수 있겠지만…… 투란, 너는 황금의 성혈(聖血)을 시작으로 해서 드라클래스의 용혈(龍血), 암혼(暗魂) 일족의 영혈(靈血), 이터니티의 데몬블러드…… 쉽게 말하자면 십이혈족 중에서 인왕도의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혈족들을 제압하고 찢어발긴 채로 삼켜버렸다. 그놈들의 피에 담긴 유산은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 감정에도 반응해서 네가 억누르려던 십수 년을 그대로 되살려 버려. 애초에 그런 피의 전승을 통해서 일족의 강대함을 유지하던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이름을 봉인해야 했고, 그 봉인을 지키내기 위한 안전조치로 그냥 기억의 소소한 부분까지 잠가버린 거야. 그게 지금의 결과다만…….
‘넌 마음에 안 들었던 거냐?’
―마음에 들 리가 있냐! 모처럼 세월을 쌓고 철 좀 들었나 했는데 도로 철딱서니 팽개친 놈이 돼버린 셈인데!
불쑥 묻는 투란에게 드라고니아는 확실하게 으르렁거렸다.
키득, 투란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감돌았다.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지만 드라고니아는 투란이 덮어버린 십수 년을 모조리 기억하고 그사이에 성장한 기량을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언더섀도우에서 성장한 투란의 능력이 들어가기 전으로 되돌아와버린 듯한 상황이 언짢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투덜거림은 투란에게 증명하고 있었다.
호르트의 유해, 신상을 처리하고 투란이 세운 계획은 성공했다고.
스스로 대견해 하려는 투란의 귓가에 살짝 거친 마찰음이 닿았다.
끼익, 끼익.
에스탄이 다가와 투란을 향해 앉고 있었다.
마찰음은 그 허리춤에서, 다리에서…… 엑소기어의 움직임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기름칠을 하지 않은 문짝 같다는 느낌이 짙었다.
“기름칠하면 안 되는 물건이에요?”
갸웃하며 투란은 바로 입으로 생각을 토해냈다.
에스탄이 주름진 눈가를 잔뜩 구기면서 이에 말한다.
“뭔 기름칠이야? 이건 물 뿌려서…… 뭐야, 잠깐 다녀온 사이에 저지른 거냐? 어이, 칼탄! 이 녀석, 정말로 기억을 지워 없앤 거야?”
칼탄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예. 저도 낯선 사람처럼 보시더군요.”
“뭐가 그리 급해서…… 젠장, 뭔 짓이냐고 따질 수도 없는 거잖아! 하아, 투란 너 내가 다녀와서 굴하람의 상황을 전하면 대충 듣고 기억을 제거하든 인격을 새로 만들든 한다고 했거든. 갔다 오는 사이에 저질러 놓는다고 안 했어. 그래서…… 대체 어느 때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냐? 적어도 나는 알아보는 거겠지?”
“백금 도시에서 프릿에게 백금안을 만들어줄까 말까 말 꺼냈던 일까지는 기억하는데 말이죠. 그다음에 여기서 눈 떴거든요.”
투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사이에 드라고니아는 에스탄의 투덜거림에 대해서 보충해주고 있었다.
―에스탄도 나처럼 네가 언더섀도우의 일을 그대로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래야 자신을 데리고 알드바인으로 가서 적절하게 소개해줄 테니까, 최소한 알드바인에 도달할 때까지만이라도 네가 언더섀도우를 기억하기를 바랐지. 물론 넌 그딴 요청 따위 깨끗하게 무시하고 바로 일 저질렀지. 당장이라도 홀시딘을 불러 돌아갈 수 있는가 물을 작정으로 말이야.
‘어? 홀시딘을 불러?’
―셀리아가 마도구를 만들어줬어. 언더섀도우 밖이라면 바로 상아탑에 전문(傳文)이 가능한 마도구지. 뭐, 로열클래스의 마법에 대해서 몰랐으니까. 그건 전혀 밝힌 적이 없는 일이야.
‘그렇군…… 아, 그럼 마석은?’
―에스탄이 갖고 있다.
‘응? 왜? 내 주머니에 없어?’
―네 주머니에 있기도 하지만, 홀시딘에게 건네줄 것은 모두 에스탄이 보관하고 있어. 저 허리춤의 엑소기어에 새겨진 왜곡의 배낭 안에 말이야. 그걸로 에스탄이 알드바인에 정착하고 말년을 보낼 거처를, 안전을 보장받기로 약속했다만…… 그 일은 에스탄이 알아서 할 일이고, 너는 홀시딘을 부르기로만 되어 있었지. 뭐, 이건 그냥 다음 일에 대해서 어쩌기로 했냐고 물으면 말해줄 거다.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빠른 이야기가 마무리되기가 무섭게 에스탄을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소리 없는 대화는 번개처럼 빨랐기에 앞에서 낯을 마주하고 듣는 에스탄 입장에서는 하던 말을 멈추지 않고 바로 이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근데, 언더섀도우 나올 때 마석 받기로 했었는데…….”
말끝을 얼버무리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몸을 뒤적이고 더듬는 투란이었다.
에스탄이 그 꼴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부터 흘렸지만 기억을 몽땅 날려 보냈다는 점을 새삼 확인했다는 듯이 대꾸는 해주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다. 나오면…… 알드바인의 상아탑에 연락할 방법이 있다고 했었거든. 연락만 닿으면 단숨에 대마법사가 데리려 와서 곧장 거기로 갈 수 있다고 말이야. 아, 그런데 투란 너 연락은…… 칼탄, 이 녀석 상아탑에 전문은 보냈나? 나자빠졌다 일어나서 정신 나간 꼴인데, 연락 어떻게 했어?”
칼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마법을 통한 전언은 바로 반응이 올 거라고, 그러면 언더섀도우를 기억하는 채로 대응할 것이라고 뒤로 미뤘습니다. 이제 연락하셔야 해요.”
한층 더 눈살을 찌푸린 에스탄이 곧장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투란에게 말한다.
“하여간 귀찮게 한다니까…… 투란, 알드바인의 상아탑에 바로 연락가능하다고 했었는데, 어떻게인가 기억하나? 그것도 날려먹었으면 곤란한데…… 어때?”
이에 투란이 뭐라 말하기 전에 드라고니아가 재빨리 이야기한다.
―가짜 반지를 만들어 뒀다. 로열클래스의 징표를 둘러싸는 반지야. 블랙레온에 대기시켜놨으니 꺼내 끼면 돼. 끼면 바로 마법이 발동해서 홀시딘에게 연락이 가게 해 놨어.
‘호오?’
투란은 에스탄을 향해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손바닥부터 내밀었다.
곧바로 블랙레온의 변형된 무늬가 떠올랐고, 드라고니아의 말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반지가 볼록 튀어올랐다.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기가 무섭게 빛을 뿜었고, 허공으로 한 가닥 화살처럼 빛줄기가 쏘아졌다.
에스탄이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듯한 투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허공으로 쏘아진 빛줄기가 곧장 사라졌을 때, 에스탄이 느릿하게 다시 입을 열며 칼탄에게 손짓했다.
“뭘 멀뚱거리고 서있어? 이 근처에 별것 없잖아? 앉아, 너도 앉아서 기다려. 상아탑에서 회신이 오든, 프릿이 오든……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그래도 칼탄은 한편에 언제든 튀어오를 듯한 묘한 긴장감을 지닌 자세로 앉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투란은 그런 칼탄보다 에스탄의 말에 바로 의아함을 느끼고 짚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릿이 와요?”
분위기로 봐서는 일을 모두 정리한 듯한데, 프릿이 왜 오는가?
마중이라면 미리 했든가 여기 올 것이라면 함께 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뒤늦게 와야 할 까닭이 따로 있는가?
에스탄은 투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그시 보는 척하다가 다시 혀를 차는 소리부터 내고 대답해주고 있었다.
“오겠지. 온갖 핑계로 안 보내주려고 했는데, 네가 도망쳤거든.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뱀파이어 혈족을 완전히 끝장내는 데 널 끌어들이려고 했으니까. 뭐, 인왕도가 이제 어느 혈족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시점에서 넌 떠날 이유가 넘쳐났지. 그래도 프릿은 구원자라는 최강의 전력인 널 더 붙잡고 싶어했지. 바루하 영감이나 셀리아는 아예 황제 자리까지 떠넘기고 프릿이 대신 튀려는가 의심까지 하는 모양이었다만…… 덕분에 너 도망치는 데 도움도 받을 수 있었지.”
무슨 이야기인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어서 투란은 눈만 끔벅였다.
다만 에스탄의 눈길은 ‘그게 모두 네 탓이야!’라고 하는 듯한 분위기가 무럭무럭 새어 나오는데, 곁에서 칼탄이 불쑥 끼어들어 말한다.
“폐하가 오신다면, 재상께서 함께 오신 것 때문이겠지요. 연로하신 분이 은퇴를 꼭 언더섀도우 밖으로 하셔야 하느냐고 안타까워 하셨잖습니까. 거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새로 아늑한 집을 지어줄 수도 있다 말씀을…….”
“내가 원래 바깥 사람이거든! 거기서 죽으면 타향살이 하다가 고향 구경도 못 하고 뒈지는 거라고! 여생을 해 뜨고 지는 곳에서 좀 보내겠다는데 왜 잡으려고 해!”
에스탄이 울컥한 듯 칼탄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문득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칼탄 말대로 프릿이 여기와 누굴 데려가려 한다면 역시 투란 자신보다는 에스탄일 것이라고.
‘내 생각 맞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프릿은 언더섀도우에서 뱀파이어만큼은 완전히 제압하길 원한다. 십이혈족의 대세를 꺾기는 했지만 아직 너의 도움을 받을 일은 많으니까. 재상인 에스탄의 경우에는 여럿이 그 일을 분담하기는 한다만, 역시 에스탄이 단독으로 처리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적확(的確)할 때가 많아. 뭐, 너나 에스탄이나 프릿 입장에서는 둘 다 곁에 두고 싶을 수밖에 없어.
‘야, 그럼 진짜 잡으러 온단 말이야?’
―그렇게는 못해. 보내준다는 약속을 했고, 그것도 벌써 몇 번 연기했으니까. 다만 설득을 하려 들기는 할 거다.
‘흐흠, 설득이란 말이지.’
―아니면 일을 저질러놓고 수습해야 한다고 하소연하든가.
‘윽…….’
귀 막고 무시할 생각이었던 투란은 프릿이 징징거릴 수 있다는 의미를 깨닫고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에스탄이 언더섀도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은 척하려고도 했었잖은가. 하지만 정작 투란과 함께 인왕도로 휩쓸려 들어갔을 때에는 어영부영하다가 다시 재상 노릇을 했었다.
그때 나온 말이 투란이 바로 구원자란 소리였는데…….
“얀마! 구원자! 재상!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 꼭 그렇게 제대로 말도 없이 튀어야 했었냐! 너네 너무한 것 아니야!”
볼멘 외침과 함께 언더섀도우의 모래와 바람 장막을 찢고 누군가 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투란은 그것이 누군가 눈을 깜박이면서 맹하니 바라봐야 했다.
먼저 눈에 띈 얼굴은 틀림없이 프릿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무슨 강철벽에 불룩 튀어나온 듯한 상태라면, 움직이는 작은 성채 같은 괴이한 것에 들러붙은 채라면 과연 프릿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저걸 타고 쫓아오다니, 과연 얼렁뚱땅 황제 폐하로구먼.
드라고니아가 어이없어 고개를 젓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탄은 버럭 성난 외침을 터뜨렸으니.
“그걸 왜 끌고 나와! 수도방위용이잖아! 이 망할 폐하 놈이!”
어쩐지 다시 재상의 의무를 수행하는 듯하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