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41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32)
에스탄은 제란드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간결하고 명확하게, 투란을 바라보면서 이야기에 대한 감상이란 듯이 말한다.
“그렇게 위장하고 있었군. 음, 알았어. 그럼 나도 투란이 그렇게 떠나왔다가 만나서 알드바인까지 동행한 사람 정도로 해 두자고.”
“위장이라고 말하신 까닭은?”
제란드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다가 바로 묻고 있었다.
에스탄이 그런 제란드의 표정을 보면서 히죽 웃음을 머금은 채로 대답한다.
“언더섀도우는 바깥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신기한 곳이지. 밖에서는 백 일, 반년이 지난 사이에도 언더섀도우에서는 삼 년, 사 년이 지날 수도 있어. 저 넓은 그림자 아래에서는 그림자 밖에서 일 년이 흐르는 사이에 십 년이 훌쩍 지나가는 곳도 있다네. 아주 신기하잖나? 투란은…… 그 신기함을 경험했다네. 그리고 자네들의 시간과 자신이 어긋나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그 기억을, 그 경험을 덮고 밖으로 나왔지. 그게 자네가 모르고 내가 아는 투란의 비밀 한 가지라네. 다른 부분은 투란이 스스로 기억을 열고 드러낼 때까지는 말해줄 수 없어. 자, 이제 납득하겠나?”
제란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웃하며 투란에게 눈길을 돌리며 묻는다.
“기억을 덮었다는 것은…… 투란, 너 언더섀도우에서 있던 일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지? 자신의 기억을 자신이 억누르고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었던 거냐? 우리랑 있던 일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기는 하고?”
“아니, 그러니까 들어가서 한 사나흘은 기억하는데 나머지는 모르겠어. 음, 저 그림자 아래로 들어가기 전에는 아주 멀쩡했어. 에, 그니까 나는 사나흘 지난 다음에 바로 나왔나 싶었는데 에스탄 할배는 백 일이 넘게 흘렀다고 말하는 거야.”
조금 날카롭게 짚는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투란은 생각을 쥐어짜 내듯이 대답했다.
에스탄이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 보탠다.
“너무 꼬이고 꼬인 시간의 흐름 탓에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미친놈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정상적인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정상적이지 못한 시간 동안의 기억을 억누를 필요는 분명히 있었지. 뭐, 그 결과 지금 투란은 언더섀도우에 들어서기 전이랑 경험에 별 차이가 없는, 알드바인의 자네들이 아는 그대로의 투란인 셈이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수년을 알고 지낸 투란이 더 편하지만, 이렇게 날 낯선 사람 보는 듯하는 녀석이 모르는 일까지 훤히 알고 있다는 점은 꽤 흥미로워. 그야말로 내게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이 재미있어질 듯해서 기대된다고나 할까?”
“정정하신 모습이 꽤 오래 남은 시간 같군요.”
제란드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에스탄도 낄낄거리면서 가만히 잔을 비우고 스스로 채워 다시 홀짝이며 느긋하게 출발을 기다린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투란은 벌컥거리며 큰 잔을 비우고 나서 바로 제란드에게 묻는다.
“그보다, 룬디아크 공방이랑 거래를 했다니…… 그럼 이 하늘을 나는 배는 룬디아크 공방에서 사온 거야?”
“사온 배도 있기는 하지만, 이 배는 홀시딘이 금색의 마도사랑 우리가 여행했던 이야기를 듣고, 사온 배를 참고해서 새로 만들어낸 거야. 뭐, 여기 오는 것이 첫 시범운행인 셈이었지.”
“첫 시범?”
“띄우자마자 여기로 방향 잡고 날아왔다고. 어쨌든 한두 달이면 될 일이 석 달을 넘어가기 시작했으니까, 슬슬 네 안전문제도 짚어 볼 때가 된 셈이잖아.”
“어, 뭐…… 잠깐, 석 달 넘어가면서 왔다고? 그러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대체 얼마나 걸린 거야? 내가 들어갔다 나온 것이 석 달 좀 넘은 셈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죠, 에스탄?”
투란이 가만히 셈하려다가 퍼뜩 놀라면서 에스탄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듯이 중얼거렸다.
에스탄도 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흥미로운지 바로 답하며 묻고 있었다.
“그래, 거의 딱 백 일 가까이 지났다고 했어. 내가 굴하람에 들었던 것이 말이야. 그렇다면 이 배는 춤추는 산맥에서 검은 산맥까지 가로질러서…… 열흘도 걸리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맞는가?”
“정확하게, 알드바인에서 비행을 시작하고 사흘째지요. 첫날은 기본적인 점검을 아주 신중하게 했고, 둘째 날은 좀 험악하게 내구성 시험을 하고 정비를 했지. 그리고 사흘째에 곧바로 이리로 날아왔어. 음, 거의 반나절 걸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오자마자 네가 이쪽에 있는 것을 감지해냈지. 뭐랄까, 아주 딱딱 잘 맞춰 왔다고 해야 하는 셈인데…… 아마 우연은 아닐걸?”
제란드가 가만히 날짜를 헤아리며 하는 말에 투란은 눈을 깜박였다.
‘우연히 날짜를 맞췄다고?’
―물론 아니지. 제란드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만, 너 오늘 나오기 전에 대강 며칠 사이가 될 거라고 미리 연락을 해뒀어. 나오자마자 바로 알드바인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말이지. 그러니까 홀시딘은 대강 오늘 즈음에는 나와 있을 거라 알고 있었던 거야.
‘헤에, 그래서 바로 날아와준 거야? 우와, 엄청 반가워해주는 셈이네?’
―흐흥, 글쎄다. 날짜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파격적으로 배웅 나올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드라고니아는 어딘가 음흉한 낌새를 섞어 투란을 놀리듯이 말했다.
뇌리에 울리는 말을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버린 다음, 투란은 제란드를 바라보면서 방긋 웃음 지으면서 말한다.
“우연이 아니라 그냥 날 걱정해준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휙 날아왔는데, 마침 내가 휙 나와 있었던 것이잖아! 으하핫, 제란드도 내 걱정 좀 해서 함께 왔던 거잖아? 그렇지?”
바로 에스탄이 투란을 어이없다는 듯이 보면서 제란드를 흘깃거렸다.
제란드는 어딘가 미묘한 웃음을 띤 채로 투란에게 대답한다.
“투란, 그런 기대는 하지 마. 뭐, 전혀 걱정하지 않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돌아간다면, 어쨌든 간에 내일 아침 해를 보기 전까지 알드바인에 도착하기는 할 거야.”
“어떻게 그렇게 빠른가? 아무리 허공을 난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라 하고 싶은데.”
에스탄이 제란드에게 바로 묻고 있었다.
투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 궁금했기에 제란드를 보며 눈길로 대답을 재촉하는 시늉을 했다.
제란드는 가만히 식탁 위에 잘라 놓은 과일 한 점을 입에 넣고 잠깐 우물거리다 삼키고서 손가락 둘을 세워 내밀면서 대답을 시작했다.
“이 배는 두 가지 방법으로 운항하지. 첫 번째는 룬디아크 공방에서 만들어진 다른 배처럼, 바람을 받고 공중을 부양하며 비행하는 것. 바람 속도와 방향에 영향을 많이 받는 방식이지. 뭐, 그런 점에서는 공중에 띄운 채라고 해도 물 위를 움직이는 배랑 별 다를 것이 없어. 하지만 두 번째, 이 배의 두 번째 운항방법은 홀시딘이 우리 경험담을 바탕으로 고안해낸 거야. 상아탑의 마법, 바람의 길을 적용하는 것. 그게 이 배가 알드바인에서 여기까지 반나절 만에 온 방법이야.”
“바람의 길로 이런 배를 옮길 수 있다고?”
투란은 새삼 배의 크기를 가늠하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바람의 길, 상아탑에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보낼 때 쓰는 마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운송방식으로는 상당히 비효율적이라서 급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짐 정도로 제한시켜 사용한다고 들었다.
한데 이 배의 크기는 어떻게 봐도 거의 집 한두채는 홀랑 담을 정도였고 위에 부풀어 있는 가죽 풍선을 고려하면 그 몇 배는 되는 것 아니던가.
나름 열심히 생각하면서 의아해하는 투란을 보고 제란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이 배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야. 뭐, 조금 있다가 보면 알 거야. 그보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프릿…… 황제폐하란 분이 꽤나 대마법사의 관심을 끌고 계신가보네?”
‘황제폐하’란 말의 미묘한 낌새에 에스탄이 한숨을 쉬었다.
“뭐,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일 수도 있지. 따지려 한다면 여기 있는 투란도 만만치 않겠지만…….”
제란드도 쓴웃음과 한숨을 섞어 내쉬면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잘 어울리고 있는 듯한 제란드와 에스탄을 보면서 투란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얼마 후, 투란이 더 배를 채우겠노라고 요리를 입안에 욱여넣고 있을 때 홀시딘이 구멍을 지나쳐 들어섰다. 기분 좋은 외침이 곧바로 마법사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좋아! 아주 잘되었어! 투란, 돌아가는 것 맞지? 제란드, 대비는 다 되어 있겠지?”
투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란드 역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탄이 조용히 마법사를 향해 묻는다.
“내가 동행해도 상관없으시겠지요?”
“당연히! 이미 괜찮다고 했잖습니까, 인왕도의 재상과는 앞으로 할 이야기가 꽤 많을 겁니다! 자, 그러면…… 문부터 닫고…….”
경쾌하게 대답하면서 홀시딘은 손을 저었다.
열려있던 구멍이 바로 닫혔다.
그 순간, 투란은 고요함을 느꼈다.
구멍 너머로 흘러가던 바람의 흐름이 순식간에 감각의 영역에서 사라진 듯했고, 배가 공중에 떠 있다는 분위기도 덩달아 지워졌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먼 풍경은 그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본다는 시점만 확실하게 느끼게 할 뿐이었다.
홀시딘의 손짓이 몇 번 더 이어졌다.
어리둥절한 사이에 드라고니아가 재빠르게 투란의 시각 속에 이 배의 바깥 풍경을 비춰줬다. 덕분에 투란은 차단된 감각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아, 풍선이…….’
바구니를 매달고 날아오르는 듯했던 모양, 그것이 굴하람 근처에서 투란이 잠깐 즐겼던 허공을 나는 풍선의 형태였다. 하지만 이 배는, 부운선이란 이름이 뜻하는 그대로 구름처럼 꾸며져 떠 있는 중이었다.
그 구름의 형태가 순식간에 쪼그라들면서 정리된 그물처럼 단단한 배의 천장 쪽에 눌어붙는 듯했다. 그리고 배의 양쪽으로, 바닥에서 흘러나온 듯한 회색의 피막이 펼쳐지면서 새롭게 바람을 품는 듯했다. 얼핏 보면 거대한 피막의 쟁반 위에 오그라든 구름 덩어리가 올려진 듯한 모양이었다.
그런 형태가 되면서 주변의 바람이 요동쳤고, 훌훌 휘몰아치며 배를 감아왔다.
바람의 고치가 그렇게 묘한 형태의 배를 감쌌다고 보이는 순간, 마력이 바람에 섞이면서 곧바로 배가 쏘아졌다.
순식간에 배는 굴하람의 상공을 관통했고, 아늑하게 먼 곳을 향해서…… 흡사 떨어져 내릴 낌새가 전혀 없는 투석(投石)처럼 날고 있었다!
‘야, 프로브 쳐졌잖아!’
관측하던 프로브가 거리가 멀어진 순간 곧바로 해제되고 있었다.
―의미 없잖아, 이젠…… 그나저나 이렇게 이동하는 상황인데도 잔 속의 물이 흔들릴 낌새도 보이지 않는군. 제대로 마법을 걸어놨어. 대단한데, 홀시딘…….
드라고니아가 새삼 배에 걸린 홀시딘의 마법에 감탄했다.
그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어서 투란은 어정쩡하니 창문 너머를 흘깃거리다가 제란드를 흘깃하고 홀시딘을 흘깃하며 눈 둘 곳을 찾아 헤매고 말았다.
홀시딘이 냉큼 한편의 의자 위로 둥실둥실 날아가 내려앉더니, 눈알을 굴리는 투란을 보고는 바로 제란드에게 묻는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어? 알드바인의 상황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나?”
“아니요. 새로 알드바인에 오실 손님께…… 어쩌면 그곳에 아예 눌러 살지도 모르는 분께 투란의 상황에 대해서 몇 마디 알려드리고 있었어요.”
제란드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홀시딘은 ‘그렇군!’이라고 간단히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곧바로 투란에게 말한다.
“투란, 우린 알드바인보다 먼저 루바인에 들러야 한다.”
“예? 루바인……?”
투란이 뜬금없는 말에 맹하니 ‘루바인’이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홀시딘은 전혀 머뭇거림 없이, 도도하고 당당하게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경계 도시 루바인, 알드바인에서 화이트 레이크를 건너 곧장 가거나 그 호반을 따라가면 있는 작은 도시 말이다. 그리로 갈 거야. 왜냐하면, 지금 거기서 네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거든.”
“예?”
투란이 눈을 깜박이며 맹한 소리를 냈다.
제란드가 픽 새는 웃음을 섞어 보태 말한다.
“그냥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가 나타났거든.”
“몬스터……? 아니, 그게 뭔데 알드바인에 잠깐 들르지도 않고 그냥 가요? 왜? 어째서? 대체 뭔데 그래요?”
어이없어서 두서없이 으르렁거리려던 투란은 문득 홀시딘이 자신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일을 떠올리고는 간신히 진정하며 묻고 있었다.
절실했던 홀시딘은 시련이 어쩌고 하면서 몰튼노트 기간틱이라든가 퀸 아라크레온이라든가, 정령이 깃든 숲에서 날뛰던 무쇠뿔 오우거 앞에 투란을 던져놨었잖나.
지금 여기까지, 딱 날짜까지 맞출 작정으로 날아왔다가 날아서 돌아가기를 서슴지 않는 홀시딘의 태도로 본다면 어떻게 생각해도 그 시련과 닮은 수준의 일이 터져 있을 듯했다.
과연 홀시딘은 이런 투란의 추측을 인정하듯이 바로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면 어떻게 계획이라도 다듬을 여유가 있을 텐데, 지금 루바인 근처에서 날뛰는 괴물은 둘이나 되거든. 하나도 역대에 손꼽히는 괴변으로 기록할 지경인데 그런 것이 둘이서 오락가락하며 난리를 떨고 있지. 이대로 두면 화이트 레이크를 뒤흔들어서 알드바인을 덮칠 정도로 굉장한 놈이랑, 루바인을 먼지 폐허로 만들고 알드바인까지 쳐들어올 놈이다. 멜란드가 케이라가 이끄는 마법사들이랑 함께 버티고 있다만, 오래 버티지 못해. 투란, 네 힘이 필요하다.”
“나는 가는 길에 내려줄 수 있는 거요?”
맹한 투란을 대신하듯, 에스탄이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