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5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47)
투란은 소리 없는 맹렬하고 거대한 울림을 느꼈다.
머릿속 구석구석을 울리면서 목과 몸통, 팔다리를 타고 손끝 발끝에 이르는 울림은 사룡의 격동과 전혀 다른 것이지만 그 격(格)이란 점에서는 거의 동등했다. 몸을 흔들고 뼈와 살을 분리하는 격동과 다른, 차분하게 이리 당겼다가 저리 밀었다가 하는 커다란 울림…….
그 울림의 중심은 명확했고, 그로부터 퍼져 나오는 형체 또한 또렷했다.
‘크리스탈 애쉬.’
핏빛으로 물든 거품막이 오그라드는 중이었다.
그 중심에 선 투란은 새하얀 사슬 세 가닥이 휘감은 핏빛의 장벽 속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며 안개처럼, 연기처럼 휘몰아치고 흐르는 크리스탈의 재를 뒤집어쓴 채였다. 스스로 ‘파라블랙·잉크’를 깔고 그로부터 ‘크리스탈 애쉬’를 끌어낼 수도 있고, 거꾸로 ‘크리스탈 애쉬’의 형체를 드리우고 ‘파라블랙·잉크’를 쥐어짜낼 수도 있는 투란이었다. 그러니 상황은 그리 대단할 리가 없기는 한데…… 이 크리스탈 애쉬는 투란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대로 관을 짤 수도 있고 뇌옥(牢獄)을 꾸며 투란을 그대로 감금할 수도 있는 크리스탈 애쉬였다.
수룡 크리스털 가드의 정수가 쉴 새 없이 문장의 마력에 삼켜지는 중임에도 울림과 함께 퍼져 나온 크리스탈 애쉬는 투란의 의지와 무관하게 멋대로 춤을 추듯 펄럭이거나 잘게 터져 흩어지는 광경을 그려내며 맴돌고 있었다.
―투란, 문장 속에도……!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문장 속 풍경 깊은 곳에서도 벌어진다는 것을 짚고 있었다.
‘그래, 알아…… 그쪽이 원본이고 이쪽은 그 흉내처럼 보여.’
투란도 실재의 상황과 심상 속의 상황을 재빠르게 비교하고 검토하며 답했다.
―이해 못하겠군. 어째서…….
혼란스럽다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중얼거렸다.
몬스터의 정수가 삼켜지는 과정에서 몬스터 로드가 그 본능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하거나 하면 자연스럽게 그 형상이 발현하기는 한다. 하지만 투란은 지금 수룡의 정수를 깔끔하게 보이드의 껍질 속에 퍼담고 있었고 문장 속에서 수룡의 형상은 채 드러나지도 않은 상황.
그럼에도 수룡의 마법은 투란의 몸 주변에서, 문장 속에서 명확하게 그 힘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굳이 드러난다면 수룡의 형상이어야 할 텐데…….
‘내가 크리스탈 애쉬를 지녔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투란은 적당히 납득하고 있는 듯한 말을 했다.
―뭐! 지금 네 몸 주변을 도는 크리스탈 애쉬가 너의 몬스터 형상이란 거냐! 아니잖아!
드라고니아가 어리둥절하다가 으르렁거렸다.
‘아르고누스에서 형성되었다는 말이 아니야. 아르고누스를 통해 마법 크리스탈 애쉬도 사용할 줄 알잖아, 내가 말이야. 그 때문인 것 같다고. 지금 내 몸을 울리는 수룡의…… 이 괴상한 울음이 마음 한구석에서 그 마법을 당연하다는 것처럼 끌어내는 모양이라고…… 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수룡이란 녀석…… 내가 보고 겪고 아는 드레이크랑 성질이 너무 달라. 이 울림도 사룡의 격동이랑 너무 다르고. 뭔지는 완전히 삼켜야 알 것 같아.’
투란은 눈살을 구겨가면서 드라고니아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속삭이며 상황을 정리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야, 저 사슬 대체 뭐야!’
어느 틈엔가 몬스터 엠블럼의 마력이 수정알을 묶은 사슬로 번져나가며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핏빛 잉크 얼룩이 옮아버린 듯했지만 몬스터 엠블럼의 마력이 사슬을 갉아내고 그 속에서 정수를 탐닉하는 중이니, 결코 그냥 색이 옮는다는 수준에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드라고니아 또한 투란의 의문에 동참하듯 빠르게 주변을 훑었고, 원주와 사슬, 장벽의 틈새를 검토하고 나서야 대답했다.
―투란, 저 사슬도 수룡의 일부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뭐! 잠깐…… 정수랑 따로 노는데!’
투란은 문장의 풍경 속에 드리워지는 사슬의 형상을 살피다가 한층 더 구겨진 낯으로 의혹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룡의 일부라면 먼저 삼키고 있던 정수와 섞이고 엮여야 하는데, 마치 별개의 몬스터라는 것처럼 따로 몰려 뭉치고 있었으니까.
―잘려나간 발톱으로 단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 발톱 단도는 원래 몸과는 무관한 단도일 뿐이잖아. 저 사슬도 수룡의 잔해를 제련했지만 수룡의 제어는 받지 않는 그런 것이란 말이다. 대마도사의 솜씨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짓이지.
‘카엘!’
투란은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뭔 일이 났는데 대마도사가 엮였다면 당연히 갖다 붙일 이름이고, 갖다 붙이기 좋은 이름이기도 하니까!
덕분에 온갖 누명도 뒤집어쓴 대마도사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 굉장한 마법처럼 보이면 일단 카엘을 의심하는 것이 상식 아닌 상식.
이런 투란의 생각에 드라고니아가 헛웃음을 섞어 대꾸한다.
―아니, 이번에는 대마도사 카엘이 맞아. 누명이 아냐. 몬스터의 파편을 이용해서 마도구를 제작하고, 그 마도구가 여전히 몬스터인 것처럼 혹은 뭐든 살아 있는 듯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카엘의 대마법이야. 공식적으로는 몬스터 기어란 호칭까지 매겨져 있다.
‘진짜!’
―몬스터의 힘을, 그 파편을 고스란히 역이용해서 그 몬스터를 봉인해버렸다는 기록은 꽤 많아. 하지만 거기 수룡이…… 사룡 때도 그랬지만 용의 이름을 받은 녀석들까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당했다는 것은 여전히 신기하군.
‘으흠…… 몬스터의 파편으로 제련된 몬스터라…… 에이, 어쨌든 삼켜진다면 언제라도 처리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살짝 마음을 놓는 듯, 투란은 몬스터 엠블럼에 더욱 집중했다.
주변의 격렬한 변화, 뒤엉켜 움직이던 크리스탈 애쉬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보다 구체적인 형체를 꾸며나갔다. 그사이에 핏빛의 장벽과 엉켜 있던 사슬은 투명하게 변하며 으스러져 흩날렸고, 무지갯빛 수정알은 그 채광을 잃고 투명한 알의 형태를 드러내다가 티끌이 되어 바스러져갔다.
푸싯, 푸시싯.
거품 곳곳에서 괴상한 음향이 터지면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자잘하게 퍼져 나가면서 거품막은 화이트 레이크의 물결이 침투하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하는 듯했다.
그와 함께 핏빛이 드리워진 시커먼 잉크가 급속도로 그 범위를 좁히며 투란의 발 아래로 모여들어 지워져갔다.
퍼억, 촤아악.
결국 거품막이 요란하게 찢어졌다.
물더미가 빈자리를 채우러 몰려들었다.
명백하게 원래의 자연스러운 형태로 돌아가는 수중의 변화…….
쿠웅.
투란은 바닥을 세차게 박차며 튀어 올랐다.
찢어진 자리를 넓혀가며 몰려들던 물줄기 속으로 투란의 몸이 파고들었다.
촤아아.
물살을 가르며 투란은 그대로 수면까지 부상했다.
그 속도를 줄이지 않고 투란은 그대로 수면을 관통하며 너울거리는 구름을 향해 날아올랐다. 구멍이 뚫린 구름이 둥실거리며 투란을 받아들였다.
“다녀왔어요! 어, 그런데…… 잠깐 좀 쉬면서 정리해야 해요. 홀시딘, 에스탄, 좀 기다려줘요!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하나 확인부터! 투란, 삼켜서 지워 버린 거냐! 호수를 범람시키던 몬스터, 이제 정리된 거야!”
홀시딘이 재빠르게 묻고 있었다.
투란에게 휴식을 보장하는 것보다 현재 상황에 대한 명확한 보고부터 원하는 상아탑 마도사, 알드바인의 마스터로서 묻는 바였다.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웃하는 모습으로 대답해준다.
“여기 있던 놈은 정리했어요. 하나뿐이었다면 일 끝난 셈이죠. 만약 비슷한 놈 몇몇이 무리를 짓고 있던 거라면…….”
“알았다, 쉬고 있어.”
홀시딘은 투란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탄이 보니 투란은 한편으로 가서 풀썩 드러누웠고, 홀시딘은 아까처럼 바쁘게 상아탑과 마법으로 교신하면서 뭔가 마무리 짓고 정리하는 듯했다.
잠시 허공의 배, 부운선 안에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마법사는 입술을 열심히 움직이며 뭔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동행자에게는 전혀 그 말이 전해지지 않았다.
은퇴한 재상은 그런 마법사를 흘깃하고는 누운 채로 끙끙거리는 몬스터 로드를 보며 차를 홀짝였다.
몬스터 로드, 투란은 그사이에 문장 속의 풍경, 자신의 심상 속에 그려지고 있는 수룡 크리스털 가드와 봉인의 사슬을 관찰하느라 멍한 모습으로 바쁜 채였다.
* * *
수룡의 정수는 사슬까지 완전히 삼켜진 다음에 곧바로 ‘천칭’의 아래를 향해, 사룡이 날고 있는 축에 이를 때까지 추락했다. 마치 자신의 겪은 사룡과 동등하고 ‘천칭’의 깊이가 그 척도라는 것처럼 하강한 셈이었다.
그리고 사슬이 축을 휘감으며 세 가닥 나선을 그리며 펼쳐졌다.
나선은 시원하게 확장되다가 원을 그리며 서로 만나 겹쳐졌다.
수룡의 정수는 그 원의 안쪽으로, 원의 표면에 닿자마자 세찬 안개와 바람이 맺히는 풍경을 꾸미기 시작했다. 원은 어느 틈엔가 수정 거울처럼 속이 채워졌고 안개와 바람이 그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모양을 꾸몄다.
수룡의 형상이 또렷하게 그 머리를 드러낸 곳이 그 원의 안쪽이었다.
그리고 원의 아래가 부풀며 단숨에 거대한 물방울이 아래로 떨궈질 듯 말 듯 매달린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 광경은 투란에게 수정으로 된 항아리를 떠올리게 했다.
비록 그 크기가 지름 수십, 수백 미터는 될 것 같은 항아리이고 깊이도 거침없이 수백 미터는 될 듯하다는 것이 오싹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투란은 어째서인가 수룡 크리스털 가드라면 저 정도는 갖춰도 괜찮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 설마 저 녀석이!’
투란은 문득 수룡이 자신을 현혹시켜서 이 풍경 속에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드라고니아처럼 그렇게 숨어버린다면, 이번에는 대화도 못한 채 지워 버리지도 못하는 몬스터로 괜히 문장을 낭비한 셈이잖나!
―저 녀석은 그런 마법 안 쓰나.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염려에 투덜거렸다.
‘어, 그런가 보네.’
투란도 금방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의 자그마한 호수…… 심상 속이라지만 수백 미터의 영역을 꾸민 크리스털 가드가 노골적으로 보내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나, 여기 머물며 그대의 힘이 된다.
―이것은 맹약.
―드래곤로드의 자취를 좇으면 그대는 드래곤의 유산을 얻으리라.
―이것은 전언.
단조로움이 가득한 메시지였지만, 어쨌든 드라고니아처럼 나불거리며 마법을 가르친다는 경우랑은 확연히 다르다 선언한 셈이었다.
―이 바보가! 저놈이 뭐라는지 못 들은 거냐!
드라고니아가 투덜거림을 넘는 으르렁거림을 토해냈다.
문장의 풍경 속을 메아리치며 선명하게 들린 그 말에 투란도 문득 깨달았다.
‘어라! 드래곤로드! 드래곤의 유산! 그런 게 진짜로 있다고!’
간혹 음유시인 혹은 주정뱅이가 그림 투아란의 전설을 나불거릴 때 빠지지 않고 들러붙는 한 대목의 이야기였다.
드래곤로드의 재보(財寶), 그림 투아란이 죽으면서 행방불명이 된 보물창고.
지금도 가끔 영문을 모를 곳에서 튀어나오는 고대의 유물이 있고, 그중에 그림 투아란의 전설 속에 나올 법한 것이 있다잖던가.
투란의 경우에는 실제로 사막에서 그런 고대의 환영을 직접 겪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수룡이 한 몇 마디는 꽤나 중요한 정보…….
‘어디서 찾으란 이야기는, 전혀 안 하잖아!’
되새겨 보니 투란을 살짝 울컥하게 하는 메시지였다.
마치 열심히 땅을 파면 언젠가 금이 나온다고 하는 듯한!
구체적으로 어디 가서 뭘 찾아보란 말은 해야잖나!
―그런 걸 봉인된 놈이 어찌 알겠냐. 단지…… 그 뜬금없던 고대의 전설이 사실은 중요한 단서일 수도 있다고 확인해준 것만으로도 굉장한 거야.
어째서인가 드라고니아는 진지하게 굉장한 정보를 얻은 듯이 말하고 있었다.
투란은 그 속내를 금방 엿볼 수 있었기에 바로 툴툴거린다.
‘천 년도 더 된 이야기잖아! 여태 남아 있는 단서가 있을 것 같냐! 주변에 전설에 나오는 바위랑 닮은 것이 있으면 바로 다 캐고 부숴보고도 남을 시간이잖아.’
―인간의 손발이 닿는 곳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음, 나중에 이야기하자.
조금 반발하려는 듯하던 드라고니아가 이야기를 끊었다.
투란도 그 까닭을 바로 알았다.
‘뭐가 또 나왔다는 거지!’
홀시딘이 알드바인에서 조금 급한 연락을 받고 부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