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5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49)
쿵.
‘없네!’
잠깐의 활강(滑降) 후에 날개를 접고 작은 섬에 툭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채로 발 디딘 투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호수를 곳곳에서 가르며 모였다는 수룡의 분신인지 뭔지가 아무 흔적도 보이질 않았으니…….
―작은 숲이다만, 담장 노릇은 제대로 하는군. 시야에 막혀 있어 보이지 않는 곳에 뭉쳐 있는 모양이다. 압축된 형체일지도 몰라. 묘하게 탐지가 안 되니 조심해서 접근해야할 거야.
드라고니아가 다방면에서 섬을 둘러보며 말했다.
‘중심!’
투란의 낯이 조금 더 찌푸려들었다.
일부러 날개를 펼치고 속도를 늦추며 내려오면서 봤던 풍경, 그 안에는 중심이라고 해서 특별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이십 미터의 폭을 지닌 조그마한 섬은 걸맞은 작은 숲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숲의 나무가 제법 굵고 높기는 했지만 알드바인 북벽 너머의 숲에서 자란 나무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 그늘 아래에 뭘 감춰두고 어쩌고 할 여지는 분명히 없다.
‘탐지가 안 된다고!’
재차 확인하면서 투란은 성큼성큼 나무 사이를 가르듯이 지나갔다.
사람 몸통만 한 나무, 사람 키의 몇 배는 거뜬한 높이의 나무를 타고 오르는 굵은 넝쿨과 곳곳에 자리 잡은 이끼와 버섯…… 몇 걸음 들어가지 않아서 사방을 흘깃 둘러보니 여기가 섬인가 짙은 산속 숲의 한복판인가 애매한 분위기가 또렷했다.
‘나무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져. 정말 프로브의 탐지가 막힌 거야!’
―그래. 지금 호수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
‘어! 어라!’
―안팎이 차단되어 있다. 그런데……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것인지를 모르겠어. 너무 자연스럽고 마력의 흐름조차 없는 채로 마법의 탐색을 이렇게까지 막아낼 수 있다니, 긴장해라.
‘음.’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신중한 경고를 들으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경고를 할 정도의 기이함과 달리 딱히 막는 것이 없었고, 나무 사이로는 사람 하나 지나갈 틈새가 넉넉했다.
그렇게 작은 나무의 기울어진 가지와 풍성한 잎사귀에 가려진 경계를 넘는 순간, 투란은 흠칫 놀랐다.
‘뭐야!’
―허!
우거진 작은 숲의 중심은 빈 터가 얕은 구덩이를 드러낸 채로, 기울어진 나무 그늘을 지붕 삼은 것처럼 보였다. 그 구덩이의 테두리를 따라 하얗게 번들거리는 나무…… 혹은 하얀 얼음을 나뭇가지처럼 꾸며 박아놓은 듯한, 기둥만 남은 울타리의 모양이 갖춰져 있었다.
그 한복판에 둥둥 떠 있는 듯이 엉킨 하얀 안개가 허물어지며 바람이 새어 나왔다.
차가운 숨결 같은 바람은 한 박자 늦게 투란의 살갗에 닿았다.
그 숨결은 곧바로 투란에게서 본능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하아…….
닿은 것보다 훨씬 차가운 숨결이 투란의 입가에서, 온몸에서 스며 나왔다.
숨결과 숨결이 미묘하게 뒤엉키는 순간, 투란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저주……잖아!’
―그런 전설이 있기는 했다만, 직접 맞선 본체도 안 한 짓이었는데…….
드라고니아는 살짝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수룡 크리스털 가드의 숨결에 저주가 서려 있다는 전설, 하지만 막상 투란과 맞선 수룡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분신으로부터 남겨진 듯한 잔해 속에서 흘러나온 수룡의 숨결, 본체도 분신도 없는 상황에서 토해진 그 숨결 속에는 저주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거 미묘한데!’
투란은 가만히 손을 내밀면서 갸웃했다.
확실히 닿는 것을 향해 쉼 없이 ‘얼어붙어!’라고 속삭이는 듯한 힘, 뒤틀린 마력은 저주라 부를 만했다. 하지만 수룡의 비늘 한 조각만으로도 그 숨결보다 몇 배는 더 차가운 힘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지금 닿은 이 숨결은 투란에게는 저주도 뭣도 아닌 것.
아마 수룡이 현신(現身)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쩌면 수룡은 그저 숨을 쉴 뿐이고, 그 안에 담긴 차가움이 제멋대로 퍼져 나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저주라 불러야 하는가!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저주는 없을 것 같다만!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기묘한 생각을 좇는 듯하다가 투덜거렸다.
‘그것도 그러네!’
투란은 다시 앞으로 내딛으면서 퍼져 나오는 숨결을 한 손으로 움켜쥐는 시늉을 하면서 대꾸했다. 투란의 이런 작은 손짓에는 보다 또렷한 의지가 담겼고, 수룡의 숨결을 한층 깊이 들이쉬는 흐름을 만들어 냈다.
역으로 흘러나온 그 숨결 탓인가 하얀 가지의 울타리, 기둥만 세운 듯한 가지들이 파르르 떨리며 부스러지는 듯했다. 부스러진 하얀 파편이 안개처럼 뭉클거리며 이어지는 광경은 투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어라!’
―사슬!
뭉클거리는 하얀 파편의 형체를 드라고니아가 읊조렸다.
투란은 본능 속에서 뭔가 반응하는 것을 다시 느꼈고 알아차렸다.
하얀 가지마다 으스러지는 채로 둥실거리는 사슬 모양의 안개가 되었고, 그대로 서로 맺히고 이어지면서 투란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투란의 내민 손이 주먹을 쥐었고, 그 팔뚝에서 뭉클거리며 하얀 사슬이 돋아나며 덮쳐오는 사슬 무더기를 맞서갔다.
하얀 사슬과 사슬이 만나며 뒤엉킨 실타래가 되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처럼 꼬였다. 새하얀 사슬의 덩어리가 투란이 내민 팔 앞에서 이뤄지는 듯했다.
한데 그 사슬 덩어리를 향해 숨결을 토해냈던 울타리 중심의 하얀 안개, 그 남은 잔해가 검은 광채를 번뜩이며 실가닥처럼 시커먼 연무(煙霧)를 흘려보낸다! 갑작스러웠고 그 검은 빛깔 속에는 음울하고 불길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투란, 저건……!
드라고니아가 움찔하며 경고하려 했다.
‘알아, 진짜 저주잖아. 그치만 수룡의 저주는 아니야.’
투란은 가볍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음울하고 불길한 검은 연무의 실가닥을 보는 순간, 팔뚝 깊은 곳에서 새하얗게 변모한 살갗을 향해 입을 열고 나가는 또 하나의 본능을 느낀 때문이었다.
치익, 촤악!
날름날름.
사슬을 돋아냈던 투란의 팔뚝, 그 살갗 곳곳이 거칠게 찢어졌다. 그 열린 틈에서 꾸물거리는 혀가 다채로운 색상을 머금은 채로 허공을 핥으며 기어 나왔다.
혀는 사슬이 엉킨 것도, 그 주변부가 혹독한 차가움에 바람조차 얼어붙는 듯하다는 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죽죽 뻗어 나갔다. 보기에 따라서는 물컹거리고 날름거리는 넝쿨이 뿌리를 허공으로 마구 뿜어내기라도 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저주와 혀가 만나는 순간, 저주가 갉혀나가며 혀가 부풀며 더욱 빠르게 날름거린다.
‘참 좋은 선물이었지!’
―그래, 아주 좋은 선물이다.
투란의 말에 드라고니아가 혀를 차는 듯한 말투로 동의했다.
키득거리는 채로 투란은 앞으로 더 나아갔다.
주먹이 거칠게 부딪히니, 공중에서 엉킨 사슬이 곧바로 끊어지고 터져 나갔다가 다시 이어 붙었다. 이번에는 뒤엉킴 없이 가지런하게 정돈되며 투란의 팔뚝으로 휘감겨 들어왔다. 굵직한 사슬이 둥글게 엉키며 투란의 팔뚝을 감싼 듯하다가 깊은 무저갱으로 빠져들어가듯이 오그라들며 사라져갔다.
울타리의 기둥노릇을 하던 하얀 잔가지 기둥들이 모두 바스러지고 지워진 경계를 넘어 투란은 걸음을 더욱 깊이 내딛었고, 허공에 뜬 하얀 안개의 잔해를…… 아직도 검은 저주의 잔재를 머금은 하얀 안개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째앵.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비늘……!”
투란은 자신이 손에 움켜쥔 것을 보며 갸웃했다.
―수룡의 것 같은데!
드라고니아가 거의 단도 정도의 크기인 비늘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성채 같았던 수룡의 몸집을 떠올리면 아주 작은 비늘, 그 파편인 듯 보였다.
하지만 비늘의 형상은 온전하게 뽑아낸 듯했고, 그 안에 담긴 저주가 날름거리는 혀의 공세에 모두 지워지는 순간…… 투란은 이 수룡의 비늘에 담긴 기억의 잔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으앗, 기분 나빠!’
“죽어라, 흐흣, 죽어!”
“더러운 고아 새끼, 이 괴물아, 죽어!”
“나의 저주가 네 주변을 물들일 것이야!”
“하지만 아무도 내가 저주한다고 알지 못한다!”
“너 때문이니까, 네 탓을 할 것이다!”
“죽어, 이 추한 괴물 그림 투아란!‘
칼자루를 거꾸로 잡은 채로 온몸에 상처입은, 머리까지 피로 물든 괴상한 몰골이었다. 어떻게 봐도 인간인 듯싶지만, 그 쏟아내는 말투와 거꾸로 잡은 칼자루가 피워내는 불길하고 음울한 마력은 인간의 몰골을 했어도 그를 괴물처럼 느끼게 했다.
그렇게 저주를 토하던 자는 이윽고 쓰러졌고 거대한 발에 짓밟혀 으스러졌다.
새하얗고 투명한 채로 거대한 발은 자신이 뭘 밟았나 잠깐 눈가로 가져다 대는데…… 무지갯빛 눈동자가 꽂혀 있는 칼을 발견하고 킁 하는 가벼운 콧방귀가 터져 나왔다. 칼은 순식간에 풍화(風化)되어 사라져 버렸고, 시커멓고 음울한 저주는 곧바로 거대한 수룡의 비늘 한 점에 들러붙었다.
너무나도 작고 작은 저주인 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저주의 원인이 된 자의 죽음이 오히려 저주의 힘을 북돋운 것처럼.
그래서 검게 물든 비늘 하나, 수룡은 이를 가벼운 숨결로 감싸 다른 비늘 사이에 겹쳐 눌러 넣었다.
그리고 잊었다.
지금 이 순간, 투란이 그 잊은 기억의 잔재를 만나고 나서야 문장 깊은 곳에서 수룡 크리스털 가드는 알아차린 듯한데.
‘망할, 기분 나쁘잖아!’
이런 투란의 으르렁거림에 푸웃 하는 가벼운 콧방귀만 흘린 채로 잠수할 뿐이다!
푸시싯, 날름!
팔뚝에서 흘러나온 혀는 투란이 느끼는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능에 따라 저주를 포식해서 지울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투란이 손에 꼭 쥔 것은 새하얗게, 영롱하게 빛나는 수룡의 비늘…… 거대한 힘이 꽉꽉 눌러 뭉쳐진 듯한 기묘한 수룡의 파편이었다.
“앗, 차가워.”
새삼스럽게 차가운 감촉에 투란이 툴툴거렸다.
―그 칼, 설마…….
드라고니아가 투란이 겪은 기억의 잔재를 뒤늦게 훑어보는 듯, 그리고 놀란 듯이 중얼거리려는 찰나였다.
투두둑, 푸억.
투란이 밟고 있는 땅이 요란하게 뒤집어졌다.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투란을 뒤덮었다.
피잉, 패팽.
기괴할 정도로 날카로운 음향을 흘려낸 촉수 몇 가닥이 여기저기로 뻗쳐나갔다.
투란이 밟고 있던 땅에서 흘러나온 촉수였다.
촉수는 땅을 뒤집고 난리를 떠는 것과 다르게 투란을 건드리거나 그 주변을 헤집지는 않았다. 마치 투란 쪽은 위험하니 피한다는 듯했고, 곧바로 투란과 거리를 둔 자리를 두들기고 파헤쳤다. 그사이에 촉수의 근본이 되는 뭔가가 그 파헤치는 자리로 옮겨가듯이 땅이 불끈불끈 튕겨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퍼억.
“저건 또 뭐야!”
땅거죽을 으깨면서 치솟은 이형(異形)의 몬스터를 보고 투란이 으르렁거렸다.
―호오! 오징어를 닮았는데 땅 밑을 파헤치고 다닌다고?
드라고니아는 한가롭게 추억을 더듬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투란은 바로 비늘을 쥔 손을 당기면서 반대편 손을 내밀고 외쳤다.
“홀시딘! 이상한 것이 새로 나왔어요!”
급한 말투 속에 울린 소리는 곧바로 내민 손에 얽힌 로열클래스의 징표를 통해 하늘 높이 전해진 듯했다. 한데 돌아오는 답변은 투란의 외침보다 더 세고 바쁜 외침이었으니.
“땅징어다! 놓치지 마! 잡아! 의태하는 변태라 지금 놓치면 호숫가 어디 튀어나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투란, 놓치면 안 돼!”
―그래, 땅징어. 바다에 살아야 할 오징어가 변이된 경우처럼 보이지만 한 번도 바다에 간 적이 없는 의태형 괴물, 하지만 괴수와 괴물의 틈새를 오가는 묘한 상태 탓에 어떤 놈은 몬스터 로드에게 삼켜지고 어떤 놈은 삼켜지질 않지. 저놈은 몬스터일까, 아닐까! 응, 투란 어느 쪽으로 느껴지냐!
홀시딘과 다르게 드라고니아는 여유롭게 속삭이고 있기도 했다.
물론 투란으로서는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으니.
“대체 이게 왜 여기서 나오는데!”
수룡의 숨결, 그 비늘 한 조각이 남겨진 자리.
잊혀진 기억의 잔재, 저주가 버젓이 휘날리던 곳.
그런 곳의 땅 아래에서 저 괴물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왜 지금 이 순간, 투란이 막 수룡의 잔재까지 완벽하게 처리했다 싶은 순간에 저렇게 땅을 뒤집고 튀어나오는가!
“따지지 말고 일단 잡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라고! 놓치지 말란 말이야! 얼른 쫓아가!”
홀시딘은 투란의 의문을 그대로 파묻겠다는 듯이 더욱 거칠게 외쳐주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저게 뭔……!”
쫓을 자세를 갖추면서도 투란은 불만을 토하려 했다.
땅징어인가 뭔가 하는 괴물, 괴수가 느닷없이 몇 미터짜리 고양이 형태의 맹수로 변모하지만 않았다면 끝맺을 수 있을 불만이었다.
“변신 괴수!”
맹하면서도 짙은 호기심이 맺힌 말이 불만 대신에 투란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