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70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61)
Chapter 213. 귀인(貴人)의 의무
라카샤는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나서 바로 라카샤가 깨달은 일은 자신이 누워 있는 채란 것…… 오래된 나뭇결로 채워진 천장이 보였고, 자신의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 맺힌 수건이 얹혀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침상 곁으로 작은 의자에 앉아 물수건을 갈아 주는 이가 한 박자 늦게 라카샤에게 보였다. 갸름한 체구에 팔꿈치까지 닿는 토시를 두 손목에 모두 끼고 길고 검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촛불 빛에 일렁이는 모습, 짙은 갈색의 웃옷이 붉은 광택을 흘려 내며 단단해 보이는 가죽 바지가 번들거리는 광경이 묘하게 잘 어울리며 매혹적인 마력을 흘려 내는 듯한 분위기까지 흐르는…….
“키유나?”
라카샤가 그 이름을 되뇌었다.
희미한 그 목소리에 키유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빙긋 웃었다.
“깨어났어요?”
“내가 왜……?”
잠시 혼란스러움에 라카샤가 중얼거렸다.
몸을 휘감았던 저주를 떨쳐 냈지만 아직 가슴 깊이 새겨진 공포 때문에 방 안에 꼭 숨어 있었던 일을 라카샤는 기억해 냈다. 그 저주를 떨쳐 내 버린 투란이 잠시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말에 겁을 먹고서 그랬다.
“투란.”
문득 라카샤는 투란이 돌아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투란은 라카샤에게 몇 가지를 설명했는데, 그 설명을 라카샤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 의미가 몸으로 구현되었을 때.
“아, 아앗!”
라카샤가 놀란 소리와 함께 두 손을 눈가로 끌어 올렸다.
환한 촛불 아래 라카샤의 두 손은 그냥 부드럽고 멀쩡해 보였다.
키유나가 조금 더 짙은 웃음 사이로 미묘한 한숨을 섞어 말한다.
“많이 놀랐지요? 나도 듣고 꽤 놀랐는데…….”
흠칫해서 라카샤가 키유나를 바라봤다.
키유나가 보지 않고 들었던 일, 그 자리에 키유나가 없는 채로 벌어졌던 일이 뒤늦게 라카샤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스며들었다. 그리고 라카샤의 표정이 창백해진 채로 급한 말이 입술을 넘었다.
“투, 투란은…… 투란, 화났어요?”
“음? 투란이 왜 화를 내요?”
진심으로 어리둥절해하는 키유나의 말, 그 표정과 갸웃거림이 라카샤를 반쯤 안도하게 했지만 반쯤 다급하게 했다.
“몬스터 로드라는 것, 알고 있었는데도 내가 보고 놀라서…… 놀라서 정신이 나갔잖아요. 어, 그러니까 그게…….”
말을 하다 보니 정리가 되지 않고 정돈이 되지 않는 급한 기분만 또렷해지는 라카사였다. 이를 보며 키유나가 잠깐 갸웃하다가 문득 무슨 뜻인가 알아차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냥하게 묻는다.
“라카샤, 혹시 몬스터 로드에게 도움을 받아 놓고 너도 괴물이니까 꺼지라고 외치는 사람처럼 돼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돼 버렸잖아요.”
눈가를 실룩이며 자신을 탓하는 채로 라카샤가 대답했다.
어느새 두 손을 눈가에 대고 얼굴을 덮은 채로 라카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가를 되새기며 한층 더 깊이 후회하는 듯한데, 키유나가 흐음 하고 잠시 갸웃하며 생각하다가 그 이마 위에서 손길에 밀려 떨어지려는 수건을 아예 걷어 내며 말한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투란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라카샤. 투란은 화내지도 않았어요. 아, 굳이 따지자면 무슨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고 해야 하나? 마스터 홀시딘이랑 시알라한테 엄청나게 야단맞고 넋 나간 꼴이 돼 버렸으니까 말이에요. 푸후훗.”
“예?”
새로운 물수건이 이마에 얹히는 것을 느끼며 두 손으로 무심결에 그 수건을 쥐고 받는 채로 라카샤가 키유나를 보며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박였다.
키유나가 짐짓 목청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흠, 흐음! 그러니까 마스터 홀시딘은…… 이 정신 나간 놈아, 몬스터 로드가 된 사람도 처음 자기 몸이 변하는 광경을 보면 반쯤 죽는시늉을 하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몬스터 로드가 될 리가 없는 사람의 손을 그리 바꿔 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마스터 홀시딘은 이렇게 몇 번을 얼러 댔지요. 아주 짜증이 났나 봐요. 아, 그리고 시알라는…… 곱디고운 아가씨 손을 꼭 그렇게 우락부락한 몰골로 바꿨어야 했냐고, 곱고 강력한 손이 없는 것도 아닌 게 왜 그랬냐고 몇 번을 다그쳤어요. 푸후훗, 투란은 변명도 제대로 못 했지요. 투란도 라카샤가 그냥 쓰러질 줄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에요.”
“몇 가지 얘기해 줬는데요, 투란은.”
숨죽이는 듯한 목소리로 라카샤가 웅얼거렸다.
미안함, 안타까움과 함께 여전히 당혹스러워하는 라카샤의 표정을 읽으며 키유나가 조금 더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한다.
“충분히 알려 준 이야기는 아니었잖아요? 투란, 항상 말이 서툴러서 뒤죽박죽인 데다가 한마디 하면 남들이 어련히 열마디 알겠거니 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라카샤가 정신 잃고 쓰러진 부분은 순전히 투란의 실수인 셈이에요. 라카샤가 잘못한 것은 없어요.”
“그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로 투란을 탓할 수는 없잖아요? 투란은…… 나를 구해 줬는데…… 나는…….”
조금씩 잦아드는 목소리로 라카샤는 어떻게든 뭔가 말하려 했지만 키유나만큼 투란을 모르기에, 이 낯선 곳의 일을 잘 모르기에 말을 더듬으며 눈만 깜박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키유나가 가만히 손을 뻗어 라카샤가 어느새 두 손으로 꼭 쥐고 입가에 내려대고 있는 물수건을 잡아 그 이마 위에 올려 주며 말한다.
“라카샤, 투란은 아무 생각 없이 남을 도와요.”
“예?”
“보답이나 보상은 헌터 길드의 의뢰를 다룰 때만 생각해요. 투란이 누군가를 도울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아무 생각이 없는 탓에 뒷일도 전혀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일단 돕고 나서 멀뚱거리죠. 그러니까 라카샤, 마음 단단히 하고 우선 몸부터 건강하게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요. 무섭고 놀란 것을 보더라도 바로 쓰러지지 않는 몸과 마음, 지금 라카샤에게 필요한 모습이에요. 다른 일은 나중에…… 정말 뭔가 보답하고 싶더라도 나중에 생각해요. 라카샤가 저주를 완전히 끝장낸 다음에 생각해요. 그게 지금 라카샤가 해야 할 일의 순서예요. 자, 그러니까 우선…… 이것부터 천천히 먹어 봐요.”
토닥토닥, 물수건을 손끝으로 두드리면서 차분히 이야기한 다음 키유나는 조그마한 잔을 옆에서 집어 라카샤에게 내밀고 있었다. 잔에서 나는 진한 수프의 냄새가 라카샤의 빈속을 자극하며 꼬륵거리게 했다.
키유나는 빙긋 웃었고, 라카샤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 * *
“여어, 시알라! 웬일이야, 고양이를 키우려고?”
문턱을 넘어선 손님은 바위에 올려진 고양이, 고양이가 담긴 양젖의 접시를 보자마자 어이없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아니, 이게 새로운 요리인가!’라는 말을 덧붙이는 채로 묻고 있었다.
“파헬, 오랜만이네? 왜 내가 고양이 좀 키우면 안 되나? 파헬이 파티 외상값을 싹 갚아 준다면 사냥개 듬직한 것도 몇 마리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알라는 살짝 가시 돋친 말투로 문턱을 지나는 몇몇을 노려보면서 대꾸했다.
그 눈길에 몇몇이 바로 흠칫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에이, 사냥개 따위는 필요 없지! 사냥감이 생기면 이 파헬 팀을 부르면 된다니까! 외상값 대신에 몸으로 때워 준다니까! 물론 착실히 벌어서 외상값을 갚을 노력도 하고 있으니까 떼먹힌다는 생각은 안 해도 돼. 그런데…… 진짜 뭔 고양이야? 이렇게 작은 품종은 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슬슬 빨라진 잰걸음으로 자신의 팀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 저편 구석진 탁자에 모여 앉는 사이에 시알라의 시야를 가로막듯이 선 채로 파헬이 한층 더 넉살 좋게 떠들고 있었다.
무장은 치웠지만 어쨌든 몬스터 헌터의 능숙함과 노련함이 살살 배어 나오는 그 몸짓에 시알라가 혀를 차기는 했지만, 어쨌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한다는 듯이 대꾸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녀석이 준 선물…… 가끔 이야기했잖아, 투란이라고 잠시 일이 있어서 멀리 여행 간 가족이 있다고 말이야.”
“오? 제법 한다는 몬스터 헌터였는데 갑자기 일이 꼬여서 몬스터 로드가 되었다는 그 친구? 언제 돌아올지 애매하다더니, 결국 돌아왔어? 호오, 그것 참 좋은 이야기로군. 아, 시알라 우리는 늘 먹던 것으로…… 멤버 숫자에 맞춰서 줘. 다들 배가 고프니까. 아, 걱정하지 마. 금방 갚는다니까. 요즘 길드의 의뢰가 착실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 알잖아? 그럼, 난 멤버들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하니까.”
파헬이 슬쩍 바에서 몸을 떼며 웃는 얼굴로 돌아서며 잰걸음으로 팀이 앉은 탁자를 향해 멀어져 갔다.
시알라는 혀를 몇 번 찬 다음에 접시 위에서 뒹굴며 앞발 뒷발을 적신 양젖을 핥는 새끼 고양이를 손끝으로 꾹 누르면서 입술을 넘지 않는 소리로 속삭인다.
“너, 정말 샤벨투스 맞냐? 이빨 발톱 새로 자라는 거 맞아? 그래도 얌전히 있어, 얌전히 있지 않고 수상한 짓 하면…… 투란이 뭐라 하든 말든 토막 내 버릴 거야. 알았지? 똑똑하다 했으니까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는다. 사이좋게 지내자고, 사이좋게.”
새끼 고양이는 딱 그 체격에 어울리는 작은 울음으로 답하고 있었다.
야옹, 야아앙.
* * *
―시알라에게 사실을 말하고 왜 홀시딘에게는 숨긴 거냐?
드라고니아가 불쑥 묻는 말은 투란을 코웃음 치게 했다.
‘설마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홀시딘이 알면, 그 쪼그맣게 변한 샤벨투스를 납치라도 해 갈 것 같아서?
‘뭐?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가져간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던 거냐!
‘아니, 이빨 발톱 다시 돋는 것 알면 때마다 찾아와서 한몫 챙길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음, 통째로 집어 가는 경우는 생각 안 했지. 상아탑의 마법사를 너무 믿는 셈인가.’
키득거리는 채로 투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뚜둑, 어깨뼈가 순식간에 탈구(脫臼) 증상을 보였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쪼그리고 앉은 투란의 허리와 다리에서 동시에 뚜득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뼈와 뼈마디가 분리되었다가 결합되는 증상이 투란의 온몸에서 차분히 나타나는 셈이었다.
―야, 이딴 짓을 꼭 이렇게 성벽 위 첨탑 꼭대기에 앉아서 해야 하냐?
조금 질렸다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투란은 금빛매의 쉼터, 그루터기를 바탕으로 꾸며진 보금자리를 내려다보는 남쪽 성벽 위에 앉은 채였다. 이전에 없던 첨탑은 이전보다 높아진 성벽 곳곳에 불쑥불쑥 솟아난 채였고 알드바인은 더욱 견고하고 높은 자리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는 듯한 자태를 자랑하는 듯했다.
‘여기가 악마 동굴부터 시작해서 북쪽 성벽까지 한꺼번에 시야에 담기 좋은 곳이라고 너도 찬성했잖아?’
―굳이 이렇게 올라앉을 필요가 없다는 말도 했다만?
‘음, 그야…… 그래도 이렇게 높이 앉아 보는 편이 좋잖아?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기분도 나고…….’
우두둑.
투란은 여전히 몸의 뼈마디 곳곳에서 기묘한 소리를 내는 채로 성벽 밖의 풍경과 성벽 안의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옮겨갈 마음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드라고니아는 이 또한 언짢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왜 샤벨투스의 몸뚱이를 이렇게 앉아서, 사방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서 시험하고 있냐고! 몬스터 로드라고 미리 소문 깔아 뒀다고 해도 이렇게 드러나는 짓을 하라는 말은 아니었을 텐데?
‘아니, 보인다고 해도……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겉으로 보일 리가 없잖아! 지금도 소리를 안 내려면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가를 시험하는 중이라고 했잖아. 샤벨투스의 몸뚱이가 이렇게 묘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유연함과 골격 구성의 기묘함에 대해서는 어느 쪽 도감에도 참 잘 나와 있었잖아. 굳이 이렇게 몸으로 직접 실험해 볼 필요가 있냐?
‘있지, 당연히! 갑자기 뭔 이상한 소리야? 내가 그런 설명보고 바로 몸 상태를 예상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냐?’
―못 하겠냐?
잠깐 멈칫하다가 나온 드라고니아의 되물음은 조금 묘한 낌새가 어려 있었다.
그 낌새는 투란을 흠칫하게 했다.
단순히 설명을 보고 단번에 그 내막을 파악할 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드라고니아는 마치 몬스터의 정수를 삼킨 순간부터 투란이 그 힘을, 능력을 곧바로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처럼 여기는 듯하잖나.
‘야, 왜 그런…….’
어이없어 따지려다가 투란은 멈췄다.
어렴풋이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기묘한 느낌이 투란에게 말하고 있었다.
―왜 안 돼?
마치 당연히 되는 일을 스스로 외면하는 까닭을 묻는 듯했다.
왜 그런가를 투란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사라진 기억, 그 안에 뭔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왜 그 기억을 덮고 지웠는가, 진지하게 물을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