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7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65)
“키유나, 이것 좀 기억해 줘.”
투란이 간단히 말하면서 라카샤의 앞에 섰다.
곁에 있던 키유나가 갸웃하는 사이, 투란의 손이 가볍게 라캬사의 이마를 두드리는 듯했다. 손등 쪽으로 방문을 두드리는 듯한 가벼운 동작.
그 순간 키유나는 무엇을 지켜보라고 했는가 바로 알 수 있었다.
손짓 사이에 미묘하게 퍼지는 마력의 파문, 그 파동의 흐름이 키유나에게 직접 닿았고 어떻게 라카샤의 몸을 울리는가를 또렷하게 느낄 수가 있었으니까. 그 원인은 투란이 라카샤의 몸에 고유 마력을 전하면서 동시에 이를 키유나의 마력에 간섭하도록 한 탓…….
정교할 뿐 아니라 대담한 마력의 운용이었고 마녀로서 키유나가 지닌 마력 감지의 특성, 몬스터 로드인 투란 자신의 기량까지 완벽하게 파악한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대단해졌네.”
살며시 감탄하는 소리가 키유나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라캬사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뜬 표정으로 투란을 바라봤다.
마녀가 감탄하는 사이, 드라고니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야, 뭔 짓이야! 미리 말을 하고 해야 놀라질 않지! 놀라서 반발했으면 어쩌려고! 이것 봐! 이 아가씨는 놀라서 창백해졌구먼!
라카샤의 낯빛은 드라고니아가 짚은 것처럼 파리해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살짝 입술을 꽉 깨무는 라카샤의 모습에서는 또다시 자신의 몸이 변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러나 그것이 저주가 아닌 투란이 하는 짓이기에 억눌러 참는 낌새가 확연히 엿보이기도 했다.
투란이 방긋 웃음 지으면서…… 옆에서 보기에 놀란 아이를 억지로 달래 보려는 수작이라고 또렷하게 느껴지는 망측한 웃음을 띤 채로 말한다.
“라카샤, 느낌에 집중해요. 느껴 보는 거예요. 어깨에서 팔로, 손목으로…… 크고 두꺼운 가죽 건틀릿, 바위처럼 튼튼한 건틀릿을 끼워 본다고 생각해 봐요. 그 건틀릿의 손가락에 닿는 것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언제라도 벗을 수 있는 건틀릿인데, 지금은 끼워 넣는 중이라고…… 상상을 해 봐요. 지금 어깨부터 느껴지죠? 그 느낌이 바로 끼우는 느낌, 그렇게 기억을 하고…… 자, 어서 끼워 본다고 강하게 생각해요.”
라카샤는 이 말을 굳은 의지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라카샤의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듯, 라카샤의 두 손은 잿빛 바위 그랑츄의 형상을 덮어쓰고 있었다. 손등과 손목, 그 살갗부터 거미줄처럼 그어지고 퍼져 나가는 가는 넝쿨 줄기가 엮이면서 새로운 손의 형상을 꾸며 내는 광경이었다.
투란이 가만히 그 두 손을, 커다래진 라카샤의 두 손을 잡아 주며 다시 말한다.
“이제 이 느낌을 기억해요. 그 느낌에 따라 생각을 집중해 봐요, 서두를 것 없이 차분하게…….”
이번에는 곁다리로 붙는 말이 없었지만 라카샤는 또렷하게 손등에서 손바닥으로, 손목을 타고 팔뚝으로 퍼져 오는 느낌에 집중했다.
그랑츄의 손은 곧바로 라카샤의 의지에 반응하며 오그라들고 사라졌다. 넝쿨 줄기가 풀려나가며 살갗 안으로 가라앉는 광경은 마치 이슬 방울이 모양을 잃고 지워지는 듯했다.
그다음으로 투란은 몇 가지를 더 말해 줬다.
그때마다 라카샤는 자신의 몸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느낌을 기억했고, 그 느낌에 따라 몸 곳곳에서…… 뼈와 살 안쪽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 이 낯선 경험에 경악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라카샤는 끝까지 버티면서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라카샤에게 그렇게 경험시킨 다음, 투란은 키유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도와줄 수 있지?”
키유나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되묻는다.
“한 가지, 라카샤 목 뒤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그건 형상을 해체하지 않는 거야? 계속 유지해야 하는 거야?”
“응? 아, 그건 저주를 삼키는 녀석이거든. 라카샤의 심장처럼 자연스럽게, 그게 저주를 삼키는 동안에는 라카샤는 내가 심어 둔 몬스터의 파편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 애초에 그 저주를 삼키고 생성된 마력으로 유지하는 파편이니까.”
“그래…… 그런데 꼭 형태를 노출하고 혀를 날름거리는 꼴을 보여야 해?”
“응? 아니, 꼭 저렇게 노출하지는 않아도 되는데…… 왜?”
투란이 갸웃하면서 키유나의 물음이 무슨 의미인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목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진 채로 갓난아이 입보다도 조그맣게 열고 그보다 훨씬 작은 혀를 날름거리도록 해 뒀으니 눈에 잘 띄는 것도 아니니까.
곧바로 키유나의 입술이 실룩였고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키유나의 손등이 투란의 이마를 툭툭 두드리며 말이 나온다.
“몬스터 로드도 아닌데 몬스터 로드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 꼴이잖아! 손에 덮어쓰는 몰골은 마법이라고 우길 수 있지만, 작아도 저렇게 속살을 드러내는 꼴이면 오해라고도 못하지! 그냥 문신이나 점, 얼룩처럼 보이면서 저주를 삼키도록 하는 편이 훨씬 낫단 말이야!”
“알았어, 그럼 조그만 문신으로 하지. 아, 라카샤 어떤 모양이 좋아요?”
눈알을 굴리면서 키유나의 말을 되새기고 알아차리는 척 하다가 투란이 다시 라카샤를 보며 물었다.
조금 갑작스러운 듯, 라카샤는 놀란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단지 엉겁결에 손이 올라가서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듯이 더듬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키유나가 혀를 차는 듯하다가 시알라를 향해 묻는다.
“시알라, 귀엽고 예쁜 아가씨 목에 어울리는 문신이 뭐가 있었어? 고양이? 새?”
투란이 눈알을 굴리면서 갸웃하는 눈짓과 고갯짓을 하며 시알라를 바라봤다. 어떻게 봐도 ‘그런 걸 왜 시알라에게 묻지?’라는 의미가 풀풀 휘날리는 꼴이었다.
그런 투란을 향해 눈꼬리를 치켜올리면서 시알라가 도도하게 말한다.
“요즘 알드바인의 순진한 처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문신이라면, 날개 달린 고리. 알드바인의 마도(魔道)가 낳은 오러 마크의 무늬랑 닮았다고 유행이지. 그 문신이 드러나면 지나가던 얼간이들이 오러 마크로 착각하고 함부로 들이대지 않는다고 말이야. 동그랗게 찍힌 원에 날개가 붙고 그 중심으로 살짝 화살이 관통해서 내려가는 모양이 꽤나 앙증맞다고 하더라고.”
“……라잖아, 투란.”
키유나가 맹한 눈을 깜박이며 시알라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투란에게 보채듯 말했다. 그러면서 슬쩍 발끝으로 투란의 발등을 찍고 정강이도 조금 세게 걷어차 주기도 했다. 그만 멍청한 꼴을 관두라는 자극이었고, 투란은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하, 핫.’이라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는 시늉을 하면서 라카샤를 향해 눈길을 돌리며 말한다.
“됐어, 이제 몬스터 로드로 오해받는 형태는 드러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분명히 라카샤의 살갗 속에서, 필요해진 부분에서 바로 자리 잡고 숨을 쉬듯이 저주를 삼키고 지워 버릴 거야. 그 녀석은 라카샤가 다루지 않아도 돼. 그게 편리할 거야. 음, 그리고 나는…….”
투란의 눈길이 케이라를 향해 흘깃 움직였다.
그 눈길, 그 흐려진 그 말꼬리를 받듯이 바로 케이라가 말문을 연다.
“투란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조금 멀리 가야 하는 일이지요. 네, 칠왕국…… 여기 브로큰 킹덤과 아예 먼 곳입니다. 바로크 왕국 근처니까요. 그리고 그쪽 상황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데, 어쩌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지요.”
“헉! 몇 달!”
놀란 소리는 투란이 냈다.
어이없어하는 시알라, 키유나…… 그리고 멀리 가서 몇 달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에 바로 불안한 표정을 띠면서도 참는 듯한 라카샤가 투란을 쳐다봤다.
움찔하다가 민망해서 투란이 케이라에게 자그맣게 속삭인다.
“그렇게 오래 걸린다는 말은…….”
“상황에 따라 며칠 뒤에 바로 돌아올 수도 있어요. 자세한 상황은 거기 도착해서 따로 들을 거라니까 이쪽에서 가늠하고 예상할 수는 없어요.”
“어, 그러면 뭐…….”
침착한 케이라의 말에 투란은 멋쩍고 민망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시알라나 키유나는 투란을 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는 모습으로 한숨을 쉬었고, 라카샤는 눈만 깜박이며 투란을 바라봤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투란이 과연 잘 다녀올 것인가를 살짝 의아해하는 모습들…….
전혀 의문 품을 일이 없다는 듯 케이라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잇는다.
“상아탑에서는 투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투란이 그곳에 도착한 다음에도 알드바인에서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할 예정이에요. 만약 이쪽에서 저편의 상황을 새롭게 예측할 경우에는 바로 그 정보를 바탕으로 지원할 계획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일은 춤추는 산맥의 여러 왕국이 직접 개입되었으니까요.”
여기까지 말이 나왔을 때 시알라가 흠칫하고 놀라 묻는다.
“여러 왕국이라면…… 이쪽의 칠왕국이 아니라 고대왕국 쪽?”
케이라는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투란을 향해 묻는다.
“투란, 정리할 일이 더 있나요?”
“음? 라카샤에게 알려 주는 것 말고는…… 아, 시알라! 이빨이랑 발톱, 잘 나눠 가져야 해! 혼자 다 갖으면…….”
투란이 갸웃갸웃하면서 생각하다가 냉큼 말하니, 곧바로 시알라가 발끈해서 말을 자르면 으르렁거린다.
“뭘 혼자 다 가져! 알아서 잘 나눠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그딴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그보다는…… 케이라, 멜란드나 제란드를 불러서 함께 보내는 것은 어때요? 페란드도 어쩌면…….”
“안 됩니다, 시알라. 투란과 함께 움직일 팀은 저쪽에서 이미 준비해 놓겠다 했어요. 엘더 헌터를 중심으로 한 팀이라 예정 외의 인원을 추가 못 한다고 하더군요. 스승님조차 함께할 수 없다 했으니, 어쩔 수 없어요.”
케이라가 미묘하게 눈가를 꿈틀거리며 하는 대답이었다.
그 미묘한 변화에 시알라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늘 평온하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듯한 케이라였다.
그나마 눈에 띄는 표정의 변화라면, 스승인 홀시딘의 말썽꾸러기 같은 짓이 터져 나올 때……. 한데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케이라 역시 저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는 뜻이란 것. 그럼에도 따질 부분 또한 딱히 보이지 않아서 은근히 짜증 나는 중이란 표현…….
한숨과 함께 시알라가 키유나를 흘깃하면서 말한다.
“뭐, 마스터 케이라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 투란, 말썽 피우지 말고 잘 다녀오란 말밖에 못 할 것 같은데? 괜찮은 거지?”
“어.”
투란은 ‘내가 뭔 말썽!’이라고 따지려다가 살짝 가늘어지는 시알라와 키유나의 눈길에 움찔하며 얌전히 대답했다. 이 묘한 태도에 라카샤가 갸웃하는데 시알라는 바로 한쪽 눈꼬리를 치켜올리면서 으르렁거림을 보태고 말았다.
“일 끝났다고 옆으로 새서 싸돌아다니지 말고! 한번 가면 몇 년 소식도 안 보내는 짓도 하지 말고!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대체!”
조금 격한 말투였지만 키유나는 고개를 살그머니 끄덕이다가 작게 덧붙인다.
“주점에서 술 취한 사람 말만 듣고 이상한 짓도 하지 말고…….”
“아니, 그건……!”
투란이 뭐라 반발하려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술 취한 아저씨가 아니라 듬직한 누나였다고 변명하려다 보니, 그 누나는 아저씨보다 더 아저씨 같다는 소리를 좀 듣지 않았던가? 목욕하던 용병 아가씨를 어린 투란이 봤다는 말에 ‘안겨 봤냐?’란 소리부터 들이대던…….
“그럼, 가죠.”
뭔가 잔소리가 길어지고 잔망스러워지는 분위기가 피어나는 듯한 상황을 케이라가 차분하고 냉정하게,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었다.
“어? 아, 가야죠.”
투란이 입술을 삐죽이려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한데 갑작스럽게 라카샤가 작은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꼭…… 가야 하는 거겠죠?”
어지간하면 가지 말라는 의미가 담뿍 담긴 채였다.
시알라와 키유나는 입술만 달싹여 ‘그렇겠지?’라며 은근히 라카샤의 말에 대답하란 듯이 투란과 케이라를 둘러봤다. 실로 마지막 순간까지 빠질 방법이 있나 찾아보라고 보채는 듯한 눈빛이 번뜩이는 표정이었다.
케이라는 그 소리 없는 물음에 살짝 망설이며 입을 다문 채로 투란을 바라봤다. 거부하고 거절할 권한은 분명히 투란에게 있다는 듯.
투란은 쓴웃음과 함께 라카샤를 바라보며, 하지만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리도록 또박또박 말한다.
“의뢰를 받았으니까. 상아탑의 의뢰는 어지간하면 받는 편이 좋아요, 라카샤. 보상이 꽤 두둑하거든. 그리고…… 이래저래 앞으로 상아탑에 부탁할 일도 많아서 이럴 때 미리미리 빚을 지워 두는 것이 좋아요. 마스터 케이라, 이제 가지요.”
케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투란은 자신과 케이라를 휘감는 마력을 느꼈고 나무의 형체가 그 마력에 따라 뒤틀리며 감싸 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무는 장막처럼 주변을 가리는가 싶은 순간에 티끌처럼 흐트러져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까지 시알라, 키유나와 함께 라카샤를 다독이며 서 있던 금빛매의 쉼터와 전혀 다른 곳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홀시딘보다 섬세하군. 이동 경로가 정교하기도 하고…….
깔끔하고 빠른 마법의 전개에 드라고니아가 감탄했다.
투란도 그 감탄에 동조하기는 했다.
‘마력이 좀 약하지 않았나?’
홀시딘의 마력이 강대한 흐름과 비교하면 케이라는 어쩐지 조금 여리고 힘이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야, 관짝이다.
드라고니아는 변해 버린 풍경의 중심부터 짚어 투란의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 의도대로 투란은 갑자기 변한 풍경, 으쓱한 밀실 한복판에 떡하니 놓인 석관(石棺)을 볼 수밖에 없었다. 활짝 열린 채로 누군가 담을 준비가 끝난…….
“뭐 해, 들어가!”
홀시딘이 곁에서 불쑥 튀어나와 석관에 담길 시체는 바로 투란이라 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