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8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73)
“오랜 벗 칼로드와의 약속에 따라 드라코눔의 탈키오가 묻는다, 그대 시련을 받아들이겠는가?”
빛의 띠를 굵고 큰 드라고와 꼭 닮은 회색빛 손아귀에 띄운 채로 묻는 말이었다.
투란은 그 빛이 윌 라이트의 마력으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었고, 탈키오의 비늘 빛이 회색인 까닭은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바랜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은 드라고니아…… 자신이 품은 녀석의 감회(感懷)가 스며든 탓인가, 세월에 한참 시달린 노년의 드라고니아에 대해 이질적이지만 낯익은 안타까움이 배어드는 듯했다.
“네, 시련 받을게요.”
잠깐 멋대로 파고드는 오래된 감정을 추스르다가 투란은 대답했다.
빛의 띠가 곧바로 투란의 왼팔을 손목부터 휘감았다.
엉겁결에 손을 들어 보던 투란은 띠를 통해 마법 배낭 블랙레온은 물론이고 로열클래스의 징표 역시 얌전히 ‘묶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자리를 빛의 띠가 대신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투란 자신의 마력, 비전을 통해 형성해 몬스터 로드의 고유 마력과 다른 흐름을 형성하고 독립되어 있는 윌 라이트의 마력 또한 띠를 향해 모이며 응축되고 잠겨 든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거……?”
투란이 탈키오를 보고 살짝 놀란 눈길을 보냈다.
“녀석은 내가 맡아 두기로 하지. 잠시 나와 이야기라도 하자꾸나, 앙헬…….”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내가 애로 보이나! 이 망할 할배가!”
투란의 드라고니아가 탈키오에게 버럭 소리치고 있었다.
탈키오의 손에 새로 맺힌 빛의 구슬이 붕붕 울리면서 나는 소리였다.
“아…….”
어이없어하다가 투란은 바로 납득했다.
윌 라이트, 의지의 마력은 드라코눔 마법의 기본……이자, 궁극이라 하지 않았던가. 몬스터 로드의 역량과 무관하게, 심지어 문장이 봉인되어도 그 위용을 드러내는 마법이니 시련을 통해 기량을 알아내는 것에 진정한 훼방꾼이 맞다.
그런데 탈키오는 이 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아, 귀염둥이들 이리 오렴. 큐라드, 반가운 친구들이 왔잖니 어서 맞이해 주렴.”
살짝 굵직하고 무뎌 보이지만 위험한 손톱을 흔들거리며 하는 말인데, 그 끝에 알록달록한 색채를 머금은 빛 구슬이 서넛 새로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뭐냐고 투란이 물을 겨를도 없이 정령수가, 다름 아닌 투란이 단련해 온 사대 속성의 스피릿 아티팩트가 그 빛 구슬에 연이어 들러붙고 있잖은가!
“엥? 그건 또 뭔데 주렁주렁 몸에 숨기고 있었냐?”
놀란 소리는 쥴이 내고 있었다.
투란은 입만 벙긋거리며 탈키오가 진짜 드라코눔의 대원로, 관록 있는 마법사란 사실을 깨달으며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스피릿 아티팩트로 가공되고 단련되어서 정령수로 태어났기에 오롯하니 투란 자신에게만 귀속된 존재라 하는 녀석들을 저렇게 꼬드길 수 있다니!
두터운 바람결 속에 네 개의 구슬이 휘감기며 탈키오의 어깨 언저리에 둥지라도 틀듯이 모여 맴돌았다. 그 광경을 보다가 투란은 문득 미묘한 어긋남을 느꼈다. 정령수는 거둬갔지만 투란에게는 아직 남은 녀석이 있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
한데 탈키오의 굵고 무거운 목소리가 투란의 눈가에 살짝 깃든 그 의아함을 풀어 주는 이야기를 바로 흘려 준다.
“키린도 마찬가지였지, 몬스터 로드가 여러 경험을 통해 얻은 정령이라면 몬스터 로드 자신의 힘이라고 해야잖는가? 쥴, 그렇지 않나?”
“어? 아, 그야 당연하지만…… 영감, 조금 전에 빼내 간 것은 드라코눔의 정령술로 만들어진 정령기(精靈機)였어? 헤에…… 진짜 드라고니아가 본래 지성을 되찾은 채로 네 안에 머물고 있는 거구나. 용케 미치지 않았네?”
쥴은 살짝 낯선 말을 섞어 감탄하는 듯한데 마지막에 붙은 몇 마디가 왠지 ‘미쳤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는 듯하다!
“그럼, 이제 된 건가요?”
쥴을 외면하는 눈길로 슬슬 어깨를 돌리며 또 다른 장비 따위는 전혀 갖추지 않았다고 과시하는 몸짓으로 투란이 물었다. 전송관에 실려 날리고 곧바로 툴로쉬가 마련한 마수에 엮인 다음에 드레이번 칼릭을 타고 날아왔다, 떠날 때 마법 배낭 안에 잔뜩 담아 온 도구, 장비를 갖출 시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평소 준비된 마법은, 드라코눔의 비전을 바탕으로 한 마법은 그걸 맡아 주고 있는 드라고니아랑 함께 빛 구슬 안으로 묶여 버린 듯하니, 실로 입고 있는 옷의 튼튼함 말고는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 이 정도면 시련에 도전해도 되는가? 아니면 옷도 더 얇고 무력한 것이어야 하는가?
탈키오가 옆으로 날개를 단단히 오므린 자세로 물러서며 말한다.
“뿔수리의 날개에 손을 대고 시련에 도전하게. 그러면 칼로드의 시련이 자네를 맞이할 거야, 투란.”
쥴이 뒤에 멈춘 것을 보면서 투란은 탈키오를 스쳐 지나가 뿔수리가 붉게 그려진 벽…… 문의 형상 앞에 섰다. 물러서지 않을 참이니 더 이상 묻고 어쩌고 할 일이 없으므로, 투란은 가만히 숨을 고르며 뿔수리의 반쯤 펼친 두 날개에 두 손을 붙였다. 단단한 바위의 감촉, 결코 당기거나 밀어 열릴 리는 없다는 것을 느끼며 투란이 문의 형상을 향해 속삭인다.
“칼로드, 시련을 받을게요. 당신이 남겼다는 몬스터의 정수가 필요하다니까요.”
기왕 입을 열었으니 목적도 분명히 고백해 보는 셈이었다.
애초에 인페르노의 하이로드가 더 이상 나설 수 없었고, 또 다른 하이로드 역시 이번에도 일시적인 격퇴를 했다는 다음에 닥쳐올 재앙을 가늠할 수 없다 해서 여기 온 것이니까.
한데 투란의 속삭임이 끝났음에도 바위는 반응 없이 고요했다.
두어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슬슬 단단한 바위 앞에 대체 무슨 고백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투란의 뇌리에서 무럭무럭 자랄 조짐을 보이려는 찰나, 투란은 뿔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가 자신을 확 덮치며 감싸는 것을 느꼈다.
‘몬스터…… 고유 마력!’
이번에는 다른 생각할 겨를 따위 없이,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몬스터 엠블럼이 방출해 낸 고유 마력, 몬스터 로드만의 힘이 투란을 감쌌고 바위 안으로 끌어당겼다. 흡사 앞으로 굴러들어 간다는 듯한 느낌으로 투란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데…….
벅벅, 쥴이 머리를 긁적였다.
탈키오가 수염과 뿔을 흔들거리며 묻는다.
“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아, 뭐…… 갑자기 생각났는데, 영감…… 키린이 여기 왔던 거, 벌써 사십 년 정도 지난 일이 아니었나? 그래서 홀랑 까먹고 있었는데…… 영감이랑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한 십몇 년 전에도 한번 왔잖아, 내가…… 그런데 영감이 냅다 키린 얘기부터 꺼내니까…… 에, 그러니까 내 말은…… 저 투란 녀석, 대체 몇 살인 거야?”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듯이 이 말 저 말 늘어놓다가 결국 요점은 이것이란 듯이 쥴이 쓴웃음과 함께 묻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탈키오는 빛바랜 비늘이 뒤틀리는 입매로 묘한 웃음과 함께 답한다.
“인간의 나이는 우리 눈에는 가늠하기 참 어렵지. 주름이라도 확실히 보이는 모습이라면 모를까…… 어린아이 시절을 벗어나면 참으로 뭐라 못 하겠더군.”
“핑계가 참.”
혀를 차면서 쥴은 돌아섰다.
탈키오도 날개를 정리하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돌아섰다.
뿔수리의 커다란 무늬는 완전히 잠긴 듯한 문짝 모양의 돌에서 도도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둘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데굴데굴, 통통.
촤아아악!
정말로 몸이 웅크린 채로 앞구르기를 했고 실뭉치처럼 튕겼기에 투란은 바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두 발로 서려 했다. 그 결과 비스듬하고 까칠한 비탈에 발을 대고 세찬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는 꼴!
‘발 다 까질 뻔했네!’
소리 없이 으르렁거렸지만 대꾸는 없었다.
문장 속의 별빛 무리는 여전히 반짝이지만 드라고니아는 지금 다른 곳에 외출한 것처럼 반응해 오지 않았다.
촤악.
발에 힘을 주고 멈추다가 투란은 고요함을 느꼈다.
모처럼 오롯하게 홀로 선 고요함.
낯설었지만 새삼스럽지 않은 묘한 느낌이었다.
가슴 한곳이 간질거리면서 허전한…….
“좋은 것이었는데 다 찢어졌네.”
문득 맨살이 드러난, 잿빛 바위 그랑츄의 살결이기에 까칠하게 미끄러지는 와중에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맨발을 보며 투란은 살짝 소리를 내 봤다. 마법 배낭에 쑤셔 넣지 못한 탓에 무릎 아래 장화가 다 터지고 찢겨 나간 상황, 조금 더 몸을 다른 형상으로 변이시키면 벌거숭이가 될 판이니 뭐라 하는 것이 당연하잖나?
물로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저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맺히는 것을 깨달으며 투란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봤다. 빛의 띠가 문신처럼 감겨 있었다. 살갗이 벗겨지더라도 그 자리에 단단히 머물러 반짝일 마법의 빛…….
한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투란은 볼을 두 손으로 두드렸다.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분명히 아니었다.
어느새 늘 함께 있고 뭐라 할 때마다 따박따박 떠드는 말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나간 꼴이 되어서 살짝 허전할 뿐이다.
스스로 상태를 나름대로 냉정하게 점검했지만 투란은 다시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 수밖에 없었다.
‘혼자 숲을 떠돌면 미친다더니…… 이런 기분이었다가 미치는 셈인가. 그래서 키린이 내게…….’
새삼 하지 않던 생각이 저절로 투란의 뇌리를 스쳐 가기도 했다.
험한 산, 울창한 숲에서 길을 잃고 홀로 헤매는 사람이 왜 미쳐 버리는 일이 생기는가에 대해서 사냥꾼들은 ‘사냥꾼이 아니잖아?’라는 말로 얼버무리고는 했다. 홀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냥하는 자신들은 그렇게 미칠 리 없다고 뻐기는 말투가 참 못돼 보였다.
‘난 사냥꾼이지, 몬스터를 사냥하고 몬스터를 삼키는!’
자신에게 으스대는 이들의 모습을 덧씌우며 투란은 주변을 훑어봤다.
눈가를 타고 검은 잉크가 눈썹과 눈덩이를 채색하며 조그마한 눈알들이 알록달록하게 돋아난 채였고, 두 눈은 이미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의 눈동자를 품고 번뜩이는 중이었다.
자신이 홀로 선 채란 상황에 잠시 당혹한 탓에 이 거대한 공동(空洞)이 꽤 기묘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가 다시 보는 셈이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그 기묘함을 느끼며 투란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뭘 하라는 거야, 대체…….”
아무 단서가 없는 시련은 아니었다.
데굴거리며 구르는 사이에 희미하게 들려온 속삭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속삭임의 내용은 그리 상냥하지도, 자세하지도 않았다.
―영원한 잠을 취한 나를 찾아오라.
그리 길지도 않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당장 느껴지는 대로 생각하자면, 자신이 죽어 있는 곳…… 자신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오란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투란 자신이 아니더라도 ‘영원한 잠’이란 말에 ‘죽었어?’ 하는 것이 보통 상식적인 추측이 아니겠는가? 거기 취해 있다고 하면 ‘죽었네’ 하겠지만 그걸 얻어 갖고 있다고 한다면 뭔가 제대로 된 관짝이라도 있을 법하긴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칼로드가 자신의 시체 놓인 자리를 찾아내라고 수수께끼를 냈다는 점은 틀림없어 보이잖는가?
얼핏 생각하면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듯한데, 투란은 주변을 두어 번 더 둘러보면서 이것이 왜 몬스터 로드의 기량을 가늠하는 시련인가를 확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투란이 선 자리, 텅 빈 공동의 어중간한 높이에 툭 하니 돌출된 바위 위에서 보이는 거대한 풍경이 그 느낌을 강요하는 채이니까.
‘어디 보자, 우선 여기가 입구.’
투란은 자신의 등 뒤가 묘한 방식으로 다시 채워져 막힌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이 선 바위 아래가 꽤 높은 절벽의 중간 언저리란 것도 가늠했다.
거기에 앞에 확 펼쳐진 수백 미터…… 모래의 호수가 지름 1킬로미터를 넘는 거의 2킬로미터 가까이 활짝 펼쳐진 채로 풍경의 대부분을 장악한 채.
특이한 점이라면 모래 호수의 중심을 꿰뚫는 원뿔이 천장에서 아래로, 바위가 고드름처럼 자라 내린 것처럼 놓여 있다는 것.
보통은 바위로 된 천장이 저리 놓여 있으면 어두컴컴한 풍경이었겠지만, 천장 곳곳에 듬성듬성 뚫린 구멍이 햇살을 풍부하게 통과시켜 주는 탓에 밤이 아니라 낮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해 줬다.
‘벽에는…… 젤리? 슬러시? 아주 뚝뚝 떨어지는구나, 좔좔 흐르면서.’
투란은 사방을 꽉 막고 있는 절벽, 천장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장벽의 울퉁불퉁한 모양 사이로 물 덩어리처럼, 진흙 덩어리처럼 맺혀서 꿈틀거리는 몬스터가 열심히 숨는 시늉을 하며 가득하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그 꿈틀대며 향하는 방향은 마치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한 모래로부터 멀어지려는 듯이 보였다.
그러니 저 얌전하게 보이는 모래가 그 아래에 뭘 감추고 있다는 결론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솨아아.
원뿔 아래에서 뭔가 요동치며 모래를 밀어내고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투란이 모래 호수를 수상하게 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