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8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77)
척 봐도 두툼하고 튼튼하고 막강해 보이는 강철의 기둥.
우물거리는 거대한 구멍의 안쪽으로 어린아이가 두어 걸음만 디뎌도 닿는 자리에 그런 강철 기둥이 교차하며 벽을 만들어 가로막고 있었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잘 어울리는 검은색의 강철 기둥 벽, 탈출구란 것만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는 아무 생각 없이 들이박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 닿기 전에 이미 투란은 그 강철 기둥으로 이뤄진 벽이 구멍 안에 몇 겹으로 쌓여 있는가, 벽이 모두 몇 장으로 중첩되어 구멍을 틀어막고 있는가를 ‘느껴’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뿔이야?’
호기심이 솟아났지만 답을 구할 수도, 구할 때도 아니었다.
그보다 허공을 돌진하며 비행하는 와중에 투란은 자연스럽게 내밀어지는 자신의 손을 살폈고, 다행스럽게도 익숙한 다섯 손가락의 형태에 살짝 안도하면서도 아주 낯선 핏방울이 손톱을 대신에 맺힌 꼴을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손끝에서 툭 떨어져 날려갈 듯한 붉은 이슬방울이라고 생각할 만도 했지만 투란은 그 핏빛의 이슬이 진짜 ‘손톱’이며 ‘칼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지금 이 핏방울의 손톱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도…….
파앗.
가늘디가는 실 끝처럼 핏방울의 한쪽이 흘러 나갔다.
가늘고 긴 핏빛의 실 가닥이 허공을 가르며 넓게 펼쳐져 피막(皮膜)처럼 강철 기둥이 교차한 벽에 닿았다. 한 가닥, 한 가닥이 허공을 번지며 펼쳐진 피막이었으니 그저 널찍하게 벽을 칠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예상이 자연스러웠지만, 결과는 그런 예상을 비웃듯이 소리도 없이, 어떤 반발도 없이 강철의 벽이 지워진 것이었다.
속마음으로는 움찔하며 당황스러운 투란이었지만 몸은 당연하다는 듯이 곧바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마치 예정한 계획이 새겨져 있고 어느 순간까지는 그 계획에 따라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내민 다른 손, 핏방울 손톱이 부풀며 굵직한 송곳처럼 확대되며 하나로 뭉쳐 손끝에 기둥처럼 굵고 커다란 창을 매단 모양으로 앞을 향해 내질러졌다. 자신의 몸보다 굵은 송곳을 앞장세운 채로 그대로 허공을 돌파하는 모습이었다.
격돌이 예상되는 광경이었지만 투란은 간단하게 열 겹 이상의 벽을 지나치며 아무런 반발도 느끼지 못했다.
‘……!’
스쳐 가며 시야에 드리워진 벽의 단면, 강철 기둥의 절단면은 뜨거움도 차가움도, 충돌의 미묘한 진동조차도 없었다. 그저 지워진 채로 원래 거기 있었다는 것처럼, 손끝에서 뻗어 나간 핏빛 방울의 거품이 허공을 채색하니 그저 사라졌다는 것처럼!
투란은 이런 광경을 보면서도 자신의 경악에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해하다가 곧바로 씁쓸함을 깨달았다. 이럴 때 뭐라 뭐라 열심히 떠들어 주던 녀석이 지금 외출……했다가 실종된 상태잖은가!
이렇게 마음속이 번잡한 와중에도 투란의 몸은 예정된 계획에 따른다는 듯이 착실하게, 분명하게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강철 기둥을 교차해서 만들어진 벽의 너머에 수 미터의 길이, 수 미터의 폭과 높이로 이뤄진 동굴 끝자락을 단숨에 지나쳤다. 동굴은 절벽 중턱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뛰쳐나오자마자 어림잡아 이십여 미터 높이인 허공인 상황, 이를 느끼자마자 투란의 몸이 뒤집히고 허공을 미끄러져 지면을 밟듯이 서려 했다.
아무런 이상도, 조짐도 없는 동작이었고 날개의 묘한 특성을 겪은 다음인지라 그냥 허공에 멈추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런 투란의 안일함을 놀리듯이 한 발이 은근한 경련과 함께 발가락을 활짝 펼쳤다가 오므리고 있었다. 더불어 무릎이 슬쩍 당겨 올려지는 순간, 투란은 이십여 미터 아래의 지면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볼 수 있었다.
허공에 선 채로 닿지도 않은 지면을 움켜쥐고 당기는 괴이함, 마법이라도 쓰는 듯한 이 현상은 대체 어떻게 일어났는가?
솟구쳐 올라온 흙 기둥에 두 발을 딛고 서는 순간, 투란은 그 답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마음속에서 치솟는 심상, 그 풍경을 통해서.
* * *
‘작은 공방.’
마음에 깊이 투영된 ‘이름’이 투란을 울려 왔다.
그 메아리가 정신에 스며들 때, 투란은 문득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알아차렸다. 불길이 샘솟는 우물을 뒷쪽에 둔 채로, 앞쪽이라 할 곳에 걸려 있는 것은 도해(圖解)…….
뿔, 날개, 뼈가 드러난 턱과 뼈로 된 가면이 얹힌 듯한 머리, 은은한 분홍 색채가 어린 보랏빛의 머리카락, 같은 색채인 체모가 온몸 곳곳에 뼈 장식 틈새로 드러난 형태…… 그중에서 지금 가장 궁금해하는 발가락의 실체가 ‘보이고’ 있었다.
포스 윌더.
마법사의 마력을 아케인 포스, 사제의 성스러운 힘을 디바인 포스, 자연현상에 배어 있는 섭리의 힘을 네이처 포스라 부르는 경우를 고려할 때 포스 윌더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호칭이라 했다. 마법사도, 사제도, 자연의 이치도 포스 윌더란 호칭을 그리 달갑게 여길 리가 없다고 술 취한 로그메이지가 주점에서 떠들어 댈 정도로.
애초에 ‘포스’라 불리는 힘의 영역이 아리송하기 이를 데 없는 탓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운 호칭이라도 몬스터에게 적용할 경우에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현상을 가리킬 때 쓰인다. 그 형태를 이룬 몸이 닿지 않은 채로 몬스터가 사물을 휘두르고 밀고 당기며 버텨 낼 때 발휘되는 힘, 때로는 이력(異力)이라는 어설픈 표현까지 덧붙여지는 힘을 포스라 할 뿐이니까.
‘근데 그게 수십 미터 밖에서 땅을 기둥처럼, 기둥째로 뽑아 올린다고?’
선명한 의문이 곧바로 투란의 마음에 피어났다.
몬스터가 포스를 휘두른다면, 그건 그냥 눈에 보이지 않는 발톱 손톱이 하나씩 더 돋아 있다고…… 앞발 뒷발에 여분의 길이가 덧붙여진 것이거나 가죽에 보이지 않는 가죽이 한 겹 더 붙어 있거나!
아무리 몬스터가 포스를 휘둘러 댄다고 해도 이렇게 수십 미터 규모의 흙장난을 한다는 이야기를 투란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은밀하게 휘둘러진 포스에 의해 별것 아니었어야 할 몬스터가 까다로워지고 사냥 등급이 올라가서 위험해진다 정도였는데…….
몬스터 로드라면 그런 포스의 능력을 정수에 담은 몬스터의 파편을 꽤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보이지 않는 칼, 방패, 갑옷을 한 벌 더 걸치는 셈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앞뒤 재기도 힘들 정도로, 그저 발가락을 구부리며 발바닥에 힘을 준 것만으로 수십 미터짜리 흙 기둥을 뽑아낸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무슨 몬스터를 때려잡아 얻은 힘인가 납득할 수가 없잖은가!
이 의문이 깊어지고 한층 더 노골적이 될 듯한 순간, 투란은 도해의 발가락이 꿈틀거리며 그 발의 형태가 한층 또렷하게 시각을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몬스터의 생김새, 이름이 투란의 마음에 ‘담겨’졌다.
‘크라잉 티라녹스……!’
사우루스 계통의 작은 몬스터였다.
징징거리고 울고 비명을 지르고 울고…… 그 울음소리가 소름 끼치고 오싹하게 하며 왠지 모를 두려움을 샘솟게 하는데, 청각에 장애가 있거나 그냥 귀가 막힌 경우에는 전혀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다. 때문에 크기가 닭의 두 배 정도 되는 두 발로 뛰는, 꼬리가 짧고 앞발이 뭔 가시처럼 작은 도마뱀 계열의 몬스터는 캄캄한 밤이라도 그늘진 곳을 숨어 다닌다. 울어 젖히는 것 말고 다른 능력이 없다고 알려질 정도였고 위험성은 들개 새끼 수준…… 하지만 크라잉 녹스는 두 발뿐이라도 벽을 타고 달리며 발 디딜 곳, 발톱을 걸 곳이 없는 천장 틈새에서 들러붙을 수 있었다. 그 괴이한 발의 악력(握力)이 바로 포스!
‘아, 잠깐!’
투란은 마음에 쏟아부어진 몬스터의 정체를 깨닫고 느끼다가 자신을 멈춰 세웠다.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든 지식인데, 앞뒤가 어긋나고 있잖나!
아무리 몬스터 로드가 몬스터의 정수를 키울 수 있다고 해도 크라잉 티라녹스의 포스 능력이라기에는…… 흙 기둥이 너무 굵고 높다!
이 새로운 의문은 곧바로 투란에게 새로운 ‘앎’을 느끼게 했다.
그 ‘앎’이 왜 이 심상 풍경이 ‘작은 공방’인가를 깨닫게 했다.
단련(鍛鍊)하고 제련(製鍊)한다, 그 소재는 몬스터의 정수(精髓).
몬스터의 원형(原型)을 보존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몬스터의 원형은 그저 참고할 이야기의 한 토막, 그 원형의 정수를 고스란히 드러내서 형성할 까닭이 있는가? 없다.
칼로드는 그렇게 판단했고, 그런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이 ‘작은 공방’은 그렇게 꾸며진 심상…….
투란에게는 알아도 납득하거나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투란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설렘과 함께 피어나는 ‘느낌’이 있었다.
하찮고 작은 몬스터…… 전혀 쓸모가 없다 여겨진 조각 안에 담긴 것을 찾아냈을 때의 즐거움과 놀라움.
무엇보다도 투란 스스로도 ‘악마의 심장’을 통해 어느 정도 겪은 바가 있잖은가.
‘그럼, 설마 저 핏방울 손톱도……?’
묘한 기대와 함께 투란이 도해 전체를 훑어보려 할 때, 막 투란의 시각에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이 담겼을 때 격한 충격이 아래에서 치솟으며 바라보는 풍경이 휙 돌아갔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우물 안에서 너울거렸고, 투란은 심상 풍경과 겹쳐지는 현실의 광경을 깨달아야 했다. 동시에 핏방울 손톱의 정체가 투란의 마음속에 잔잔하게 스며들고도 있었다.
‘아…….’
* * *
‘블러드 네일!’
원래부터 강력했고, 단련과 제련이 거의 필요가 없는 소재였다.
단지 그 사용법만 확실하게 인지하고 숙달되면 되는 강력한 절단 능력.
그 원형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다는 기분을 투란은 애써 한쪽으로 치워야 했다.
잠시나마 심상의 풍경을 엿보며 ‘작은 공방’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지금 할 일은 칼로드가 남긴 완성된 몬스터의 형태를 더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투란이 해야 할 일, 칼로드가 맡기고 넘긴 일은 절벽의 구멍을 오물거리며 꿈틀거리고 기어 나오려는 거대한 암석형 몬스터를 처분하는 것이었다. 그 정체, 칼로드가 파악한 바가 ‘작은 공방’에서 투란의 마음에 곧바로 투영되는 중이었는데…….
‘괴암산(怪巖山).’
몬스터는 그냥 산이라고 불렸다.
그 산을 억지로 찍어 누르고 시련을 부여하기 위한 몬스터 떼를 그 빈 속에 채워 넣고 칼로드는 기다렸다. 계승자에게 뒤처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넘기면서 물려받은 ‘힘’의 크기를 스스로 겪도록 준비해 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투란은 괴암산의 특성을 ‘알아’ 버렸고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가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더불어 칼로드가 어떻게 죽은 다음에도, 수백 년 전에 죽었음에도 지금 투란 자신에게 그렇게 ‘기억’하도록 했는가도 깨달았다.
‘키린…… 하는 짓이 닮은 사람이 수백 년 전에 있었군요.’
그나마 이런 상황을 예정했기에 골수에 스며드는 고통만큼은 없도록 배려는 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떠오른 추억에 살짝 한숨을 쉬어야 할까 싶었다.
하지만 투란은 자신을 다스려 한숨을 쉬거나 긴장을 풀지 않았다.
칼로드는 괴암산을 ‘처분’할 ‘힘’을 전해 줬지만 그 ‘힘’을 휘두르는 것은 투란 자신이어야 함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투란이 미숙하게 맡겨진 일을 처리한다면 괴암산은 자신의 파편을 도주시킬 터였다.
온전하게 도망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괴암산이 지금 그 목적으로 자신을 응축(凝縮)시키고 압착(壓着)하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들거리며 튕겨 나오는 거대한 바위들…… 괴암산의 본래 크기는 수 킬로미터를 떠올리면 저런 몇 미터짜리 바윗덩어리는 상대적으로 조그맣다 해야 하겠지만, 저 작은 파편들이 산맥 깊은 곳으로 숨어들면 겨우 몇 년 안에 괴암산 본래의 크기로 성장할 터.
마음속에 스며들어 와 자리 잡은 ‘앎’…… 여기서 괴암산을 완전히 정리, 처분해 버리는 방법을 되새기면서 투란은 수백 미터의 크기로 줄어들며 압도적인 밀도(密度)로 내부를 뭉개고 있는 괴암산을 관찰했다.
이 관찰은 단지 겉에 보이는 것만 살피는 바가 아니었다.
해골 가면 모양이 된 얼굴 윗부분, 눈꼬리 위쪽에서 우람하게 돋아 나가며 안팎으로 굽이친 뿔의 감각이 괴암산의 내부를 관조해 주며 시각화한 광경…… 거기에 보랏빛 허공 속에 깊이 박힌 금빛 조각 같은 눈동자의 독특한 투시가 겹쳐지고 있었다.
때문에 투란은 벌레 무리를 낳던 어미 괴물 여러 마리가 모래에 압사당하며 으깨지는 채로 버둥거리고, 벌레 무리가 바위와 모래의 반죽 속에서 갈려 나가는 광경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괴암산의 수 킬로미터 크기가 수백 미터로 줄어들자 모래 벌레를 닮았던, 나름대로 모래를 가로지르게 해 준 탈것 노릇도 해 줬던 괴수 역시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버티며 바위와 모래의 압력에 파괴당하지 않으려 힘을 쓰는 중이었다.
만약 모래와 바위 틈새의 젤리, 슬러시의 온갖 해괴한 품종이 괴암산의 소화액 노릇만 하지 않았다면 어미 괴물이나 벌레 무리와 달리 저 괴수는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건 아까운데…….’
투란은 젤리나 슬러시, 어미 괴물과 벌레 무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저 괴수는, 어디가 드레이번 칼릭을 떠올리게 한 저 괴수만큼은 살짝 탐이 났다.
더불어 수 킬로미터의 크기를 수백 미터로…… 이제 거의 이백 미터 안쪽으로 압축하며 몸의 밀도를 말도 안 된다 싶을 정도로 높이는 괴암산에도 약간 흥미가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투란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