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8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80)
‘어라?’
아주 밝은 웃음이 쥴의 낯짝에 덧씌워지는 풍경.
‘천칭’의 광활하고 방대한 심상…….
그리고 반지를 낀 손도 아니고 끼지 않은 손도 아닌, 전혀 다른 뭔가에 닿은 듯한 또 다른 ‘손’의 감각.
투란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다채롭고 기이한 ‘감각’에 집중해야 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풍경, 없다가 생긴 묘한 느낌이 뒤엉키면서 마치 투란에게 또 다른 몸이 생긴 듯했으니까.
그 묘한 느낌을 따라 투란이 마음을 넓히고 펼쳐 나간다고 뜻을 품었을 때 백금 반지가 부드럽게 호응하고 있었다.
* * *
‘천칭’의 광경을 담은 창이었다.
둥글게 열린 창은 ‘천칭’의 형상을 담은 꼭지를 정점에 두고 부드럽게 백금의 원호(圓弧)를 좌우로 흘려 내는 채였다. 그 원호가 흐릿하게 아래쪽에서 닿을 듯 말 듯 한 꼴로 그려 내는 중심의 원형 안에 ‘천칭’의 광경이, 심상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그 풍경에서 미묘하게 반짝이며 ‘천칭’의 꼭지로부터 흘러나온 실 가닥의 백금은 또 다른 형상의 문장을 꼭지로, 명패(名牌)처럼 둔 채로 더욱 작은 원호를 흘려 내며 작은 창을 꾸미고 있었다.
투란은 명패 같은 그 꼭지의 조각을 바라봤고, 자신이 ‘천칭’을 통해 품고 있는 다른 문장의 풍경을 작은 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황금매와 어둔늑대 펜릴, 뿔수리까지.
문장마다 다른 풍경을 크고 작은 창으로 둔 채 한꺼번에 바라보는 상황은 투란에게 굉장히 낯설면서도 반가웠으며 신비로웠다.
동시에 대체 자신이 어떤 몸으로 앉아서, 가만히 문장의 풍경을 담은 원…… 창틀을 손으로 더듬고 있는가를 되짚으며 이 상황이 얼마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가를 깨닫고 있었다.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려 투란이 마음을 정하니, 크고 작은 창을 이루는 백금의 틀은 미세하고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린 형상이 보였다. 큰 창에서 작은 창으로 흘러가는 가지가 풍경을 비추는 창의 바탕 뒷면을 채우며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을 명확하게 하는 모양을 꾸미고 있었다.
그 뿌리인 ‘천칭’의 굵은 버팀목은 바닥에 굳건히 작은 지팡이처럼, 틀의 원호 좌우로부터 꼬여 내려온 백금의 줄기였다. 그 줄기가 파고드는 바닥은…….
‘심연…… 나의 심연.’
투란이 몬스터 엠블럼을 새긴 순간부터 그 깊은 곳, 아래쪽으로 자리 잡은 심연의 형상이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회오리처럼, 소용돌이처럼 느릿하니 맴도는 바닥으로부터 부드럽게 밀려오는 ‘마력’이 투란에게 지금 ‘몸’을 꾸며 주고 앉아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투란은 ‘마력’을 더듬었고, ‘심연’에서 솟아나는 이 힘이 문장의 풍경으로 흘러가며 문장마다 색다른 고유 마력을 엮어 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몬스터 로드의 고유 마력이 문장을 채우고 유지하며, 몬스터의 정수를 보존하는 풍경을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는 것까지, 투란의 ‘앎’이 넓어져 갔다.
그 ‘앎’의 확장, 확대를 통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백금의 형상을 드리운 마법이 어떻게 문장의 전환을, 교체를 지원해 주는가.
심연을 거쳐 ‘천칭’에 그 매듭을 엮어 걸어 낸 투란의 방법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문장과 심연의 구조를 이러한 심상 영역 속에서 분리하고 격리하여 완전히 단절된 형태로도 교체할 수 있다!
‘그렇군, 그래서 저렇게 많은 문장이…….’
투란은 자신이 지닌 몬스터 엠블럼과 다른 문장을, 창의 안쪽이 아닌 창 너머의 허공을 장식하듯이 도도하게 부유하는 수십은 가볍게 넘을 듯한 문장의 원판을 바라봤다.
홀시딘을 떠올릴 만큼 둥실거리는 여러 원판은 가로지르는 사슬을 건 채로 매와 천칭, 늑대부터 가까이 들이대면서 해골과 거미, 사자와 뱀, 유니콘과 와이번을 떠올리는 형상까지 품은 채로 와글거리고 있었다.
반쯤 본능적으로, 반쯤은 보는 순간 마음속에 새겨지는 지식의 파편을 통해 투란은 저 사슬을 풀고 늘어뜨리게 되면 심연과 교류하는 새로운 문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몬스터의 파편을 전혀 머금지 않은 채이기에 당장 저것을 품었다가는 보이드 엠블럼의 지독하고 흉악함을 다시 겪을 뿐이지만!
‘내 천칭 속으로 바로 담길 일은 없구나.’
문득 투란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천칭’을 되찾기 위해 심연을 관통한 짓은 투란 자신만의 비전(祕傳).
원래는 함부로 시도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일!
그대로 심연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정신이 잠겨 든 채로 지워진 몬스터처럼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투란이 그 어려움 속에 나름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하, 하, 하. 황금매의 불완전함 때문에 터득할 수 있었냐!’
황금매가 처음부터 ‘천칭’에 삼켜진 채로, ‘천칭’에 의지하는 채로 완성돼 버린 탓이었다. 그 과정을 거친 탓에 투란은 경험했고, 깨우쳤으며 자신만의 비전으로서 완성해 버린 것이다.
어둔늑대의 문장이나, 뿔수리의 문장부터 겪은 일이었다면 투란은 정말 이 백금의 마법을 얻지 않으면 ‘천칭’을 잃어버린 채로 되찾지 못했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런 위험한 짓을 시도할 마음조차 품기 어려웠을 것이다.
온전한 심연을 갖춘 문장은 그런 위험한 일을 허용하지 않으려 할 테니까. 오롯하게 몬스터의 정수만을 담그고 세상에서 지우려 할 뿐이니까!
‘아니, 잠깐만…… 내가 어떻게 이런 것을?’
자신이 터득한 비전의 위험성, 성공했던 까닭을 깨닫던 투란은 문득 이 사고방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느꼈다. 백금의 마법을 통해 ‘알게’ 되면서 어느 순간에 그 마법의 이치를 마음에 드리우고 분석하는 중이라니, 이런 사고방식이 투란 자신의 성격과 어울릴 리가 없잖나?
하지만 곧 투란은 알 수밖에 없었다.
백금의 마법이 단순히 ‘앎’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앎’을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사고(思考)의 도구도 함께 건네주는 탓이었다. 호기심과 의문에 호응해서, 이미 ‘앎’ 속에 담긴 답을 즉각 마음에 새겨 주는 기묘한 도구…… 그 도구가 투란의 마음에 척도(尺度)로서, 기초적인 사유(思惟)로서 자리 잡고 즉각적으로 활용되는 중이었다!
‘전설의 대마도사!’
새삼 투란은 조그마한 백금 반지에 이 정도 마법을 담아 놓은 대마도사 카엘이 어째서 전설이 되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귓가에 울리는 쥴의 목소리…….
“어때? 어때, 투란? 어이! 아직 따로 해 줄 이야기가 좀 더 있어! 이제 나한테 좀 관심을 주라고! 야, 나 좀 봐! 나를 보라고! 초점 좀 맞추고!”
이 마법의 풍경을 둘러보는 귀가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 * *
“보고 있어요.”
입을 간신히 여는 느낌이 투란의 목젖을 채웠다.
쥴이 빙그레, 조금 전보다 더 밝게 웃었다.
덕분에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백금 반지가 자아낸 풍경을 둘러본 시간은 그야말로 한순간.
쥴은 그 한순간을 간파한 듯이 말을 붙여 온 것이다.
그리고 다시 투란이 그 풍경 속에 빠져드는 것을 막듯이 물음을 잇기도 하는 쥴이었다.
“아주 색다른 문장들이 있었지?”
“네, 해골이나 늑대는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사자나 유니콘의 문장도 있었던 건가요? 뱀도 있고, 와이번까지 있던데.”
투란은 어렴풋이 조여 오는 숨을 몰아 내쉬듯이 말해야 했다.
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있었나 봐. 엄청난 옛날에 말이야. 카엘은 옛날부터 그 자취를 좇기도 했고…… 어쩌면 그 시절에도 어떻게 살아 있었을 거야. 대마도사니까, 마법으로 문장을 수집하는 방법도 알아냈던 모양이야. 뭐,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몇백 년 전에 슬쩍 흘린 말로는 드래곤이랑 뭔가 엮인 탓에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던데…… 아, 쓸모없는 이야기겠지? 하하핫, 이런 얘기 하려던 것은 아니야! 야, 허황한 소리 하는 미친놈 보는 그 눈길 좀 치워 주라! 젠장, 너도 몇백 년 살아 봐! 뭐든 떠들기 시작하면 살살 기억이 울컥거리면서 필요 없는 소리를 내뱉게 된다고! 어흠! 암튼, 지금 내가 해 주려던 이야기는…… 아, 너 혹시 그 가게라고 들어 봤냐? 간판은 일단 데릭 형제 상회라고 하는데…….”
“툴로쉬랑 한 번 가 봤어요.”
투란은 짧게 대꾸했고, 쥴은 휘파람을 불며 좋아라 하다가 갑자기 갸웃하면서 다시 묻는다.
“갔는데, 옷장 반지 안 샀어? 무장 반지는?”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도감 사고 나온 다음에 다시 못 들러 봤네요. 그런데 그게 뭔 반지인데요?”
투란이 기억이 희미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쥴이 가볍게 한 손을 들었다.
손가락마다 요란하게 끼운 반지가 빽빽하게 마디를 채운 꼴이 보인다 싶었는데, 한순간 쥴의 손이 우악스럽게 부풀면서 털이 가득한 모양이 되었다. 어딘가 타우루스를 닮기도 했고 비비나비랑 비슷하다 싶기도 한 몬스터의 손아귀였다.
투란은 그 변형 과정의 특이함을 곧바로 눈치챘다.
몬스터 로드가 저런 식으로 몸의 형상을 변화시키면 장신구이든 옷이든 그대로 깨지고 찢겨 나간다! 그래서 벌거숭이 몰골이 되거나 누더기 꼴이 되는 것이 상식이라면 상식.
그런데 쥴의 손가락에 가득했던 반지들은 그냥 사라졌다.
그리고 쥴이 다시 손을 뒤집으며 사람의 형체로 되돌리니, 손가락마다 반지가 모두 멀쩡하게 아까 그대로 꽂혀 있잖은가!
멀뚱거리며 눈을 깜박이는 채로 투란은 그 손을 보고 쥴의 낯짝을 보고 다시 손가락 마디마다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반지 무더기의 기묘한 상태도 그렇지만 방금 쥴이 몬스터 로드로서의 능력을 보이는 순간, 이제까지와 다르게 순수한 몬스터 로드의 고유 마력이 미묘한 파동과 함께 투란에게 느껴졌다.
마치 하이로드로서의 쥴과 몬스터 로드로서의 쥴이 미묘하게 나눠진 채로 서로 간섭을 하지 않는 듯한…….
“이런 것도 되지.”
흐흣거리는 말투와 함께 쥴이 허공을 쥐는 시늉을 했다.
그 쥐어진 손 안에는 단도 한 자루가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음?”
잠깐 투란은 스쳐 가던 생각을 모두 치우고 쥴의 손에 든 단도를 쳐다봐야 했다. 마법 배낭에서, 문신으로 변화시킨 블랙레온으로부터 뭘 꺼낼 때 저런 비슷한 짓을 할 수 있기는 했다. 데몬스 러그라면 살이 갈라지는 채로 불룩 칼을 토하는 몰골이 될 듯하고…….
하지만 지금 쥴이 보여 준 현상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원래 손을 웅크리고 쥐면 거기 뭔가 당연히 쥐어진 채여야 한다는 듯했다.
“무장 반지는 언제 어디에서도 즉각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태세를 꾸며 주지. 옷장 반지는 몸에 걸친 옷차림이 찢어지고 해지지 않게, 어찌 보면 몬스터 로드의 몸과 마찬가지로 변화에 순응해서 거둬들였다가 다시 입혀 준다. 이게 원래 그 가게에서 몬스터 로드가 찾아오면 열심히 파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물품인데…… 구경도 안 해 본 표정이다, 어째?”
“어, 그게…… 다음에 들르면 몬스터 로드를 위한 다양한 도구를 구경시켜 준다고 했는데…… 들를 약속도 잡았는데 어쩌다 보니 아직 못 들러서 말이죠.”
투란은 조금 구겨진 낯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감을 펼쳤다가 찾아든 강렬한 충동 때문에 냉큼 도시를 떠나 버렸고 약속해 둔 물품을 받지도 못한 채 몇 년을 밖으로 싸돌아다녔다. 그렇게 투란이 없는 사이에 켈 데릭은 알드바인까지 약속을 지키러 왔다는 듯했는데…… 그 이야기도 아직 자세히 듣지 못했다!
어째서인가 계속 밖으로 겉돌고 있는 황당한 시간이 길어지고 있잖나.
쥴이 투란이 새삼 한숨을 쉬려는 듯한 모습을 보며 껄껄 웃음과 함께 말을 잇는다.
“이런 반지 때문에 다시 들를 필요는 이제 없다, 투란. 그 반지는…… 아주 오래전에 제작될 때부터 무장 반지와 옷장 반지의 기능은 이미 갖추고 있거든. 아니, 그 반지야말로 다른 반지들의 시초이자 원형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뭐 보통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 기능이 추가되고 개선되기 마련이다만…… 그 반지는 문장을 위한 특별함 때문에 몬스터 로드를 위해 짜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을 모두 담아 만들어졌기에 나중에 만든 것들이 오히려 기능을 빼내고 삭제해야 할 정도였다더라. 쉽게 말하자면…… 음…… 그래, 옷감의 재료와 무구의 재료를 담고 적절한 레시피, 설계도? 그런 지식을 추가하면 옷과 기본적인 무구는 그대로 제작도 해 준다고 했어.”
가만히 듣던 투란은 문득 묘한 부분을 깨달았다.
“쥴, 혹시…… 이거 안 써 본 거예요? 여태 끼고 있었으면서, 이것 말고 다른 반지만 써 본 거예요?”
쥴이 살짝 웃음을 흐리면서 진지한 눈길로 투란을 보며 답한다.
“그 반지는 나를 구해 준 적이 있어. 그때 한 번 써 봤지.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에게 전해 줘야 한다길래 내가 계속 쓸 수 있는 다른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반지가 생겼지.”
“그 손가락에 낀 모든 반지의 마법이 이것 하나에 담겨 있다고요?”
척 봐도 모조리 마도구인 쥴의 손가락을 가득 채운 반지 무더기를 보며 투란이 어이없어 되묻고 말았다. 쥴은 그렇게 되묻는 말보다는 ‘이것 하나’란 말과 함께 투란이 치켜세우는 손가락을 보며 한숨부터 쉬었다.
“야, 그러니까 그 손짓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