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
Chapter 3. 허공의 옥좌
‘정신이…… 있네?’
투란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캄캄해지고 고요해진 다음에 몸이 기울어지는 느낌이 나더니, 정신이 말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의 감각은 희미해지고 엉망이 된 듯한데, 정신만 멀쩡해서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투란의 정신이 의문을 탐색하기 위해 ‘지각’을 어루만졌다.
다룰 수 있는 것이 오직 ‘알고, 생각한다’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뭔가를 만지고 닿아서 움직이는 오각(五覺)이 모두 정지되어 반응이 없는데도 정신이 뭔가를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겨우 활용할 수 있는 지각으로 가능한 일은 뭔가를 생각하거나 기억을 뒤집는 것뿐이었지만, 찾는 답이 금방 기억 속에서 굴러 나왔다.
‘문장!’
몬스터 엠블럼이었다.
이 이상하고 어중간한, 깨어 있는 듯한데 기절한 듯도 한 상태는 몬스터 엠블럼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처음이 아니구나!’
투란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오각이 다 가 버린 채로 지각만 남은 상태는 낯설다.
하지만 오각이 남아 있어도 꼼짝 못하고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기억은 분명히 투란에게 새겨져 있었다. 머리가 아닌 문장을 통해 분명하게 간직되어 있었다.
‘그 물결…… 다시 쓸 수 있을까?’
투란은 문장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여리고 작은 물결, 그 힘으로 악마의 심장을 사냥해서 삼켰다. 그 힘으로 ‘천칭의 문장’을 보이드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뒤로도 힘은 여전히 그와 함께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가냘프지만 분명한 그 힘을 투란은 기억해 냈고, 다시 원했다.
즉각 문장이 반응해 왔다.
가장 선명하게 투란이 기억하는 구체적인 힘, 삼켜 버린 악마의 심장이 맥동하는 것처럼 문장도 일정한 박자를 일으켜 그 여린 파문이 여전히 간직되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투란은 즉시 정신으로 그 힘의 파문을 움켜쥐고, 몸을 살피려 들었다.
앞서처럼 이 여리디여린 힘만으로 충분히 몸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호응을 받았다.
투란은 눈이 뜨여 있는 상태, 귀가 멍하면서 바싹 조여든 상태, 팔다리를 할짝대는 뭔가의 이상한 촉감, 숨이 멎고 입안이 마른 것까지 바로 알았다.
게다가 아주 잠깐, 심장도 멎은 듯이 느껴졌다!
‘뭐야, 왜 심장이 뛰지 않아?’
하지만 그 느낌은 곧 미세하고 여린 심장의 꿈틀거림을 깨달으며 떨쳐 낼 수 있었다. 심장은 완전히 멎은 것이 아니라 멎은 것처럼 느리게 움직일 뿐이었다. 이건 마치 죽은 척하는 꼴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그 심장을 대신하듯 몬스터 엠블럼에서 흘러나오는 여린 파문이 서서히 선명한 맥동을 일으키며 온몸에 번지고 있었다.
‘이거 정말…… 오러인가?’
투란은 다시 작은 의문을 품었다.
전에는 정체가 뭔지 따지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 가득히 채워진…… 아니, 정신을 텅 비게 하는 지독한 공허에 시달리면서 뭔가를 채우기 위해 몸짓 없는 발버둥과 발악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결과 악마의 심장이 깃들였고,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쪽이잖은가?
하지만 지금, 심장이 멎은 듯하지만 꿈틀거려서 일단 죽는 건 아니다 싶은 상황이 되자 투란은 이 여린 힘이 대체 뭔가 제대로 궁금해졌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몸!’
생각은 즉각 힘을 움직였다.
머리를 다쳐서 완전히 기절한 상태나 마찬가지였을 때도 ‘지각’을 부여했던 힘이다. 과연 그 힘은 심장이 거의 정지 상태인 지금, 감각을 대신해 냈다! 곧 구체적인 몸 상태가 정신 속에 잡히기 시작했다.
파문의 힘에 물들어 가며, 서서히 눈에 뭔가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눈알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먼 하늘을 초점도 없이 보는 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귀는 꼭 눌린 느낌이었고, 찾아오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심장이 멎은 듯이 느려진 탓인지 숨결도 멎은 듯이…… 아니, 멈춰 있었다!
‘아, 망할! 이러니까 갑자기 쓰러졌구나!’
심장의 급격한 멈춤 혹은 멈추는 척한 상태가 그를 때려누인 것이 분명했다.
악마의 심장이 뭔가에 놀라 죽은 척한 것이다, 이건!
‘아니, 이게 대체 뭔 지랄이냐고!’
투란으로서는 진심으로 기가 차고 화날 일이잖은가.
하지만 투란이 흥분하려 들어도 그의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고 고고하기까지 한, 잔잔하고 여린 문장의 힘만이 보다 세밀하게 몸속을 누비며 살갗을 넘나들 뿐이었다. 그 덕분에 투란은 새로 느낄 수가 있었다.
‘어? 이건 또 뭐지?’
아까보다 더 늘어나고 또렷하게 뭔가가 들러붙어 팔다리, 허리 언저리에서 혀를 날름거리듯이 핥는 낌새가 있었다. 하지만 살갗이 떨어져 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언저리에서 작게 피어난 넝쿨이 표피를 감싸며 저항하는 덕분인 듯했다.
투란은 그것이 뭐든 자신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 거슬렸다.
이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사람의 상식이 통하는 그런 것일 리가 없잖은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망할 심장아, 죽은 척하지 말고 움직이란 말이야!’
의젓하게, 머리보다 더 냉정하게 생각까지 할 수 있는 녀석이 대체 뭘 봤기에……?
하지만 지금의 투란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죽은 척하는 심장 탓에 기절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인데, 그사이에 뭔지 모를 것이 ‘아, 이거 먹는 건가?’ 하는 듯이 자신의 몸을 할짝거린다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의지가 곧 힘으로 이어졌다.
문장이 드리운 파문이 보다 강하게 맥동하며 심장을 두드렸다.
그 두드림을 받아들인 듯, 심장도 함께 세차게 맥동했다.
“푸아앗!”
심장이 세찬 고동을 반복하면서 숨결이 다시 들락였다.
투란은 거센 숨소리를 내며 입을 열고 더 많은 숨을 들이켜려는 듯이 헉헉댔다. 그러는 사이에 몸은 바로 일으켜 앉았고, 할짝대는 감각이 남은 팔다리를 마구 긁적이며 뭐든 달라붙었다 싶은 느낌이 있으면 쳐 내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바로 일어서면서 허리도 긁적이고 붙은 것을 떼는 손짓을 되풀이하며 봤다.
도대체 뭐가 그리 할짝였을까?
혀가 아니었다.
사람 입에서 나온 것이든 짐승 입에서 나온 것이든, 혀처럼 생긴 것은 없었다.
그냥 손바닥 크기 정도로 길고 넓적한 풀잎이 잔뜩 돋아 있을 뿐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그 풀잎들이 말리고 펼쳐지고 흔들거리면서 그의 팔다리, 허리가 닿았던 지점을 더듬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투란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가라앉은 안개에 촉촉이 젖은 풀잎들은 그의 기분 따위 아랑곳없이 방금까지 열심히 할짝대던 것이 사라진 상황에 저항하듯이 굽어지고 흔들거리면서 힘껏 몸을 뻗어 움직이고 있었다.
‘아, 뭔가 잡아먹는 놈인지도…….’
몬스터가 아니라도, 벌레를 잡아먹는 꽃이라든가 잎사귀라든가 하는 것이 세상에 있다. 그게 몬스터 레벨로 등장하면 사람도 짐승도,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사라든가 어금니 긴 큰 덩치 짐승이라도 붙들고 쥐어짜 씹어 삼키는 것이고.
투란은 그것들이 손바닥 정도 크기라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풀밭의 전부가 그런 놈들이라면 할짝거림에 언젠가 살갗이 발려 나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은 돌연 투란에게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혹시 이미 잡아먹혀 뼈만 남은 잔해 같은 것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투란은 자신이 어디 있나 의아해지고 말았다.
날름대는 혓바닥 같은 풀잎까지 덮은 안개, 그러나 사방을 다 덮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 자리의 한쪽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구멍, 거기서 흘러나오는 안개였다. 그가 열심히 기어 나온 바로 그 구멍에서!
한데 이 구멍은 왜 기울어져 있는가?
어째서 갑자기 투란이 서 있는 곳을 바닥으로 삼아 저 높은 곳을 향한 듯한 비탈이 이어지고, 거기에 절벽의 구멍이 있는가?
답은 간단했다.
주변의 풍경이 싸악 변해 있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절벽 꼭대기라 할 수 없었다.
구멍에서 나오는 안개는 오직 구멍 주변만을 메웠고, 투란은 그저 그 안개의 영역에 반만 발을 걸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꽈악 조여드는 듯한 기분 속에서 투란은 침착하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불쑥 가슴에 손을 대 보니, 악마의 심장이 내는 고동이 바로 느껴진다.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그 두근거림은 곧장 악마의 심장이 부여하는 섬세한 촉각에 의해 파악되는 상태기도 했다.
‘아까 그거 없나?’
미묘한 아쉬움이 투란을 생각하게 했다.
심장이 움직이면서, 온몸에 미세하게 번져 있는 넝쿨의 감각이 한꺼번에 살아났다. 섬세하고 시각처럼 정교한 ‘지각’이 분명히 돌아왔다. 하지만 이는 투란이 거의 기절한 상태에서도 정신을 차리게 해 준 그 문장의 여린 힘, 파문과는 달랐다.
악마의 심장이 맥동하며 일으킨 피의 흐름과 격한 자극이 몸을 채우자, 그 여린 파문은 마치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이 사그라들어 느껴지지 않았다.
‘없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다시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애써 봐도 그 여린 힘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 정체가 뭔지 잔뜩 의심만 하게 해 놓고, 투란이란 무대에서 퇴장해 버린 것이다.
이제 다시 투란이 몸 상태를 점검하려면…….
꼬르륵.
그때, 배에서 기다렸다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배고프다. 양분이 필요하다.
소리와 걸맞게 선명한 ‘사고(思考)’가 가슴에서 느껴졌다.
투란은 곤혹스러웠다.
분명히 위장이 비어 있는 상태는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배고픔을 생각할 때가 아니잖은가?
―배고프다! 먹어야 한다! 회복해야 하잖아, 몸!
투란이 막연히 먼저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고 결심하려는 순간, 강하게 심장이 맥동하며 ‘사고’를 밀어붙였고 머리를 그 생각으로 채우려 했다.
“닥쳐.”
투란은 입을 열고 내뱉은 다음, 손으로 이마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가슴에 자리 잡은 악마의 심장 안에서 자신이 생각하기도 했잖은가?
그런데 지금 이건 뭔가?
어째서 심장 안에 자리 잡은 투란, 자신은 없고 배고픔만 들이대며 생떼를 쓰려는 이상한 생각이 툭 튀어나오는가?
―필요하다! 나…… 아니, 우리에겐 먹을 것이 필요해!
한 번 더 세차게 심장으로부터 밀려 나온 생각이 투란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젠장, 그런 거였나…….”
몬스터의 본능, 악마의 심장이 만들어 낸 흉내에 불과한 마음 상태를 투란은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래 그 마음 상태는 악마의 심장이 깃들인 자에게 그게 뭔가 알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마음 상태—의식—에 이른 자의 본래 마음을 덧씌워서 악마의 심장이 주도권을 쥐고 움직이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몬스터에게 홀린 경우는 악마의 심장이 아니더라도 많았다.
라미아의 미모에 홀려서 산 채로 잡아먹히고 그 위장 속에서 기뻐 울부짖는다는 것도 그렇고, 사이렌의 노래에 홀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환희에 가득 찬 함성을 지른다는 것도 그랬다.
그런 식으로 먹이를 홀리는 경우랑 다르게, 홀린 사람 혹은 짐승을 둥지로 삼아 움직이는 놈들도 있었다.
투란이 듣기로 그중 끔찍했던 이야기는 블러드플라이의 둥지가 된 사내의 사연이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몸에 블러드플라이 떼가 들락거리고 있었는데, 온전하게 생각할 수 있길래 도시로 찾아왔다는 사내. 하지만 사내는 도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해체했다. 블러드플라이가 배고파한다고.
웃고 떠들고 제대로 대화도 할 수 있었지만, 사내는 블러드플라이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꺼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 그런 몬스터를 삼키고 제압해 자신의 의지 아래 복종시키기 위해, 몬스터 로드에게는 부적이 필요하다고 했다.
투란에게는 없는 부적이.
“쳇! 그런 거 원래 없어도 된다고 하더라. 옛날에는, 그러니까 괴물 왕자가 왕자님 자리에 앉기 전 시절에는 몬스터 로드 중에서 부적 갖고 다닌 사람이 없었다던걸.”
‘그랬을까?’
툭 튀어나온 기억을 붙잡으며 투란은 생각해야 했다.
투란은 몬스터 로드이기에, 악마의 심장이 덧씌우려는 자신의 흉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본능을 부적 없이 억누르고, 자신의 의지에 따르게 할 수 있을까?
정말로 투란은 생각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