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0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00)
끼이익.
느슨하게 울린 돛대의 소리가 투란을 눈뜨게 했다.
스쳐 가던 바람은 잔잔해져 있었고, 배는 고정된 채로 요람인 마냥 부드럽게 흔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조그마한 소리는 여러 사람이 거리를 두고 오가는 중이란 것을 깨닫게 해 줬다.
발딱 일어나 앉으며 투란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뱃전에 기댄 채로 선 쥴과 눈이 마주쳤다.
“깼냐? 잠버릇 그렇게 웃길 줄은 몰랐는데, 긴장 풀고 편히 자면 그러냐?”
바로 눈을 끔벅거리는 투란에게 이리 묻고 있었다.
“잠버릇?”
투란이 조금 맹하니 대꾸하니 쥴이 키득거리면서 흉내 내듯 말한다.
“썩을, 망할, 두 마디는 기본이었고 거기다가 뭐랬더라……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해라? 무슨 강아지라도 길들였냐? 하여간…….”
“내가 잠꼬대를 했어요?”
더 이어지려는 놀림을 가로채듯이 투란은 되물어야 했다.
‘진짜냐?’
―아마도? 그저 입 밖으로 몇 마디씩 새어 나가기는 했다만, 구체적인 문장을 이루는 말은 없었을걸?
드라고니아에게 확인하니 애매하고 묘할 뿐이다!
‘이상한 버릇 생긴 거야?’
살짝 움찔하는 채로 투란은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버릇이라기보다는 안전한 영역 안에 있을 때는 살짝 풀어질 뿐이라고 해야겠지. 위험하지 않을 때는 수면 중에 뒤척임을 하는 정도? 그냥 그뿐이다.
드라고니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쥴은 투란이 눈가를 실룩이며 짓는 표정을 보다가 느릿하게 다시 말문을 연다.
“잠버릇을 전혀 몰랐냐? 하긴…… 이리저리 돌봐 주는 요정이 붙어 있으면 그리 조심하지 않아도 되긴 하지. 풋! 야, 야,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초보 사냥꾼이 가는 곳마다 긴장했다고 똥오줌 싸질러 놓고 뭘 잘못했나 모르겠다고 우기는 일이 아니잖아. 뭐, 너 그러는 꼴 보고 툴로쉬는 꽤 좋아하고 안심하는 모양이니까 그쪽으로는 오히려 잘했다고 해야겠지.”
“어? 툴로쉬는…… 없네요?”
줄줄 흘러나오는 말에 맹하던 투란은 갑작스럽게 언급된 툴로쉬의 이름에 흠칫하다가 물어야 했다. 배는 요람처럼 멈춰서 있고 쥴은 뱃머리에서 느긋한데 정작 이 마법의 배를 소유한 주인이 이 자리에 없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주인 없이 손님만 덩그러니 남겨진 꼴 아닌가?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누군가랑 저 너머에서 만나고 있는 것뿐이야.
드라고니아가 툴로쉬의 위치를 놓친 적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쥴 또한 말하고 있었다.
“잠깐 볼일 보러 갔어. 저 언덕 너머, 이쪽 작은 숲 그늘에 우릴 떨궈 놓고 말이지. 뭐, 엘더 헌터의 일거리일 테니까 우리도 떨어져 있는 편이 좋기는 해. 괜히 곁에 있다가 엉뚱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잖아?”
“노래하는 술꾼과 엮이고 싶지는 않기는 해요.”
투란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쫓아가서 쳐 죽이는 일만으로도 벅차고 힘든 것이 몬스터 사냥인데, 거기에 몬스터의 자식이라든가 그 자식을 품은 어미라든가 하는 일이 인간적으로 엮이면 이모저모로 훨씬 피곤할 뿐이니까.
쥴도 어깨를 으쓱하면서 슬쩍 고개를 돌린 채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맞아, 엮이면 엮일수록 피곤하지. 뭐, 그런 일은 툴로쉬에게 맡겨 두고…… 투란, 이제 어쩔 거냐? 이 언덕 너머에 쥴이 볼일 보러 간 곳이 바로크 왕국 경계 도시거든. 뭐,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상아탑의 지부가 있고, 단숨에 상아탑으로 보내 주는 마법도 돈 받고 써 주거든. 이대로 너 왔다는 곳, 알드바인으로 돌아갈 거냐? 아니면 모처럼 왔는데, 바르코 왕도로 날아가서 구경 좀 하다가 갈 거냐?”
“에? 구경?”
투란은 ‘딱히 남은 일은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다가 움찔했다.
듣고 나니 바로크 왕국으로 들어섰던 적이 없잖은가?
돌이켜 보니 투란이 거점으로 삼은 알드바인은 들어 본 적도 없는 브로큰 킹덤의 한구석이 아니던가!
그렇게 거점을 확보하고 나서 뭘 하려고 했던가?
“어라?”
멍한 소리가 저절로 투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응? 왜? 뭘 잊고 있다가 생각해 냈는데?”
쥴이 호기심 가득 찬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아니, 그냥…… 언젠가 바로크 왕국도 들러 보고 에테온 왕국도 들러 보고…… 막 그런 상상을 했는데 여태 기회가 없었네요?”
생각해 보니 왠지 어이가 없어서 투란은 자신도 모르게 새는 웃음과 함께 대답을 하고 말았다. 열심히 키린에게 들은 바대로 실천하는 중이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정작 여행해 보겠노라 생각했던 쪽으로는 전혀 움직인 적이 없다니…….
투란의 태도를 보며 쥴이 눈을 반짝이는 채로 슬그머니 투란 쪽으로 스르륵 뱃전을 타고 미끄러지면서 묻는 것처럼 말한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가 아닐까? 알드바인의 대마법사님께서 무척이나 투란에 대해 생각이 많다며? 툴로쉬가 겨우 널 빼내…… 아니, 간절히 요청해서 여기까지 불러올 수 있었다잖아. 그러니까 다시 그 대마법사 품속에 들어가면, 언제 또 이렇게 느긋하게 잠꼬대하며 여행할 일이 생길까? 기왕 나온 김에 바로크 구경도 좀 하고, 브로큰 킹덤과 다른…… 아, 너 원래 어디 출신이냐? 춤추는 산맥 밖에서 오진 않았을 테고, 생김새로 봐서는 딱 로그람이나 기가둠, 솔로얀 같은 남방 쪽 같은데?”
주렁주렁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주절주절 이어지는 목소리 틈새로 투란은 확실하게 설득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반쯤 그리 생각하고 있던 일인데, 거기에 쥴의 유쾌하고 큰 목소리가 담기니 제법 그럴듯하잖나.
―야, 널 찾아 멀리서 온 손님까지 있잖아?
드라고니아가 기울어지는 투란의 마음을 다른 쪽으로 밀듯이 말했다.
‘응? 아…… 라카샤!’
투란도 퍼뜩 알드바인에 이런저런 일이 쌓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하클 영감에게 돈을 맡기고 받기로 했던 장비라든가, 일단 알드바인에서 보자고 했던 키유나라든가, 비슷한 경우이지만 꽤 다른 상황인 라카샤라든가…… 언더섀도우부터 함께 온 재상 영감님이라든가!
슬쩍 떠나 있다가 돌아간 알드바인에서 할 일을 전부 미뤄두고 갑작스럽게 엘더 헌터에게 협력하려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큰일이 끝났으니 이제 자잘한 일이 남겨진 거처로 돌아가야 할 터이기는 한데…….
‘잠깐 구경하고 가도 되잖아? 어차피 마법으로 휑하니 날아갈 예정이니까.’
―잠깐? 구경? 지금 네 마음속에는 바로크부터 시작해서 에테온을 거치고 솔로얀을 지나 곧바로 로그람으로, 그 국경을 따라 샤오콴 마을까지 내달리고 있는 풍경이 둥둥 떠다니는데?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내심을 짚으면서 어이없어했다.
‘어? 풍경? 야, 가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상상만 해 본 거잖아!’
슬쩍 부정하려다가 투란은 웅얼거리면서 변명해야 했다.
확실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홀시딘이 대마법사가 되어 시크릿키퍼 노릇을 해 주는 알드바인에서의 거점은 꽤 튼튼한 경우였다. 거기에 엘더 헌터인 툴로쉬랑도 어울린 참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지금 당장 시알라 남매가 단단히 자리 잡고 기다려 주는 알드바인으로 서두를 필요는 없잖은가?
지금 투란으로서는 몇 년이 지난 지금의 샤오콴 마을 쪽이 꽤 궁금했다.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는 투란을 보며 쥴이 키득거리며 더욱 짙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기댄 뱃전을 더 미끄러져 다가오면서 말한다.
“눈알 돌아간다, 돌아가! 으하하핫, 가고 싶은 곳이 어디야?”
“아니, 뭐…….”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투란은 고개를 젓지 못했다.
어째서인가 점점 더 여행이라는 부분에 강렬한 충동이 치솟는 것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투란이었다. 그리고 이런 충동은 지금 투란에게 뭔가 해괴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어째서지? 가만히 틀어박히는 것만 좋아하는 녀석을 삼켜서 열심히 설득한 탓인가?’
로열젤리 슬러그, 그 게으름뱅이의 성질을 따라간다면 그냥 돌아가 처박힌 채로 뒹굴뒹굴하며 세상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듯이 지낼 터였다. 하지만 투란은 그 게으름뱅이를 열심히 설득했고, 그 영향력을 잔뜩 줄여 놨다. 한데 지금 느껴지는 이 충동은 그 설득이 어째서인가 투란 자신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는 듯하잖나.
세상 넓으니 어서 둘러보고 구경하라고, 단단히 굳혀 놓은 거점 일은 나중에 생각하라고……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을 더 세상 구경하고 돌아가도 다들 괜찮을 것이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린 시절부터 꿈꿔 왔던 여행을 해 보자고 하는 충동이 무럭무럭 커지면서 가슴을 두근두근 울리고 있었다.
―딱히 나쁜 생각은 아니다만, 쥴이 널 홀리는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고. 저 하이로드는 네가 대마법사랑 친해서 상아탑의 영향 아래에서 움직이는 부분을 꽤나 거슬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
드라고니아가 가만히 건네는 말이었다.
투란은 이를 곧바로 입으로 꺼내 쥴에게 묻는다.
“알드바인으로 돌아가서 상아탑의 대마법사님이랑 친하게 지내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잖아요? 지금보더 더 친해지면 마법으로 휭휭 더 쉽게 여행할 수도 있으니까.”
“잉? 바람의 길 말이냐? 그 마법은 돈만 주면 그냥 써 주잖아! 뭐야, 설마 금광 한두 곳 모르는 거냐?”
쥴이 삐딱하니 갸웃하는 시늉을 하면서 되묻고 있었다.
―뭐? 금광 한두 곳?
드라고니아가 흠칫하는 시늉을 했다.
투란은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흠칫해서 바로 되물어야 했다.
“알아요? 금광 몇 곳, 그냥 알고 있는 거예요? 혹시 남는 금광…….”
“야, 야! 산맥 깊은 곳을 싸돌아다니다 보면 드레이크라든가 기간틱 웜이라든가 갈아엎어 놓은 곳도 볼 수 있잖아! 몬스터 중에서 금은 캐서 쓰는 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굳이 진짜 금이 아니더라도 상아탑에다가 안에서 잡은 몬스터 조각 몇 개 넘기면 금전적인 여유는 넘쳐날 텐데? 너, 설마 금이 그냥 좋은 거냐?”
반짝거리는 투란의 물음에 어이없어하며 말을 자른 채로 떠들던 쥴이 겨우 납득할 구석이 보인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그야말로 투란이 그냥 돈을 좋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금광 따위에 연연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태도였다.
“그야…… 좋잖아요? 도시에서 갖고 싶은 것 있으면 언제든 구할 수도 있고, 상아탑이나 길드 계정에 넣어 두면 아쉬움 없이 어디서든 쓰고 싶을 때 쓸 수도 있잖아요? 뭐 갖고 싶은데 모자라서 결국 사냥 한번 더 나오는 짓 따위 안 해도 되고…….”
“하, 하, 하.”
쥴이 살짝 억지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 쥴도 고개를 삐딱하니 기울인 채로 끄덕이며 말을 보탠다.
“뭐, 틀린 말은 아니야. 급할 대 금전 구한다고 설치는 것보다야 훨씬 똑똑한 짓이지.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일은 좋긴 좋아. 그런데…… 정말로 금광 위치가 알고 싶은 거야?”
“안전하고 주인 없는 곳이 알고 싶죠!”
냉큼 대꾸하는 투란이었다.
푸훗, 웃음을 짧게 흘리고 나서 쥴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낄낄거리고 싶은 것을 참는 얼굴로 말한다.
“아, 너 정말…… 너 혹시 크랙 출신이냐? 거기 사는 녀석들이 금광, 금맥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여유 있으면서도 꼭 너처럼 더 많이, 많을수록 좋다, 이러거든. 어? 크랙은 안 가 봤어? 호오! 바로크에서 에테온으로 가는 길목이니까 쭈욱 둘러 가면…….”
“어딜 둘러 갑니까?”
즐겁게 떠드는 쥴의 말을 툭 끊고 끼어든 것은 불쑥 뱃머리 쪽으로 올라서는 툴로쉬였다.
“어? 돌아왔냐? 갔던 일은?”
쥴이 되물었다.
툴로쉬는 조금 노려보는 눈길부터 흘리다가 대답한다.
“잘 안 풀렸어요. 아무래도 신전의 탈출 마법으로 단숨에 벗어난 모양입니다. 이쪽으로 피신했다가 떠나거나 한 낌새는 없어요.”
“응? 뭐가? 아, 술꾼에게 당한…… 그럼, 이제 어쩔 거야? 냅둘 수도 없잖아? 물론 내 일은 아니지만 궁금하네.”
어리둥절하다가 쥴이 이마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간신히 툴로쉬가 뭘 확인하러 갔는가 기억해 냈다는 시늉을 했다. 슬그머니 투란과 하던 이야기를 옆으로 치워 두면서 이야기를 바꾼 셈이었다.
툴로쉬는 쓰윽 눈길을 돌려 쥴을 외면하는 척하며 투란에게 말한다.
“이쪽에 있는 상아탑 지부에서 바람의 길을 타면 바로 알드바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러려면 알드바인의 대마법사, 홀시딘에게 허가를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네. 지부의 마법사가 단독으로 그 먼 거리를 수송해 줄 수는 없다고 해. 어때, 투란. 바로크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면 헌터 길드의 지부가 있고, 거기라면 굳이 마법사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마도구, 바람의 길을 담은 마도구가 있어. 저 도시를 스쳐 가서 하루만 더 가면 되거든. 내 입장에서는 갑자기 대마법사랑 친분이 있는 누군가가 도시에 나타나는 것보다는 하루만 더 함께 갔으면 좋겠는데.”
“툴로쉬, 설마 하루 안에 무슨 몬스터를 만날 예정인 거냐?”
쥴이 투란이 뭐라 하기 전에 끼어들었다.
투란은 쓴웃음을 지었는데, 문득 툭탁거리는 쥴과 툴로쉬의 모습에서 낯설면서 낯익은 다른 이의 잔상(殘像)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프릿……?’
무슨 상황인가 기억이 흐릿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언더섀도우에서 겪은 듯한데…… 의아함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마치 자신에게 ‘아직은 아냐.’라는 소리를 듣고 금세 고개를 돌린 것처럼.
망각의 바람이 스쳐 간 다음에는 쥴과 툴로쉬의 모습과 제안이 더욱 선명하게 투란의 눈과 귀를 덮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