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1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05)
흐릿한 눈알 위로 눈동자를 대신해 있던 무늬가 하나로 뭉쳤다. 무늬는 빛을 머금었고 환하게 눈알을 물들이다가 눈길을 대신하는 듯한 섬광을 뿜어냈다.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관통하고 꺾어 버리는 파괴적인 섬광이었다.
하지만 흰머리 수리가 눈을 부라리며 내뿜은 그 섬광은 영롱하게 앞을 가로막는 수정의 방패, 물방울이 어우러지며 완벽한 거울을 이뤄 낸 벽과 부딪혀 곧바로 드높은 창공(蒼空)으로 꺾여 올라갔다.
투우웅.
뒤늦게 단단한 벽을 울리는 듯한 음향이 퍼졌다.
‘이게 무슨 이글베어야앗!’
투란이 내밀고 있는 왼쪽 팔뚝에는 ‘크리스탈 애쉬’로 빗어내고 아쿠아가 깃들여 만들어진 수정의 방패가 방벽처럼 크게 돋아난 채였다. 맑은 물이 세상을 비추듯, 이 수정 방패가 이글베어여야 했을, 하지만 이글베어가 지니지 못한 파괴적인 눈빛을 뿜어내는 모습을 비춰 내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파괴적인 눈빛이 벼락 줄기처럼, 꼿꼿하게 뿜어낸 섬광을 그대로 반사시켜 맑고 푸른 하늘로 날려 버렸다.
투란의 움직임은 그렇게 튕겨 내고 불평하는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돌진했고, 오른팔을 대신해서 돋아난 듯한 시커먼 테두리를 지닌 칼날을 그어 내서 외모만큼은 분명히 이글베어인 괴물을 베어 냈다.
흰수리 머리의 목덜미가 절단되었고, 양쪽 어깨가 끊어진 다음에 두 발목과 무릎이 다른 방향으로 비켜 나가듯이 미끄러지며 이미 절단된 상태인 것을 드러냈다.
―꽤나 특이한 변종인데…… 야, 이거 네가 며칠 도시에서 빈둥거리며 본 현상수배지에 올라 있는 놈 아닌가? 뭐랬더라, 음…… 아, 그래! 파괴(破壞)의 안광(眼光)을 사용하고 뇌격(雷擊)을 두른 이글베어 형태의 몬스터! 이놈 맞나 본데?
‘알고 있으면서!’
뒤늦게 절단 난 이글베어에 대해 떠드는 드라고니아, 투란은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드라고니아는 한층 더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탐색을 봉쇄하는 능력까지 있거든? 아무래도 뇌격, 아니 뇌전이라고 해야 할 힘이 몸을 감싸고 탐지를 막는 장막 노릇도 하는 듯하네? 게다가 그 힘을 눈알에 집중해서 뿜어내는 것이 저 파괴의 안광인가 보고…… 투란, 이거 조두웅신(鳥頭熊身) 형태의 몬스터 중에서 희귀한 놈인가 보다. 상금도 꽤 걸려…… 삼키냐?
가만히 듣고 있던 투란이 토막 난 이글베어의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는 시커먼 잉크를 흘린 다음에 단숨에 핏빛 고리를 퍼뜨리며 그 정수를 끌어당겨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둥그렇게 퍼진 잉크의 외곽을 따라 불길이 이글거렸고, 흙덩이가 꿈틀거리며 이글베어의 다른 흔적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뭐야? 뭘 하려고?
‘지워 두려고.’
간단한 대답과 함께 투란은 숨을 골랐고, 문장 속에서 얌전히 담긴 희귀한 이글베어의 형상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손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불기둥이 소리 없이 하늘 높이, 아까 전에 튕겨 올라갔던 파괴의 섬광처럼 솟구쳐 올랐다. 불기둥의 뿌리가 되는 땅바닥이 검게 그을렸고 담긴 흔적을 잿더미로 뭉개며 갈려 버렸다.
‘이제 시침 떼면 돼.’
―시침?
드라고니아가 황당해했지만…….
“무슨 일 났어요?”
숲에서 나온 투란은 놀라고 있는 그란과 사르굴을 향해 주섬주섬 허리춤을 챙겨 차림새를 단장하는 시늉을 하면서 태연하게 묻고 있었다.
그란과 사르굴은 투란이 나온 방향을, 그 어깨 너머를 흘깃하다가 조금 벗어난 다른 쪽을 가리키며 되묻는다.
“못 봤나?”
“번쩍하고 화르르 하고! 뭐가 솟아올랐잖아!”
투란은 눈을 껌벅이며 둘이 가리키는 쪽을 보는 척하다가 갸웃하며 자신이 나온 쪽을 어깨 너머로 손가락질하며 대답한다.
“숲이 우거져서, 주변이 잘 안 보였는데요.”
그란이 눈살을 찌푸렸고 사르굴은 투란이 나온 방향을 보다가 납득했다.
“아, 그러네. 저 정도면…… 소리가 크게 난 것도 아니긴 하니까…… 아니, 이게 아니고! 어, 아란! 아란도 봤죠! 저 너머에서 뭔가…….”
“봤다. 그란, 사르굴. 정찰해 줄 수 있겠나?”
가까이 다가온 아란은 냉정하게 사르굴의 말을 자르며 부탁하듯 지시하고 있었다.
사르굴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금방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란은 말없이 도끼를 바로 잡으며 먼저 걸음부터 내딛고 있었다. 둘이 그렇게 저편으로 정찰을 가고 난 다음에 아란이 투란에게 가까이 붙으며 나직하니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현상금 걸린 흰수리 대가리 곰탱이였나?”
―응? 이 인간, 어떻게 알았지?
투란이 뭐라 하기 전에 드라고니아가 놀라서, 어이없어 갸웃하고 있었다.
이미 훤히 간파한 듯한 그 말투, 그저 다음의 상황을 고려해 확인하는 태도를 알아차렸기에 투란도 간략하고 솔직하게 답한다.
“네. 좀 위험해 보여서…….”
벼락처럼 토막 내서 패 죽였다는 말은 더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란은 다 들은 듯이 안도하며 속삭인다.
“많이 위험했군. 다들 엉긴 채로 싸울 때 주변을 다 망가뜨리는 놈이니까…… 고마워. 자네를 소개해 준 분께도 정말 감사해야겠어. 아, 혹시 뒷정리할 일은 있는 건가?”
“아뇨.”
다시 한번 간단히 대답하며 투란은 살짝 멋쩍은 낯빛이 되었다.
마치 쥐도 새도 모르게 현상금을 독식하려고 치워 버렸다는 듯한 상황이니까.
하지만 아란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납득하고 한층 더 안도한 모양이었다.
“고맙네, 아주 다행이야. 파괴의 섬광을 봤다는 증언은 내가 따로 모아 주지.”
“어? 아, 네…….”
움찔하다가 곧 무슨 까닭인지 깨닫고 나니 투란은 한층 더 멋쩍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응? 무슨 얘기냐?
‘어? 그니까 몬스터 중에 쳐 죽이고 나면 흔적도 없이 뭉개지는 놈들 있잖아. 그럴 때는 사냥한 사람 곁에서 누가 봤다고 대신 길드에 말을 해 줘야 하거든. 그러면 어떻게든 나중에 보상금을 받을 수 있어. 뭐, 대강 그런 얘기야.’
―그렇군.
드라고니아는 더 캐묻지 않고 납득한 듯했다.
* * *
캐러반은 다시 둘로 갈라져서 움직였다.
짐을 나눴지만 마치 서로 가던 길을 그냥 간다는 것처럼.
그 틈에서 투란은 여전히 그란과 사르굴 사이에 앉아서 구경꾼 노릇을 하는데, 그란과 사르굴의 심각한 분위기가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찰을 다녀온 둘은 투란이 남겨 놓은 흔적, 불기둥과 그 잿더미의 광경을 보고 와서 크게 떠들었고…… 주로 사르굴이 큰 소리를 냈고 그란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리는 모습이었지만, 둘의 정찰 결과는 이 주변에 어쩌면 낯설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얼쩡거릴 수 있다는 경고로서 상단 전체를 긴장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한참 떠들고도 긴장한 사르굴의 태도, 이를 부추기며 전혀 부정하지 않는 그란의 모습이 호위를 비롯한 짐꾼과 상인들까지 모두 잔뜩 긴장하게 만든 셈이었다.
그 분위기가 얼핏 봐도 조금 답답해서인가.
―그냥 쳐 죽였으니 문제없다고 말하면 쉽잖아? 왜 아란은 그 부분을 말하지 않는 거냐? 네 비밀이야 지켜 주고 말해도 되잖아?
한참을 지켜보던 드라고니아가 의아함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야…… 너무 풀어지면 위험에 쉽게 휘말리니까. 아직 에테온의 길목에 들어서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을걸? 국경 넘어서 에테온의 영토 안이 되면…… 어? 저게 왕의 가로등인가 봐!’
적당히 대꾸하며 멀뚱거리고 있던 투란은 문득 짙게 풍겨오는 기묘한 냄새, 후각(嗅覺)이 아니라 분위기로 느낄 수 있는 냄새를 킁킁거리며 소리 없이 외쳤다. 드라고니아 또한 상단의 긴장된 모습보다는 에테온 왕국의 가로등 쪽이 흥미롭다는 듯이 대꾸한다.
―그렇군, 또 변했나?
‘어? 변해?’
―고대 마법을 부활시켰다고 소문났다만? 그 뒤로 고대의 시설, 한번 망가졌거나 못 쓰게 된 물품들을 하나씩 복구하고 복원하고 있었잖아. 저 가로등도…… 원래는 저렇게 가로수 안에 처박아 두는 물품은 아니라 들었다만, 좀 묘하게 복구해 놨구먼.
‘그래?’
투란은 갸웃했다.
포석이 깔린 도로는 마차 서너 대가 나란히 서서 움직일 정도로 폭이 넓었다. 그 도로의 좌우로 울타리를 만들려다가 만 듯이 나무가 듬성듬성 간격을 둔 채로 심어져 있는데, 그 나무의 적당한 높이에 옹이구멍이 파여 있고 구멍 안에서 툭 불거져 나온 초롱 등불이 도로를 비춰 내고 있었다.
마치 왕의 대로는 당연히 밝혀져야 한다는 듯한 기묘한 등불의 빛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은은한 마력이 배어 나오는 중이기도 했다.
‘무슨 마법이냐?’
―파사(破邪), 파마(破魔). 몬스터에게 거부감을 부여해서 접근을 막는 형태의 마법, 그런 계통의 힘이 담긴 불빛이야.
‘아하…… 저게 반역의 패왕이 베푼 자애(慈愛)의 등불이구나.’
―그래, 키린의 아버지 되는 작자가 복구한 것이지.
키린을 되뇌며 드라고니아는 떨떠름한 듯이 웅얼거렸다.
투란은 그 웅얼거림과 함께 주변에서 고요함을 깨며 살짝 안도하는 낌새가 번져 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호의 등불이야.”
“어? 벌써?”
“후아,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
“야, 너무 마음 놓지 마!”
“마음 놔! 젠장, 저걸 무시하는 몬스터면 뭘 해볼 틈도 없을 테니까.”
“재수 없는 소리 말고 긴장 풀지 마라!”
투덜거리고 툭탁거리는 소리들…….
투란은 다시 한번 ‘가호의 등불’, 멀리 소문으로 들을 때는 왕의 자애가 담긴 등불이라서 ‘자애의 등불’이라고 불리는 가로수 안의 묘한 마법 등불을 바라봤다. 그 불빛에서 여린 마력이 쉴 새 없이 배어 나오고, 사람을 다독여 주는 느낌이 짙었다.
‘키린이랑 닮았네.’
―뭐?
‘그렇잖아, 내가 키린을 만나서 느낀 것 같다고.’
―무슨 헛소리야!
등불의 낌새가 키린을 떠올리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데, 드라고니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투란으로서는 그런 드라고니아를 향해 그저 낄낄거리며 웃어 줄 뿐이지만, 정작 얼굴에 떠올린 것은 편안함이었다.
가로수의 그늘 아래를 밝혀 주며 멀리 이어진 대로를 인도해 주는 듯한 불빛에서 한없이 그런 느낌이 짙게 배어 나오니까.
‘뭐, 어쨌든…… 드디어 키린 왕자님의 나라를 구경하는 거라고! 야, 뭐 꼭 들러 봐야 하는 것 없냐?’
―들러봐? 에테온 왕도라도 구경하면 되잖아. 고대의 마법이 가장 먼저 복구되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니.
‘으흠, 왕도 가기 전에는 없냐? 이런 국경 가까이 있는 도시라든가…….’
―지금 저 녀석들이 떠드는 거?
‘어?’
투란은 뒤늦게 곁에 앉은 사르굴 너머에서 사르굴에게 뭔가 묻고 있는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어이, 정말 요새 살룬 성이 그렇게 변했어?”
“뭐가 그렇게인데?”
심드렁하고 귀찮아하는 사르굴의 대답인데, 그 목소리는 어쩐지 ‘더 물어, 더, 더!’라고 보채는 듯하다?
“위키드랜드처럼 도박장이 많아졌다며?”
“아, 그거…… 뭐, 살룬 성주가 금전욕이 강하니까. 뭐야, 너네 아직 살룬 성에 안 가 본 거냐? 이 상단 여정이 허구한 날 살룬 성 주변을 맴도는데, 한 번도 안 가 봤어?”
“에이, 가 보긴 했지. 하지만 그건 변하기 전이고, 아무튼 정말로 도박장이 그렇게 많이 생긴 거야?”
“으흠, 이전보다 더 늘었을지도? 뭐, 지금 도착하는 곳에서 반나절이면 갔다 올 수 있으니 가서 보면 되잖아? 어차피 대엿새 정도 머물 예정 아니었나? 어이, 그란! 너 뭐 예정 들은 것 없냐?”
사르굴이 떠들다가 투란 너머로 물었다.
투란은 그 물음에 따라 고개를 돌려 그란을 봤다.
그란은 낯을 구기고 투란을, 투란 너머의 사르굴을, 그 너머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궁금해하는 일행을 보고는 퉁명스럽게 답한다.
“모른다. 아란 대장에게 물어봐.”
하지만 사르굴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란에게 묻는 일은 없었다.
아란은 마차 지붕 사이를 건너다녔고, 지금은 다른 마차 지붕에 올라 뭘 물어볼 거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모두의 관심이 살룬 성에 모인 채로 다시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 갔고, 그 덕분에 투란 또한 살룬 성에 대해 적잖은 호기심을 품을 수 있었다.
―가서 도박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누가 도박 같은 몹쓸 짓을! 그냥 구경만 하고 싶어. 왜 도박이 몹쓸 짓인가, 몹쓸 짓인데 왜 그렇게들 빠져드는가 궁금하잖아?’
―누가 들으면 도박 구경 한 번도 안 했다고 착각하겠다? 알드바인의 주점에서 주정뱅이들이 쉴 새 없이 내기하며 도박, 도박 하고 있었잖아!
‘그거랑 같겠냐? 여긴 알드바인이 아니잖아! 응, 분명히 색다를 거야!’
―헐?
‘다를 거야, 분명히!’
투란은 기대를 부풀렸다.
에테온은 반역의 패왕과 괴물 왕자님의 나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