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1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06)
Chapter 222. 춤추는 여로 II
상단이 멈춘 곳은 거대한 성벽의 앞, 성 밖에 세워진 기묘한 마을의 한구석에 붙은 광장이었다. 굳이 성안으로 들어설 필요가 없다는 듯, 짐꾼들이 광장 주변에 짐을 내려놓았고 상인들은 바쁘게 거래처를 찾아 흩어졌다.
아란은 그런 풍경을 등 뒤로 하고 투란에게 다가왔다.
“여기까지……겠지?”
“네, 갑자기 끼워 달라고 했잖아요. 여기까지 함께하도록 해 줘서 고마웠어요.”
투란은 당연한 인사를 건너며 답했다.
아란은 쓴웃음을 짓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란과 사르굴이 슬쩍 떨어진 곳에 있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다들 바쁘게 여행의 피로를 풀겠다는 듯이 흩어진 채였다.
그래도 아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흘러나온다.
“길드에는 적당히 증언을 넣어 두지. 툴로쉬가 알아서 처리해 줄 거야.”
“어? 아, 뭐…… 고마워요.”
잠깐 잊고 있었기에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답하는 투란이었다.
―호오? 웬일이냐? 무슨 생각으로…… 살룬 성 구경할 생각에 보상금을 잊었던 거냐? 어이구, 그럼 그렇지.
‘시끄러워!’
마음을 울리는 드라고니아의 핀잔을 외면하면서 투란은 슬쩍 아란에게 묻는다.
“살룬 성을 구경하고 가 볼까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 거죠?”
“살룬? 혹시 도박장 구경해 보려고? 거기 가지 않아도 저 성안으로만 들어가도 먹고 놀고 내기할 수 있는 펍이 한가득해. 뭐, 살룬의 도박장은 위키드랜드를 꽤나 흉내 낸 시설이 많다고 하긴 하더군. 아, 쓸데없는 소리가 길었네. 어쨌든 살룬으로 가려면 여기 성벽을 지나치긴 해야 해. 살룬은 이 대방벽의 안쪽에 자리한 안전한 도시이니까.”
“대방벽? 여기서부터였어요?”
투란이 흠칫 놀라 다시 높이 솟은 에테온의 이름모를 성벽을 바라봤다.
아란은 투란과 나란히 서면서 입술을 축이는 쓴웃음과 함께 말을 잇는다.
“최근에 확장을 끝낸 덕분이야. 원래 고대의 대방벽은 손상이 심해서 살룬 성채까지 후퇴해서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패왕께서 옥좌에 오른 다음, 꾸준히 방어선을 확장했고 여기까지 닿았지. 아마 한 사오 년 되었을걸? 저 성벽이 저 모양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은…….”
“헤에…… 고대의 대방벽이 벌써 여기까지 복원되었군요.”
적잖게 감탄하는 투란을 보며 아란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대방벽을 처음 실물로 확인한다면 놀라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다.
한데 투란의 감탄은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앞으로 이삼십 년은 더 지나야 가능했을 일이 당장 눈앞에서 이뤄진 것처럼 보는 듯한 분위기라니…… 이제 갓 스물이 넘을까 말까 하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잖은가?
그러나 아란은 굳이 짚어 묻지 않았다.
투란의 역량 또한 그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어쩌면 겨우 열 살 언저리에서 어른처럼 살아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조금 더 깊은 감회에 아란이 빠져들 듯한 순간.
“아란! 불러요.”
사르굴이 저쪽을 가리키며 외치고 있었다.
투란과 아란이 고개를 돌리니, 상단을 이끄는 상인 중 하나가 손짓하는 모습이 바로 보였다. 아란이 몸을 돌리며 나직하니 숨을 고를 때, 투란이 재빨리 말한다.
“그럼, 가 볼게요.”
“평안한 여행이 되길 빌겠어, 투란.”
“아란도요…… 어, 거기 그란 아저씨랑 사르굴 아저씨도요!”
가까이 있는 아란에게 작별하다가 둘의 낯짝을 향해 인사를 더해 주는 투란이었다.
그란이나 사르굴이나 새삼 투란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표현할 낌새는 전혀 없이 그냥 가볍게 손짓으로 마주 인사하며 가 버릴 뿐이었다.
투란 역시 작별을 했으니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대방벽의 일부라는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방벽이라…… 패왕이 큰소리만 친다고 소문이 돌았는데, 끝내 이뤄 냈군.
씁쓸함과 아쉬움, 살짝 일그러진 감탄이 섞인 듯한 드라고니아의 중얼거림이었다.
그 스쳐 보내는 듯한 몇 마디에서 투란은 문득 대방벽과 얽힌, 괴물 왕자와 얽힌 드라고니아가 난리 쳤던 사건을 떠올렸다.
‘아, 맞다! 네가 에테온 왕도에서 발작해서 미쳐 날뛰면서 가장 먼저 들이박은 것이 대방벽의 초석이었다며? 그거 부서졌냐? 이야기꾼이 초석을 들이박는 널 가로막는 얘기로 바로 넘어가서 결국 부쉈나 안 부쉈나를 말을 안 하거든. 어떻게 되었어?’
―초석이 부서졌으면 여기까지 대방벽의 마법이 이뤄졌겠냐!
‘네가 부수고 나서 에테온 궁정 대마법사가 수리했을 수도 있잖아. 이 대방벽을 이루는 고대 마법은 궁정 대마법사가 복원한 거라던데?’
―그 작자는 그냥 맥이 끊어진 부분을 보강만 했을 뿐이야! 고대 마법을 그렇게까지 완전히 해석은…… 젠장, 안 부쉈어! 초석에 닿기 전에 키린과 부딪혔다고! 더 묻지 마!
‘헤에…….’
살짝 키득거리는 표정만 남긴 채로 투란은 이야기를 멈췄다.
마법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보다 눈앞에 높이 치솟은 대방벽의 한 귀퉁이라는 성벽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높이만 봐도 거의 사오십여 미터는 될 듯해 보였고 성벽 아래에 열린 커다란 문과 통로는 두께 또한 수십 미터라고 증명하는 광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백여 미터짜리 거인이거나 날개 달린 경우가 아니라면 일단 어떤 녀석이라도 올려다봐야 할 수준이었다.
‘등불보다 강력한 마력이 느껴져. 역시 어정쩡한 수준인 몬스터는 이 방벽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꺼리겠지?’
―애초에 그럴 목적인 마법이니까. 등불이야 그저 느낌 정도로 몰아내는 수준이겠지만, 이 방벽은 다가오는 몬스터를 요격할 수단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마법으로 돌을 쌓은 것이 아니고, 안팎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전투할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지. 쉽게 말해서 어지간한 범람 정도는 기본적으로 배치된 병력만으로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단 얘기다.
‘바로크에는 이런 것 없었는데…….’
―그야 그렇지. 고대 마법을 이 수준까지 되살려 낸 것은 에테온의 패왕이니까. 그래서 반역이니 뭐니 하고 깎아내리려 하다가도 인정하는 것이잖나.
‘다른 왕국에는 알려 줄 수 없는 마법이었냐? 바로크는 솔로얀처럼 에테온이랑 딱 붙었는데…… 솔로얀도 이런 것 없겠지?’
―왕의 혈통이 필요하니까. 에테온 역시 패왕의 반역 이전에는 순수한 왕가의 혈통을 잃은 채였고, 다른 나라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어. 패왕이 옥좌에 오르고 그에게서 허락이 떨어졌기에 대마법사가 왕가의 고대 마법을 손댈 수 있었지. 에테온 말고 다른 왕국의 상황은 바로크랑 거의 비슷할 거야.
‘흐음…… 그러고 보니 키린, 귀한 핏줄인데 이제 왕궁으로 돌아가 있으려나?’
―너랑 만나겠다고 찾아오라 한 장소는 아예 고대 왕국 여섯 어디에도 아니었다만?
‘베오기탄? 연락을 그리로 하라고 한 거지. 몇 년이 지났는데 가족을 보려고 몇 번은 들러 보지 않았을까? 어쨌든 진짜 왕자님이시잖냐.’
―흥, 그놈이 그런 자각을 하고 있겠냐? 몬스터 로드랍시고 어디선가 되먹지 못한 수작을 궁리하고 있을걸!
‘너도 참…….’
소리 없이 떠드는 사이에 투란은 열린 성문에 닿았다.
성문을 지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차례를 지키고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은 금방 눈에 띄었다. 거의 아무 일 없이 오가는 듯한 모습이긴 한데, 그 과정에서 오가는 이들이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흔드는 광경이 분명히 보였다.
투란은 툴로쉬가 바로크에서 구해다 준, 헌터 길드가 확실하게 보증해 주기에 춤추는 산맥의 어떤 나라에서도 아무 탈이 없다는 신분패를 꺼내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흔들며 걸었다.
흘깃거리는 경비병들의 눈초리가 제법 매서웠지만, 각자 지닌 마도구를 통해 신분패를 확인한 다음에는 바로 그 눈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편리한 마법이네.’
투란은 성벽 경비병이 지닌 마도구를 곁눈질하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필수적인 마법이다. 인간인가 아닌가, 신분패와의 공명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니까. 적당히 변신해서 인간 흉내 내는 놈들은 대부분 걸러질 것이야.
‘거의?’
살짝 놀라는 투란이었다.
거의, 그 말은 대방벽을 지키며 감별하는 마법조차 속이는 몬스터도 있단 뜻이 아닌가!
―당연하지, 저게 무슨 절대적인 분별을 해 주는 마법인 줄 알았어? 마력 장벽을 두르거나, 강력한 오러를 발산하는 대상의 정체는 밝혀내지 못해. 그래도 그런 현상을 경고하기는 하겠지만…… 속임수를 특기로 하는 몬스터라면 여길 그냥 통과할 수도 있다. 고블린 위키드, 트릭스터 중에서 그런 변신을 하는 놈이 나타난 적도 있었을걸? 뭐, 고대의 해괴한 사건 기록이었으니 거의 보기 힘들겠지만.
‘응, 보고 싶지 않아! 이런 대방벽이랑, 왕국의 경비병이랑, 길드의 신분패까지 동원한 상황을 속임수로 지나치는 몬스터라니! 보고 싶지 않아!’
―볼 일 없을 거다. 그런데…… 저 푯말은 뭐냐?
투덜거리는 사이에 통로의 반대편에 도달한 투란에게 드라고니아가 한쪽을 짚으며 묻고 있었다. 그쪽을 본 투란은 소리 내서 같은 의문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살룬까지 십이 킬로미터?”
심지어 푯말 옆에는 나란히 선 수레들도 보였다.
어떤 것은 말이 끌고 어떤 것은 소가 끄는 수레인데, 공통점은 모두 짐이 아니라 사라을 싣고 갈 준비가 된 모양새를 했다는 것.
그리고 투란이 토한 의문에 답하듯, 수레 곁에 선 이들이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동전 두 닢! 살룬까지 빠릅니다! 힘을 아껴 살룬에서 마음껏 즐기세요!”
“왕복에 동전 세 닢! 오늘 놀고 내일 다시 이 자리로 모셔다 드립니다!”
요약하면 대충 이런 두 가지 내용을 담은 채였다.
―가서 도박하고 가진 돈을 모두 잃으라고 꼬드기는 셈인가?
드라고니아의 평은 신랄했다.
‘아니, 뭐 꼭 그렇게까지…….’
투란은 떨떠름하니 바라봐야 했다.
대방벽 안쪽, 들어서자마자 도박의 명소를 향해 유혹하는 모습들이라니…….
반역의 패왕, 키린의 아버지가 모험을 하며 도박하는 이야기가 꽤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왕국으로 들어서는 입구나 다름없는 곳부터 도박장으로 인도하려는 친절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래서 안 갈 거야?
슬쩍 놀리는 말투로 묻는 드라고니아였다.
투란은 입가를 실룩이다가 꼭 다물면서 소리 없이 대답한다.
‘왠지 싫다.’
―응? 싫다니? 안 가겠다고? 아니, 왜?
드라고니아가 화들짝 놀랐다.
불룩 튀어나오려는 쓴웃음을 참으며, 투란은 슬슬 늘어선 수레들을 지나치면서 가지런하게 포석으로 정돈된 길을 따라 걸으면서 생각한다.
‘너무하잖아. 저 눈빛들 봐. 칼만 들면 그냥 강도로 보일걸? 살룬이 재미있는 곳보다는, 사기꾼이랑 도둑이 가득할 것 같다고. 그리고…… 저쪽에 다른 푯말, 아직 안 봤냐?’
―‘에테온 왕궁 가는 길’이라고 적힌 저 푯말 말이냐?
‘응. 그 옆에 보면 ’솔로얀으로 직진‘이라고도 있잖아.’
―전혀 의미 없는 푯말 아니냐? 거리가 표기된 것도 아니고 그냥 해 뜨는 곳이 동쪽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어? 뭐, 그렇기는 하지. 그렇기는 한데…… 도둑과 사기꾼이 가득한 도박장 가는 길보다 믿음직스러워 보이거든. 내가 딱히 도박이나 내기를 좋아한 적도 없잖아? 설마 있는 거야?’
―없다, 몬스터랑 어울리는 놈이 그딴 성격이면 뭘 하든 일찌감치 뒈지는 법이라는 말을 더 좋아했지.
‘아, 그래? 그건 오라클 아저씨 이야기였는데…… 뭐, 살룬은 나중에 보고 일단 솔로얀으로 직진하는 길을 따라가 보자고. 거의 에테온 왕궁 가는 길이랑 겹쳐진 꼴이니까, 가다가 왕궁을 지나칠 수도 있잖아? 어때, 괜찮지?’
―난 아무 상관 없다. 드라코눔의 아칸은 죽었고, 난 실체 없는 몬스터의 정수일 뿐이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까 키린은 널 어떻게 되살릴 생각이었던 거야? 널 어떻게 다시 돌려보내려 했던 것 아닌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상황과 착각한 거야. 엉뚱한 소리니까, 그런 얘기는 잊어버려라.
‘그래? 뭐, 그렇다 치고…… 아니, 이건 좀 이상하네!’
풍경을 구경하며 걷던 투란은 문득 갸웃하면서 살룬으로 갈 준비가 된 수레들 쪽을 보다가 자신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뭐가 이상해? 뭘 찾냐?
‘에테온 왕궁으로 가는 수레는? 솔로얀으로 가는 수레는? 전혀 없잖아!’
―야, 당연히 없지! 여긴 출구가 아니고 입구라고! 애초에 저 해괴한 푯말이 왜 이 언저리에 있냐부터 의심했어야지! 바로크로 가는 일행이라도 이 안에는 없잖아! 성벽 밖의 마을이 건너편에 하나 더 있을 것이란 추측도 못 하냐? 거기까진 가야 새로운 상단을 보거나 여행 마차를 볼 수 있을걸!
‘그러네?’
벅벅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투란은 키득거렸다.
아란 쪽이랑 헤어지고 나서 성벽 하나를 지나치고는 금방 길을 헤매는 꼴이라니, 어쩐지 아무것도 없는 황야를 헤맬 때보다 더 길 찾기가 어려운 듯하잖나.
하지만 투란은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 나아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속삭여 주는 쪽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