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2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15)
‘얀마!’
투란은 드라고니아에게 언짢음을 표현하려 했다.
한데 그 낌새가 낯으로도 드러난 모양이었다.
예르카가 빙긋 웃고서 아르안과 티아라를 살짝 눈짓하는 채로 나지막하니 말한다.
“마법에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않는 기묘한 조건들이 필요하다잖아. 게르민은 과거 너와 연관된 부분에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티아라가 너랑 놀 때 들었던 이야기를 주목했다. 우리에게는 단순한 이야기였겠지만, 뭐 그중에는 여러 가지 쓸모 있는 정보도 있었겠지만 아닌 것도 많았잖아? 아무튼 그중에서 이 솔로얀 왕국에 대한 부분을 찾아내서 마법의 실마리로 삼았다는 말이지. 간단하게 생각하면, 그냥 마법인 거다, 투란.”
“아, 네…….”
고무쇠 아저씨가 옛날보다 말이 많아졌는가, 옛날만큼 많이 떠드는가를 비교하면서 투란은 적당히 대꾸하고 말았다. 이런 투란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의혹은 드라고니아가 분명히 느꼈다.
―뭘 의심하는 거냐? 마법은 제쳐 놓은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네가 아는 사람들인가 의심하는 거냐? 아냐? 그럼 대체 뭘…….
‘가장 기본적인 부분.’
투란은 간단하게, 소리 없이 대꾸하고 티아라와 아르안이 부엌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이 적당히 멀어졌다 싶을 때, 예르카의 주름진 얼굴에 눈길을 돌리면서 나직하게 묻는다.
“아저씨, 징표에 대해서 비밀이에요?”
“응? 아, 하핫. 아니다. 내가 얻은 징표는 널리 소문난 것이야. 다만…… 소문이 퍼진 것처럼 많은 놈들이 손에 넣질 못했을 뿐이지. 너도 아마 한두 번 들은 적은 있을걸? 샤오콴에서도 떠든 녀석들이 꽤 있었지. 뭐, 나도 그때는 무시했다만…… 물에 빠져 가라앉는데 헤엄을 못 친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치잖냐? 그래서 피신하는 셈 치고 갔지.”
“피신요?”
묻는 말이랑 전혀 다른 곁가지로 새는 이야기, 그 안에 섞인 예상과 다른 한마디에 투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갸웃했다.
예르카가 입가에 주름을 잡아 웃으며 속삭이듯이 말을 잇는다.
“저 애들은 모르는 이야기야. 저 애들은…… 내가 몬스터 로드로서 역량을 키우려고 갔다고만 알고 있지. 뭐, 그게 아예 틀린 것도 아니긴 하니까. 그 무렵에 날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오는 녀석이 있었거든. 숨어서 암살, 독살을 노리는 놈이라서 어떤 년인지 놈인지 전혀 모를 때라, 상대를 드러나게 할 필요가 있었지. 도망 다니다 지쳐 죽을 수는 없잖냐? 아무튼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별로 믿지 않고 있던 투신의 시련이었어.”
“네?”
이번에는 잘 듣던 투란이 맹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투신, 그 부적과 징표는 매우 유명했다.
몬스터 엠블럼을 억제하기도 하고 보조해 주기도 하는 점에서 수해(樹海)의 사제, 숲의 사제단이 제작해 파는 것보다 효과가 더 좋다는 말도 있었다.
투신의 시련 또한 유명하다면 유명하기는 했다.
그 부적이나 징표랑 다르게 부정적으로!
당장 징표만 하더라도 몬스터 로드가 함부로 몸에 새기면 곧바로 미쳐서 죽을 때까지 날뛴다는 위험성과 함께 버텨 내면 어지간한 부적보다 훨씬 좋다고 하는,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이라 도박하려는 심정으로 도전할 만한 것이라 평해지는데…… 시련은 투신이 사람 잡으려고 만든 신전 속의 함정이라고, 백 년에 한두 명 통과하고 나서 그냥 미친놈이 되어 나올 뿐이라고만 할 지경!
예르카도 투란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에 무슨 소문을 되새기는가 안다는 듯 말했다.
“함정으로서는 끝내주잖냐?”
“죽고 싶었던 거예요? 미치고 싶었던 거예요?”
매우 상식적으로 대꾸할 수밖에 없는 투란이었다.
도박하는 마음가짐으로 징표를 새긴다, 그런 경우는 바로크 왕국의 몬스터 로드 중에서 종종 있다 했고 간혹 성공했다는 소문도 있기는 했다. 대부분 돌아 버렸다고 하지만.
―너, 투신의 징표를 새긴 몬스터 로드 만난 적 있다만? 잊었냐? 망치로 처맞던 그 불쌍한 녀석을…….
‘언더섀도우에서?’
―거기 말고! 아주 편리한 기억력이라니까!
‘어, 나중에 기억나겠지.’
툴툴거리는 드라고니아를 슬쩍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투란은 더욱 심각한 시늉을 하면서 예르카를 이리저리 살피는 척했다.
예르카는 그 표정에 어이없어하다가 결국 껄껄 웃는 낯이 되어 답했다.
“미치고 싶기도 했고, 죽고 싶기도 했다. 혼자 미치고 죽는 것은 억울해서 쫓아오는 놈도 함께 휩쓸리게 하고 싶기도 했지. 하지만 그렇게 미쳐 죽는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시련을 살아서 통과하겠다는 각오가 더 컸어. 그리고 성공했다, 이렇게 말이야.”
말과 함께 가만히 손목의 가죽 토시를 빼내며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이리저리 뒤집어서 투란이 잘 볼 수 있도록…… 살짝 자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손목을 휘감아 올라가는 기묘한 무늬는 어찌 보면 뱀을, 어찌 보면 물고기를 닮은 비늘과 함께 넝쿨 가지처럼 팔뚝을 나무 삼아 휘감는 듯하다가 뿌리라도 내리려는 모양으로 보였다.
그 형태가 투란에게는 어딘가 살짝 낯익었다.
‘이거 어디서 봤는데……?’
―허리에 휘감은 몬스터 로드를 봤지.
드라고니아가 핀잔하듯 말했고, 투란도 퍼뜩 알아차렸다.
투신의 징표, 확실히 이걸 허리에 감은 녀석을 본 적 있었다.
‘솔리드 포톤 망치에 처맞던 놈이었나?’
―야, 그 망치는 솔리드 포톤 아니었거든?
기억이 엉터리라고 드라고니아가 핀잔하고 불평했지만, 투란은 이 또한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내면서 예르카에게 묻는다.
“이러면 팔이 잘리거나 할 때는……?”
“시련의 징표는 마음에 새겨지고, 몸은 그 표상(表象)을 투영해 낼 뿐이야. 신체 훼손이 일어나면 멀쩡한 부분에 올바른 형태로 다시 자리 잡아. 그 점이 사제의 손으로 새겨진 징표와 시련을 거친 자의 징표가 갖는 차이라고 하더라.”
“아하…….”
예르카의 말에 ‘잘린 적 있어요?’라는 물음을 입안에 머금었던 투란이 적당한 소리로 뭉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예르카는 투란이 그리 물을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한 것이었고 쓴웃음과 함께 다시 가죽 토시를 팔에 끼우면서 말을 잇는다.
“자, 너의 사소한 의문은 풀어 줬으니까 이제 내 사소한 의문에 답해 봐라. 뭐가 의심스러운 것이냐? 알킨이 네 보석으로 신분 위장했다는 일이 그렇게 믿기지 않는 거냐?”
꽤 낮은 속삭임으로 묻고 있었다.
투란은 부엌 쪽을 흘깃하다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한다.
“이십 년 넘게 암살자를 보냈다면서요? 엄청난 가문인데 어딘지도 모른다고요? 아저씨, 저 갓난아기 때 버려졌다는 이야기 기억하잖아요? 마법의 보석까지 달아 놓은 갓난아기를…… 아무리 샤오콴 마을이 깊은 곳에 있다고 해도 십몇 년이 지나도록 못 찾아왔다고요? 그런 얘기를…….”
“로잭이랑 똑같은 생각을 했구나.”
“에? 로잭도?”
투란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금방 왜 로잭이 자신이 지금 내뱉은 것과 똑같은 의문을 품었는가를 투란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때문에 투란의 표정은 금방 씁쓸함과 함께 차가운 웃음으로 채워졌다.
“녀석이 그러더구나, 투란이 있었다면 자신과 똑같은 의문을 품었을 거라고. 샤오콴의 고아들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 생각은 할 거라고 말이야.”
예르카가 담담한 말투로 보태고 있었다.
투란으로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고아라면, 자신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잠시 친부모랑 떨어져 있을 뿐이고 언젠가 친부모가 찾아와 그 사정을 설명해 줄 것이라는…… 덧없는 희망을 한 번쯤은 품기 마련이니까.
마법의 보석까지 매달아 놓고 찾아오지 못했는데 강력한 가문에 제대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수상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을 거의 함께 보냈던 로잭이라면 당연히 투란처럼 생각할 만했다.
“그래서 그 부분을 꽤 오래 파고들었다만, 여전히 대체 어떤 가문인가조차 확정 짓지 못하고 있지. 이번에도 그 일을 더 자세히 파고들어 보겠다고 간 거다만, 내 생각에는 역시 두룩칼을 직접 찾아내서 쳐 잡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거야.”
“그러고 보니 왜 아직도?”
예르카가 덤덤한 척하는 말투 속에 짙게 깔린 분노를 느끼면서 투란은 살짝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무쇠의 몬스터 로드, 투란이 알기에도 조금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부적보다 더 좋은 징표를 몸에 새긴 상급 몬스터 로드가 된 예르카가 왜 두룩칼을 직접 만나 처리하지 않고 있었을까?
원인이 누군가 알았는데도 가만히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투란이 아는 고무쇠 아저씨의 급한 성격이 아닐뿐더러, 몬스터와 엮여 사는 이들의 일반적인 성향이라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어떤 까닭이 있을 터인데…….
“두룩칼이 누군가 알아냈을 때, 로잭이 가장 먼저 하려고 했지. 상대가 암살, 독살을 마다하지 않는데 이쪽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야. 그런데 못 했다. 우리는 노출된 처지이지만 놈은 이름조차 두룩칼로 바꾸고 행적을 감춘 채였거든. 그래, 아직도 우린 녀석이 어디에 숨어 있나 몰라. 그저 녀석이 의뢰해서 보낸 추적자, 살인자만 상대해 왔어.”
“길드 소속인가요? 아니면…….”
슬그머니 느껴지는 심각함에 투란이 말끝을 흐리며 낮게 되물었다.
예르카가 새삼스럽게 한숨부터 흘려 내며 대답한다.
“로잭이 길드 소속의 몬스터 헌터야. 까닭 없이 누군가 살인 청부든 뭐든, 길드에 소속된 자를 해치려 하거나 해쳤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는 것이 헌터 길드잖아. 로잭의 파티 멤버들도 몇몇 당했지만 길드는 나서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굉장히 사적인 일로 받아들였다고 하더구나.”
“길드에서 나서지 못하는 사적인 일이라고요?”
“그래. 다만 한 가지는 확인해 줬다. 청부받는 놈들이 길드 소속은 아니라고 말이야. 이제까지 상황으로 대강 추측해 보면, 아무래도 무법 지대라는 위키드랜드에서 청부받아 온 놈들인가 싶어. 신분 파악을 못 했으니 전부 추측이다만.”
“어쨌든 길드에서도 뭔가 파악은 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응? 그야 그렇지. 왜 혹시 길드 윗줄에 누구 아는 거냐?”
예르카가 눈을 살짝 치켜뜨며 기대에 찬 눈빛을 드러낸 채로 묻고 있었다.
투란이 그 눈빛에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며 얼버무리는 대답을 한다.
“그냥 뭐…….”
“호오? 아는가 보네! 그런 일에 대해서 물어도 알아봐 줄 정도로 친하냐? 아니면 이제부터 친해져야 하냐?”
“물어봐서 대답을 해 주나 마냐에 달린 것 같은데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아예 얼굴을 들이대면서 흉악한 음모라도 꾸밀 듯이 묻는 예르카였기에 투란은 고개를 뒤로 빼는 채로 대꾸해야 했다. 이런 투란의 당혹스러운 모습을 감상하듯 눈을 빛내던 예르카가 다시 똑바로 앉으며 껄껄 웃는다.
“좋구나, 이상한 일을 겪어서 아직 파릇하게 어린 채이지만 그래도 알차게 살아왔다니…… 기쁘다, 투란.”
투란은 노인의 웃음 속에서 ‘얼른!’이라는 부추김을 금방 엿볼 수 있었다.
덕분에 투란의 입가에도 살짝 쓴웃음이 맺힌 채로 몇 마디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었다.
“일단 로잭을 만나고서 생각해 봐야죠. 오늘, 아니 내일쯤에는 확실히 돌아오는 거겠죠?”
“그래, 살아남으면 말이지.”
예르카의 대꾸가 예상 밖이잖는가!
“네?”
다소 얼빠진 투란의 한마디에 예르카가 낄낄거리며 탁자 너머로 눈길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뭐, 딱히 염려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단지…… 로잭이 무리한다면 금방 위험한 상황이 될 테니까. 그래도 무리하지 않는다고 하고 갔으니까, 믿고 기다려야지.”
투란은 뭐라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새삼스럽게 예르카, 고무쇠의 몬스터 로드랑 티아라 가족, 거기에 로잭이 겹쳐져서 같은 처지란 점이 투란의 가슴에 와 닿았다. 몬스터가 상대가 아닌데, 목숨을 걸고 움직여야 하는 일…… 이십 년을 넘게 그런 일에 시달려 왔기에 반쯤 포기했으면서도 억울하기에 대항하며 살아온 세월……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살그머니 투란의 표정이 무거워지고 예르카 또한 이에 공감하는 듯해서 둘 사이의 분위기가 음울해지는가 싶은 순간.
“자, 심각한 얼굴 치우고 우선 이것부터 맛봐. 기억하지, 투란? 우리 어머니가 자랑하던…….”
“멧돼지 통구이?”
갑작스럽게 부엌에서 커다란 쟁반을 두 손으로 밀어 올려 거의 머리에 이고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티아라가 외쳤고, 투란은 ‘멧돼지가 멧돼지를?’이란 생각을 하는 채로 쟁반 위에 커다랗게 배를 가르고 엎어진 멧돼지와 그 형태를 고스란히 닮은 듯이 퉁퉁한 몸집으로 걸어 나오는 티아라가 과연 자신이 알던 옆집 꼬맹이인가를 다시 한번 고민하며 중얼거려야 했다.
그 탓에 잠깐 무거워질 듯했던 마음의 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예르카 또한 통구이는 좀 뜻밖인 듯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