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40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31)
Chapter 227. 왕도의 불청객
망각의 은총은 기억의 상처를 치유한다.
동판이 금색을 일렁이며 새겨진 글귀가 소리 내서 우는 듯이 진동했다.
동판 좌우로 박힌 등잔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불은 벽에 새겨진 금을 타고 그림을 그리듯이 번져나갔고, 어느 틈엔가 바닥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물결처럼 퍼져나가기도 했다.
불꽃이 그려내는 무늬의 중심이 밝아졌고 그 중심에 광채(光彩)가 모이고 뭉치는 듯하며 형상을 이뤄내는데…… 불꽃이 찰랑이는 순간에 뭉쳐진 빛이 흩어지고 사람이 둘 나타났다.
기우뚱하고 주춤하는 듯한 몸짓 사이로 투란과 로잭이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를 흘깃거렸다. 그리고 곧.
“우엑! 퉷퉷!”
먼저 투란이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야, 입 다물고 있었잖아!”
로잭이 웃기는 짓이라는 듯이 핀잔했다.
“느낌이 그렇잖아! 설마 흙거죽을 씌워서 땅속으로 쏴버릴 줄은 몰랐어! 차라리 바람의 길이 좋지 않았냐고!”
투란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로잭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그쪽으로는 감시당했다니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내 움직임을 알아냈다고. 그래서 지금 상아탑의 선이 닿지 않는 헌터 길드의 힘을 빌렸잖아!”
“아, 내 덕분이지?”
삐죽거리는 입술과 함께 투란이 으르렁거렸다.
로잭이 잠깐 움찔하다가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대답한다.
“그럼, 당연히 네 덕이지. 정보를 얻어내는 솜씨를 보고 이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확신한 나의 판단이 좋았지! 암, 그렇고 말고!”
“이 아저씨 보소? 얼렁뚱땅 자기가 잘했다네!”
“그럼, 잘 안 했어?”
“칫.”
한번 더 으르렁거리려는 투란을 향해 로잭은 당당하고 뻔뻔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투란이 혀를 차며 새침한 시늉을 하니 로잭이 코웃음과 함께 한쪽을 턱짓하며 말한다.
“노닥거릴 때가 아니야. 나가자. 비상시에만 쓰도록 허용된 마도술식이랬잖아. 우리가 자리를 비켜줘야 빨리 복구하지. 애초에 엄청난 특혜라서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잖아.”
“이보셔요?”
투란이 황당한 표정으로 로잭에게 몇 마디 하려는데.
“어이, 장난은 나와서 하지?”
동판 아래의 문턱 너머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마력을 담고 전해져 왔다.
일렁이며 여전히 무늬를 채우고 동판을 밝히던 불꽃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며 어둠이 짙어져 갔다. 얼른 나가지 않으면 이 지하 깊은 곳에 어둠만을 벗 삼아 남게 될 것이라고 바로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투란은 투덜거리는 표정, 삐죽거리는 입술을 유지한 채로 재빨리 동판 아래를 지나 문턱을 넘어갔다. 로잭도 두어 걸음 느리게 투란의 뒤를 쫓듯이 문턱을 넘었다.
소리 없이 동판 아래에 벽이 채워지며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된 방이 닫혔다.
투란과 로잭을 불러낸 사내는 로브의 두건으로 얼굴을 가려 턱만 내놓은 채로 가볍게 돌아서서 둘에게 등을 보이며 앞장섰다. 사내의 손에 들린 기묘한 등잔이 가늘고 긴 통로를 밝혀주는 유일한 빛이 되어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흔들었다.
투란이 갸웃하며 얌전히 사내의 뒤를 따르는데, 로잭은 먼저 묻는 말부터 꺼내놓고 있었다.
“나가는 곳을 고를 수는 없나?”
“어디로 가고 싶은데?”
사내는 멈추지 않는 느릿한 걸음과 함께 되묻고 있었다.
투란이 흘깃 돌아보니 로잭은 싱긋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황금양의 쉼터, 왕궁이 보이는 여관이라던데…… 양꼬치 맛이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
“알았다.”
사내의 대답은 짧았다.
그리고 금방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사내가 기묘한 무늬의 철판이 덧대진 등잔을 휘두르니 통로가 소리 없이 반응하며 저 너머의 길이 뒤틀리며 변하고 있었다.
“투란, 멈추지 마.”
슬쩍 발이 늦춰진다 싶은 투란의 등을 밀며 로잭이 재촉했다.
“안 멈춰!”
툴툴거리며 대꾸하면서도 투란의 걸음은 처음보다 확실하게 느려져 있었다.
등잔이 흔들리고, 덧대진 철판이 마력을 흘려내며 통로는 처음 향하던 곳과 다른 곳으로 새로운 형태를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 변화가 살갗에 와닿는 탓에 모르는 척할 수가 없으니 당연히 투란은 관심을 기울이는 셈이었다.
앞장선 사내가 이를 눈치챈 듯, 걸음을 조금 빨리 하며 다시 말문을 여는데.
“몬스터 로드였나? 조금만 참아주게. 그리 심한 자극은 아닐 테지만……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려면 갈 길을 조금 바꿔야 하니 어쩔 수가 없어. 아, 이제 끝났군. 그럼, 어서 따라오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로의 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투란도 이를 느꼈기에 슬그머니 통로 벽에 손을 대고 스치듯이 만지는 채로 걸음을 빨리했다. 로잭은 말문을 닫고 그 뒤를 따라 빠르게 걸을 뿐이었다.
오래 걷지는 않았다.
통로가 끝난 곳은 널찍한 지하실이었고, 목재와 석재가 이리저리 포개진 채로 쌓여 있었다. 따로 등잔은 두지 않아 어두웠지만 한편으로 가파르게 박힌 듯한 계단 너머에서 옅은 빛이 넉넉하게 스며와서 나가는 방향은 똑바로 알려주는 상태였다.
등잔을 품 안으로 담으며, 한층 더 깊이 두건을 당겨 얼굴을 감추는 태도로 사내가 투란과 로잭을 돌아보며 말한다.
“저 계단을 올라가서 왼쪽으로 가게. 골목이 끝나는 곳의 맞은편에 황금양의 쉼터가 보일 거야. 그럼…….”
“어, 수고하셨어요.”
투란이 한편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로잭도 투란처럼 한편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끄덕하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로브의 사내는 그대로 둘 사이를 스쳐 벽 너머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고, 지하실의 흐릿한 불빛 아래에 지나온 통로의 흔적은 찾아볼 길 없이 가로막힌 벽을 둘은 잠시 바라봤다.
잠시 후, 로잭이 어깨를 으쓱하며 스며오는 정적을 물리치듯 말한다.
“잠깐 짐 정리 좀 하고 나가자.”
“음? 정리?”
“멀리서 온 차림새를 정리해야지, 가볍게 산책 나온 것처럼 꾸미려고. 너도 무장 치우고, 적당히 도시 사람인 척 꾸며봐.”
“왜?”
투란은 갸웃거리는 의아함을 가득 담아 되물어야 했다.
로잭은 조금 짙어진 웃음을 머금고 대답한다.
“황금양의 쉼터에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야, 자세한 이야기는 방 잡고 해줄 테니까. 일단 하라는 대로 좀 해줘.”
“자세히 이야기해야 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꾸하며 투란은 일단 로잭이 어떤 차림새가 되려는가를 지켜보기로 했다. 등과 허리에 채워놓은 배낭을 뜯어내고 발목이나 허리띠에 쟁여놓은 무장까지 풀어내서 손목에 채운 마법의 도구 안으로 쓸어 담는 데까지, 로잭이 도시를 거니는 가벼운 차림새가 무엇인가를 시범 보이는 것을 보며 투란도 적당히 흉내 내서 따라 했다.
그러다가 마무리처럼 로잭이 두툼해 보이는 돈주머니 하나를 노골적으로 엿보이도록 허리춤에 매다는 것을 본 다음, 투란은 물었다.
“돈으로 무장한 거야? 급하면 그걸 쥐고 패려고?”
담겨 있는 것이 금전이든 동전이든 저 정도 무게라면 조그마한 방망이 정도의 타격은 가능하리라 추측해서 묻는 말이었다.
로잭에게 이 물음은 조금 뜻밖이지만 그래도 예상 범위 안이었던 모양이었다.
“돈으로 무장했지. 이걸 쥐고 패지는 않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꺼내서 이리저리 자랑질을 하고 퍼질러 쓰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야, 발목이랑 손목도 풀어. 척 봐도 멀쩡한 날붙이 튀어나오게 생겼구만! 다른 걸로 갈려고 하지 말고 그냥 빼! 바지 주머니도 비워! 옆구리 꼬챙이도 치워! 얌마, 허리에 철사는 왜 감아두려고! 너 몬스터 로드잖아! 맨몸이 흉기인 놈이 왜 자꾸 날붙이를 매달아서 경계하게 하냐! 그래, 그렇게 나는 빈손이라고 자랑하는 몰골이 되란 말이야!”
잔소리는 투란이 최소한의 무장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고 격렬해졌고, 결국 로잭은 탈탈 털어 벗기듯이 투란의 차림새를 가볍게 바꿔버렸다. 그런 결과에 대해 투란이 어처구니없어했고, 드라고니아도 한마디 넌지시 흘려낼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무장해제하다니, 도시 안이 꽤 안전한 모양인데?
‘그럴 리가 있냐! 어딜 가길래 이러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투란은 소리 없이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로잭은 투란의 차림새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다음, 흡족한 표정으로 앞장서며 계단을 밟는 채로 말한다.
“다 이유가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기다리면 다 해줄 거고, 안 해주더라도 저절로 알게 될 거야. 투란, 아직 운명의 인도는 끝나지 않았어. 가자고, 게르민이 준비해둔 마지막 도구를 손에 넣어야지!”
“저절로 알게 되면, 로잭 나한테 한 대 세게 맞을 줄 알아.”
투란은 투덜거림을 기어코 뱉어냈다.
“아, 그래. 그러자고.”
흘려내는 듯한 대꾸와 함께 로잭이 문을 열고 나갔다.
환한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 먼저 발 딛는 듯한 로잭의 뒤를 투란은 바로 뒤따라 나갔다.
골목은 그늘진 구석이 없는 것처럼 밝았다.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골목만을 노려보며 지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밝았다.
로잭은 그 골목에 서서 왼쪽을 돌아봤다.
투란은 로잭이 보지 않는 쪽부터 봤다.
골목 오른쪽 끝으로는 큰 길이 보였고 마차와 사람이 함께 오가는 풍경이 살짝 엿보였다.
“황금양의 쉼터는 저쪽이야, 한눈팔지 말고 따라와.”
로잭의 목소리가 투란을 돌아서게 했다.
말과 함께 로잭은 성큼성큼 저편의 간판을 노려보며 나아가고 있었다.
투란은 조용히 그 뒤를 따르면서 드라고니아에게 묻는다.
‘어떻게 된 마법인가 알겠어?’
―지맥(地脈) 이동 말이냐? 브로큰킹덤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규모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긴 하는데…… 대마도사의 방식을 모방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는 대마도사가 자신의 방식을 수정해서 헌터 길드에 선물했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까? 아무튼 바람의 길을 땅 아래로 적응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텅 빈 하늘에 열린 바람의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꽉꽉 채워진 땅속의 틈새를 열고 이동한다는 점은 완연히 다르다만.
‘가죽 포대 같은 흙주머니에 담아 쏴질러대는 거였잖아! 그대로 땅속에 처박는 줄 알았구만!’
―그건 다르다고 했잖아.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데 같을 리도 없고…….
‘그래서, 이 도시 아래의 길은 어떻게 된 거야? 로잭이 말하니까 척척 길을 바꿔주던데, 원래 있던 길 아니었지?’
―지하 통로 따위는 없었다. 그냥 새로 틈새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지. 틈새는 돌아가면서 도로 다 메워놨다는 것, 너도 느꼈지? 다시 쓸 수 있는 통로 따위가 아니다. 상황 봐서는 이 도시 지하 어디로도 마음껏 다닐 수 있어 보이더군. 그래, 그 철면등이 그러기 위한 마도구였어. 아마 지맥이동으로 도착한 곳도 그 철면등이 있어야 오갈 수 있었을 거야. 헌터 길드의 비장의 한 수가 틀림없어. 담당한 자들도 딱히 너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었지? 툴로쉬가 꽤 배려해준 것이 맞을 거야.
‘음, 로잭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글쎄다? 소문으로만 듣고 네가 정보 캐내는 모습에 그냥 찔러봤다는 변명은 솔직히 믿기 어렵다만…… 운명의 인도가 작용하는 중이라면 과정을 따져봐야 우연의 연속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을걸?
‘난 그냥 휘말리는 거야?’
―아마 그런 분위기가 아닐까? 하지만 너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잖아? 아무 근거도 관련도 없이 휩쓸린 상황은 분명히 아니지. 반드시 부딪혀야 할 일은 맞잖아?
‘어, 그건 그래.’
조금 씁쓸한 바를 느끼면서 투란은 커다란 황금양이 아로새겨진 채로 덜렁거리며 앞을 막는 문을 밀어내며, 먼저 들어간 로잭처럼 세게 흔들거리지는 않게 살짝 닫히도록 비켜내며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음? 퍼브가 아닌가?’
고요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투란은 갸웃했다.
보통 이런 여관이라면 일단 일 층은 주점 겸 식당으로 오가는 손님이 왁자지껄하게 널려 있을 듯했는데, 문 너머에 널찍하게 펼쳐진 풍경 어디에도 뭘 먹고 마시는 모습은 없었다. 그저 오가면서 숙박 여부를 결정하거나 잠시 앉아 기다리는 이들만 보일 뿐이었다.
로잭은 그 풍경에 녹아든 것처럼, 여관의 점원을 향해 익숙한 걸음걸이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투란도 멀뚱거리며 구경하고 기다릴 수 없으니 그 뒤를 바로 쫓아갔는데…….
“양꼬치 칠 번, 예약했는데?”
덜렁 로잭이 던진 말은 매우 기묘했다.
의아했지만 투란은 얌전히 로잭의 뒤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이들을 흘깃거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로잭에게 맡긴 일은 별문제가 없으니 그저 동행만 해도 된다는 것처럼.
물음의 대답은 투란까지 훑어본 다음에야 나왔다.
“예약 확인했습니다. 일곱 분까지 머무실 수 있습니다만?”
“오늘은 둘만 왔어. 나머지는 언제 올지 몰라. 당분간은 둘뿐일 거야, 아마도.”
머뭇거림 없이 로잭이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이 층의 십칠호 실로 가시면 됩니다.”
열쇠가 얌전히 로잭에게로 건네졌다.
로잭은 문가에서는 더 볼일이 없다는 듯이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움직였고, 투란은 총총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그 사이에 투란의 눈길은 열쇠를 건네준 계산대 너머의 점원과 함께 계산대까지 재빠르게 훑어내기도 했다.
‘야, 뭐냐 저건?’
―무장을 숨기는 덮개잖아.
‘여기 여관 맞아?’
―글쎄다.